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대한민국명소 (2006~) (여행지)/1.서울시 관광

서울 혜화역 대학로 (2023.1.11)

동방박사님 2023. 1. 11.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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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동에 있는 대학로에  오랫만에 나왔다. 겨울이라 차가운 느낌이 있었지만 젊은이들은 여기저기서 활기있는 모습이 좋아보였다. 잠시 시간여행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오늘 여기에 온 이유는 이승만 대통령 개인사저가 있는 이화장에 가고자 왔으나. 이화장은 외관에서만 볼수 있고 안에는 돌아볼수 없는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잠시 시선이 방송통신대학교에 머므렀다. 우리나라의 국립대학 방송송통신대학은 학구열이 있는대 여러가지 환경으로 배움의 시간을 놓치고 사회생활하면서 자신의 꿈을 일구어낸 산실이기도 하다. 대학로에는 연극의 산실이기도 하다 여전히 여기저기 연극포스터와 선전물이 있고 추위를 잠이녹이려는 오뎅가게 떡복이 튀김가게 포장마차 들이 보인다. 오늘도 이렇게 잠시 시간여행을 했다.    

대학로(大學路, Daehak-ro)

대학로(大學路, Daehak-ro)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582-1(종로5가교차로)에서 혜화동 56(혜화동로터리)까지를 잇는 도로이다. 그 주변 일대 문화예술 활동의 거리를 지칭하기도 한다. 종로5가에서 이화사거리까지의 구간은 4차선이고, 이화사거리에서 혜화동로터리까지의 구간은 왕복 6차선이다. 과거 이 도로에 서울대학교 문리대학이 자리잡고 있었어서 이 이름이 붙여졌다

서울대학교 종합발전계획의 일환으로, 대학교육의 발상지로서 동숭동 캠퍼스가 갖고 있는 역사적 가치와 장소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이전 반대측 주장과 일제 강점기의 경성제국대학이 갖는 흔적을 지워버림으로써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 것이 옳다는 이전 찬성측 주장 가운데 후자가 선택되어, 동숭동 캠퍼스는 19751월부터 단계적으로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으로 옮겨갔다. 바로 이 동숭동 캠퍼스 옆을 지나던 도로이기 때문에 대학로라는 이름이 붙었다.

198554, 정부 주도로 대학로 일대에 문화예술의 거리를 조성하면서, 서울 곳곳에 흩어져 있던 문화단체와 극장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2] 경성제국대학이 들어서고 이후 서울대학으로 바뀌면서 대학가 문화가 주를 이뤘던 이곳은 젊은이들의 천국으로 불리게 되었고, 2004년에는 인사동에 이어 서울에서 두 번째 문화지구로 지정되면서 서울의 문화를 대표하는 거리가 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김상옥(金相玉, 189015~ 1923122)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다른 이름은 김영진(金永振), 아호는 한지(韓志의엄(義嚴)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그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생애

한성부 어의동에서 군관을 지낸 김귀현(金貴鉉)과 김점순(金占順)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병조판서 김영정의 15대손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면서 한학을 수학하는 동시에 어의동보통학교를 다녔다. 10대 중반부터 기독교에 입문하고 서울 동대문감리교회를 다녔다. 야학에 다니면서 물산장려운동을 벌이고 경상북도 풍기군에서 결성된 대한광복단에 참가하는 등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김상옥은 창신동에서 영덕철물상회를 자영하고 한 때 종업원만 50명에 가까울 정도로 컸었다. 김상옥은 이를 모두 독립운동에 쏟았다. 그는 말발굽을 만들어 히트를 쳤다. 일제강점기 시절대 머리카락이 잘린 사람들 에게 도움을 줄수있는 말총모자를 선보였다

독립운동에 투신

19193·1 운동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항일 운동에 뛰어들어, 반일 비밀 조직인 혁신단을 결성한 뒤 지하 신문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해 배포했다. 3·1 운동 당시 만세를 외치던 여고생을 살상하려고 한 일본군경을 저지 및 폭행하고 군경의 검을 탈취하여 자신이 보관하였다.

다음 해에는 풍기 시절부터 동지인 한훈, 북로군정서의 김동순과 함께 요인 암살을 위한 조직을 만들어 구체적인 암살 계획까지 세운 것이 드러나 상하이로 망명했으며, 이 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이시영, 신익희, 이동휘, 조소앙 등과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기독교인이었던 김상옥은 192255일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 등 신사상에 접했으며, 한살임 정강 및 선언을 통해 종교를 배경으로 한 민족 혁명에서 유물론적 계급 혁명으로 사상이 변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 임정 군무부 행정관 직책으로 발탁된 그는 192210월 권총 3정과 실탄 800발 및 폭탄 그리고 항일 문서를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한 뒤 1923112일 독립운동 탄압의 본산으로 악명이 높았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인 경찰 및 어용신문 매일신보사의 사원 1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고 알려져 있다.[2] 투척 사건 이후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피신하던 중, 사이토 총독이 회의에 참석하러 도쿄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암살할 목적으로 서울역 주위를 수일간 배회하다가 종로경찰서 무장 경찰 20여 명에게 포위되었다. 김상옥은 그들과 총격전을 벌여 유도사범이자 형사부장인 다무라를 사살하고 경부 20여 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고봉근의 집에서 경부 20여명에게 포위당한 후, 반격해 중상을 입혔다.[출처:위키백과]

안창호(安昌浩)

안창호(安昌浩, 1878119~ 1938310[2])는 대한제국의 교육개혁운동가 겸 애국계몽운동가이자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가이다. 그의 사후 1988321, 24일 도산 안창호 선생이 공부한 구세학당 , 즉 경신중학교와 경신고등학교(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에 소속한 장로교회 학교)에서 그에게 명예 졸업장이 추서됐다.

평안남도 출신이며, 본관은 순흥, 호는 도산(島山), 종교는 개신교이다. 구한 말 만민공동회에서 강연을 하였으며, 배워서 익히는 것의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의 영향력이 강대해지자 미국으로 망명, 이후 미국 사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919년 상하이에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또한 실력양성론과 함께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 실력을 키우는 것이 독립의 발판이라 생각하여 1899(광무 2) 점진학교, 1908(융희 2) 대성학교, 1926년 중국 난징에 동명학원을 설립하였다.

대한의군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사령관을 지낸 항일 독립운동가 안중근(安重根) 선생과는 동성동본 친족척이기도 하며 1938년 경상남도 부산에서 간경화를 비롯한 폐렴과 만성기관지염 및 위하수증· 복막염 및 피부염과 소화불량 등의 합병증으로 타계한 그는 생전에 흥사단, 대한인국민회 등 재미한인단체를 조직, 주관하였고, 19194월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주도하였다. 1921년부터는 임시정부 창조론과 개조론이 나뉠 때 개조론을 주장하였으며, 국민대표자회의가 강제 해산된뒤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미국의 한인 교포사회의 지도자였던 그는 박용만, 이승만, 서재필 등과 경쟁, 갈등관계에 있기도 했다.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 이후 일본 제국 영사관 경찰의 불심검문에 체포되어 송환,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형문을 받았고, 고문 후유증으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했으나 소화불량과 간경화, 폐질환을 비롯한 여러 질병의 합병증으로 출옥 직후 사망한다. [출처: 위키백과]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186157~ 194187)는 인도의 시인 겸 철학자이다.

그는 인도 콜카타에서 배다른 15형제 가운데 열셋째아들로 출생하였다. 영국 런던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niversiy Collge London: UCL)에 유학하여, 법학과 문학을 전공하였다.

1913년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후 1929, 일본을 방문하였다.

타고르는 이 밖에도 방글라데시의 국가와 인도의 국가를 작사·작곡하였으며, 그가 시를 짓고 직접 곡까지 붙인 노래들은 로빈드로 숑기트(Rabindra Sangit)라고 하여 방글라데시와 인도 서벵골 주를 아우르는 벵골어권에서 지금도 널리 불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간디에게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 초등학교 고학년 국어교과서에 실렸다.

 함석헌(咸錫憲, 1901313~ 198924)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종교인, 언론인, 출판인이며 기독교운동가, 시민사회운동가였다.

광복 이후 비폭력 인권 운동을 전개한 인권운동가, 언론인, 재야운동가, 문필가로 활약한 그의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호는 신천(信天), 씨알, 바보새이다.19193.1 운동에 참여했다가 퇴학 당한 후, 사무원과 소학교 교사 등을 전전하다가 1928년부터 1938년까지 오산학교의 교사를 역임했다. 이후 교육, 언론 활동 등에 종사하다가 해방 후, 1947년 월남하였다. 이후에는 성서 강해 등을 하다가 1956년부터는 장준하의 사상계에 참여하여 정치, 시사 등에 대한 평론 활동, 신앙 활동, 반독재 민주화운동 등을 하였다.그의 종교는 초기에는 일본 유학 중에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자였다가 중기에는 기독교였으나 후기에는 장로회로 바꾼것이다,

 예술가의집 소개

2010년 12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구청사가 예술인들이 마음껏 창작하고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인 예술가의집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술가의집은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는 대학로에 있으며, 예술가의 창작을 지원하고 예술가와 예술가, 예술가와 시민 간 소통을 지원하는 매개형 열린공간입니다.

건축물 소개

사적 278호인 예술가의집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 본관으로 사용됐습니다. 설계는 우리 건축계의 선구자인 박길룡(1898-1943)이 맡았습니다.

예술가의 집 건축 역사

  • 건축연대 : 1931년 10월 10일 준공 / 1981년 사적 제 278호로 지정
  • 건물의 전체적인 형태는 엄격함과 권위를 강조합니다. 아케이드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일본 동경제대 건물과 유사한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