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이데올로기 연구 (독서)/7.전체주의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2013) - 관리되는 민주주의와 전도된 전체주의의 유령

동방박사님 2023. 2. 18.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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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일반적으로 현재 미국이나 한국의 정치체제를 ‘민주주의’라 규정하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저조한 투표율, 대표되지 못하는 시민들의 불만과 정치적 무관심, 다양한 반민주적 행태에도 불구하고, 주기적으로 유지되는 선거에 의해 대표자를 뽑는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체제를 ‘민주주의’라 부른다. 하지만 미국의 대표적 진보 정치학자이자 50년간 급진 민주주의 정치사상을 대변해 온 월린은 이와 같은 시각을 협소한 민주주의관에 입각한 시각이라 비판하며 다음과 같은 도발적 의문을 제기한다.

월린은 이 책을 통해, 사실 우리는 더 이상 민주주의 체제가 아니라 ‘전도된 전체주의’ 체제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충격적인 진단을 내놓는다. 대체 무엇이 이 노학자에게 그토록 전체주의를 증오했던 냉전의 종주국을,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칭하며 전쟁까지 불사하는 나라를 ‘전도된 전체주의’ 체제로 규정하게 만들었을까? 그리고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이 나라―국가정보기관이 선거에 개입해 여론을 조작하려 하고, 소위 CEO 대통령이 국민 앞에서는 거짓 약속을 고한 채 관료들에게는 국토를 파헤치라고 명령하는, 그리고 시시때때로 반공주의를 이용한 보수의 색깔 논쟁이 모든 사회경제적 이슈를 덮어 버리는 이 나라―를 민주주의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목차
차례
서문
감사의 말
미리 보기

1장 신화 만들기
2장 영구 지구 전쟁에 대한 상상의 시작
3장 전체주의의 전도, 민주주의의 왜곡
4장 테러의 신세계
5장 유토피아적 슈퍼파워론
6장 변신의 동학
7장 의고적인 것의 동학
8장 슈퍼파워의 정치학
9장 민주주의에 대항하는 지적 엘리트들
10장 슈퍼파워와 제국의 시대의 미국 정치
11장 전도된 전체주의
12장 데모스의 계기들
13장 민주주의 전망

저자 소개

저 : 셸던 월린 (Sheldon Wolin)
 
월린은 현재 생존해 있는 미국의 대표적 정치사상가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그는 오벌린대학교를 졸업한 후 제2차 세계대전에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1950년에는 하버드대학교에서 “보수주의와 헌정주의: 1760~1785년 기간의 영국 헌정 사상에 대한 연구”(Conservatism and Constitutionalism: A Study in English Constitutional Ideas, 1760~178...

역 : 우석영

철학하는 사람. 탈근대 전환 연구자. 작가. 동물권연구변호사단체 PNR, 출판·연구 공동체 산현재, 생태문명원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생태주의 사상, 생태 전환, 탈근대 전환과 관련한 글을 주로 쓰며, 자연문학에도 심취해 산다. 저서로 《걸으면 해결된다Solvitur Ambulando》(공저), 《숲의 즐거움》, 《동물 미술관》, 《철학이 있는 도시》, 《낱말의 우주》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이 세계의 식탁을 ...
 

출판사 리뷰

래넌 재단이 수여하는 2008년 올해의 주목할 만한 책 논픽션 부문 수상

정ㆍ재계 엘리트가 지배하는 주식회사 민주주의
소비자-관객으로 전락한 시민
이것은 미국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의 이야기다.
당신은 지금 민주주의가 아니라 ‘전도된 전체주의’ 체제에 살고 있다!
돈, 엘리트, 애국주의, 공포, 기만이 지배하는 정치, 이것이 민주주의인가?


ㆍ이 책은 한때 평등주의의 정신과 민주주의가 생생히 살아 있는 신생 공화국으로 칭송받다가, 현재는 전체주의로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한 나라에 대한 이야기이다.
ㆍ이 책은 한때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는 것을 민주주의로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소수집단에 대한 언어폭력과 행동의 획일화가 민주주의로 매도되고 있는 한 나라에 던지는 질문이다.

일반적으로 현재 미국이나 한국의 정치체제를 ‘민주주의’라 규정하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저조한 투표율, 대표되지 못하는 시민들의 불만과 정치적 무관심, 다양한 반민주적 행태에도 불구하고, 주기적으로 유지되는 선거에 의해 대표자를 뽑는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체제를 ‘민주주의’라 부른다.
하지만 미국의 대표적 진보 정치학자이자 50년간 급진 민주주의 정치사상을 대변해 온 월린은 이와 같은 시각을 협소한 민주주의관에 입각한 시각이라 비판하며 다음과 같은 도발적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체제가 더 이상 민주주의가 아닌 것은 아닐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경제 권력과 국가 권력이 결합해 사실상 제압할 수 없는 형태로 전환된 새로운 정치체제가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월린은 2008년 출간한 이 책을 통해, 사실 우리는 더 이상 민주주의 체제가 아니라 ‘전도된 전체주의’ 체제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충격적인 진단을 내놓는다. 대체 무엇이 이 노학자에게 그토록 전체주의를 증오했던 냉전의 종주국을,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칭하며 전쟁까지 불사하는 나라를 ‘전도된 전체주의’ 체제로 규정하게 만들었을까? 그리고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이 나라―국가정보기관이 선거에 개입해 여론을 조작하려 하고, 소위 CEO 대통령이 국민 앞에서는 거짓 약속을 고한 채 관료들에게는 국토를 파헤치라고 명령하는, 그리고 시시때때로 반공주의를 이용한 보수의 색깔 논쟁이 모든 사회경제적 이슈를 덮어 버리는 이 나라―를 민주주의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민주주의의 가면을 쓴 ‘전도된 전체주의’

“민주주의는 실패할 수 있는 체제이자 반민주적 체제에 제 자리를 내줄 수 있는 체제이다. 그리고 이 반민주적 체제는 전체주의 정권에 적합한 대중과, 이들의 지지를 받는 ‘민주적’인 체제라는 가정을 공급한다.”


월린은 현재와 같은 비민주주의 혹은 반민주주의 체제가 나치, 스탈린, 무솔리니의 고전적 전체주의와는 차이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고전적 전체주의가 대중의 정치적 동원화에 열을 올렸던 반면, 전도된 전체주의는 시민을 수동적인 ‘시청자-소비자’로서의 역할에 매몰되도록 함으로써 탈동원화한다. 고전적 전체주의가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존하고 억압적인 작동 양식을 보이는 데 반해, 전도된 전체주의 체제는 CEO와 같은 리더십에 의존한다. 또 고전적 전체주의가 선전, 선동, 프로파간다에 의존한다면, 전도된 전체주의는 민주주의적 목적을 내세운다. 고전적 전체주의가 일면 사회주의적 측면을 가진 데 반해, 전도된 전체주의 체제는 기업과 한편이 되어 빈자의 복지에 무관심하다.
이런 체제에서는 협동보다는 경쟁을 중시하는 반정치적 문화가 만연하며, 국가 역시 최대 이익을 내는 것을 기준으로 ‘경영’되고, 공격적인 사유화 프로그램이 추진되며, 국가의 점점 더 많은 부분들이 돈 많은 로비스트들의 책략에 휘말리게 된다. 또한 기업이 지배하는 미디어 역시 정치를 한낱 구경거리로 재현하면서 이런 지배 양식과 공모한다.
월린에 따르면, 이와 같은 전도된 전체주의는 ‘관리되는 민주주의’(managed democracy)라는 가면을 쓰고 자신의 경향성들을 은폐한다. 이는 관리되고 통제되는 주기적인 선거, 조작된 여론조사, 얼마나 많은 민주주의가 허용되어야 하는가를 지시하는 사법 체계를 통해 민주적 정치를 일정한 과정 속에 가두어 길들이면서 하나의 안정적인 틀로 환원한다. 따라서 이는 언제든 관리 가능하고, 조작 가능한 민주주의이자, 효율성, 균형 예산, 경제에 필요한 정치적 안정, 통치 가능한 수동적 시민에 걸맞은 민주주의가 된다.

전도된 전체주의의 징후들 1
여론조사 조작과 선거 관리


ㆍ이 책은 군림하지만 통치하지 않는 사람들의 민주주의에 관한 이야기이다.
ㆍ이 책은 여론조사로 정당의 후보를 선출하는 어느 민주주의국가에 던지는 질문이다.

월린에 따르면, 현대 민주주의에서 선거는 시민 참여 자체를 대체해 버렸다. 선거는 단 한 번의 순간에 소수에게 권력을 부여하고 다수가 이에 순종하겠다고 동의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특성이 있다. 이는 선출된 후보에게 표를 던진 사람이건 아니건 간에 모두가 선출된 이의 결정을 따르도록 만든다. 월린은 민주주의를 이와 같은 투표와 동일시하는 과정 속에서, 권력의 정당화 과정은 시민들을 순종적인 시민으로 이끄는 미끄럼 길이 된다고 말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선거마저도 선거자금 브로커, 전문 선거 전략가, 로비스트, 여론조사 전문가들에 의해 관리되고 ‘사영화’되어 민주주의를 ‘대의하지 못하는 정부’ 또는 ‘고객들의 정부’로 만든다는 점이다. 대의제도는 더 이상 유권자들을 대변하지 않는다. 선거는 기업인들이 지배하는 언론매체가 제공하는 국내외 정치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는 기껏해야 절반에 불과한 유권자들의 행사가 되었다.
2000년 미국 대선은 시민이 통치자를 뽑는 과정에서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이 기실 전무하다는 쓰디쓴 교훈을 안겨 주었다. 조직되어 있고, 부를 소유한, 그리하여 여분의 권력을 갖춘 기업과 달리, 평범한 시민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통제권 밖에 있는 어떤 과정이 허용하는 권력만을 소유할 뿐이기 때문이다.
역설은 다음과 같다. 논리적으로 데모스는 대표를 선출하는 권한을 지니지만, 그들에게는 선거 자금, 텔레비전 광고, 토론 형식 등과 같은 실제 선거 과정을 통제하거나 이를 정할 수 있는 실제적인 권력이 없다. 대신 우리가 보는 것은 고도의 기술로 관리되는 선거,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기업의 자원과 전문 지식을 활용하는 이들에 의해 통제되는 선거다.

나치식 대중 여론조사 방법과 오늘날의 여론조사원에 의한 조사 방법 사이에는 의미심장한 차이점이 있다. 나치의 일차적 관심은 어떤 ‘대중’ 의견, 즉 어떤 특징이나 뉘앙스도 없는 시민들의 획일적 의견을 만들어 내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나타난 것이 바로 ‘예’, ‘아니오’ 가운데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는 경직된 형태의 국민투표다. 반면 미국식 방법은 우선 시민들을 특정 범주로, 이를테면 ‘20세에서 35세 사이의 시민’, ‘40세 이상의 백인 남성’, ‘여성 대학 졸업자’와 같은 특정 범주로 쪼갬으로써 선거를 준비한다. 그리하여 잠재적 유권자 집단은 소규모의 하위 집단들로 나누어지고, 후보자들은 특정 범주 집단의 ‘가치’, 선입견, 습성에 맞추어 제작된 메시지를 통해 그 하위 집단들을 ‘목표로 삼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시민들을 서로 분리시키는 요소가 강조되고, 서로에 대한 불신이 심어지며, 공통 신념을 지닌 응집된 다수의 형성이 어려워짐으로써 시민들은 탈동원화된다.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도 정교화된 범주에 대중을 몰아 놓고 그들을 주사위 놀이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그 범주 내 성원들을 더욱 쉽게 조작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포커스 집단’으로 값싸게 재탄생되며, 그들이 내린 결론은 정치 현실이라고 알려지게 된다. 응답자들로서는 자신의 의견에 따라 행동할 의무가 전혀 없게 된다. 한갓 의견 제시에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는 이유는 만무한 것이다. (본문 106쪽)

전도된 전체주의의 징후들 2
기업 권력과 국가권력의 결합:
민주주의 주식회사


ㆍ이 책은 한때는 뉴딜 사회주의를 실현할 뻔했으나, 지금은 의료보험조차 민영화된 어느 나라에 대한 이야기이다.
ㆍ이 책은 한때는 CEO 대통령의 리더십을 기꺼이 감수했고, 삼성공화국이라 불리기도 하는 어느 나라에 던지는 질문이다.

무엇보다 현재 전도된 전체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국가권력과 경제 권력의 결합이다.
한편으로, 국가권력은 과학적 진보를 기술적 성과로 전환하기 위해 기업 권력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정책 조언과 경영 기술을 위해서도 기업 인재들에 크게 의존한다. 정치인들은 돈 잘 버는 기업 간부직을 위해 사임하고, 기업 중역들은 정부 부처에 들어가 정책을 만들고자 휴직하며, 군대 고위 간부는 기업체에 고용되고, 대학교수가 되며,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선다. 이로 인해 나타난 한 가지 사태는 정치적인 것이 경영자들의 손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오늘날 정치와 선거, 정부 부처의 운용은 정치 기술이라기보다는 경영 기술의 문제로 간주된다.
다른 한편으로 기업 권력 역시 국가에 다양한 방식으로 의존한다. 명목은 계약, 보조금, 보호, 사업 기회의 증진 등 다양하다. 1970년대 중반부터 기업 권력과 국가권력 사이의 관계는 상호 호혜 관계 또는 기업과 국방부 사이의 회전문 관계 이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가장 만연한 현상 가운데 하나는 정부의 규제 권한은 점점 줄어든 반면, 기업 권력이 점점 더 정부의 기능과 서비스를 떠맡게 되었다는 사실, 즉 민영화(이하 사영화)이다. 기업의 힘은 군사 영역, 즉 한때 국가의 특권으로 열정적으로 보호받던 영역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기업과 국가가 이제는 절대 불변의 유착 관계를 형성하고 있을 정도로, 오늘날 ‘사영화’는 일상적 규범이 되고 있으며, 기업 이익에 냉담한 국가 행동은 어느덧 기행奇行이 되어 버렸다.
이와 같은 사영화는 ‘관리되는 민주주의’의 주성분이다. 한때 포퓰리즘의 승리로 찬미되던 중요한 국가 기능들을 폐기함으로써 사영화는 민주주의적 내용물에 상처를 입힌다. 사영화의 옹호자들이 추종하는 전략은 복지 기능을 ‘사회주의’로 평가절하하고, 그 기능을 민간 입찰자들에게 판매하거나 특정 프로그램으로 사영화하는 것이다.

기업 문화의 전염

이에 따라 기업 경영자들이 정부에 기업문화를 전염시키는 문제 역시 심각하다. 21세기 기업의 기풍은 협동이 아닌 경쟁과 거대화, 실업자와 망가진 공동체를 양산하고 방치하는 반反정치 문화다. 또 쉼(=불경기) 없이 계속해서 혁신ㆍ확장해야만 하는 증대의 문화다. 기업의 최고 중역들은 무엇보다도 기업 자체의 이익 창출 가능성이 기업과 사회 사이의 공통성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명제를 자명한 것으로 수용한다. 이와 같은 기업 확장 문화의 가장 경악할 만한 화신은 월마트로, 이 기업은 작은 마을에 침투해 경쟁 능력이 없는 소규모 사업체들을 파괴하고 있다. 또 노동자들에게 저임금, 가혹한 노동 여건, 열악한 의료보험을 강제하는 한편, 노조 결성을 막고 있다. 이는 곧 기업적ㆍ제국적 양태의 전도된 전체주의인 것이다.
엔론과 월드컴의 회계부정 스캔들이 말해 주듯, 기업 중역의 사익 추구는 조직 자체의 이익 추구에 우선한다. 지난 10년 동안 최고 중역들이 연루되었던 기업 범죄와 부정행위는 일상적으로 수도 없이 발생했다. 속임수, 거짓말, 사기, 사업 실패에 아랑곳없이 지급되는 특별 보너스, 냉혹한 기업들의 행태 등등. 레이건 집권 당시 고위 공직을 차지했던 이들은 공공서비스를 중시하는 공직자들이 아니라 기업 경영자들이었으며 이는 정부에 기업 기풍을 불어넣었다. 이에 따라 ‘이해 상충’이 창궐하고, 기업의 위법행위로 말미암아 권력자 전체에 대한 대중적 불신이 증대했지만, 전도된 전체주의에서 이런 대중의 정치적 냉소는 지양해야 할 일이 아니라 정치적 타락과 무기력화에 기여하는 구성 요소일 따름이다.

이와 같은 기업 문화가 정부로까지 어떻게 전염됐는지는 ‘다운사이징’을 생각해 보면 된다. 기업은 경쟁자들과 좀 더 효율적으로 경쟁하고자 인력을 축소한다. 실직, 현저히 변모된 삶, 파괴된 희망. 다운사이징은 자본주의가 가진 ‘창조적 파괴’(슘페터)의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부분으로 환호받는다. 정치는 바로 이 다운사이징을 똑같이 모방하고 있다. 더욱 가난한 이들, 더욱 취약한 계급의 필요를 지속적으로 희생시키는 정치. 사회 급부의 축소, 노동 규준의 해이한 적용, 수치스러울 정도로 낮은 최저임금, 이 모든 것들은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고안된 전략의 일환이자 노동자계급이 정치적으로 더 이상 불필요하게 된 사태를 드러낸다.
재계의 지배적 기풍이 반정치적이고, 민주주의에 반하는 행동과 가치를 조장하는 시대에 과연 민주주의라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기업계가 정치 리더십의 주요 공급자인 동시에 정치 부패의 주요 원천이 되는 시대, 소액 투자자가 단 한 표만을 지닌 보통 유권자의 무력함에 상응하는 무력한 지위에 있는 시대에 우리가 제기해야 하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전도된 전체주의의 징후들 3
국가와 엘리트의 거짓말:
대중 기만의 정치


ㆍ이 책은 한때 자유세계와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전체주의 체제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다 결국은 적을 닮아 버린 한 나라에 대한 이야기이다.
ㆍ이 책은 국가정보기관의 수장이 청문회장에서 진실만을 말하겠다는 증인 선서를 거부하는 어떤 나라에 던지는 질문이다.

근본적으로 거짓말은 권력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다. 직접성 없는 정치, 진실이 없는 정치, 평범한 시민의 정치 참여가 쇠락하는 사태에 직면해, 민주주의는 애국주의, 공포, 대중 선동에 대한 반정치적 호소를 잘 수용할 뿐만 아니라 거짓말, 허위 진술, 기만이 일상적인 관행이 되고 마는 정치 문화를 받아들인다.
이와 같은 대중 기만의 정치, 거짓말쟁이의 계보는 플라톤의 엘리트주의적 철인통치론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반공주의로 들끓던 냉전기의 매카시즘이다. 매카시는 단순하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장광설로 끝도 없이 거짓말을 해댔다. 그는 계속해서 스파이, 배신자, 빨갱이, 좌익분자 고발에 광적으로 몰두했다. 새로운 일련의 정치조직들(FBI, 하원 비미非美활동조사위원회, 정부 기관들로부터 ‘불순한’ 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각종 충성ㆍ안보 위원회들)이 출현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이는 곧 이데올로기적 복종을 강화하기 위한 ‘사상 검열’이었다. ‘불충’이라는 범주는 공산주의자들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사람들이라고 여겨지는 이들, 또 공산주의자들이었던 동료나 지인을 은폐한 이들 등에게 광범위하게 적용되었다. ‘적과 흑’이 출현하고 연예계, 언론, 지식인 집단 내 의심스러운 ‘빨갱이들’과 그들의 동조자들을 색출하고 근절하기 위한 ‘블랙리스트’가 작성되었다.
사실 이와 같은 반공주의는 서로 연계되어 있다고 의심받던, 더욱 큰 목표물을 향해 있었다. 사회민주주의, 노동조합의 힘, 뉴딜과 관련된 반자본주의적 신념, 대학 사회 및 언론과 동일시된 정치적 자유주의 등이 바로 그 목표였다. 이런 목표물들은 공산주의자나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자, 불충한 자 또는 공산주의에 적어도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는 세력들로 ‘중상모략’을 받았다.
가장 최근의 예로는 부시의 거짓말을 들 수 있다. 부시는 의회와 대중 앞에서 ‘사담이 알카에다와 연루되어 있다’, ‘그가 대량 살상 무기를 소유하고 있다’는 거짓말로 이라크전을 시작했다. 이는 한편으로 국내 정책에 대한 관심을 최대한 줄이고 국내 정책 이슈를 테러리즘, 세계화 같은 이슈들보다 부차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민주주의를 심각한 수준에서 전복하는 정치이기도 했다.

전도된 전체주의의 징후들 4
사소한 것에 의한 정치:
문화전쟁


ㆍ이 책은 한때는 반전운동과 민권운동을 통해 살아 있는 민주주의를 보여 주었으나, 지금은 그 어떤 명분 없는 전쟁에도 애국자-왕과 같은 대통령의 리더십을 순순히 따르는 순종적 시민들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이다.
ㆍ이 책은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분단을 경험하고 여전히 반공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어떤 나라에 던지는 질문이다.

비슷한 규모로 양분된 유권자들, 양당 간 격차가 적은 의회라는 상황은 또한 문화 전쟁을 부채질하기 쉽다. 금욕의 가치, 주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는 종교 자선단체의 역할, 게이 결혼과 같은 이슈들에 대한 논쟁에서 중요한 것은, 애초 이 이슈들에 대해 어떤 시원한 결론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런 논쟁들의 정치적 기능은 시민들을 분열시키는 것이자 계급 간 격차를 모호하게 하는 것인 동시에 유권자의 관심을 사회경제적인 문제에서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다. 문화 전쟁에 참여하는 일이 언뜻 강력한 정치 참여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문화 전쟁은 정치 참여의 대체물이다. 언론과 비본질적인 이슈들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천명하려는 정치인들은 이런 문화 전쟁에 주목하지만, 이는 결국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위선적인 정치’에 기여한다.
부시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을 천명했을 때, 그가 수행한 것이 바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위선적인 정치’의 공식화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9ㆍ11 이전에 부시 행정부는 일반 시민을 위한 그 어떤 진지한 프로그램도 준비하지 않은 채 업무를 시작했다. 부시 행정부의 ‘대민’ 의제는 단순하고 대체로 부정적인 것이었다. 즉, 정부 규제의 완화, 환경보호 장치의 제거, 부자를 위한 세법 개정안 통과, 사회보장 프로그램의 축소 따위 말이다. 반면 석유ㆍ에너지ㆍ제약 분야 기업 스폰서들의 경제적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부시 행정부가 긍정적으로 추진한 의제들은 교착상태에 빠진 정치와 기업 권력을 십분 활용해 진행되었다.

1950년대 내내 진행된 이데올로기 전투도 마찬가지였다. ‘충성’, ‘전복’, ‘공산주의’을 중심으로 진행된 그 10년의 정치는 한편으론 격렬한 것처럼 보였지만 또한 협소한 것이기도 했다. 사회경제적 사안들은 이데올로기 투쟁에 종속되었고, 그 싸움에서 반공 이데올로그들은 주요 사회 경제 개혁 세력인 자유주의를 공산주의와 어떻게든 연결시키려 했다.
오늘날 선거 정치는 어떤 ‘의사擬似 합의’를 건드리지 않는, 강조점의 소소한 차이들을 둘러싼 접전이 되고 마는 경향이 있다. 중도파의 표를 얻기 위한 경쟁, 이른바 무소속 또는 부동층의 표를 얻기 위한 경쟁 속에서 사회적ㆍ교육적ㆍ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쟁점은 수면 밑에서 계속 침잠된 상태로 남아 있고, 정치적 언어를 통해 환기되지 못한 채, 정지되어 있는 것이다.

결론
감히 나서는 것으로서의 민주주의:
탈주적 민주주의


결론적으로 월린은 민주주의에서 희망은 바로 풀뿌리 수준에서의 민주주의, 그리고 진정한 참여의 의미를 복원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그는 ‘탈주적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어떤 봉기적 계기에 출현하는 일시적이며, 우발적이고, 간헐적이며, 즉흥적인 모습(예컨대 역사적으로 그것은 거리에서의 시위나 봉기, 대중 회합, 대규모의 청원 운동, 관청에 대한 습격 등)을 띠고 있다. 이는 ‘여가 없는 보통 사람들’이 가진 한계로 인해 비제도적인 형태, 간헐적이고 일시적이며, 즉흥적인 형태를 띠긴 하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드러내는 저항의 차원을 가진다. 말하자면, ‘탈주적 민주주의’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들이 가진 작은 힘을 모으는 것 이외에는 부당한 것을 바로잡을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제기되는 고충에 호응하는 넓은 범위의 가능한 형식들 및 그 변형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탈주적 민주주의는 기존의 정치제도 내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대변 받지 못하는 데모스들의 고유한 정치 참여의 한 양식이자, 데모스가 자신의 정치적 권력을 드러내는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민주주의에 대한 이와 같은 월린의 관점은, ‘탈주적 민주주의’가 단지 전도된 전체주의 아래에서 나타나는 민주주의의 방어적인 전략이라기보다는 민주주의 그 자체의 고유한 성격임을 시사하고도 있다. 이는 민주주의를 대의제의 형식으로 환원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오늘날의 지배적인 관점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월린은 민주주의가 기본적으로 정치사회를 다스리거나 지배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이는 민주주의가 기본적으로 여가 시간이 없는, 가난한 계급의 지배로 규정(아리스토텔레스)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늘 경제적 생존이라는 문제에 사로잡혀 있었고, 열악한 조건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고단한 부담 탓에, 정치적 삶에 자신을 헌신하겠다는 소명 의식을 거의 가질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이와 같은 현실은 다수 대중이 통치를 했던 시기(말하자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주주의의 시기)가 역사적으로 매우 드물었고, 간헐적이었으며, 희귀한 현상이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나아가, 역설적으로 오늘날 민주주의의 역사와 그 제도는 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현실에서 실현시키려 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민중의 통치를 두려워하고, 이를 견제하고, 정치의 장에서 일반 대중이 출현하는 것을 최대한 제약하고자 노력했던 엘리트들(예컨대 매디슨을 위시한 미국의 헌법 제정자들)에 의해 주형되었다는 점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월린은 이처럼 민주주의를 하나의 통치의 형식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맞서, 민주주의를 하나의 저항과 투쟁의 형식으로 재규정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한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그 정의상 데모스의 권력 내지 통치를 의미했지만, 사실상 데모스는 그와 같은 권력을 행사하고 사회를 통치할 시간도, 여력도 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사실상 민주주의는 하나의 온전한 통치 형식이라기보다는, 저항의 형식으로, 탈주적 민주주의의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월린이 보기에 민주주의는 이전 세대들에 의해 가능해진 사회적 협력과 성취의 혜택을 좀 더 광범위한 시민들에게 확장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체제에서 대변되거나 포섭되지 못한 데모스의 고유한 권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민주주의는 제도화된 과정이 아니라, “순간의 경험이며, 고생고생해서라도 남부럽지 않은 삶을 영위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인 사람들이 절실하게 느끼는 고충이나 필요에 대한 반응”이며,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들이 가진 작은 힘을 모으는 것 이외에는 부당한 것을 바로잡을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제기되는 고충에 호응하는 넓은 범위의 가능한 형식들 및 그 변형태들”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원래 민주주의란 곧 부당한 것을 바로 잡는 시정의 정치, 즉 (더 많이 가졌고 더 많이 교육받은 이들이 통치를 독점하게 만드는) 부와 권력의 극단적 불평등을 완화시키기 위해 보통 사람들이 ‘감히 나서는 것’이나 공동의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좌절과 분노, 폭력의 계기 속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탈주적인 민주주의fugitive democracy였다. 또 그 좌절, 격정, 폭력은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기층민을 ‘소란을 일으키는’ 족속으로 묘사하도록 자극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