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대한민국명소 (2006~) (여행지)/1.서울시 관광

조계사주변 (보성사터, 숙명여학교터, 신흥대학터. 중동중학교터, 우정총국터, 도화서터, 민영환집터)

동방박사님 2023. 3. 12.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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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사 터

보성사  1910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인쇄소이다.

천도교와 보성사

당시 천도교에서는 중앙교당에 창신사(彰新社)를 설립하고 천도교관계 서적 및 교회기관지인 천도교월보(天道敎月報)를 간행하였다. 1910년 말 천도교에서 보성학원(普成學院)의 경영권을 일체 인수하면서 학교에 있던 보성사인쇄소를 창신사와 병합하고 그 명칭은 그대로 보성사라 하였다. 보성사는 최남선(崔南善)이 설립한 광문회(光文會)의 신문관(新文館)과 더불어 당시 인쇄계를 주도하였다. 보성사는 비단 천도교월보나 교회서적 및 학교교과서의 인쇄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한국출판문화 향상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나 한때 보성사의 적자가 누적되자 교회 간부가 손병희(孫秉熙)에게 보성사의 폐쇄를 건의한 적도 있었다.

독립선언서 인쇄

보성사의 가장 큰 업적은 19193·1운동 때 발표된 독립선언서의 인쇄였다. 보성사의 소유주이기도 했던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특명으로 최남선이 초안을 집필하고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넘겨받아 사장 이종일, 공장감독 김흥규, 총무 장효근이 1919227일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극비리에 35천 매를 인쇄하였다.

일본경찰의 방해

이종일은 이 중 총 21,000매의 선언서를 자신의 집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이 선언서를 28일 각지에 보냄으로써 31일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던 도중 인쇄소의 작업소리를 듣고 형사 신승희(申勝熙)가 현장을 목격하였다. 이에 놀란 이종일이 형사의 옷자락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와 뒤에 손병희로부터 받은 5,000원을 주며 눈감아주기를 간청해서 위기를 넘겼다. 10시가 넘어 인쇄 완료된 선언서를 손수레에 싣고 교당으로 가는 도중 일본경찰의 검문을 받았으나, 손수레의 짐은 인쇄된 족보라고 속여 무사히 옮길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이, 보성사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가 무사히 은닉됨으로써 3·1운동이 예정대로 진행될 수 있었다.

일제의 방화

또한, 31일에는 윤익선과 이종린, 이종일, 김홍규 등이 지하 신문인 조선독립신문 1만부를 연이어 발행하였다. 일본 경찰은 보성사를 즉각 폐쇄하였으며, 1919628일 밤에는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이후 보성사는 터만 남아 오늘에 전한다. 보성사는 현 종로구 조계사 경내에 있으며, 기념비와 동상은 조계사 후문 맞은편 근린공원에 있다.

서울 우정총국

우정총국은 근대적 우편 업무를 시작한 관청으로, 1884년 4월 일본과 미국에서 신식 우편제도를 시찰하고 돌아온 홍영식이 건의하여 만들었다. 이건물은 1884년 11월 전의감의 부속건물을 수리하여 만든 우정총국청사이다.  그해 12월4일 우정총국의 개업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이 민씨 정권을 제거하고 신정부를 조직하는 갑신 정변을 일으켰다. 이때 본채를 제외한 부속건물은 모두 탓고, 우정총궁의 우편 업무도 중단되었다. 1893년에야 전우총국이란 이름으로 우편업부를 다시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본에 통신권을 빼앗긴 1905년 이후에는 한어학교, 중동야학교, 경성 중앙우체국장 관사 등으로 사용되었다. 해방 후에는 개인 주택이었다가 1972년부터 체신기념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