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조선시대사 이해 (독서)/5.조선역사문화

세종시대의 정치와 사상

동방박사님 2022. 12. 3.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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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책은 세종대의 정치와 사상을 다루고 있다. 세종대의 경이적인 업적을 특히 문명교류와 국가혁신의 관점에서 검토했다. 그것은 13-14세기 팍스 몽골리카 하의 ‘제1차 세계화’(the first globalization)에 의존하고 있다. 몽골제국이 유라시아 대륙을 통일한 결과 여러 문명들이 활발하게 교류하며 융합되었고, 수많은 고려인이 세계체험을 겪었다. 그 결과 국가혁신의 사상과 운동이 배태되어, 조선건국으로 귀결되었다. 세종은 그 자양분을 소화하여, 전면적인 국가혁신에 착수했다. 그 결과 국가의 표준이 완성되고, 조선의 전통이 확립되었다.

목차

서론

I. 세계사 속의 세종 시대

1.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하의 제1차 세계화와 문명표준의 확산
2. 13-14세기 한국인의 세계체험
1) 13세기 이전 한국인의 세계체험
2) 팍스 몽골리카 하 한국인의 세계체험
3. 성리학의 동전(東傳)과 국가변혁
1) 성리학의 전달자들
2) 성리학의 개혁구상

II. 세종 시대의 개막

1. 조선 건국기의 정치와 태종
1) 고려말-태조대 이방원의 정치적 활동
2) 태종대의 왕권 강화(1): 육조직계제의 시행
3) 태종대의 왕권 강화(2): 사병의 해체
4) 태종대의 왕권 강화(3): 종친, 공신, 외척의 제거
5) 태종대의 정치에 대한 평가
2. 세종 시대의 개막
1) 태종의 권력 이양-승계 정책
2) 충녕대군의 정치적 부상과 친세자파의 견제
3) 양녕대군의 폐세자와 충녕대군에의 전위
4) 폐세자 과정에 대한 의문: 태종과 양녕대군의 진정한 의도

III. 국제정치: 사대와 자주의 사이

1. 세종대의 대명관계와 사대정치
1) 한국사에서 대중국 사대정책의 의미
2) 세종시대 사대정책 개요
3) 세종대의 조선-명 관계: 지성 사대와 신뢰의 구축
4) 중국에 대한 분노: ‘구민보국(救民保國)’을 위한 인내
5) 조선의 정치 현실주의와 기만: ‘구민보국’을 위한 권도(權道)
6) 지성 사대의 효과(1): 조선에 대한 중국의 신뢰와 존경
7) 지성 사대의 효과(2): 영토분쟁의 평화적 조율
2. 세종대의 정복전쟁(1): 대일관계와 대마도정벌
1) 1389년 제1차 대마도정벌
2) 1396년 제2차 대마도정벌
3) 1419년 제3차 대마도정벌
3. 세종대의 정복전쟁(2): 북방영토의 확장
1) 세종대의 국방정책과 영토확장
2) 세종의 여진정벌과 4군 6진 개척

IV. 세종대의 위민정치: 정치적 휴머니즘

1. 세종대의 법률과 형사정책
1) 동아시아 전근대국가의 법과 정치: 법치는 존재했는가
2) 세종대의 법과 정치: 열악한 사법현실
3) 법에 대한 세종의 태도: 흠휼주의
4) 세종대 사법현실 개선의 한계: 무주권과 신분제의 굴레
2. 세종대의 ‘기민-구휼’정책과 조세정책

V. 세종대의 말과 정치

1. 세종대의 공론정치: 말의 ‘개방’과 ‘장애’
2. 의정부서사제 논쟁: 권력구조와 정부형태 논쟁
1) 전통 중국의 정치체제 논쟁 : 법가와 유가의 대립
2) ??조선경국전??의 정부형태 구상
3) 태조-태종대의 정부형태 논쟁: 의정부서사제 대 육조직계제
4) 세종대의 정부형태 논쟁: 의정부서사제의 부활
5) 왕과 신하의 협치는 어떻게 가능한가
3. 풍수지리 논쟁: ‘경학(經學)-잡술(雜術)’의 통치학 ?

VI. 문명교류와 문화적 정체성의 정치 …

1. 언어와 정치: 훈민정음 창제를 둘러싼 문화정체성 논쟁
1) 제자(製字) 원리에 관한 논쟁: 표음문자와 표의문자의 대립
2) 훈민정음의 실용성에 관한 논쟁: ‘편민’(便民)과 ‘중화’(中華)의 대립
3) 훈민정음의 문명적 성격 논쟁:‘이적화’(同於夷狄)와 ‘개물성무’(開物成務)의 대립
2. 음악과 정치: 중국음악(雅樂)과 조선음악(鄕樂)의 대립 …
1) 음악의 표준 논쟁
2) 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의 조화
3. 과학과 정치: 풍토, 보편성, 그리고 민생 …?
1) 세종의 학문관: 국정 운용을 위한 실용주의
2) 집현전의 설치: 지식강국의 산실
3) 하늘의 탐구: 천문학과 수학
4) 땅의 탐구: 지리학
5) 몸의 탐구: 의학과 법의학
6) 지식의 종합과 체계화: 인쇄술

결론: 사람 사는 즐거움(生生之樂)이 있는 나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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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 : 김영수
 
현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이다. 1997년 서울대학교에서 「고려말과 조선조 건국기의 정치적 위기와 극복과정에 관한 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통령실 연설기록비서관,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영남대학교 정치행정대학 학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 『건국의 정치: 여말선초, 혁명과 문명전환』(이학사, 2006)은 한국정치학회 학술상(2006), 제32회 월봉저작상(2007)을 ...
 

출판사 리뷰

이 책은 세종대의 정치와 사상을 다루고 있다. 세종대의 경이적인 업적을 특히 문명교류와 국가혁신의 관점에서 검토했다. 세종대의 연구에는 세 가지 편향이 존재한다. 첫째, 일국적 관점이다. 한국의 시야에서만 이해하려는 것이다. 둘째, 민족적 관점이다. 과도하게 미화하려는 것이다. 셋째, 문화적 관점이다. 정치보다 문화적 이해에 치우친 것이다. 이에 반해 이 책은 세계사, 비교사, 정치사의 관점을 취했다. 세계사의 관점에서 볼 때, 세종대의 업적은 13-14세기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하의 ‘제1차 세계화’(the first globalization)에 의존하고 있다. 몽골제국이 유라시아 대륙을 통일한 결과 유럽과 아랍, 중앙아시아, 중국문명이 활발하게 교류하며 융합되었다. 13세기 중엽 수많은 고려인이 세계체험을 겪었다. 그 결과 국가혁신의 사상과 운동이 배태되어, 조선건국으로 귀결되었다. 세종은 고려에 유입된 자양분을 소화하여, 전면적이고 종합적인 국가혁신에 착수했다.

한국 역사에서 세종대가 지닌 가장 큰 특징은 한국다운 문명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삼국시대 이래 한반도의 국가는 중국문명에 압도당해 문명적 자신감을 상실했다. 세종대의 최만리 역시 한글 창제가 중화를 버리고 이적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박연은 조선의 향악을 중국의 아악으로서 교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세종은 향악을 “반드시 중국에 부끄러워할 것은 없다. 중국의 음악인들 어찌 바르게 되었다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중국 음악이론을 집성한 「율려신서(律呂新書)」를 깊이 이해한 뒤의 결론이었다.

세종은 음악뿐 아니라 모든 분야를 원리적으로 이해했다. 이 때문에 맹목적으로 추수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융합할 수 있었다. 고유문명과 세계문명을 융합해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데 성공한 것은 한국 역사상 세종대가 처음이었다. 그 결과 국가의 표준이 완성되고, 조선의 전통이 확립되었다. 이것이 한국전통의 오리진이다.

32년간에 걸친 세종의 정치는 하나의 목적, 즉 백성을 하늘이 낳은 사람(天民)으로 섬기고 보살는 것이었다. 세종은 정치의 도리(王道)를 이렇게 말했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만 나라가 평안하게 된다. 내가 박덕(薄德)한 사람으로서 외람되이 백성의 임금이 되었으니, 오직 이 백성을 기르고 어루만질 방법만이 마음속에 간절하였다.”(「세종실록」 세종 5년 7월 3일)

세종만의 정치적 특징이 존재한다. 첫째, 철저하게 실용주의의 관점에 서 있다는 것이다. 그의 학문관과 심학적(心學的)인 유교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했다. 조광조는 “도야말로 정치의 출발점”(道乃出治之由)이라고 말했다.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에게 「사기」를 읽히고자 하자 윤회는 “경학(經學)이 우선이고, 사학(史學)은 그 다음이 되는 것”이라고 반대했다. 그러자 세종은 학자들이 “말로는 경학을 한다고 하나, 이치를 궁극히 밝히고 마음을 바르게(窮理正心) 한 인사가 있다는 것을 아직 듣지 못하였다.”고 비판하였다.(「세종실록」 세종 7년 11월 29일) 세종은 산학(算學, 수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토지 측량처럼 수학이 국가의 긴요한 사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둘째, 세종은 듣기와 포용에 뛰어났다. 국정운영에 필요한 것이라면 기존의 틀을 벗어나 과감히 수용했다. 천민이라도 정치에 도움이 되면 썼고, 낮은 견해라도 쓸모가 있으면 들었다. 세종 12년과 15년, 헌릉(獻陵, 태종의 능)의 이장 문제로 세종은 지관(地官) 최양선의 견해를 듣고자 하였다. 그러자 예조좌참판 권도는 국가의 안정은 이런 잡술이 아니라, “육경을 높이시고 백가를 물리쳐서, 마음과 학술을 바르게 하고 간사함과 정대함을 분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세종실록」 세종 15년 7월 15일) 이에 세종은 “임금으로서는 포용하는 것으로 아량을 삼는 것이어서, 비록 꼴 베는 사람의 말이라도 또한 반드시 들어 보아서 말한 바가 옳으면 채택하여 받아들이고, 비록 맞지 아니하더라도 또한 죄주지 않는 것이 아래의 사정을 얻어 알고 자신의 총명을 넓히게 되는 것이다.”(「세종실록」 세종 15년 7월 27일)라고 말했다.

셋째, 세종은 특정한 문화에 우열을 나누지 않았고, 단지 조선에 실정에 맞는 문화를 창조하고자 했다. 한글 창제는 대표적 사례이다. 「농사직설」을 편찬하며 세종이 말한 바처럼, 중국과 한국은 ‘풍토’가 달랐다.(風土不同) 조선식 농법이 필요했던 이유는 농법의 기본 텍스트였던 원대의 「농상집요(農桑輯要)」가 중국 황하 이북의 풍토에 적합한 농법이었기 때문이다. 중국 농법의 원리는 채용할 수 있으나, 그 실제를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었다. 이런 ‘풍토’의 문제는 단지 농법에 그친 것이 아니다. 첫째 말이 다르고, 둘째, 소리가 다르고, 셋째, 산천이 다르고, 넷째, 하늘이 다르고, 다섯째, 수목이 다르고, 다섯째, 관습이 다르고 수많은 것이 달랐다. 이 때문에 새로운 문자, 음악, 회화, 천문학, 의학, 법률 등이 필요했다. 물론 세종 시대에도 굶어 죽고, 옥에 갇혀 원통하게 죽는 백성이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천재지변은 인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이지만, 배포와 조치를 잘하고 못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다할 수 있는 것”( 「세종실록」 세종 12년 9월 11일)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고통에 완전히 대처할 수 없지만, 덜 고통스럽고 위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힘의 정치'(power politics)에 대비되는 ‘정치의 힘’(power of politics)이다. 세종의 정치는 베버가 말한 “하늘의 부름에 답하는 정치”(politics as vocation)였다.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하게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능력이 있는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직업으로서의 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