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이데올로기 연구 (책소개)/1.나치즘.파시즘

뉴딜, 세 편의 드라마 - 미국의 뉴딜 · 무솔리니의 파시즘 · 독일의 나치즘

동방박사님 2022. 10. 9.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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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뉴딜 정책에 관한 본격적인 비교 · 분석

대공황이라는 절망적 상황에서 나타난 세 가지 뉴딜. 그것은 이탈리아의 파시즘 · 독일의 나치즘 · 미국의 뉴딜이었다. 세 가지 뉴딜은 ‘위기 속에서’ 그 ‘위기를 이용해’ 정권을 잡았고 ‘위기에 맞선’ 거대한 기념비적 사업들을 단행했다. 이는 왜 뉴딜과 파시즘과 나치즘이 동시대에 등장했고 어떻게 똑같이 대중의 열광적 지지를 받을 수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저자 쉬벨부시는 이들 정권들의 정책들, 그리고 사회와 정부에 대한 대공황 시대의 대중의 태도와 사고방식을 세세하게 연구해 재구축함으로써 파시즘 · 나치즘 · 뉴딜에 대해 더욱 깊이 있는 이해로 이끈다. 이를 통해 독자는 미국의 뉴딜이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와 히틀러의 독일, 나아가 스탈린의 소련과도 닮았던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목차

서론: 비교들에 관하여

1장 친족 관계?
유럽의 관점
미국의 관점
공통의 기반
자본으로부터의 해방자들

2장 리더십
루스벨트의 라디오와 히틀러의 집회

3장 선전
상징의 힘
블루 이글
“순응의 상징화”
선전 게임

4장 땅으로 돌아가자
지역주의
정착지
자경 자급 농장

5장 공공사업
아그로 폰티노
테네시 강 유역 개발 공사
아우토반

에필로그: “우리가 행진할 때”
 

저자 소개

저 : 볼프강 쉬벨부시 (Wolfgang Schivelbusch)
 
“문화사의 거장”이라 불리는 볼프강 쉬벨부시는 1941년에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쉬벨부시는 프랑크푸르트와 베를린에서 문학, 철학, 사회학을 공부하였으며 1973년부터는 뉴욕에서 자유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브레히트 이후의 사회 드라마』(1974), 『철도 여행의 역사』(1978), 『기호품의 역사』(1980), 『지식인의 황혼』(1982), 『섬광』(1983), 『빌헬름 시대의 한 오페라』(...
 
역 : 차문석
 
1965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다.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에 급진적 민주주의 운동을 하였고, 1994년에 대학원(성균관대 정치학과)에 들어간 후 '대중 운동'과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해 연구하여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최근에는 '북한의 국가와 사회'와 '노동의 역사'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성균관대, 동국대 등에서 연구원 및 연구 교수로 근무했다. 현재는 통일교육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
 

책 속으로

히틀러, 무솔리니, 그리고 루스벨트는 국민 투표로 선출된 리더십의 사례들로 간주되었다. 즉 서로 다르지만 철저하게 합법적인 수단을 통해 권력을 획득한 독재자들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준군사적인 폭력 집단과 조직화된 억압적 국가 기제를 갖고 있는 파시즘 및 국가사회주의의 대중 정당들과, 그리고 다원적 통합이었던 뉴딜 행정부 간의 차이를 몰랐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적 논평가들과 파시스트 논평가들 모두 사회적으로 정향된 뉴딜의 정책들과 집단성을 강화하는 파시스트 사상들 사이에 많은 유사성들이 있음을 확인했다. 당시의 정치학자들과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합의는, 1933년 봄과 여름에 루스벨트 치하의 미국이 일종의 자발적 강화 과정 속에서 탈자유주의 국가로 스스로 전환했다는 것이다. --- p.39

만일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여했기 때문에 비로소 대공황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오늘날 역사가들의 합의를 받아들인다면, 파시즘/국가사회주의와 뉴딜 사이에는 한층 더한 유사점이 나타난다. 세 이데올로기들은 모두 자신들의 국민 경제를 완전히 건강한 상태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재무장과 그에 따른 전쟁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 p.54

오늘날 아돌프 히틀러와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는 거울상체로 비춰진다. 사실, 이보다 더 극적인 인물 대비 연구를 상상하기란 어렵다. 히틀러는 벼락출세한 서민, 히스테리성 선동 정치가, 사악한 독재자, 야만과 악마와 그리고 전체주의의 화신으로 기억된다. 반면에 루스벨트는 귀족적인 신사, 개인적 정치적 권위를 선천적으로 타고난 자신감 있는 지도자, 자유민주주의적 휴머니즘의 구현자로 호의적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1930년대 당대인들은 상이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고, 최근의 몇몇 역사 연구자들 역시 당대인들과 비슷하게 보았다. 그들에게 히틀러와 루스벨트는 모두 대중을 자신의 영향력으로 사로잡았던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리더십이 없었다면 국가사회주의나 뉴딜은 모두 불가능했을 것이다. --- p.81

국가 주도의 선전부터 국가가 재정을 대는 공공사업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인민을 “국민화하는 데” 엄청난 강조점을 두었다. 이러한 인민의 ‘국민화’는 이탈리아 파시즘이 리소르지멘토로부터 각색했던 유명한 언명에 기반해 있었다. 즉, “이탈리아를 창조했으니, 그 다음에는 이탈리아 인을 창조할 것이다.” 1930년대의 관점에서 볼 때, 19세기 내셔널리즘이 가진 중대한 결점은 그것이 결코 추상을 넘어서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전쟁 기간 동안에 단발적으로 분출된 애국주의를 제외한다면 인민들은 국가와 정서적 거리를 유지했다. 이와 달리 1930년대의 새로운 국가는 그저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진정한 조국이 되었다. --- p.146

미국의 국가 아이덴티티를 구성하는 기둥들 중에는 군국주의적 유럽과는 대조적으로 미국은 평화로운 상인들의 공화국이라는 신념이 있었다. 이러한 자기 이미지는 40년의 냉전 동안에 소리 없이 역전되었다. ‘예방 전쟁’이라는 새로운 독트린과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 공식적으로 승인되었을 뿐이었다. 과거에는 군국주의적 괴물,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서는 미국의 적, 그리고 1945년 이후에는 미국의 가장 충성스러운 동맹국인 독일이 이라크 침공에 참가하기를 거부한 것은 역할의 교환을 강력하게 시사한 것이다. 좀바르트의 상인-전사 이분법의 미국식 버전도 바로 그러했다.
--- p.235
 

줄거리

칼 폴라니는 파시즘과 뉴딜과 사회주의를 연구하면서 시장 경계와 사회에 대해 분석했다. 그러나 폴라니에게 파시즘, 사회주의, 뉴딜은 모두 시장과 시장 경제에 대한 안티테제의 의미를 갖고 있지만, 이들 상호 간의 관계는 본격적으로 조명되지 않았다. 이러한 역할을 자청하고 있는 것이 쉬벨부시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1930년대에 파탄의 직면에 처한 국가를 구할 유일한 권위로서 작동한 뉴딜, 파시즘, 나치즘은 전체주의로 나아갔다. 이들 각각은 어떠했고 이들의 관계는 어떠했나? 쉬벨부시는 여기에 주목한다. 세계사 상식에서는 미국의 뉴딜은 ‘좋은’ 것이며 그 반대편 극단에 전체주의 국가들의 ‘극악함’이 자리해 있는데, 쉬벨부시는 이들을 비교하고 수렴시키기 위해서 아예 이들을 섞어 버린다. 그리고 이들을 비교하기 위해 먼저 이들이 1930년대에 공유했던 공통적인 기반에 주목한다. 그것은 일단 건축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다.

신고전주의 건축과 뉴딜들 - 서론
쉬벨부시는 당시의 건축학의 사조를 뉴딜들에 관한 설명으로 연결시킨다. 쉬벨부시는 ‘신고전주의’를 눈여겨 주시한다. 신고전주의는 ‘국가가 권력과 권위를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보여 주는 건축 양식’을 주도하기 때문이다. 신고전주의는 대공황 시기에 총체적인 국가 개입으로 절정에 달했다고 평가한다. 국가 개입, 그것은 파시즘, 나치즘, 스탈린주의, 그리고 뉴딜을 하나로 수렴시키는 당대의 조건이자 요인이었다. 이 시기에 유행하고 확산된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은 이데올로기와 체제가 아무리 달랐다 해도 경쟁적으로 치솟아 올랐다.
자본주의의 위기 시기였던 대공황 시기에 대중들은 모더니즘의 가장 심각한 적들, 즉 국가사회주의(나치즘)와 파시즘에 현혹되었다. 왜냐하면 국가사회주의와 파시즘은 대중들에게 그들이 원하고 필요로 했던 것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기념비성이었다. 기념비적 건축을 전체주의적 정권들과 잘못 동일시하는 것은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대립을 반영했다. 근대 건축이라고 하면 자유민주주의나 사회 복지 국가를 연상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대립 구조의 가정들에 대해서는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념비적 건축은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제도들의 힘을, 독재 체제에서는 국가의 공격적인 권력을 똑같이 잘 보여 준다”는 프랑코 보르시의 주장이 그랬던 것처럼, 학자들은 신고전주의적인 모뉴멘털리즘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점차 깨닫게 되었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체제의 개혁적 국가들뿐 아니라, 볼셰비즘과 파시즘의 국가들 모두가 건축을 필요로 했다. 그것은 보다 깊은 의미와 공동체에 대한 신뢰, 존경, 그리고 의사 종교적 감정을 자극하는 하나의 사원처럼 국민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국민 위에 우뚝 서게 될 건축이었다.

친족 관계 - 1장
국가사회주의자들은 루스벨트가 취임 후 첫 100일 동안에 단행했던 긴급 구제 조치들을 자신들의 혁명적 프로그램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으로서 환영했다. 유럽의 논평가들도 루스벨트를 무솔리니와 같은 국민 투표제로 뽑힌 독재자로서 묘사했다. 베르나르 페는 “대중들의 애정과 열광적 지지를 받는 진실한 독재자”라고 불렀고, 한 저자는 “미국에서도 역시 자본주의는 코포라티즘적인 국면에 진입했다”라고 썼다. 일거에 파시즘은 갑작스레 그 영향력이 국경들을 초월하는 하나의 전 지구적 세력처럼 보였다.
그래서 당시 루스벨트의 정적들은 루스벨트의 제반 정책들에 대해 “러시아 방향으로 너무 멀리” 나아간 것으로 묘사했으며, 심지어는 민주당 의원조차 루스벨트를 “이 나라의 구석구석에다 히틀러주의를 이식하려” 했다고 비난했다. 허버트 후버는 “뉴딜의 경로를 계속해서 따라가면 우리 정부는 일종의 파시스트 정부가 될 수 있다”라고 하며 루스벨트의 정책들에 대한 공개적인 저항을 부르짖었다.
뉴딜 행정부는 파시즘/나치즘과의 유사성을 숨기지 않았다. 루스벨트 스스로 언젠가 기자들 앞에서 무솔리니와 스탈린을 자신과 “피를 나눈 형제들”이라고 말했고, 루스벨트의 고문단의 렉스퍼드 터그웰은 파시즘을 향해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보아 왔던 것 중에서 가장 깨끗하고, 가장 깔끔하며,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사회적 기계의 부속품이다. 그것은 나에게 부러움을 자아냈다”고 말했으며, 루스벨트의 내무장관 해럴드 이커스는 “이 나라에서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러시아에서 해 왔던 것의 일부이며, 심지어 어떤 것들은 히틀러 치하 독일에서 행해진 것들이었다”고 선언했다.
이질적인 것으로 생각되어 왔던 이 체제들을 마치 친족 관계처럼 연결시키는 기제들은 다양하다. 군사 구조들과 군사적 메타포들이 그러했으며,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도 그러했다. 뉴딜의 이념적 고향이라 할 ‘혁신주의’를 신봉하던 미국 관료들의 외침은 ‘자유방임주의는 죽었다. 사회 통제 만세’였다.

리더십 - 2장
오늘날 아돌프 히틀러와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는 거울상체로 비춰진다. 이보다 더 극적인 인물 대비 연구를 상상하기 어렵다. 히틀러는 사악한 독재자나 전체주의의 화신으로 기억된다. 반면에 루스벨트는 귀족적인 신사이자 자유민주주의적 휴머니즘의 구현자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1930년대 당대인들은 상이한 입장을 취했다. 그들에게 히틀러와 루스벨트는 모두 대중을 자신의 영향력으로 사로잡았던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리더십이 없었다면 국가사회주의나 뉴딜은 모두 불가능했을 것이다.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은 통상적인 대의제가 더 이상 결과들을 산출하지 못하거나 혹은 공공의 열광을 불어넣지 못하는 그러한 위기 상황에서 등장한다. 사회학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그러한 현상은 위기 상황에서 불신당해 온 의회와 정당 같은 매개 기구들을 우회하는, 대중과 지도자 간의 직접적인 국민 투표식 결합으로 설명될 수 있다. 심리학적으로 말한다면, 구체제에 대한 공동의 반란에서 대중과 카리스마적 개인이 상호 수렴한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당대인들은 히틀러와 루스벨트가 인민의 영혼을 감동시키는 탁월한 능력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들의 연설은 인간적이었으며 친밀감을 주었다. 그들은 각자의 고유한 방식으로 청중들에게, 군중이 아니라 마치 청취자 개개인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루스벨트가 좋아했던 의사소통 수단인 라디오는 지도자에게 가장 친밀한 사회 단위인 가족에 대한 접근을 가능케 했으며, 자신의 메시지를 그 가족 구성원들 각각에게 친히 전달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나치의 주요 집회 무대에서 펼쳐진 인민과 지도자 간의 일체감은 루스벨트가 노변정담들을 통해서 맺어 나갔던 친밀한 연계와는 달랐지만, 양자 모두는 집단적인 경험이었고 최종 결과는 매우 동일했다. “가장 대규모의 행사들에서조차, 개별적인 청중들 모두는 하나같이 총통이 자신에게 직접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한 것이야말로 개인들 하나하나가 이 사람에게 쏟는 거대한 애정과 충성의 원천이다.”

선전 - 3장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루스벨트 행정부와 히틀러 정권이 수행했던 홍보 작업은 이전의 그 어떤 정부와도 달랐다. 당시 미국출판인협회의 대표였던 엘리샤 핸슨은 “신문사와 통신사에 고용되어 뉴스를 작성하는 기자들보다 정부를 위해서 뉴스를 쓰는 신문 기자의 수가 더 많다”고 빈정댔다. 물론 미국의 언론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고 정부의 직접적인 지령을 받지 않았지만, 방송 허가권 등을 통해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언론을 통제했다. 미국이 특이했던 것은, 라디오 방송국들은 말해야 할 것에 대해 지시를 받을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대개 그들은 해야 할 말을 이미 말하고 있었다.
어떤 것을 완전히 전유해 내는 능력 면에서 나치당만이 그러한 능력을 독특하게 갖고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이 시기의 “상징 전쟁”에서 보듯 선전에서 상징의 중요성은 분명했다. 선전은 이미 상승하고 있는 어떤 운동에서 가장 잘 작동하며, 선전의 효과가 가장 잘 나타나는 순간은 위기와 혁명의 시기에 온다. 그때는 국민의 의지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을 때인데, 그때야말로 선전 슬로건은 지금까지는 불명료했던 인민의 의지를 명확히 표출하게 된다.
뉴딜은 상징과 강압을 거대한 선전 캠페인 속에 통합해 냈다. 대표적인 것이 블루 이글 캠페인이었다. ‘블루 이글’은 1933년 7월에 대공황에 직면해 끝없이 추락하는 미국 경제를 통제하기 위해 착수한 정책이었다. 루스벨트는 그 캠페인을 “실업에 대항하는 여름 대공세”라고 묘사했으며, 친구와 적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블루 이글 배지는 옷에 달도록 하였고 블루 이글 포스터는 가게나 공장에 걸도록 했다. 블루 이글 상징물이 없을 경우 대공황과 싸우는 국민의 군대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고, 심지어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의 적’이라고 공표되었다. 블루 이글을 비방하는 사람들은 ‘얻어맞아도 싸다’는 정치인의 공개적인 발언도 회자되었다. 《데일리 헤럴드》의 한 특파원은 “독일의 스와스티카(나치 갈고리 십자가)보다 블루 이글이 더 많았다”고 했다.
히틀러 정권과 루스벨트 행정부가 행한 선언들은 한도 끝도 없었지만 그런 선언들의 실제 내용은 별로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았다.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던 것은 어떤 특별한 사업과 그것의 성공 기회들이 아니라, 그러한 사업들에서 나타났던 감정적 호소였다. 국가사회주의와 뉴딜은 1930년대에 정치적 성공을 위해 가장 필수적이었던 재능을 갖고 있었다. 즉 혁신적으로, 대담하게, 그리고 파렴치하게 상징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었다.

지역주의와 ‘땅으로 돌아가자’ 운동 - 4장
대공황의 파국은 국가의 재발견과 구현에 자리를 내주었다. 국가는 좌절의 시대에 유일하게 실재하고 믿을 수 있는 가치의 원천이자 최후의 피난처로 간주되었다. 자유주의 경제의 토대 붕괴는 새로운 “지반”을 찾기 위한 탐색을 촉발시켰다. 이탈리아와 독일 그리고 대공황에 영향을 받은 다른 모든 나라들에서 그러한 탐색은 땅에 대한 신화를 창출했다.
유사한 과정이 정치 심리학에서도 발생했다. 국민들은 보호와 지침을 얻기 위해 더 이상 자유민주주의에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대신 국민들은 새로운 유형의 권위주의 국가에 신뢰를 두었다. 이런 국가는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일 두체와 총통으로 제도적으로 인격화되었고, 미국에서는 루스벨트로 상징적으로 인격화되었다. 지도자의 경제적 임무는 국가를 세계 경제로부터 해방시켜서 국내의 토착적인 토양에다 이식시키는 것이었다.
아우타키, 즉 국가의 경제적 자급자족은 1930년대의 표어가 되었지만, 이것은 단순한 경제적 개념 이상의 것을 의미했다. 1930년대에 재발견된 국가는 전 인민의 국가였다. 계급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저 평범한 시민만이 존재했는데, 이들은 계급적 분열을 넘어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되었다. 이러한 운동의 일부를 차지했던 것이 바로 “지역”의 부활이었다. 왜냐하면 대지와 향토만이 자신을 안심시키는, 소박하고도 안정적인 그 무언가를 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루스벨트 역시 땅은 자본주의에 의해 황폐화된 세계를 기적적으로 재생시키는 일종의 마술 재료와 같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헨리 포드는 산업과 농업 간의 균형의 필요성을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포드는 “농업에서의 한 걸음과 산업에서의 한 걸음으로, 미국은 안전하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목표는 많은 사람들이 19세기에 파괴되어 버렸다고 믿었던 자연과 경제, 기술과 문화 사이의 균형과 조화를 복원하는 것이었다. 제시된 해결책들은 거대하게 통합된 산업적?농업적 사업들에 의해 비대해져 버리고 파산된 경제를 좀 더 적정한 규모의, 균형 잡힌, 그리고 무엇보다도 위기 방지적인 체계로 어떻게 재조직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것은 이전 시대의 “유기적” 혼합 생산으로 복귀하는 것, 즉 “재농업화”를 의미했으며, 혹은 거대 규모의 산업을 농업 생산 속에 배태시키거나 아니면 농업 생산과 결합되도록 소규모 단위들로 분화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파시즘, 국가사회주의, 뉴딜 모두는 각종 선전을 통해 대중들을 열광시키면서 전원-정착지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이들 정착지 운동은 정책의 상징이 되었기도 했지만, 민주주의 체제이든 혹은 독재 체제이든 간에 공영 주택은 위신을 위한 사업들과 경쟁할 수 있는 웅장함이 매우 부족하다. 이는 1936년 이후부터 선전이 왜 다른 종류의 건설 사업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는가에 대한 이유이다. 그들은 수년 전에 소련에서 수행되었던 거대한 공공사업들로 시선을 돌렸다.

공공사업 - 5장
모든 정치 체제는 전시 사업을 추진한다. 전시 사업을 통해서 정권은 세계에 자신을 표출하고 자신들의 정치의 목적, 방법, 이상이 판단되기를 기대한다. 파시즘, 뉴딜, 국가사회주의의 경우 전시 사업들은 각각 늪 지역의 개간, 잊혀진 강 계곡에 댐과 발전소의 건설, 그리고 전국적 고속도로망 건설 등이었다. 이들 사업이 위의 세 정부에게 왜 그다지도 중요했는지를 이해하려면 우선 그들 모두가 무조건적으로 모방하고 경쟁하려고 했던 한 정권, 즉 소련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스탈린의 제1차 5개년 계획은 “공산주의의 꿈의 공장”이라 불렸던 선전 기구에 의해서 시작되고 수행되었다. 선전의 주제는 노동뿐 아니라 프로젝트 그 자체이기도 했다. 시멘트와 강철, 굴착기와 트랙터, 굴뚝과 댐, 송전선과 터빈과 같은 원료와 자재들이 그토록 서사적이고 신화적인 웅장함으로 취급되었던 적은 이전에는 결코 없었다. 1927년에 서구는 자신의 번영을 즐기는 데 너무나 몰입해 있어서 스탈린의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당대인들은 스탈린의 5개년 계획을 통계적 왜곡과 허황된 기술적 낭만주의로 구성된, 머나먼 나라의 이국적인 사건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서구 세계가 광란의 20년대로부터 갑작스럽게 대공황으로 돌입하자 그러한 태도는 일변했다. 신생국 소련의 분주한 움직임과는 대조적으로 산업화 국가들에서의 실업자 행렬과 폐쇄된 공장들을 보여 주는 화보 잡지만큼 두 체제 간의 대조를 확실하게 보여 주는 것은 없었다. 소련의 움직임은 광범위한 공적 관심의 주제가 되었고 모방의 주제가 되었다.
스탈린이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을 정복하려는 거대한 행위, 즉 드네프르 강에 댐을 축조하려는 소비에트 계획을 밝힌 지 3년 뒤인 1930년에, 무솔리니는 자신의 정권을 위해 그와 유사한 위신 사업들 즉 아그로 폰티네 개간에 착수하였다. 1933년 5월 루스벨트는 테네시 강 유역 개발 공사 법안에 서명했다. 독일은 아우토반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경제적 필연성 - 에필로그
전 지구적 활동 무대에서 파시즘적/국가사회주의적 노선에 따른 전체주의적 복지 국가와 루스벨트의 자유주의적 변이 중 어떤 국가주의 시스템이 승리를 거둘 것인지를 결정한 것은 바로 제2차 세계 대전이었다. 전쟁의 결과가 보여 주듯이, 파시즘과 국가사회주의를 통해서 근대화하려는 구유럽의 시도는 실패했다. 승리한 것은 미국이었지만, 미국은 패배한 적들의 문화의 주요한 부분을 자기 것으로 흡수함으로써만 안정성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항상 미국에게 군사적 위협이었던 유럽 대륙은 일종의 평화주의의 오아시스로 전환되었다. 다른 한편 미국의 고유한 역할은 안전을 책임지면서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미국은 상인商人에서 전사戰士로 거듭났다. 평화로운 상인들의 공화국이라는 미국의 자기 이미지는 40년의 냉전 동안에 소리 없이 역전되었다. 따라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1년 전인 1944년에 미국의 고립주의자인 존 플린이 루스벨트 체제를 비판하며 말한 것은 오늘날 더욱더 적절하게 들린다. “우리에게는 적들이 존재해야만 한다. 그 적들은 우리에게 하나의 경제적 필연성이 될 것이다.”
 

출판사 리뷰

뉴딜은 파시즘 · 나치즘과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루스벨트의 뉴딜은 과연 경제 위기에 대응한 미국의 강력한 실천이었나? 미국은 나치즘과 파시즘에 맞선 민주주의의 이상이었나? 그러나 충격적이게도 1930년대 뉴딜의 미국과 파시즘의 이탈리아와 나치즘의 독일, 이 세 나라의 정권들은 전혀 대조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뉴딜, 파시즘, 나치즘 사이에 숨어 있는 공통성을 찾아내는 쉬벨부시는 전체주의 체제의 인기에 대해 독창적이면서도 논쟁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루스벨트, 히틀러, 무솔리니의 정치권력은 파탄난 국가를 구할 유일한 권위체로서 개입했다. 이 시기에 출현한 새로운 유형의 국가는 선전과 언론에 의해 받쳐졌고, 카리스마적 인물에 의해 지도되고, 안정과 힘을 추구한 사업을 설계하고 추진하면서 확고해졌다. 거대한 공공사업 프로그램들은 인민에게 일자리를 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정부의 권위를 확신시켰다.
이 과정을 추적하는 쉬벨부시는 깜짝 놀랄 만한 공통성을 폭로한다. 미국의 TVA 댐과 독일의 아우토반과 이탈리아의 폰티네 습지 개간 사이의 상징적 중요성, 루스벨트의 라디오 노변정담과 히틀러의 대중 집회가 가진 매력적인 설득력, 기념비적 건축물의 대유행, 집회와 퍼레이드와 캠페인, 국가에 열광적으로 협력한 충성스런 추종자와 지지자로서의 시민들, 어디에나 있는 깃발 · 현수막 · 배지, 행정부로의 권력 집중 ……. 그토록 짧은 시간 안에 놀라운 성취를 보인 세 국가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미국과 유럽 간의 상호 수렴이자 일종의 벤치마킹이었다.

루스벨트, 무솔리니, 히틀러. 이들의 뉴딜은 1930년대에 어떻게 국민의 희망이 되었나?
21세기 새로운 위기 앞에 다시 등장하는 오늘날의 뉴딜은 당시의 뉴딜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대공황에 맞선 각 정부의 통제 경제는 어떻게 국민의 희망이 되었고 전체주의적 국가 경영의 흐름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분석하는 세계적 문화사가의 새로운 통찰은 뉴딜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깊게 한다. 그리고 전제 군주적 전체주의 정부들을 그토록 인기 있게 만들었던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원인들을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뉴딜 정책에 관한 본격적인 비교 · 분석
대공황이라는 절망적 상황에서 나타난 세 가지 뉴딜. 그것은 이탈리아의 파시즘 · 독일의 나치즘 · 미국의 뉴딜이었다. 세 가지 뉴딜은 ‘위기 속에서’ 그 ‘위기를 이용해’ 정권을 잡았고 ‘위기에 맞선’ 거대한 기념비적 사업들을 단행했다. 이는 왜 뉴딜과 파시즘과 나치즘이 동시대에 등장했고 어떻게 똑같이 대중의 열광적 지지를 받을 수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저자 쉬벨부시는 이들 정권들의 정책들, 그리고 사회와 정부에 대한 대공황 시대의 대중의 태도와 사고방식을 세세하게 연구해 재구축함으로써 파시즘 · 나치즘 · 뉴딜에 대해 더욱 깊이 있는 이해로 이끈다. 이를 통해 독자는 미국의 뉴딜이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와 히틀러의 독일, 나아가 스탈린의 소련과도 닮았던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이때에 새로운 유형의 국가가 출현했다. 이 국가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로 인격화되었고 강력한 국가 개입과 사회적 통제로 자유주의를 대체했다. 한편으로는 선전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힘과 안정을 보여 주는 공공사업들을 통해 강력한 정부의 힘을 선보였다. 비로소 인민은 ‘국민’이 되었고, 국가는 ‘조국’이 되었다.
이 새로운 국가 개조 사업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나? 저자는 카리스마적 리더십, 선전과 언론 통제, 이데올로기, 지역주의, 대규모 공공사업들로 나눠서 살펴본다. 그렇지만 저자는 뉴딜과 파시즘과 나치즘이 공유했던 공통 요소들을 드러내 보이면서도, 루스벨트 · 히틀러 · 무솔리니로 인격화된 정치 체제들을 동등하게 다루지도 민감한 차이들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대신 그들 사이의 유사성을 추적하고 분석하면서 뉴딜과 전체주의적 독재가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들을 드러낸다.

전체주의적 정권들이 그토록 인기 있었던 이유는
오늘날 전체주의와 동일시되는 특징들, 즉 순응을 위한 정치적 압력, 억압, 반대자에 대한 국가 테러, 비밀경찰 기구 같은 것들 때문이 아니었다. 대중이 이끌렸던 것은 자신들이 무시받지 않고 동등한 존재로서 취급받는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대중은 자신들이 더 이상 혼자 힘으로 살아가지 않아도 되며 국가라는 새로운 계급 없는 공동체가 제공하는 보호와 안전과 연대를 향유할 수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전체주의는 평등주의적 공동체로서 국가를 바라보는 환상으로부터 이득을 보았다. 지도자와 기념비적인 공공사업 모두에 구현된 새로운 국가 비전, 동시에 이들 모두를 통합할 수 있었던 능력 덕분에 가능했다.
그렇다면 뉴딜은 파시즘과 나치즘에 대한 미국식 민주주의의 대응이었는가? 암묵적 항복이었는가? 뉴딜은 전체주의적 정권들을 그토록 인기 있게 만들었던 요소들을 흡수함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유효성은 어느 정도였을까? 쉬벨부시의 시선은 그 답으로 향한다.

경제 위기의 해법으로 차용되고 인용되는 ‘뉴딜’에 관한 고찰
절망의 시대에 해법처럼 등장했던 그 세 가지 뉴딜들을 쉬벨부시는 정치 · 경제 · 사회학적 관점에서 다시 비교 · 고찰한다.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사회에 총체적인 전체주의의 등장은 대중의 열광적 지지를 기반으로 탄생했다. 이런 의미에서 1930년대는 오늘날의 사회 체제를 만들어낸 기원이자 역사적 원류라 할 만하다. 사회의 전체주의적 기획, 이 속에서 국가주의 탄생 배경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대공황의 위기에서 국민의 희망이 되었던 경제는 무엇이었고 전체주의적 흐름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분석한 세계적 문화사가의 통찰을 빌어, 오늘날 그대로 답습되고 있는 뉴딜을 해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