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세계국가의 이해 (독서)/6.아프리카

나폴레옹 이집트 원정기 : 백과전서 여행

동방박사님 2022. 12. 24. 09:55
728x90

책소개

한 권에 모두 집대성되어 있는 한 국가에 대한 경이로운 탐구!

1798년 이집트를 정복하러 떠날 때, 나폴레옹은 전공이 다양한 학자들과 예술가 167명을 대동한다. 그들 중에는 당대 최고의 수학자 몽주, 화학자 베르톨레, 예술가 비방 드농과 같은 위대한 인물들과 조제프 푸리에, 조프루아 생틸레르처럼 나중에 저명해지는 아주 비범한 젊은이들이 뒤섞여 있었다. 수학자, 화학자, 엔지니어, 건축가, 박물학자, 천문학자, 의사, 출판업자, 동양 연구가, 화가, 음악가들을 망라했던 계몽주의 시대의 이 후예들은 이집트에서 3년 동안 역사상 유례가 없는 가장 뛰어난 연구 활동을 수행하게 된다.

나폴레옹 이집트 원정을 200여 점의 도판자료와 함께 생동감 있는 문장으로 서술한 이 책은 나폴레옹과 함께 동행한 학자와 예술가들이 수행한 위대한 학술적 성과에 대해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집트에서 그들이 수행한 학술적 업적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다고 불릴 정도로 학술적 가치가 높다.

총 12장으로 구성된 이 원정기는 1998년 여름, 『보나파르트의 학자들Les savants de Bonaparte』이라는 제목으로 「르몽드」에 연재되었으며, 여러 자료와 부록을 첨가해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본서는 도판자료의 추가 및 본문의 수정, 보완을 거듭하여 10년 만에 재출간된 『나폴레옹의 학자들』(2003년판)을 개정 증보했다.

 

목차

이집트 원정: 계몽주의의 모험
옮긴이의 말
이집트 원정 연대기

1 백과전서의 여행
평균 나이 25세
‘오리앙’ 호를 타고
몰타를 지나며

2 빛의 근원에서
피라미드로 가는 길 위에서 만난 신기루
정복의 노예가 된 군대
보나파르트, 이집트 학사원을 창설하다
학술 잡지와 신문을 발간하다

3 예언자와 마술사들
외면당한 프랑스 기술
두 문화의 충격

4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모세의 땅에서의 보나파르트
10미터의 실수
수문 없는 직통 운하

5 거인들 사이의 연대기 작가
당나귀와 학자들
어느 미학자의 경탄

6 페스트 앞에서
현지의 의사들
시리아 원정
전염병에 대한 논란

7 유명해진 돌, 로제타 스톤
알려지지 않은 문자와 언어
아부키르에서 파리로

8 도원경의 황홀
덴데라 12궁도
테베의 폐허 속에서
학제간의 작업

9 샅샅이 조사한 이집트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 사회
예술가 겸 민족학자들
‘와조’ 호의 출발 실패

10 나일 강의 모든 물고기
식민지화 계획
우울과 낙담
지칠 줄 모르는 조프루아

11 연속적인 측량 작업
피라미드의 높이 측정
마지막 회합
아주 탐내던 전리품

12 20권의 박학서
기념비적인 출간
풍요로운 박물관, 이집트
화려한 경력

부록
학자들 리스트
과학예술위원회
이집트 학사원
≪이집트지≫


참고 문헌
인명 찾기

 

저자 소개 

저 : 로베르 솔레 (Robert Sole)
 
이집트 출신의 프랑스 저널리스트이자 작가. <르몽드> 편집장을 역임한 후 현재 자유기고가로 활동하고 있다. ≪터키 모자Le Tarbouche≫(1992년 메디테라네상),≪알렉산드리아의 신호소Le Semaphore d'Alexandrie≫,≪맘루카(여자 맘루크)LaMamelouka≫(한국판: 사로잡힌 영혼 맘루카) 등 베스트셀러 소설을 발표했다. 또 필독서인 역사 에세이 ≪프랑스의 열정, 이집트L'Egypte, ...
 
역 : 이상빈
 
한국외국어대학교 프랑스어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홀로코스트에 관련된 미학적 접근을 주제로 프랑스 파리 제8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한국판) 편집위원과 번역위원장, 송석문화재단 부설 문래 컬처팩토리 공장장, 제1회 월드뮤직 필름 페스티벌 기획위원장, 2016년 세계문자심포지아 학술단장,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대우교수,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인문 교수, 한국 동서비교문학학회 회장 등...
 

출판사 리뷰

나폴레옹의 학자들, 파라오 시대의 이집트를 세상에 알리다!
이집트 원정 200주년 기념작! 1998년 여름 『르몽드』 연재


“나는 이집트에서 거추장스러운 문명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거기서 모든 것을 꿈꾸었고, 꿈꾸었던 모든 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수단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하나의 종교를 만들어냈다.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코끼리에 올라탄 채 내 마음대로 개작할 수도 있었던 새 코란을 손에 들고서 아시아로 향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모든 역사를 경험한 영토를 내 이익을 위해 뒤지고, 인도에서 영국 세력을 공격하며, 또 이러한 정복을 통하여 낡은 유럽과 나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며, 나는 두 세계의 체험들을 군사작전 속에 집결시킬 수 있었다. 내가 이집트에서 보낸 시기는 나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순간이었기에.”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803

기념비적인 저서 ≪이집트지≫ 속에 집대성되어 있는 한 국가에 대한 경이로운 탐구는 피비린내 나는 군사 원정이 저지른 실수조차 잊게 만들고 있다.이집트에서 학자와 예술가들은 질문서로 무장한 채 학술적 지식의 도구가 되기를 기꺼이 자처했다. 이집트에서의 “문명적” 모험이 빚어낸 수많은 논문과 보고서들은 나중에 파리에서 이 지식의 신전을 통합시키게 된다. 1802년, 국가는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이집트에서 수행한 작업을 거대한 한 작품 속에 모으기로 결정한다. 각각 800여 페이지로 구성된 텍스트 9권, 3,000점 이상의 그림이 실린 도판집 11권으로 구성된 ≪이집트지Description de l'Egypte≫는 이집트에 대한 모든 기록을 담고 있었다. 고대, 현대 국가, 자연사의 3개 파트로 나뉜 이 책은 1810년부터 1826년 사이에 연차적으로 출판되었다.

보나파르트에 의해 이집트 학사원이 창설되었으며, 로제타 스톤이 발견되었고, 거기에 씌어진 상형문자가 해독되며, 원정에 참가했던 학자와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연구 결과를 집대성한 ≪이집트지≫를 출간하면서 파라오 문명을 연구하는 『이집트학』이 본격적으로 태동한다. 동시에 이 원정은 상형문자를 해독해내는 데 성공하는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 카이로 박물관을 창설하는 오귀스트 마리에트와 같이 국제적인 명성을 획득하는 인물들도 낳았다.

“보나파르트는 대포와 인쇄기를 가지고 이집트에 왔다.
그러나 대포는 떠났고 인쇄기는 남았다.”


나세르Nasser(이집트 제2대 대통령)는 이집트 원정에 대해 일부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하고자 했다. 그는 1962년 발표된 ‘통일아랍공화국 헌장’에서 “프랑스의 이집트 원정은 당시 이집트 국민의 혁명적 에너지에 새 힘을 불러 일으켰다. 그 원정은 다른 문명, 특히 이집트와 아랍문명으로부터 빌려온 후 유럽 문명이 완성시킨 현대과학의 제 양상을 다시 이집트에 가져다주었다. 또한 이집트의 현재에 대해 연구하고, 고대 역사의 비밀을 발견해 낸 대가들을 탄생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프랑스어 사전 ≪프티 로베르Le Petit Robert≫에 ‘원정’은 “군대의 이동을 요구하는 군사작전”과 “접근이 힘든 먼 나라에서의 탐사여행”이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1798년 수행된 원정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의미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원정의 군사적인 동시에 학술적인 양상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 탐사는 정복 없이 이루어질 수 없었고, 또한 학자들의 탐사 열정과 발견에 대한 증명이 없었다면 그 정복으로부터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현지에 도착한 ‘학자들’은 자신들의 실험기구 일부를 잃어버리고 프랑스와 통신수단이 두절된 점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결국 신선한 시각, 온갖 형태의 즉흥성 그리고 예기치 못한 탐험이 오히려 나일 계곡의 호화찬란함을 발견하게 해주었다. 이집트 발견은 탐험의 목적을 이루고 있었다. 시간이 부족하고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은 초과 달성되었다. 이집트에서의 연구 활동은 ‘이집트학’이라는 새 학문의 길을 열었다. 1822년부터 시작된 샹폴리옹Champollion의 상형문자 해독은 파라오의 나라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호기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여러 사람이 나일 강 계곡에 정착하러 떠났는데, 그 중에는 세라피즈 신전을 찾아내고 카이로 박물관을 창설한 오귀스트 마리에트Auguste Mariette 같은 인물도 들어있었다. 그가 최초로 1858년부터 1880년 사이에 맡았던 고대 이집트 박물관장 직책은 거의 한 세기 동안 프랑스인들에 의해 독점된다.

-이집트 원정: 계몽주의의 모험

맘루크 기병대에 대한 추격전은 계속되었다. 무라드 베이가 진로를 변경했기 때문에, 군대는 또다시 북쪽으로 향한다. 이러한 새 출전의 조건들은 오던 길보다 훨씬 더 열악했다. 더위는 점점 더 참을 수 없어졌고, 모래바람이 일었다. 드농은 코피를 흘렸다. “사막이 나의 눈꺼풀을 찢어버렸다.” 그는 피가 묻은 베일을 통해서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이 쾌활한 50대는 세월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한다. 이번에 그의 탈진은 분명 테베의 유적들이 그에게 끼친 나쁜 인상을 설명해주고 있다. 파라오 권력의 조직화가 그에게 느끼게 해줄‘공포’에 의해 그는 다시 출발해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우울증은 지속되지 않았다. 어떻게 ‘왕들의 계곡’의 매력에 저항할 수 있단 말인가? 드농은 무덤 내부 그리기를 고집했다. “나는 큰소리로 15분을 달라고 요청하고, 군대는 손에 시계를 쥐어주며 20분을 허락해준다. 한 사람이 나를 비추고 있는 동안 또 다른 사람은 매번 내가 가리키는 물건들을 촛불로 비추었다.” 하지만 비방 드농은 외교관이 아니었던가? 사람들은 그에게 중재역을 부탁했다. 메디네 하부에서는 족장들의 인도를 협상해야 하는 책임을 맡았던 그는 유적들을 더 잘 관찰하기 위해서 그 토론을 질질 끌었다. 누군가가 둘둘 말린 수사본을 손에 들고 있는 미라를 그에게 가져왔다. 파피루스였다! 그 어떤 프랑스 여행객도, 그 어느 누구도 찾아내 본 적이 없는 바로 그 파피루스였다.

“나는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이 보물을 훼손시키지는 않을까 염려스러워 전전긍긍했다. 내가 침대에서 사용하던 이불솜도 그것을 안전하게 감싸는 데 충분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문체를 가다듬은 후, 끝없는 서정적 표현으로 “보존하기에 최상인 기후의 소중한 증거품, 시간으로 존중받은 유적, 그리고 40세기라는 시간의 흐름이 모든 책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책의 반열에 올려놓은, 피라미드들과 맞설 수 있는 이 가냘픈 라이벌”에게 경의를 표한다.
-본문 중에서(194-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