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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장 (이승만 대통령사저) - 2023.1.11

동방박사님 2023. 1. 11.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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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장 (梨花荘)

지정번호 : 사적 제497호 / 시대 : 1934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동 1번지 등

이화장은 이승만(1875~1965) 대통령 사저(私邸)로서 대한민국 초대내각이 조직된 곳이기도 하다. 이승만대통령 내외는 1947년 10월 18일부터 이 집에 살았는데 이 집에는 지금도 고인의 유품이 소장되어 있다. 현재 이화장에는 조각당 (組閣堂), 전시관으로 쓰고 있는 안채, 별채, 그리고 새로 지은 살림채가 있다. 조각당은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건물이다. 조각당은 ㄱ자형의 아담하고 소박한 건물로서 대한민국 초대내각이 조직된 곳이다. ㄷ자형 안채는 현재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 재현된 이승만 대통령의 서재, 침실 등은 검소한 생활 모습을 느끼게 한다,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던 이승만 박사는 1919년 3.1독립운동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이후 1948년 5.10 총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같은 해 7월17일 헌법을 제정하여 공포하였으며,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같은달 24일에 취임하였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개인 사저.

이 집은 해방 후 귀국한 이승만이 안정된 거처를 마련하지 못해 불편한 생활을 하는 것을 알게 된 권영일 등 33명이 돈을 모아 1947년 이 집을 사서 기증했는데 이때부터 이화장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집의 구조는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살던 본관, 내각을 구상하고 조각을 발표했다는 조각당, 1985년 이화장의 효과적인 보존관리와 유족들의 생활을 위해 지은 생활관이 있다. 이외에 1988년 8월 15일 건국 40년을 기념하여 국내외동포들의 모금으로 건립된 이승만 동상이 있다. 본관은 1988년부터 역사자료 및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평소 사용하던 가구 및 유품을 전시해 개방하고 있다. [출처: 다음백과]

이승만(李承晚) 

이승만(李承晚) 1875326~1965719)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자 마지막 주석을 거쳐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으로 재임하였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서훈되었다. 본관은 전주이고, 초명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이다. 대한민국에서 12년 동안 재임하여 박정희 다음으로 임기가 길다.

황해도 평산군에서 양녕대군의 방계 16대손으로 태어났다. 대한제국 시절 독립신문협성회회보주필, 독립협회 활동 등 계몽운동을 하였고,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수감 시절 기독교로 개종하고, 옥중 계몽활동을 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대한제국 말기 특별사면된 후 밀사로 도미하였다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미국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5년에 걸쳐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12년 미국으로 망명, 하와이에서 한인학원과 한인학교 등을 운영하며 실력양성운동을 하였다. 1919년 공산화3.1운동 이후 사회주의운동가들 사이에서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의견이 갈라졌을 때 그는 국내의 사정을 외국에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외교독립론을 주장하였다. 대한국민의회, 상해 임시 정부, 한성정부 등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 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부터 1925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1919년부터 광복 때까지 구미위원부 위원장, 주미외무행서 외무위원장,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펼쳤다. 일제강점기 중후반에는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저술하는 등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고,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제국의 패전을 확신하고 일제가 망하는 즉시 한국이 빼앗긴 주권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국제사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식 승인해야 된다는 외교활동을 하였고, 미국의 소리 초단파 방송을 통해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격려하였으며, 임시 정부와 미군 OSS 간의 한미군사협력을 주선하였다.

1945년 광복 후 김구와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공산진영과의 타협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38선 이남에 민족진영을 중심으로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합법정부를 단독 수립한 뒤 38선 이북의 비합법정부와 공산진영 일체를 쫓아내고 한반도 통일을 이루고자 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장을 지냈으며, 그 해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냉전시대에 발맞추어 반공주의, 자유민주주의, 시장 경제 체제의 대한민국의 토대를 마련하였고, 1949년 농지개혁법 제정,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등 안팎으로 대한민국 발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1952년 평화선을 선포하여 독도를 사수하였다. 1952년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발췌개헌과 1954년 대통령 연임제한 폐지와 국가주의경제조항을 시장경제조항으로 바꾸는 사사오입 개헌을 하여 대통령을 3회 역임하였다. 1960년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4.19 혁명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진 하야했고, 하와이로 망명한 후 귀국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서거하였다. 장례는 대한민국에서 가족장으로 집행되었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출처]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