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한국역사의 이해 (독서)/1.한국고대사

고대로 부터의 통신

동방박사님 2022. 11. 24.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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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국보 147호로 지정된 '울주 천전리각석'. 옛 신라 시대 경주에서 낙동강 유역으로 나가는 주요 교통로 부근에 위치한, 각종 기하학적 문양과 그림 그리고 명문이 새겨져 있다. 문자가 없던 시절부터 문자시대 이후까지, 수백 년 혹은 천수백 년에 걸쳐진 온갖 낙서가 써있는 바위다. 특히 그 바위에는 신라 왕족간 일었던 로맨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기도 하다. 벗으로 사귀는 오라비와 누이가 525년 어느 날 경주에서 가까운 천전리계곡으로 데이트를 떠났고, 갖가지 문양이 새겨진 바위에 자신들의 사랑의 이야기를 새겨놓았던 것이다.

이처럼 ‘금석문’은 고대인의 목소리를 날 것 그대로 들을 수 있는 녹음기다. 그것은 기존 역사책에서 찾아볼 수 없던 민초들이 가졌던 생각이나 행동들을 알려주기도 하며, 심지어 잘못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을 바로잡아 주기도 한다. 실제 무령왕릉의 주인을 무령왕이라고 알려준 것은 발굴 때 찾은 ‘매지석’ 덕택이었다.

청동기부터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고대사의 숨은 면면들을 금석문을 통해 밝히고 있는, 상당히 흥미로운 고대로의 안내서다.

 

목차

1. 신라 왕족의 로맨스, 그 현장을 찾아서(강종훈)
*‘천전리각석’ 원명<525년>
*‘천전리각석’ 추명<539년>
왕실의 근친혼이 성행하던 525년 어느 날, ‘벗으로 사귀는 오라비와 누이’의 관계였던 사부지 갈문왕과 미지의 여성 어사추여랑이 경주에서 가까운 천전리계곡으로 ‘데이트’를 나와, 바위에 자신들의 사랑을 남겼다.

2. 고구려 건국설화가 모두루무덤에 묻힌 까닭은(여호규)
*모두루무덤 묘지<5세기 중반>
고구려의 옛 도읍이었던 집안분지에 남아 있는, 주인 있는 무덤 하나. 이 무덤에는 ‘염모묘’와 ‘모두루묘’라는 두 개의 팻말이 서 있다. 하나의 무덤에 두 개의 팻말. 무덤 주인공 염모와 모두루를 두고 한,중,일 삼국 학자들이 벌인 오랜 논쟁.

3. 고대 한일 관계사의 민감한 화두, 칠지도(김태식)
*칠지도<426~526년경>
고대 한일 관계사에서 백제와 왜국 사이에 맺고 있던 특별한 관계를 보여주는 ‘칠지도’.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의 증거 자료로 쓰고 있는 칠지도는 그 발견 스토리부터 신비롭고, 은밀한 범죄의 기운마저 풍긴다.

4. 무늬와 그림에 담긴 청동기인들의 메시지(송호정)
*청동기시대 문양과 암각화<청동기>
문자가 기록되기 전인 청동기시대와 그 이전 시대의 모습을 추론하는 방법은, 당시 사람들이 남긴 무늬와 그림 속에 담긴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뿐이다. 토기와 청동기, 암석에 새겨진 청동기인들의 삶과 일상생활.

5. 역사의 블랙홀, 동수묘지(전호태)
*안악3호분 묵서명<357년>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의 주도권이 일본에서 중국과 북한으로 넘어온 뒤 발견된 황해도 안악군의 ‘안악3호분’. 그런데 이 무덤에 있는 68자의 묵서명이 지금까지 끝나지 않은 지루한 논쟁의 불씨가 되고 있다. 안악3호분의 주인공은 묵서명에 기록된 망명객 동수일까.

6. 고구려는 정말 유주를 지배했는가-유주자사 진묘지(전호태)
*덕흥리 벽화고분 묵서명<408년>
1976년 관개수로 공사 중 발견한 남포시 소재 ‘덕흥리 벽화분’은 풍부한 벽화 내용과 설명문, 묘지(墓誌)까지 남아 있는 고구려사 연구의 ‘정보 창고’이다. 벽화분의 주인공 유주자사 진은 광개토왕대의 인물이지만, 그의 정체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이 부분이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7. 지석에 새겨진 무령왕 부부의 삶과 죽음(이한상)
*‘무령왕 지석’<525년>
*‘무령왕비 지석’<526년>
‘세기의 발견’으로 기록된 1971년의 무령왕릉 발굴. 왕릉 출토품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무덤의 주인공이 무령왕과 그 왕비임을 알려주는 4면의 지석이다. 이 지석을 구성하는 간지도와 매지권에 얽힌, 아직도 풀지 못한 비밀들.

8. 신라사의 새로운 열쇠, 냉수리비와 봉평비(전덕재)
*냉수리비<503년>
*봉평비<521년>
논둑에 버려진 성가신 바윗덩어리에서 국보로 탈바꿈한 ‘울진 봉평 신라비’와 ‘영일 냉수리 신라비’. 한 편의 드라마를 연상시키는 발견 스토리만큼이나 이 비석들에는 고대사 연구의 신기원을 여는 극적인 내용들이 담겨 있다.

9. 조우관을 쓴 사절 그림 이야기(권덕영)
*〈양직공도〉 중 ‘백제 사신도’<6세기>
*이현 묘의 〈예빈도〉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 중 고구려 사신 부분
고대 한국인을 상징하는, 새 깃털 모자 ‘조우관’. 중국 남경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화첩에는 백제 무령왕이 파견한 백제 사신의 모습이 담겨 있다. 당나라 장회태자 이현 묘의 벽화 속에도 고대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보인다. 이들이 왜 중국 화첩과 벽화 속에 등장하는 것일까? 그렇게 추정하는 근거는?

10. 중원고구려비, 선돌에서 한반도 유일의 고구려비로(최장열)
*중원고구려비<495년>
충북 중원의 한 마을 석축 화단에 서 있던 이름 없는 비석이 1,500년 전의 고구려시대 비일줄이야. 비문과 시작과 끝을 알 수 없고, 비를 세운 연대 또한 불분명한 ‘중원고구려비’에 얽힌 갖가지 의문들.

11. 순수비에 담긴 진흥왕의 꿈과 야망(강봉룡)
*‘창녕비’<561년>
*‘황초령비’<568년>
*‘북한산비’<568년 이후>
변경 지역을 직접 돌아보고, 그 내용을 비석에 새긴 신라 진흥왕. 마운령, 황초령, 북한산, 창녕 등 전국 각지에 서 있는 순수비는 진흥왕의 활동사를 생생히 전해주고, 당시 역사를 해명하는 확실한 척도이다.

12. 백제 노귀족의 불심, 사택지적비(문동석)
*사택지적비<654년>
백제 의자왕 때 정계에서 은퇴한 사택지적이란 노귀족이 세운 ‘사택지적비’. 그 내용은 늙어가는 것을 탄식하고 불교에 귀의한다는 것이지만, 비문 속에는 백제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정보들이 담겨 있다.

13. 기와 조각에서 찾아낸 백제 문화, 인각와(이병호)
*인각와<7세기 전반>
최근 목간과 토기, 기와 등이 역사 해석의 지평을 넓히는 자료로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특히 명문 기와는 유적의 성격이나 명칭, 편년 등을 밝히는 중요한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백제 사비 시기의 명문 기와인 인각와를 통해 백제인의 개방성과 국제성을 짐작해볼 수 있다.

14. 목간에 기록된 신라 창고(김창석)
*경주 황남동 376유적 출토 목간<8세기 전후>
경주 황남동 376유적에서 출토된 목간들. 나무 조각에 문자를 기록한 목간은 고대인의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전해주는 일급 사료이다. 특히 376유적 출토 목간은 통일신라기의 창고체계와 재정 운영을 보여주는 자료로 주목할 만하다.

15. 백제 유민의 숨결, 계유명아미타삼존불비상(조경철)
*계유명아미타삼존불비상<673년>
1960년 한 대학생이 자기 고향인 충청도 연기에 있는 비암사에 명문이 새겨진 돌이 있다는 보고서를 숙제로 제출했다. 이것이 바로 계유명아미타삼존불비상이다. 이 불비상에는 나라가 망하고 20여 전이 지난 뒤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백제 유민의 숨결이 담겨 있다.

16. 정혜?정효공주 묘지, 발해사를 이야기하다(김종복)
*‘정혜공주 묘비’<780년>
*‘정효공주 묘비’<792년>
발해는 중국의 주장대로 당나라의 지방 봉권정권이었을까. 아니면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일까. 발해인이 직접 남긴 기록이 전무한 상황에서, 발해인이 새긴 정혜?정효공주의 묘지명은 발해 문왕대의 체제와 정치적 갈등을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17. 압수한 벽돌판과 사라져버린 토지문서(하일식)
*‘해인사 묘길상탑기’<895년>
1966년 문화재 밀반출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 일단의 도굴범들이 검거됐다. 이들이 훔쳐 처분하지 못한 유물들 속에 들어 있던 벽돌판이 바로 최치원이 찬한 ‘해인사 묘길상탑기’다. 이 벽돌판 기록은 신라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혼란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18. 100년 동안의 논쟁, 광개토왕릉비(임기환)
*광개토왕릉비<414년>
지금은 중국 땅이 된 고구려의 고도 국내성 지역에 우뚝 서 있는 ‘광개토왕릉비’. 그러나 비석 주변에 있는 태왕릉과 장군총 중 어느 것이 광개토왕릉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고구려 멸망과 함께 잊혀진 광개토왕릉비에 얽힌 논란과, 일제가 자행했다는 비문 변조의 전말.

 

저자 소개

 
강종훈-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신라 삼성족단과 상고기의 정치체제>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여호규-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나와 동대학원에서 <1~4세기 고구려 정치체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강사와 국방군사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김태식-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책 속으로

지석에 새겨진 무령왕 부부의 삶과 죽음

"돈 1만 문, 오른쪽 1건. 을사년 8월 12일에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전건의 돈으로 토왕, 토백, 토부모 상하의 여러 2,000석 관리에 아뢰어 (왕궁의) 서남쪽 땅을 사서 무덤을 썼으므로 문권을 만들어 밝히니 율령에 따르지 않는다."

돈 1만 문(혹은 매)는 토지의 매매 대금인데, 지석 제 4면 위에 놓여 있던 철제 오수전이 바로 그 현물로 추정된다. 이 철제 오수전은 약 98점 가량 출토되었는데, 양무제 때 제작되어 백제로 들여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수전 가장자리가 전혀 다듬어지지 않고 주물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점으로 보아 백제에서 제작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512년 8월 12일은 왕의 장례일이다. 이 날짜로 계약을 체결하였는데 매수인은 돌아가신 사마왕이고, 토왕, 토백, 토부모는 토지신이며, 상하 2,000석의 관리는 천상천하의 여러 관인을 의미한다.
서남쪽 땅인 '신지申地'란 바로 왕궁에서 본 방향을 가리킨다. 이 방위가 얼마나 정확한지는 알 수 없으나 지석에 신지와 유지를 비롯하여 방위표를 나타내는 간지도가 표기되어 있는 점을 주목한다면 당시 방위에 대한 개념은 상당히 정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당시 왕궁은 송산리 무령왕릉의 동북쪽인 '인지寅地'에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왕릉 동북쪽에는 금강이 있으며, 강을 따라 성이 있으니 바로 공산성 자리다. 웅진 시기 백제 왕궁의 위치를 놓고 논란이 있었지만 왕릉 지석의 방위로 본다면 공산성이 분명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공산성 내에 왕궁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 바깥에 있었는지, 안에 있었다면 쌍수정 앞의 광장인지 아니면 현재의 취락지 부근인지를 놓고 논란이 많다.

맨 끝에 나오는 '부종율령不從律令' 네 글자는 아직도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부분이다. 여기서 율령을 지하 세계의 율령으로 보는 견해와 현세의 율령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전자의 경우 이 율령은 천제의 율령으로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율령도 이 묘에 관한 한 미치지 못한다는 뜻으로 오직 매지권의 내용에 따른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후자의 경우 초인간적인 계약이므로 속세의 인간을 상대로 한 현행 율령에는 따르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pp. 156∼157
 

출판사 리뷰

화려한 유물 명세서, 그리고 아쉬움
최근 공주 수촌리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금동관(모) 두 개, 금동신발 세 켤레, 환두대도 석 점, 중국제 도자기 다섯 점, 등자 두 점, 허리띠 두 점, 각종 토기 수십 점…….
분명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화려한 출토 유물인데, 현재 이 유적과 유물의 연대를 두고 5세기 전반인지 5세기 중후반인지 고고학계와 역사학계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무덤의 주인공이 토착세력인지,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인지를 놓고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논란이 거듭될 때마다, 기년이나 주인공의 정체를 밝혀줄 명문 자료가 함께 나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의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설사 이 유적에서 더 화려한 금관이나 그 무엇이 나온다고 해도, 무덤 주인공이나 연대를 밝혀줄 금석문이 나오지 않는 한, 무령왕 지석이 나온 무령왕릉의 가치를 뛰어넘을 수 없다.


금석문으로 고대사를 읽는다는 것
유물과 역사 기록에 생명을 불어넣는 존재. 금석문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특히 자료가 부족한 고대사 분야에서 금석문의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이 책은 고대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담긴 자료인 금석문을 가지고, 우리 고대사의 비밀에 한 걸음 한 걸음 접근하는 책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삼국사기》《삼국유사》만 가지고 고대사를 이야기해온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문헌사료는 당대의 기록이 아닌, 후대인들이 쓴 ‘과거형’ 후술(後述)이기 때문에 그 사실성이나 진정성 면에서 일정한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금석문은 당대의 사실을 말해주는 생생한 자료로서, 요새 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타임캡술 역할을 한다. 그것도 고대인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려주는 ‘생방송 녹음기’인 것이다.


역사 왜곡을 바로잡는 금석문의 중요성
요즘 중국이 고구려사를 자국사로 편입시키고 있는 문제로 떠들썩하다. 중국은 고구려를 중원왕조의 지방정권으로 만드는 근거로, 중원왕조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중국측 자료를 일방적으로 해석하여 쓰고 있다. 고구려인이 쓴 역사서가 한 조각도 없는 상태에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광개토왕릉비나 모두루 묘지(墓誌), 중원고구려비 같은 고구려 금석문은 당시 고구려인의 당당한 세계관을 보여주는 거의 유일한 사료이다.
이들 금석문에 의하면, 고구려인은 독자(獨自)의 천하관을 갖고 있었다. 모두루 묘지에 보이는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생각하면, 고구려가 중원왕조에 예속된 지방정권이라는 중국측 주장은 터무니없음을 금방 알 수 있다. 금석문은 이렇게 후대인들이 왜곡해놓은 사서를 바로잡는 자료가 된다.


역사 대중화의 책무 짊어진 ‘한국역사연구회’
금석문이 중요하다는 것은 연구자들 누구나 공감하는 바이고, 또 실제 연구 과정에서 널리 활용하고 있지만, 이를 일반 대중에게 내놓고 보여주는 책은 아직 없었다. 일반인들에겐 금석문이란 말조차 생소할 수 있다. 금석문의 역사적 가치를 널리 알릴 수 있는 책이 있어야 한다는 공감이 형성됐고, 이 책무는 그동안 일반 대중들에게 고대사를 쉽고 흥미롭게 전달하고자 노력해온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 분과에게 돌아갔다.
한국역사 연구회는 올바른 세계관에 입각한 과학적 역사관 수립을 모토로 1988년 설립된 진보적 한국사 연구자들의 모임으로, 특히 고대사 분과는 《문답으로 엮은 한국 고대사 산책》(1994)과 《삼국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1998)를 통해 역사 대중화의 모범을 보이고 있다. 앞의 두 책이 고대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 고대인의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면, 《고대로부터의 통신》은 고대사 연구의 속살이라 할 연구 과정을 최대한 드러내어 독자들이 고대사 연구에 직접 참여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금석문을 ‘읽는’ 방식 보여주는 책
금석문 연구의 핵심은 금석문 ‘읽기’다. 이 책이 편집상 가장 역점을 둔 부분도 독자들이 직접 금석문을 읽어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총 18꼭지의 관련 금석문들의 사진과 원문을 나란히 배치하고, 금석문에서 원문의 글자들을 찾아볼 수 있게 했다. 그리하여 독자들은 합리적 추론과 해석을 통해 역사상을 복원해가는 연구자들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진귀한 체험을 할 수 있다.
또한 관련 자료들을 최대한 제시하고, 특히 자료의 어떤 부분이 중요한지 확대 혹은 강조하여 책 내용이 시각적으로도 한눈에 들어오게 했다. 각 꼭지의 앞부분에 그 주제와 관련한 키워드를 하나씩 선정, 풀이해놓은 것도 독자들의 내용 이해를 최대한 돕기 위함이다.


최고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고대사 프로젝트’
이 책은 한국 고대사의 중요한 금석문들을 거의 망라하였다. 멀리는 청동기시대의 문양 자료에서부터 국제적 논쟁의 한가운데에 있는 광개토왕릉비, 한일 관계사의 영원한 화두 칠지도, 고신라사를 한 꺼풀 벗겨낸 냉수리비와 봉평비, 과거 역사를 이끈 주역의 발자취를 담은 무령왕 지석, 동수?유주자사 진 등의 묘지문들……. 심지어 부여에서 나온 기왓장에 새겨진 도장 자국까지, 우리 나라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여러 금석문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이를 위해 각 주제의 권위자, 전문 연구자들이 총동원된 것은 물론이다. 총 17명의 한국고대사 전공 소장 학자들이 대거 참여하여,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 분과의 10년 노하우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러한 결과물은 당분간 만나기 힘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