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일본학 연구 (책소개)/2.일본문화

일본 vs 옴진리교

동방박사님 2022. 9. 18.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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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1995년 3월 20일 일본 도쿄 지하철 핵심부에 뿌려진 사린가스,
사망자 13명 부상자 6,300명…….
그러나 옴진리교 사건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부동의 최고 팟캐스트 XSFM [그것은 알기 싫다]가 공식 인증한 첫 번째 책!

인기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던 ‘옴진리교와 일본 사회에 대한 기묘한 이야기’를 책으로 묶은 『일본 VS 옴진리교』가 출간되었다.
『일본 VS 옴진리교』는 2017년 7월 20일부터 28일까지 4회에 걸쳐 ‘옴진리교와 일본 사회에 대한 기묘한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방송된 내용을 기반으로 시간 제약상 생략된 구체적인 전말과 방송 이후 추가로 일본에서 진행된 내용을 포함하여 새롭게 기술되었다. ‘옴진리교와 일본 사회에 대한 기묘한 이야기’는 옴진리교라는 종교집단이 광기와 망상에 사로잡힌 채 인류 말살 계획으로 치닫는 폭주의 과정을 시간 순서에 따라 정서적인 충격이 전해지는 동시에, 일본 사회가 준비한 길고도 치밀한 반격에 많은 애청자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무엇보다 이 에피소드의 진정한 메시지가 세월호에 있었다는 데 소름이 돋았다는 평이 쏟아졌다.

시대의 병리적 징후와 한국 사회의 그늘진 초상을 예리하게 포착해온 〈그것은 알기 싫다〉가 그동안 무수히 쏟아냈던 레전드 콘텐츠 가운데서도 역대급으로 꼽히는 에피소드를 책으로 묶은 『일본 VS 옴진리교』는 [그것이 알기 싫다]에서 공인한 첫 번째 책으로 [그것은 알기 싫다] 팬이라면 절대 놓칠 수 없는 한 권이 될 것이다.

 

목차

추천의 말
저자의 말

PART 1 옴진리교 사건
CHAPTER 1 끝나지 않은 이야기
종교, 테러, 독가스/도망자들/사형제 존치 논쟁/공모죄와 감시 사회/거대한 그림자
CHAPTER 2 옴진리교의 시작
오컬트 붐/신흥종교/세기말의 풍경/기괴한 출가제도/살인 정당화/비극의 시작
CHAPTER 3 초기의 살인 사건들
신자 사망 사건(1988년 9월)/남성 신자 살해 사건(1989년 2월)/옴진리교 피해 대책 변호단 창설(1989년 6월)/종교법인 등록(1989년 8월)/[선데이 마이니치]의 특종 연재(1989년 10월~11월)/TBS 비디오 문제(1989년 10월)/담판(1989년 10월)/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일가 살해 사건(1989년 11월 4일)
CHAPTER 4 교세 확장
중의원 총선거 출마와 낙선(1990년 2월 18일)/보툴리누스균 살포 미수 사건(1990년 4월~5월)/외부 활동과 세력 강화(1990년 후반기~1992년 후반기)/탄저균 분무 미수 사건(1993년 6월~8월)/사린 제조 착수(1993년 6월)/핵무장 계획 실패(1993년 9월)/창가학회 명예회장 사린 습격 미수 사건(1993년 11월~12월)
CHAPTER 5 광기
약제사 린치 살해 사건(1994년 1월 30일)/과대망상과 피해망상의 격화(1994년 2월)/다키모토 다로 변호사 사린 습격 사건(1994년 5월 9일)/자동소총 제조 사건(1994년 6월)/마쓰모토 사린 사건(1994년 6월 27일)/현역 신자 고문 살해 사건(1994년 7월 10일)/저널리스트 포스겐 습격 사건(1994년 9월 20일)/주차장 경영자 VX 습격 사건(1994년 12월 2일)/회사원 VX 살해 사건(1994년 12월 12일)
CHAPTER 6 파멸
[요미우리 신문]의 특종 보도(1995년 1월 1일)/옴진리교 피해자 모임 회장 VX 습격 사건(1995년 1월 4일)/한신 아와지 대지진(1995년 1월 17일)/공증사무소 사무장 감금 치사 사건(1995년 2월 28일~3월 1일)/지하철 사린 사건(1995년 3월 20일)/긴 하루(1995년 3월 20일)/옴진리교 간부 살해 사건(1995년 4월 23일)/신주쿠 청산가스 사건(1995년 4월 30일~5월 5일)/도쿄 도청 소포 폭탄 사건(1995년 5월 16일)/마쓰모토 치즈오 체포(1995년 5월 16일)

PART 2 일본 VS 옴진리교
사후처리/세 자루의 창/종교법인 옴진리교 해산명령/옴진리교 파산을 위한 준비/지하철 사린 사건 피해자 모임/파산 절차를 통한 피해 회복/일본 정부의 특별한 배려/파산 절차 시작/도쿄 도의 세금 징수 시도/숨겨진 세 번째 창/옴진리교 비품 매각 바자회/건물 해체 비용/일본 정부의 채권과 시민 피해자의 채권/기금과 모금/어젠다 세팅/후계단체/선의를 구하는 방법/파산 절차 종료/언론의 책무/일본 정부의 마지막 반격/삶을 되찾을 최소한의 권리

연표

저자 소개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한국어로 일본의 오늘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 2016년 XSFM의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에 ‘아카기 토모히로의 노력의 결과에 대한 기묘한 이야기’라는 에피소드에 ‘네티즌 17호’라는 이름으로 처음 출연하며 큰 화제를 모았다. 버블 경제 붕괴 세대의 절망과 동일본 대지진 이후 약자들의 고통에 대해 지금껏 알지 못했던 사실, 혹은 알아야 하나 외면했던 진실을 차분한 어조로 전달해가는 ...
 

책 속으로

흔히 ‘옴진리교 재판’이라고 불리는 옴진리교 교단의 범행에 관한 이 기나긴 재판은 2017년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 가운데 피고인이 사형을 언도받을 가능성이 있던 주요 재판은 원래, 2011년 11월 21일에 당시 마지막 피고인으로 불리던 교단 간부 엔도 세이이치의 사형이 확정되면서 모두 종료될 예정이었다. 당시 일본의 주요 언론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옴진리교 관련 재판이 드디어 끝나간다는 보도를 내보내기 시작했고, 이미 사형이 언도된 마쓰모토 치즈오 및 주요 간부들의 사형 집행이 늦어지는 이유에 대해 대체적으로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던 일본 사회의 많은 구성원들은 이제 재판이 모두 끝나면 곧 마쓰모토 치즈오와 다른 옴진리교 사형수들의 사형도 집행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사회나 그렇듯 일본 사회에도 풍부한 상상력에 약간의 비아냥을 얹어 시니컬한 발언을 꺼내드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들은 옴진리교 재판이 마침내 끝에 다다르는 시점에서 이런 말을 툭 던졌다.
“지금 이 타이밍에 옴진리교 수배자가 추가로 검거되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때론 현실은 소설보다 기이한 법이다.
--- p.22~23

일본에서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우선 선거에서 한 표를 행사하는 일본 국민들을 설득하는 작업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유권자의 지지 없이는 정치권은 결코 움직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꾸준히 강연회나 토론회 등을 통해 사형제에 대한 일본 국민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 지난한 여정 속에서 이들은 꽤나 높은 빈도로 옴진리교의 그림자를 확인하곤 한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다음과 같은 목소리로 존재를 드러낸다.
“사형제를 폐지하자고요? 그럼 옴진리교 교주 마쓰모토 치즈오도 사형에 처하지 말자는 소립니까?”
(……)
지하철 사린 사건이 발생한 지 20년 이상이 지난 지금도, 일본에서 사형제 폐지를 논의하려면 토론에 참가하는 사람은 옴진리교 사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미리 정해둬야 한다. 일본 사회가 옴진리교 사건으로 인해 지불하고 있는 사회적 비용이 얼마나 방대한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 p.30~31

1985년 10월, 마쓰모토 치즈오는 일본의 한 오컬트 잡지에 자신이 수양을 통해 공중부양에 성공했다며 사진과 기사를 내보낸다. 처음에는 그저 잡지의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을 뿐인 이 사진과 기사는 옴진리교가 오컬트 문화에 심취해 있던 당시의 일본 청년들을 신도로 끌어들이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옴진리교의 주요 간부였으며 현재 후계단체 중 하나인 ‘빛의 고리’를 이끌고 있는 조유 후미히로가 옴진리교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계기도 바로 이 사진이었으며, 그 외에도 옴진리교 설립 초기부터 신자가 된 많은 청년들이 이 사진을 계기로 마쓰모토 치즈오의 존재를 알게 된다. 지금은 누가 봐도 연출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 사진 한 장으로 당시에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대학을 나온 엘리트 청년들마저 속일 수 있었던 것이다.
--- p.42

옴진리교는 상당히 초기 단계부터 교주의 명령에 따른 살인은 정당화될 수 있고 심지어 교주의 살인 지령은 이것을 따른 제자 본인과 살해당한 상대방마저 공덕을 쌓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라는 식의 사고방식을 유포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포아’라는 용어를 살인 혹은 살인 지령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포아’는 일본에서도 그렇게 흔히 사용되는 말은 아니었으며, 사실상 옴진리교 사건을 통해서 유명해진 단어다. 지금도 ‘포아’라는 단어는 십중팔구 옴진리교 사건을 언급할 때 사용된다.
(……)
옴진리교는 많은 수의 신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다수의 강력범죄를 저지른다. 그 과정에서 모든 실행범이 한 치의 망설임이나 죄책감도 없이 범행을 저질렀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그들이 범행 직전에 갈등을 느끼더라도 그들 스스로가 자신을 속이고 정당화할 수 있는 심리적인 탈출구를 마련해둔 것은 교단 전체가 조직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신자들은 마쓰모토 치즈오와 교단의 명령이 있으면 내적인 갈등을 억누르고라도 이것은 선행이라는 신념 아래 끔직한 범죄를 반복해서 자행한다. 그리고 결국 이 폭주는 최악의 결과로 막을 내리게 된다.
--- p.62~63

1995년 3월에 일본 도쿄에서 지하철 사린 사건이 발생하자 속보 보도 역량을 갖춘 전 세계의 모든 언론사가 이 소식을 속보로 타전한다. 일본 사회 구성원들과는 달리 이 보도를 통해 처음으로 옴진리교의 존재를 알게 된 대다수의 세계인들이 가장 먼저 가진 의문은 이것이었다. ‘도대체 저 신흥종교 집단이 왜 대량 살상 무기를 보유하고 있느냐?’ 그리고 세부적인 사항에서 다소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 질문은 일본 사회에서도 유효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옴진리교의 활동을 추적하다 보면 결국 1990년 2월의 총선거 참패와 직후의 보툴리누스균 배양 시도에 도달하게 된다.
옴진리교가 이전까지 저질러온 범죄,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일가 살해 사건과 그 이전에 발생한 남성 신자 살해 사건의 경우 범행 내용은 끔찍했지만 범행 수단은 통상적인 강력범죄의 범위 안에 있었다. 그러나 대량 살상 무기를 제조해 교단 활동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다는 발상은 이전의 범죄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옴진리교는 바로 이 벽을 비교적 이른 시기에 허무할 정도로 단순한 이유로 넘어서 버린다. 교단을 완전하게 장악하고 있던 마쓰모토 치즈오가 대량 살상 무기 제조를 결정했고, 이를 내부적으로 정당화할 교리는 이미 예전에 마련돼 있었다.
--- p.102~103

무고하게 고문을 당한 신자는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지만, 처음부터 그가 결백한지 아닌지는 마쓰모토 치즈오 이하 교단 간부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고문이 이어지자 신자는 한 고위 간부에게 “당신은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으니 제 마음을 읽어보세요. 그러면 제가 독을 넣지 않았다는 걸 아실 것입니다”라고 몇 번이고 말했으나 고문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신자는 의식을 잃었고, 간부들은 마쓰모토 치즈오에게 이 신자가 ‘자백’을 하지 않는다고 보고한다. 마쓰모토 치즈오는 당초 계획대로 이 신자가 스파이였음을 적어도 교단의 주요 간부들에게는 믿게 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제 와서 살려두면 이미 고문을 당한 신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알 수 없어 훗날 옴진리교의 화근이 될 것이라 판단한다. 마쓰모토 치즈오는 결국 신자를 살해할 것을 지시하고, 이 지시대로 교단 간부가 이 신자의 목을 졸라 살해한 뒤 시신은 소각한다.
고문을 당하던 신자의 호소를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이 신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옴진리교의 교리를 신봉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초능력. 수행을 통해 그 초능력을 손에 넣은 존경받는 교단 간부. 옴진리교가 1980년대의 오컬트 붐에 기반을 둔 신흥종교였다는 사실을 가장 처참한 형태로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었으나, 그 결과를 27세에 불과했던 한 청년이 모두 부담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했다.
--- p.156

피해자와 유가족은 돈을 받아야 한다. 그저 큰돈을 받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와 책임을 져야 할 개인 및 단체에게서 법이 정한 범위 안에서 가장 많은 돈을 받아내야 한다. 단 한 번이라도 누군가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단체가 사용하던 의자와 책상과 연필 한 자루까지 모두 처분해 1원이라도 더 많은 돈을 피해자에게 돌려주고자 노력하는 전례가 생기면, 그 사회는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다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
세월호 참사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각종 범죄로 피해를 입은 유가족과 피해자들, 누군가를 위험에 노출시키고 그 대가로 많은 돈을 벌면서 정작 사고가 발생하면 최소한의 돈만 지급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피해를 입은 유가족과 피해자들은 한국의 법과 사회적인 합의가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많은 돈을 받아야 한다. 그들이 1원이라도 더 많은 돈을 받는 것은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1원만큼이라도 더 많은 책임을 지는 것이며, 실로 사회 정의에 부합하는 일이다.
--- p.305~307
 

출판사 리뷰

광기의 폭주가 시작된 원점부터 드러나지 않았던 끔찍한 살인 행각의 전모,
종교의 외투를 입은 고대의 망령에 짓밟힌 일본이란 현대 국가가 준비한
촘촘하고 세밀한, 그러나 멈추지 않은 반격까지!

1995년 3월 20일 오전 6시경. 5명의 남자가 도쿄의 아지트를 떠나, 치요다 선의 한 차량, 마루노우치 선의 두 차량, 히바야 선의 두 차량에 탑승한다. 도쿄를 포함한 일본의 수도권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라면 하루 이틀 사이에 한 번은 반드시 탑승할 지하철들이다. 목표로 한 역에 도착한 5명의 남자는 신문지로 싼 비닐봉투를 지하철 바닥에 떨어뜨린 뒤, 날카롭게 간 우산 끝으로 찌르고 도주한다. 이들이 도주한 직후부터 각 지하철의 차량에 사린가스가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옴진리교 사건’의 시작이었다.
시간을 ‘옴진리교 사건’ 발생 이틀 전으로 거슬러 1995년 3월 18일 새벽 2시. 1995년 새해 벽두, 옴진리교 후지산 부근 시설 주변에서 사린 잔류물이 검출되었다는 [요미우리 신문]의 특종으로 경시청의 강제 수사가 임박했던 옴진리교 교주 마쓰모토 치즈오와 간부들은 리무진 안에서 강제 수사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한다. 그러던 중 그해 1월 17일 일어난 한신 아와지 대지진과 같은 미증유의 재난이 벌어지면 경찰도 강제 수사에 돌입할 여력이 없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그 방법으로 지하철에 사린가스를 살포하자는 안이 제시된다. 아이디어 제안부터 실행 방법, 실행범의 인선까지 모두 결정되고 이들을 태운 리무진이 도착한 시각은 3월 18일 오전 4시. 일본 현대사를 뒤흔든 끔찍한 범행의 구체적인 계획을 논의하는 데 소요된 시간은 겨우 두 시간 남짓. 그리고 불과 이틀 후 옴진리교는 도쿄 지하철 핵심부에 사린가스를 살포하는 데 성공하여 13명의 사망자와 6,300명의 부상자를 낳는다.
이 광기의 폭주는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일본 VS 옴진리교』는 ‘아사하라 쇼코’라는 이름으로 옴진리교를 창시하였으나 본명 ‘마쓰모토 치즈오’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한 남자의 과대망상과 피해망상이 그 비극의 출발점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 과대망상과 피해망상이 발아하고 비대화하고 종극에 폭주하여 구제와 ‘포아’라는 이름으로 25명의 사망자와 6,300명에 이르는 피해자를 만든 것이다. 그 과정이 『일본 VS 옴진리교』PART 1 ‘옴진리교 사건’ 속에 담겨 있다.

우리는 물어야 한다.
세월호 사건으로부터 3년여가 지난 지금,

우리가 옴진리교 사건으로부터, 그리고 일본 사회로부터 얻을 교훈은 무엇인가?
옴진리교 사건은 일본이라는 현대 국가를 종교의 외투를 입은 고대의 망령이 잔혹하게 짓밟은 사건이었다. 그들의 공격이 한계에 달해 광기의 수레바퀴가 겨우 파괴되었을 때, 현대 국가인 일본은 현대 국가다운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길고 지루하고 촘촘하고 세밀한, 그리고 결코 멈추지 않는 반격이었다.
일본 정부와 수사기관, 그리고 언론은 옴진리교가 끔찍한 살인 행각을 벌이며 일본 사회를 파멸로 몰아가는 과정 속에서 안이하고 방만하며 불필요한 선택만을 거듭해왔고 그 결과가 옴진리교 사건이었다. 과거에 대한 뼈저린 후회와 반성은 당연히도 필요했지만, 그 이상으로 미래를 위한 사후처리가 중요하다는 데 일본 사회와 그 구성원 모두가 동의했다.
일본 정부와 사회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간명했다. 옴진리교의 각종 범행에 관여한 관계자의 체포, 교단의 인적 자원 박탈, 불법으로 취득한 재산의 몰수를 통한 경제적 기반의 붕괴이었다. 결국 일본 정부와 사회는 옴진리교를 붕괴시키기 위해 세 가지 수단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세 자루의 창을 준비한다. 종교법인법에 따른 해산명령, 옴진리교 파산 절차 돌입, 파괴활동방지법 적용이 그것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사후 처리의 과정은 대단히 길고 지루했다. 1995년 5월 마쓰모토 치즈오가 체포된 후 그해 6월 30일 종교법인 옴진리교 해산명령이 청구된다. 그리고 12월 28일 일본 변호사 연합회 전 회장인 아베 사부로 변호사는 옴진리교 파산 결정 이후의 절차를 관장할 파산관재인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고 고심 끝에 승낙한다. 1996년 3월 재판소로부터 옴진리교의 파산 선고가 내려지는 자리에서 아베 사부로 변호사는 “업무 종료까지 3년 정도를 생각하고 있다”라고 포부를 밝힌다. 훗날 아베 사부로 변호사 본인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는 발언이었다.
2018년 1월 옴진리교의 후계단체에 대한 감찰 처분 갱신이 대기하고 있을 정도로 일본 정부와 사회의 반격은 느릿하지만 촘촘하고 세밀하게 진행 중이다. 일본 사회는 옴진리교 사건 피해자의 권리를 회복하고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일본 사회가 동원할 수 있는 최고의 인적 물적 자원을 투입해 오랜 기간 끈질기게 싸워나갔다. 그 결과 옴진리교 교단을 붕괴시킬 수 있었으며 후계단체가 사건 발생 2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반성과 사과의 뜻을 담아 매년 일정한 금액을 손해배상으로 갚아나가도록 만들었다.
세월호 사건 이후 3년여가 지난 지금, 한국 사회는 옴진리교 사건과 이후 일본 사회의 사후 처리 과정 속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일본 사회는 옴진리교 사건이 발생한 이후 수십 년의 시간을 투자해 겨우 첫걸음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제는 한국이 이 첫걸음을 당당하게 내디딜 차례다.

저자의 말
2017년 7월에 XSFM의 [그것은 알기 싫다]를 통해 방송된 옴진리교 사건에 관한 기묘한 이야기 시리즈는 제 예상을 뛰어넘는 과분한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사건의 피해자와 희생자의 유가족은 그저 피해를 입은 것에 불과한 수동적인 위치의 사람이 아니라 가해자에게 책임을 지게 하고 피해를 배상받을 권리가 있는 채권자이기도 하다는 주장이 널리 공감을 얻은 것은 이야기를 준비한 사람으로서 매우 뿌듯하고 감사했습니다. 일본 사회는 옴진리교 사건 피해자와 희생자 유가족이 피해를 회복하도록 적극적으로 도왔지만 그들을 무작정 동정하기보다는 그들이 가해자에게서 배상을 받아낼 자격이 있는 사람이란 점에 좀 더 집중했습니다. 바로 이 착안점이 세월호 사건의 진정한 해결을 위해 한국 사회가 염두에 둘 실마리 중 하나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추천평

에고의 등장을 꺼리며 부를 이름조차 허락하지 않은 채로 활동하는 네티즌 나인(가변되는 이름 덕에, 독자께서는 작가의 다음 책이 나와도 그 사실을 모르실 수 있겠습니다)은, 처음 만나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순간부터 느낌이 많이 달랐습니다. 그는 글쟁이가 세상에 해가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덕목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며, 자신의 재능을 세상을 위해 쓰되, 세상이 자신의 에고를 떠받드느라 수고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유지하기 위해, 글을 포함한 자신의 온 삶으로 노력할 준비가 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첫 만남에서 비롯된 저의 확신이 승화된 콘텐츠를 우리의 방송과 이 책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책의 방송 콘텐츠 사용과 홍보에 있어 [그것은 알기 싫다]의 이름이 사용되는 것을 이제껏 공식 승인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내놓은 콘텐츠가, 교열과 추가 취재를 거친다 해도 미흡할 것이 두려웠고, - 음원파일도 기록매체이긴 하지만 - 스마트폰을 벗어나 더 많은 장소에 놓여 세상의 손길 근처에 머무른다는 것이 마뜩잖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 책의 출간은 최초로 이 책에 담긴 내용을 다룬 방송의 PD로서도 모험입니다. 내용이 이상하거나 공익에 해가 되고 말 내용이라면, 마음으로라도 연대 책임을 져야 할 테니 말이죠. 저는 자신 있습니다.

UMC/UW (XSFM [그것은 알기 싫다]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