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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 (2015)

동방박사님 2023. 6. 21.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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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R.H. 토니(Richard Henry Tawney)의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은 자본주의 시대의 가장 큰 문제점 가운데 하나인 불평등의 문제·공동체(공공문화) 붕괴의 문제를 다룬다. 특히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분석하고 그 해결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유럽에서는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잇는 대작으로 평가받는다. 대공황이 전 세계를 휩쓴 1926년 출간되어 전간기(戰間期)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으로도 유명하다. 최근에는 ‘종교인의 사회참여’라는 측면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저자 소개 

역 : 고세훈 (高世薰)
 
연세대학교 경제학과(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석사)를 거쳐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영국 노동당 정치에 관한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 공공행정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자신의 주된 직분이라고 생각한다. 윤리적 의무의 관점에서 교수의 역할을 바라보는 드문 유형이다. 스스로 의식할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학생들을 일컬을 때면 꼭 "우리 아이들"이라 말한다. 그 아...

출판사 리뷰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노동당 활동가,
20세기 영국 정치사상의 뿌리

노동자교육협회 집행부 시절인 50대 초반의 토니.


영국노동당 안팎과 영국 사회주의 좌우에서 토니만큼 존경과 사랑을 받은 인물도 없다. 그의 인간성과 사상, 개인적 행로와 공적 활동이 엄정한 일관성을 유지하며 한 치의 어긋남도 허용치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토니는 노동당 정치를 주도했던 수많은 지식인·정치인에게 사상의 뿌리 역할을 한 대학자다. 그는 전간기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을 쓴 저명한 경제사학자며, 『취득형 사회』와 『평등』 등의 저술로 영국 사회주의사에 윤리적 신조를 부여한 정치사상가다.

토니는 노동당 정치 현장을 떠나지 않은 정치인이었고, 평생을 자선과 노동자교육에 헌신한 사회 활동가, 성인교육 개척자, 완전무상 중등교육 주창자, 대학개혁가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동료들과 달리 장교가 아닌 일등병으로 자원하여 솜(Somme) 전선에서 치명상을 입기도 했고, 네 차례나 선거에 패했으면서도?한 번은 당선이 확정적인 선거구를 고사했다?영국 정치인 누구나 선망하는 상원의 작위를 거부했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검소와 절제의 삶을 살았다.

토니는 “사회주의에 대해 글을 썼을 뿐 아니라, 개인의 삶에서 자신이 말한 바를 구현”한 인물이다. 그는 개인적 삶의 경험과 현실사회와의 끊임없는 실천적 교류 속에서 이론과 실천의 접점지대, 원칙과 행동의 중간지대에서 양자를 오가며 그 둘의 변증법적 통합을 구현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경제가 성장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평등과 연대의 회복이 답이다!


흔히 우리나라를 기적을 이룬 나라라고 부른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도약했다는 콘셉트는 국가 브랜드 광고에서 빠지지 않는다. 경제지표로만 따져보면 대한민국은 ‘확실하게’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정책지표를 따져봐도 경제성장을 최우선 과제로 꼽지 않은 적이 없다. 우리나라와 경제성장의 관계는 의심할 여지 없이 언제나 늘 장밋빛이다.

기적을 이룬 우리는 행복한가? 누구도 쉬이 대답하지 못한다. OECD 국민행복지수를 보면 언제나 꼴찌에서 1, 2위를 다툰다(2014년 기준 34개국 중 33위). 노인자살률, 주거문제 등 세부적인 항목을 보면 비참한 수준이다. 기적이라 불릴 만큼 경제는 성장했는데 왜 우리는 행복하지 않을까?

토니는 경제성장은 답이 아니라고 과감하게 외친다. 중요한 건 바로 ‘평등’이다. 토니에게 평등은 좋은 사회를 판가름하는 기준인데, 그는 평등을 숫자로 따져서는 알 수 없는 ‘관계’의 문제로 본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는 ‘사적인 사회’다. 사적 이익이 공동의 이해를 대체해 소유와 권력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된 사회 말이다. 필연적으로 관계가 절연될 수밖에 없다.

‘관계가 끊어진 사회, 공동목표가 없는 사회, 권리만을 주창하는 사회, 그리하여 본질상 불화의 사회.’ 토니는 이러한 사회를 ‘취득적(acquisitive) 사회’라고 부른다. 이런 사회에서는 경제가 아무리 성장해도 자기 몫을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사회적 갈등에 경제성장이 답일 수 없는 이유다.

이에 토니는 취득적 사회와 대비되는 새로운 사회 모델을 제시한다. 바로 ‘기능적 사회’다. 기능적 사회는 단순한 자본 축적이 아니라 공공서비스를 강조한다. 쉽게 말해 복지를 강조한다. 실제로 토니는 국가 주도의 복지정책을 강조했다. 물론 그가 각종 사회적 문제를 두고 마치 ‘공무원처럼’ 아주 간단하게 행정적 방안을 해결책으로 제시한 건 아니다. 토니에게 복지정책은 일종의 하부구조다. 이 하부구조를 바탕으로 우리가 정말 키워내야 하는 건 바로 ‘공공문화’다.

토니는 공동문화를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들어 설명한다. 즉, 개인이란 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개인이라는 것이다. 이때 공동체는 공동문화를 요구하며 고차원의 공동문화는 문명이 소수 엘리트가 아닌 모두의 공동과제라는 확신 그리고 공유된 생활방식을 토대로 피차 소통할 수 있는 결속과 형제애에 의해 형성된다.

‘결속과 형제애,’ 바로 ‘관계’의 회복 말이다. 관계를 회복하고 공동체를 회복하면 구성원에게 순위를 매겨 줄 세우는 일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토니가 말한 ‘평등’이다. 복지정책은 이러한 공동문화를 키워내기 위한 최소한의 현실적 발판 역할을 할 뿐이다. 복지 얘기만 나오면 색깔론으로 몰아가면서도 정작 GDP 대비 복지예산비율은 OECD 꼴찌(2014년 기준)인 우리나라가 새겨들을 만한 점이다.

“공동문화는 욕구한다고 창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조직의 실질적 토대 위에 구축되어야 한다. 상이한 계급의 경제적 기준과 교육적 기회가 심대하게 대립하는 곳에서는 공동문화가 아니라 한쪽의 굴종 또는 분노 그리고 다른 쪽의 시혜 또는 오만이 결과한다.”

“공동문화의 창발은 인간에 대한 믿음에서부터”
토니 사상에서 기독교가 차지하는 위상


토니의 말이 대공황 시기의 영국에서 폭발적인 공감을 얻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비록 영국이 미국이나 그밖의 유럽 국가들과 달리 이미 워낙 깊은 침체기에 빠져 있어서 대공황 자체에는 큰 타격을 받진 않았지만 경제가 최악의 상황임은 틀림없었다. 그런 여건 속에서도 복지 문제에 크게 주목했다는 점은 그 사회가 얼마나 ‘인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실제로 토니도 ‘사람의 사람됨’을 강조했고 그 가능성을 믿었다. 인간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최상의 이익’을 명백히 인식할 수 있는 합리적 피조물이기 때문에, 도덕적·윤리적 합의는 이미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나는 감히 말한다. 우리는 이미 어떤 행위가 옳고 그른지를 알고 있다고. 이제 우리가 아는 것에 기대어 행동하자.”

그렇다면 이러한 믿음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바로 ‘기독교’다. 토니의 마지막 제자인 에일머(Gerald Aylmer)에 따르면 토니는 “가장 먼저 크리스천이었고, 그다음에 민주주의자였으며, 그다음에 사회주의자였다.” 과연 기독교 신앙은 토니에게 사적 신앙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기대어 행동’해야 할 사회적 실천이다. 실제로 토니는 기독교적 관점을 사회와 사회구조의 문제에 적용하는 데 헌신했다. 그는 기독교를 실천적인 종교이자 생활방식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교회는 경제적 삶의 관계들과 국가의 행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토니 특유의 기독교 신앙은 평등의 문제와 만난다. 그에게 ‘사람의 사람됨’은 신이 부여한 것이고 신의 ‘인격성’과 공유하는 것이기에, 모든 사회적·민족적·인종적 차별은 신의 의도와 목적을 거스르는 것이다. 절대적 존재로서 신을 상정한다면 그 앞에 인간의 차이는 한없이 사소해진다. 물론 차이는 개성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차이를 가지고 구분 짓고 차별한다는 데 있다. 신을 잊은 인간은 서로를 차별할 뿐이다.

“기독교적 인간개념의 당연한 귀결은 강력한 평등의식이다. 평등은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영민하거나 동일하게 덕스럽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단지 그들이 인간이라는 이유 때문에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는 의미다.”

칼뱅. 후기 칼뱅주의는 사회적 연대를 개인주의로 대체했다는 한계를 지닌다.

토니는 ‘기독교’라 지칭하지만 사실 이러한 생각은 모든 사회에 필요하다. 어쩌면 보편적이라 할 평등의 가치가 사라지면 그곳엔 ‘우상들’만이 자리한다. 자본주의의 부의 숭배, 전체주의의 권력숭배가 그것이다. 토니는 이를 ‘정신병적 질환’으로 보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 사회는 그 질환에 감염되었다.

이것이 종교개혁 이후 자본주의가 득세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쓴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에서 토니가 내린 결론이다. 베버의 말대로 프로테스탄티즘은 구원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노동을 강조했고 이것은 초기 자본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동반한 근대적 경제관계(계약)는 유대를 약화했고 교회는 자본주의의 윤리적 계도라는 역할을 포기해버렸다. 자본주의의 역습이 시작된 것이다. 이제 공공문화는 무너지고 사적 권리와 사적 이익만이 남게 되었다.

“중요한 건 인간적인 용기!”
테러에 대처하는 자세


공공문화의 폐허 위에서 토니는 기독교적 가치를 강조한다. 물론 꼭 ‘기독교’가 아니어도 된다. 토니가 굳이 기독교를 강조한 이유는 유럽인이라는 배경 때문일 것이다. 우리도 우리 고유의 고고한 선비문화가 있지 않은가. 그 안에서도 얼마든지 “자본주의에서의 경제적 삶의 도덕화, 자본주의 문명의 재정신화”를 위한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철학은 사회는 경제적 메커니즘이 아니라 공동의 목적에 대한 헌신하는 의지들의 공동체임을 시사한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종교철학이다.”

‘종교철학’의 뿌리를 어디에 두든-기독교든 선비문화든-중요한 건 행동이다. 토니가 가장 강조하는 것도 결국은 ‘행동’이다. 공공문화를 다시 회복시킬 행동 말이다. 토니는 (기독교도였기에) 행동의 실마리를 교회에서 찾는다. 교회의 임무는 도덕적 설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공공문화를 되살리기 위해 용기 있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자본주의의 패악을 경계해야 하고 복지정책을 세우기 위해 사회구성원들과 연대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교회는 “승리하면서 입을 닫은 교회”일 뿐이다. 이런 교회는 인간의 삶을 이기심과 탐욕에 방치하며 결국 개개인의 영혼을 ‘탈기독교화’시킨다.

이처럼 토니에게 행동이란 사회적 구조에서부터 인간의 영혼에 이르기까지 ‘전면적 변화와 개선’을 이루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다. 급진적이기까지 한 ‘행동’의 가치는 테러와 전쟁으로 신음하는 오늘날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ISIS의 잔악한 행동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결국 제국주의 시절 서구사회가 뿌려놓은 씨앗을 발견하게 된다. 자유·평등·박애를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면서도 2001년까지 ‘알제리 전쟁’ 자체를 인정하지 않은 프랑스, 유대인에겐 무릎까지 꿇었으면서도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자행한 극악한 살육에는 입도 벙긋하지 않은 독일. 한때 태양이 지지 않는 ‘제국’이었던 영국이나 냉전 시절 CIA를 통해 세계 각국의 국가테러를 기획한 미국은 말해 무엇하랴.

이런 상황에서 ISIS를 향한 보복성 ‘폭격’은 일종의 거만함에 지나지 않는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는 폭격의 거만함, 자본주의의 패악은 늘 그런 거만함에서 비롯된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필요한 건 그런 거만함이 아니라 공공문화를 되살리는 일이다. 시장과 정치적 이해에 자리를 잃은 결속·연대·형제애를 되살려야 한다. 이런 ‘전면적 변화와 개선’을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이 어제의 적을 오늘의 형제로 맞아들이는 ‘인간적인 용기’에 물꼬를 트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