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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국가 : 나치 정치 혁명의 이념과 현실

동방박사님 2022. 8. 24.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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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히틀러국가』는 1945년 이후 '독일'에서 생산된 가장 위대한 나치즘 연구서라고 불린다. 저자 마르틴 브로샤트는 주요한 나치 개개인의 의도를 중심으로 나치즘을 설명하는 '의도주의'연구와 사뭇 다르게, 나치즘의 작동 방식에 주목하는 '기능주의'연구를 이 책으로 개시했다. 그래서 이 책을 모르면 나치즘의 '연구사'를 모른다고 까지 하는 것이다. 현재 세계 역사학계에서 인정받은 나치즘 연구서 가운데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는 책은 그리 많지 않은 상황에서 나치즘을 연구하는 학자와 학생들에게 이 책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목차

서언

제1장 히틀러의 집권
제2장 집권 이전의 히틀러 운동
제3장 정치권력의 독점(1933)
제4장 주의 제국 통합과 새로운 분권주의
제5장 사회권력의 장악
제6장 제3제국 초기의 당과 국가
제7장 공무원과 행정
제8장 지도자권력
제9장 1938년 이후의 지도자절대주의와 다중지배
제10장 사법
제11장 결어

옮긴이 해설
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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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자 : 마르틴 브로샤트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 쾰른 대학에서 수학하고, 테오도어쉬더의 지도 아래 「빌헬름 시대 독일의 반유대주의 운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짧은 교사 생활 이후 1955년 서독 건국과 나치즘 연구에 집중하기 위해 뮌헨에 세워진 독일 현대사연구소의 연구원이 되었고, 1960년에는 같은 연구소에서 발간하는 「현대사 계간지」의 편집진에 합류했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당시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고 있던 아우슈비츠...
 
역자 : 김학이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어과를 졸업한 뒤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독일 보쿰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 논문인 「대공황기 대기업과 경제정책 1931~1933」은 독일 베를린의 둥케르 운트 훔블로트 출판사의 '사회경제사' 총서에 포함되어 출간되었다. 주요 논문으로 「바이마르 말기의 기업가와 정치」「나치즘과 근대화」「홀로코스트와 근대성」「홀로코스트 학살자들의 양심」등이, 옮긴 책으로 『나치...
 

책 속으로

그런 유의 지도자는 혼자 힘으로, 혹은 비범한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능력 덕분에 위대한 역사적 역할을 떠맡게 되는 것이 아니다. 히틀러 개인의 전기에서는 그의 특별함을 설명해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다. 정신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진부하기 짝이 없던 히틀러가 정치 무대에서 그토록 갑작스럽게 부상한 것 역시, 그런 지도자는 특정한 위기의식과 집단 심리의 흐름 속에서만 자라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해준다. 독일 민족주의의 광범한 병리 현상과 함께하면서, 그리고 자신의 존재 전체를 던져서 그 병리를 말로 표현하고 행동으로 옮기면서 히틀러가 발휘하던 그 비상한 열정이 그를 “지도자”로 만들었다. 기괴한 별종 인간을 민중의 가슴을 울리는 선동가로 만든 것은 바로 그 위기였다. 정치적 교사敎師로서 히틀러는 레닌에게 한참 못 미치는 인물이다. 그는 교사라기보다 촉매제였다. 새로운 것을 덧붙이지 못하지만, 현실에 분명히 존재하는 긴장과 위기의식에 불을 댕기는 화염이요, 그것이 활활 타오르도록 해주는 연료로서, 그에게는 가공할 만한 일이 시작되도록 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의 역사적 역할은 개개인의 정치적 노이로제를 집단적인 노이로제로 변환시키고, 사회에 가득한 흥분 상태를 개개인의 집착과 역동성의 기제와 행동으로 변환시키는 데 있었다. 따라서 히틀러의 지도력은 역설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한편으로 그는 실제적인 위기의식의 익명적인 대표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당대에 편재했던 흥분은 통합적 인물인 그를 통해서만 정치적 돌파구를 찾을 수 있었다.--- pp.48~49 「제2장 집권 이전의 히틀러 운덩」중에서

권력이 폭력적이고 혁명적으로 장악되는 동시에 기존의 정부가 장송葬送의 노래 한마디 없이 불명예스럽게 실각하는 모습은, 3월 6일에 헤센에서도 되풀이되었다. 그날 헤센의 돌격대와 친위대 대원들이 무장 보조경찰대를 구성하여 주도主都 다름슈타트 시내를 휩쓸고 다녔다. 경찰이 그들과 동행한 것으로 보아, 그날 돌격대의 작전은 정규 경찰의 용인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나치 행동대와 정규 경찰이 함께 움직이자, 나치가 이미 새로운 ‘치안 주체’로 받아들여지고 인정되었다는 인상이 심어졌다. 돌격대와 친위대는 공공건물에 나치 당기를 게양했고, 나치 헤센 지구당은 경찰권을 인수하기 위하여 주내무부를 점거했다. 프리크는 헤센 내무부를 나치에게 넘기라는 명령을 이미 하달하였으나, 그 명령은 아직 다름슈타트에 도착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경찰이 나치 행동대를 막아섰다. 그러나 돌격대는 출동한 경찰에게 폭력을 가하고 경찰관들로부터 무기를 빼앗았다. 그들은 또한 3월 6일에서 7일로 넘어가는 날 밤에 헤센 주총리 아델룽과 내무장관 로이슈너를 자택에 연금했고, 외부와 연락을 취하지 못하도록 전화선을 끊어버렸다. 그러는 사이 프리크가 임명한 제국위원 하인리히 뮐러가 헤센 내무부를 장악했고, 이어서 친위대원인 베르너 베스트를 제국경찰위원에 임명했다. 뮐러는 나치 헤센 지구당 위원장 슈프렝거의 측근으로서 헤센 주의회에서 나치당의 내무정책을 전담하고 있었고, 젊은 베스트는 헤센 주의회 의원이자 나치 지구당의 법률 전문위원이었다.--- p.154 「제4장 주의 제국 통합과 새로운 분권주의」중에서

나치 지도부가 1933년 여름부터 실업을 극복하기 위하여 펼친 선전 활동과 모금 운동(히틀러는 1933년 8월 31일에 뉘른베르크 나치당 전당대회에서 실업 극복을 당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선언했다. 그리고 많은 기업가들이 모금 운동을 압력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1933/34년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벌인 실업자와 빈곤층을 돕자는 캠페인은 두 가지 효과를 낳았다. 그 운동은 우선 나치당의 투쟁을 정치권력의 장으로부터 국가 운영의 장으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실제 모금액이 별로 크지도 않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했다는 나치당의 선전이 실물 경제를 반영하지 않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운동은 많은 국민들에게 민족공동체적 연대에 대한 의식을 강화했고, 새 정부가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게다가 암시의 결과이든 조작의 결과이든, 국민들이 그러한 생각을 갖게 된 것은 경제적으로도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히틀러는 그것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국민들의 그러한 생각은 나치 체제가 가난한 사람들의 물질적 상황을 개선하고 실직자들을 재취업시키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던 바로 그 시기에, 노동자들의 사회적 자율성과 자유의 권리들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은폐하거나 보상해주는 효과도 낳았다.--- pp.200~201 「제5장 사회 권력의 장악」중에서

히틀러가 헤스를 총재대리로 임명한 것은 또한, 그가 나치당의 지위를 높이기는커녕 자신의 지도자권력 아래에서 당이 독자적인 권력을 구축하는 것을 막으려 하였기 때문이다. 그 최선의 방법은 나치당에 독자적인 기반을 갖고 있지도 않고, 성격적으로도 강하지 못하며, 자신의 개인비서 출신으로, “나의 지도자”에게 철저히 예종적인 헤스에게 전권을 부여함으로써, 언제나 충성스런 자기 하인이 나치당 최고위 인물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1933년 봄에 시급했던 일은 나치 거물들과 당 기관들의 독자성을 제약하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총재대리 헤스와 총재대리실(실장 마르틴 보어만)이 그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히틀러는 1933년 6월 말에 헤스에게 제국정부 각의에 참석할 권리를 부여했다. 그렇듯 헤스는 히틀러와 나치 거물들 사이의 완충지대였고, 그 덕분에 양자 간의 곤란할 수도 있는 직접 대면의 기회가 실제로 크게 감소했다.12 그런 대면을 가급적 피하고 배후에 머무는 것은 히틀러의 주요 통치술 중의 하나였다. 그 때문에 히틀러는 수많은 갈등에 직접 개입하지 않아도 되었다(물론 이는 타인을 희생시키는 행위였다). 최종적인 결정권은 그에게 속했지만, 그는 그 덕분에 모든 당사자들에게 선량한 중개인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p.286 「제6장 제3제국 초기의 당과 국가」중에서

1939년 6월에 히틀러로부터 10만 라이히스마르크의 특별 공로금을 받기도 한 토트는 전쟁이 발발하자 군수부장관에 임명되었다(1940년). 전쟁 중에 토트건설총국은 군수부 건설과에 편입되어 군사 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기동 건설대를 육군 부대에 파견하였다. 결국 독일군 공병대마저 토트건설총국에 편입되었다. 전선에 파견된 건설총국 노동자들은 유니폼을 입고 군사적 명령 체계 아래서 일했다. 건설총국은 또한 외국인 노동자, 전쟁포로, 유대인, 수용소 수감자들 수십만 명을 건설 현장에 투입했다. 토트가 보유하고 있던 세 가지 직책(도로총감, 건설경제총감, 군수장관)은 토트건설총국에 이례적으로 강력한 지위를 부여했고, 건설총국을 히틀러국가의 가장 중요한 특수 조직의 하나로 격상시켰다. 건설총국의 법적·영역적 특징은 국가적인 건설행정과 국가적인 노동력 공급 조절 체계를 건설 분야에 속하는 숱한 민간기업들과 결합시킨 데 있었다. 이러한 즉흥적인Ad-hoc 구조는 건설총국을 수많은 법적·행정적 장애물로부터 해방시켜주었고, 고도의 유연성과 기동성과 효율성을 발휘하도록 했다. 토트건설총국은 제국정부와 그 행정 부처 곁에 존재하면서도 일반적인 국가행정이 받아야 하는 통제로부터는 벗어나 있던, 전형적인 지도자 직속 비상 특별 집행기구였다. 건설총국은 군대 및 친위경찰과 비슷한 “국가 내 국가”였던 것이다.--- pp.373~374 「제8장 지도자권력」중에서

안락사 작전의 경험은 유대인 학살을 독일에서 멀리 떨어진 폴란드와 소련 지역으로, 그리고 “친위대장의 관할”로 이전시키도록 했을 것이다. 안락사 작전 때 빅토르 브라크가 구성했던 “가스 기술자”들은 유대인 학살에도 참여했다. 절차도 비슷했다. 소수의 친위대 장교들이 임박한 작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들은 뒤에 비밀 엄수의 의무가 부과되었고, “법을 제정하는” 지도자의지를 근거로 하는 학살의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동안 정부, 행정, 부처의 통일성이 해체된 것(예를 들어 외무부 독일과)은 유대인 학살에서도 효과를 발휘했다. 정보의 확보와 참여의 정도에서 편차가 컸지만 친위경찰 외에 그런 일반 행정기관들도 유대인 학살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보안경찰과 친위대라는 지도자 직속 예외기구는 대량 학살을 본격적이고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컸고, 또한 독립적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법적 규범에 묶여 있던 다른 기관들의 파편화, 지도자 직속 기관들 간의 경쟁의 항구적인 효과, 나치 당원들의 개인적인 침투, 세계관 교육 등은 정규 행정기관들로부터 안전성과 자의식을 빼앗고, 그것들을 조작 가능한 기관으로 만들었다. 그 기관들은 어느덧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의 전 과정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행정기술적 조치(나치 지도부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채)들을 부분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유대인 학살은 간단하게 1933년 이후 진행된 유대인에 대한 법적 차별의 연속성 속에서 이해될 수 없다. 절차의 측면에서 그것은 그 이전에 이루어진 조치들과 단절된 것이었고, 그런 한에서 그것들과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공포된 법과 명령들은 독일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을 단계별로 심화시켰고, 유대인들을 예외법 아래 두었으며, 유대인들을 사회적인 게토로 추방하였고, 그렇게 “최종해결”의 길을 닦았다. 법적 형태를 띤 조치들에 의한 법 원칙의 누적적 해체는 전적으로 무형적이고 무법적인 범죄 작전을 낳았던 것이다.
--- pp.448~449 「제9장 1938년 이후의 지도자절대주의와 다중지배」중에서
 

출판사 리뷰

독일 나치즘 연구의 최고 걸작이자 고전!
최근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덴마크 출신의 세계적인 감독 라스 폰 트리에가 “히틀러를 이해한다”라는 친나치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 큰 화제가 되었다. 이 에피소드에서도 알 수 있듯 나치가 해체된 지 60여 년이 넘는 긴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히틀러와 나치 문제는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꺼지지 않은 불씨와 같다. 다시 말해, 나치즘 및 홀로코스트를 빼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서양 인문학에 대해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가운데 독일 나치즘 연구의 최고 걸작이자 고전으로 손꼽히는 책이 국내에 출간되어 눈길을 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현대의 지성 시리즈로 출간된 마르틴 브로샤트의 『히틀러국가―나치 정치혁명의 이념과 현실』(김학이 옮김)이 그것.

1945년 이후 ‘독일’에서 생산된 가장 위대한 나치즘 연구서로 손꼽히는 이 책은 주요한 나치 개개인의 의도를 설명하는 “의도주의” 연구와는 달리, 나치즘의 작동 방식에 주목하는 “기능주의” 연구를 개시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무엇보다 저자 브로샤트는 이 책을 통해 ‘히틀러 없는 나치 국가’ ‘나치 이데올로기 없는 나치 국가’를 그려내며, 나치즘에 대한 전체주의적 해석을 뒤흔들고 있다. 히틀러라는 독재자와 유일 정당인 나치당이 국가를 장악하여 사회의 모든 직업 집단을 나치화하였으며, 세계 지배를 겨냥한 일관된 대외정책을 추진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그 결과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즘은 전체주의로 파악하기에 가장 적합한 체제로 보이는 것이 사실. 그러나 그러한 통설과 학설은 이 책에 의해 심각한 타격을 받았으며, 이후 발표된 거의 모든 주요 나치즘 연구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이 책과 대결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책을 빼놓고는 나치즘의 ‘연구사’에 대해 말할 수 없다.(문학과지성사, 2011)

‘히틀러 없는 나치 국가’ ‘나치 이데올로기 없는 나치 국가’
모두 1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나치의 집권 과정(제1장), 나치의 이데올로기(제2장), 의회주의의 제거(제3장), 지방자치제의 제거(제4장), 농업, 공업, 상업 등 경제단체의 단일화와 노조의 제거(제5장), 집권 후 히틀러에 반하던 나치 돌격대의 거세(제6장), 공무원과 행정부에 대한 조치(제7장), 히틀러의 총통 권력(제8장), 나치 체제 내부의 각종 권력기관(제9장), 법과 사법부(제10장)의 순서로 서술되어 있다. 따라서 언뜻 보면 히틀러 및 나치가 전체주의적 권력을 수립하고 공고히 하는 과정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써내려간 듯하다. 그러나 내용은 정반대이다. 단적으로 “히틀러국가”라는 책 제목 자체가 반어적 의미를 담고 있다. 사실 브로샤트는 이 책에서 ‘히틀러 없는 나치 국가’ ‘나치 이데올로기 없는 나치 국가’를 그려냈기 때문.

나치는 자신들의 이데올로기, 당대 표현으로는 “세계관”에 진지했다. 나치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원민중적” 민족주의로서, 피와 흙의 “비밀스러운” 힘에 의해 규정되는, 즉 국가와 사회 그리고 개인과 사회의 분화 이전에 존재했었으나 이제는 유토피아적인 미래완료의 시점에 비로소 실현될 “제3제국”이 목표였다. 그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 내적으로는 정치사회적, 인종적 적의 제거이고, 외적으로는 동유럽에 광대한 생활공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전체주의론이 이를 나치가 현실정치를 통하여 실행하려던 구체적인 계획으로 간주하는 데 반해, 브로샤트는 그것을 하나의 은유로 파악한다. 그것은 당대 현실과의 구체적인 연관성이 결여된 종말론적 유토피아였다는 것. 예컨대 1939년 10월 폴란드를 점령하였지만, 침공 당시 나치는 정복한 폴란드를 어떻게 관리할지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 없었다. 극단적으로 모호한 유토피아는 현실과의 연관성은 상실하지만,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만은 강력하게 결속시킨다. 각 개인은 구체적인 원한과 현실적인 열망을 그에 투사하고 그를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존재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지도자”로만 불리던 그는 대중의 노이로제 속에서 자신의 노이로제를 발견하여 공통의 위기의식을 상승적으로 강화하면서, 유토피아적 미래를 향한 광적인 의지를 선지자적 제스처로 표현하던 자였다. 따라서 각 개인은 히틀러에게 자신의 열망을 투사할 수 있으며, 그런 한에서 히틀러는 대중적 의지의 결정인 동시에 그 도구였다. 히틀러라는 개인 자체가 유토피아적인 메타포였던 것이다. 이런 특성에 의해 나치즘 내부에서 권위적인 국가론자(내무장관 프리크), 광적인 행동주의적 반유대주의자(슈트라이허), 대기업과 연계된 경제적 현실주의자(샤흐트와 부분적으로 괴링), 조합주의적 사회주의자(독일노동전선 총재), 복고 취향의 향토적 문화론자(히틀러), 아방가르드 취향의 문화적 근대주의자(괴벨스), 이데올로기적 팽창주의자(한스 로젠베르크),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자(폴란드 총독 한스 프랑크) 등의 서로 모순되는 노선이 태평하게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치즘에 대한 전체주의적 해석을 뒤흔들다
이에 대해 전체주의론자들은 ‘분할하여 통치하는’ 히틀러의 통치 전략으로 환원한다. 그러나 브로샤트는 그런 내적 모순이 나치즘의 본질이라고 해석하는 동시에, 그런 대립과 갈등 때문에 나치즘에 고유한 역동성이 발휘되었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인 것이 없는 상태에서 경쟁의 자유가 무한대로 주어진 만큼 각 나치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고 성공할수록 더욱 큰 권력 영역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중장기적인 국가적 목표와 무관하게 단기적인 실적에 매달렸다. 예를 들어 “유대인 문제의 해결”은 나치 시대 내내 드높이 울려 퍼지던 목표였지만, 유대인 문제 전담 기관은 나치 시대 전체에 걸쳐서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유대인 처리를 놓고 친위대, 내무부, 경제부, 정복지역부가 경쟁하면서 각각의 실적을 내놓기 위해 노력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독일에서 유대인들에게 가해진 최대의 폭력 사태인 “제국수정의 밤”(1938년 11월 9일)은 엉뚱하게도 괴벨스가 주도했는데, 이에 대해서 사전에 통고받은 고위 나치는 히틀러를 제외하고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그 사건은 유대인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강등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즉 권력 분극들의 상호 경쟁이 역동성을 발휘하여 사태를 과격화시켰던 것이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점은 나치의 내부 경쟁이 역동성을 발휘하되, 그 방향이 ‘부정적’이었다는 것이다. 브로샤트는 이를 나치가 대기업, 군대, 고위 관리 등의 기존 세력의 아성을 장악하고 파괴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해석한다.

이로써 나치 체제가 전혀 전체주의적이지 못했다는 점이 드러난다. 또한 브로샤트는 나치의 역동성이 부정적으로만 발휘되었다는 점에 주목하는데 나치 운동이 좌파의 제거, 정신병자의 학살, 총력전, 유대인 학살 등으로 나아간 것이 그러하다. 이 책에는 이러한 양상들이 다양하게 제시되어 있지만, 브로샤트가 보다 집중한 영역은 관료제와 행정 분야였다. 스탈린 치하의 소련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것은 나치 체제의 공무원들이 나치당원일 필요가 없었다는 것, 군대는 아예 군인들의 나치당 입당을 금지했다는 것, 그리고 나치당이 도시 행정을 제외하고는, 즉 주 행정과 중앙정부와 정복지역 행정에 대해서는 ‘제도화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고위 나치는 정부에 대하여 나치당 소속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이 아니라 주지사가 된다거나 장차관이 됨으로써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따라서 나치 체제에서 정부 행정의 모습은 과거 바이마르공화국 시절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기관이 등장했다. 바로 전쟁 준비를 위한 4개년계획청, 토트건설총국, 친위대 등총통 직속의 특수 전권기관이 그것들이다. 그 기관들은 내각의 한 부처가 아니면서도 입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최고위 중앙부처였고 일반 행정이 아닌 특수 분야를 전담했다. 따라서 그 기관들은 입법권을 발동하면서도 관료주의적 제약을 받지 않았다. 이로 인해 유연하고 효율적인 정책이 가능했던 것. 즉 고속도로, 전투기 생산, 인조고무 생산 등 나치가 내세울 만한 업적들은 모두 이런 특수기관이 실행한 것들이다.

히틀러는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런 특수 전권기관들을 남발하듯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는 효율성을 발휘한다. 그러나 특수 전권기관은 특정 분야의 실적을 위하여 타기관의 행정권한을 침탈하게 된다. 따라서 기존 행정기관과의 행정권 경쟁이 불가피해진다. 게다가 그 기관들이 일반 행정의 수장직을 차지한 나치 지구당 위원장들과 대립하게 되면서 경쟁은 더욱 격화되고, 행정은 조망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중복되고 끊어졌다. 동시에 업무 추진은 더욱 과격해졌다. 업적만이 행정권 침탈을 정당화하고 더 큰 권력을 보장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상은 심지어 단일한 행정기관 내부에서도 벌어졌으며, 다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과정의 최종적 결과는 한편으로는 나치 체제의 파편화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적 파괴의 극단화였다.

이 책이 나치즘 연구에 미친 영향
이처럼 브로샤트가 나치즘 연구에 미친 영향은 막대했다. 물론 이 책 이후 모든 나치즘 연구가 브로샤트의 입론을 따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이론을 견지하고 있는 전체주의론조차 그 형태를 변형하고 있다. 바로 나치즘을 ‘정치종교’로 해석하는 것. 나치즘이 독일 대중 전체를 사로잡았다고 주장함으로써 브로샤트와는 사뭇 다른 논지를 제시하고 있지만, 나치즘의 종말론적 성격을 부각시킨 연구자는 다름 아닌 브로샤트였다. 이는 브로샤트에 동의하든 동쟀하지 않든, 나치 연구가 브로샤트를 피해갈 수 없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또한 이 책은 한국의 나치즘 연구에도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나치즘 및 홀로코스트를 빼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서양 인문학에 대해 논하기란 불가능하다. 『전체주의의 기원』이란 대작을 남긴 한나 아렌트는 말할 나위도 없고, 푸코가 그렇고 데리다가 그러하며, 최근에 자주 언급되는 아감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현재 한국에 나치즘을 제대로 소개한 책들은 많지 않다. 국제 역사학계에서 인정받은 나치즘 연구서 가운데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는 책은 메이슨T. Mason의 『나치스 민족공동체와 노동계급』, 포이케르트D. Peukert의 『나치 시대의 일상사』, 힐베르크R. Hilberg의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정도를 꼽을 수 있다. 문제는 브로샤트의 『히틀러국가』를 빼놓고는 이 책들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이렇듯 국내에서도 히틀러와 나치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이를 둘러싼 역사적 현상이 세계사의 전체 맥락에서 끊임없이 문제가 되는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따라서 히틀러와 나치 연구에 필수적인 연구서 『히틀러국가』의 출간은 국내 나치즘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