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한반도평화 연구 (독서)/5.한국전쟁

한국전쟁의 기원 2-Ⅰ(2023) - 폭포의 굉음 1947~1950

동방박사님 2023. 6. 25. 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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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한국어판 서문
머리말

1장 책을 시작하며 ─ 미국 외교정책의 방법과 이론에 대한 회고
과학과 신비: “고도로 비선형인 불안정한 자유경계의 문제” | 미국 외교정책의 이론을 향해 | 이해할 수 없는 점진주의와 미국의 달걀 | 계급투쟁의 목적과 그 결과로서의 국가 | 지배자와 이해관계 세력 | 국제협력주의/제국주의와 팽창주의/민족주의 | 미국 외교정책의 요소: 국제협력주의·봉쇄·반격

1부 미국

2장 봉쇄와 국제협력주의
정치가 애치슨 | “거대한 초승달 지대”: 애치슨 라인 | 케넌의 공학工學 | 전략의 정치: 한국을 둘러싼 국무부와 육군성의 갈등 | 워싱턴의 이승만 로비: “나는 이승만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곤경에 빠졌습니다” | 유엔이라는 타협 | 2차 미소공동위원회 | 유엔과 1948년 선거
3장 반격과 민족주의
미국 민족주의의 재검토: 고립주의/반격의 정치·경제 | 팽창주의와 광물 | 반격론자와 공군력 | 맥아더와 윌러비: 지방의 반격 사령부 | 중국 로비, 매카시즘, 반격 | 제임스 버넘: 개입주의의 이론가
4장 예정된 미로로 들어가는 운명: 첩보원과 투기꾼들
중앙 정보기관 | 도너번의 냉전 거점 | 동아시아의 비공식적 관계자들: 셔놀트, 폴리, 윌로어, 쿡 그리고 그 밖의 중요 인물 | 굿펠로의 특수 임무 | 미로 속의 두더지: 영국의 첩보원 | 금광을 모두 점유하다: 황금·텅스텐·흑사黑砂·콩 | 콩의 가격 조작 | 결론
5장 관료 기구에 침투한 반격
봉쇄와 반격: 일본과의 관계 | 넓어진 초승달 지대 | 일본 로비와 미국의 정책 | 국가안보회의 문서 68의 봉쇄와 반격 | 결론

2부 한국

6장 남한의 체제
청년 단체의 대두 | 서북청년회 | 조합주의로 조직된 노동 | 남한 체제
의 이념 | 교육자 안호상 | 한국의 자유주의와 이승만의 적대 세력 | 이
승만의 지도력 | 이승만과 미국인 | 대일 협력의 문제
7장 남한 체제에 대한 저항
1947년: 의미 없는 1년 | 촌락에서 전개된 투쟁 | 제주도의 반란 | 여순반란
8장 유격대 투쟁
전라도의 유격대 | 경상도의 유격대 | 유격대가 사용한 방법 | 외부의 개입과 진압활동 | 결론
9장 북한의 체제
대중 정당 | 협동조합주의와 혁명적 민족주의 | 정치적 탄압 | 경찰과 첩보
10장 소련과 북한
소련계 한국인 | 북한의 정치·경제와 소련 | 소련을 보는 북한의 시각
11장 북한의 대중 관계
1949~1950년 소련군 철수와 중국 영향의 유입 | 군대 통제라는 문제 | 마오쩌둥의 승리라는 다루기 힘든 영향: 동방은 붉은가? | 소련의 원자폭탄 |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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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3부 1950년 6월의 서곡

12장 적절한 간격: 미군 철수, 38도선 일대의 전투, 유격대 진압
봉쇄선 위의 한국 | 제한전과 전면전 | 1949년 38도선 일대의 전투 | 유격대 문제의 최종적 해결 | 결론
13장 “연설”: 프레스 클럽에서 제시한 애치슨 방식의 억제
예측하기 어려운 사태를 포착하고 이해하는 능력 | 애치슨의 극동 구상 | 타이완을 둘러싼 책략 | 프레스 클럽을 향해 | 평양의 문맹文盲 | 방어에 대한 애치슨의 생각 | 애치슨은 공격이 일어날 것을 고려했는가? | 프레스 클럽 이후의 연설: 총력외교와 인도차이나에 대한 관여
14장 전쟁 직전의 북한
1950년 북한에 대한 소련의 영향 | 북한에 대한 소련의 군사 지원 | 북한 군사 행동의 징후 | 북한의 동기
15장 전쟁 직전의 남한
“일본 바로 옆”: 한국의 경제적 존재 이유 | 한국과 미국의 군사 관계 | “혼수상태의 위원회” | 5월 30일 총선거 | 혼란─나라를 구하려는 이승만의 노력 | 깊어지는 남한과 중국의 관계 | 홈부르크 모자를 쓰고 참호에 선 덜레스
16장 타이완의 암시
“주타이완 미국 군사고문단”의 문제 | 도너번의 특별 임무 | 굿펠로의 특수 임무: 청천백일기 대신 태극기를 게양하다 | 셔놀트의 특별 임무 | 쿡의 특수 임무 | 침공 | 쿠데타: 총통의 축출을 시도하다 | 결론
17장 6월의 어느 고요한 주말: 전쟁 직전의 도쿄, 모스크바, 워싱턴
의외의 삼각관계: 덜레스, 존슨, 맥아더 | 근접성의 위험 | 전쟁 직전 소련의 정책 | 데레뱐코 사건 | 전쟁 직전의 워싱턴
18장 누가 한국전쟁을 일으켰는가? ─ 세 개의 모자이크
옹진의 충돌 사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 전혀 몰랐다” | 개성에서 일어난 폭발 | 동부로 확대된 전투 | 남한과 북한의 일요일 | “북한이 침공했다는 증거 문서” | 그 밖의 증거 문서 | 두 번째 모자이크 | 정보 오류: “기묘하게 조합된 모자이크” | 선호하는 모자이크 | 결론: 결의의 본래 색깔

4부 종막

19장 봉쇄를 위한 전쟁
유엔의 행동 | 전쟁에 대한 미국의 반응 | “소련의 정말 엄청난 실수”: 전쟁에 대한 모스크바의 반응 | 중국의 반응 | 부산에 대한 맹공 | 인천 상륙: 거점의 확보
20장 한국전쟁의 정치적 특징: 인민위원회와 흰 파자마
서울 점령 | 인민위원회의 재건 | 토지개혁 | 지방 정치 | 남부의 유격
전 | “흰 파자마”: 인민 전쟁과 인종차별의 문제 | 잔혹 행위의 문제 |
북한의 잔혹 행위 | 미국의 잔혹 행위
21장 반격을 위한 전쟁
커지는 소용돌이 | 남한의 북한 점령 | 크게 입을 벌린 함정: “우리는 메추라기 떼를 쫓아버렸다” | “중국군이 넘쳐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참전 | 호혜주의의 원칙 | 충격에 빠진 워싱턴 | 새로운 무기
22장 결론: 석양
패권의 구축과 재편: 한국인의 전쟁이 아니었다 | 얽힌 실과 풀린 실 | 역사와 기억 | 서쪽을 향해: 팽창주의의 종언 | 중심지의 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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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 : 브루스 커밍스 (Bruce Cumings)
 
1943년 미국 뉴욕주 로체스터 출생. 1965년 데니슨대학 심리학과를 졸업한 뒤 1967년 인디애나대학에서 석사, 1975년 컬럼비아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7~1968년 서울에서 평화봉사단US Peace Corps으로 일하면서 한국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1975~1977년 스워츠모어대학 조교수를 시작으로 1977~1987년 워싱턴대학, 1987~1994년 시카고대학, 1994~1997년...

역 : 김범

 
1970년 서울 출생.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이다. 조선 전기 정치사를 연구해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저서에 『사화와 반정의 시대』 『연산군―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 『사람과 그의 글』 『민음 한국사―15세기』(공저), 번역서에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유형원과 조선 후기』(제임스 B. 팔레), 『조선왕조의 기원』(존 B. 던컨), 『무신과 문신』(에드워드 슐츠), 『조선의 변방과 반란, ...

책 속으로

나는 당초 두 권을 계획한 것이 아니었다. 1940년대 후반의 한국 관련 자료들을 연구하면서 나는 두 권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는데, 1947년은 미국 정책에서 분수령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냉전은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본격화했을 뿐 아니라 딘 애치슨은 그 독트린을 한국을 방어하는 데까지 확장하려고 했다. 나는 이것을 1947년 1월에 작성된 다른 자료에 스테이플러로 첨부된 수기 메모에서 처음 봤는데, 거기서 조지 마셜 국무장관은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그것을 일본 경제와 연결시키라고 애치슨에게 지시했다. 이것은 완전히 수정된 일본 정책의 일부였는데, 일본 인접 국가들의 산업을 복구하는 방침을 철회하고 일본의 군사력과 정치력을 박탈하되 경제적 거점으로 다시 복원하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이었다(이것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1977년 나는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있었는데, 한 직원이 큰 손수레 가득 골판지 상자를 싣고 가면서 내게 그 안에 든 것을 읽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242 기록군Record Group’인 ‘노획 문서’였는데, 1950년 가을 미군이 북한을 점령했을 때 수집한 출판물과 극비 자료의 보고였다. 갑자기 내 연구 주제가 내 앞에 펼쳐졌다. 이를테면 1940년대에 발간된 『노동신문』은 북한 바깥에서 이용할 수 있는 복사본이 없었지만, 이 문서에는 그 공식 기관지가 거의 다 들어 있었다. 2년 넘게 이 자료들을 읽으면서 북한에 대한 내 이해는 극적으로 달라졌다.

1권에서는 기존의 미국 비밀문서와 1940년대 후반 남한에서 간행된 자료를 주로 이용했지만 이제 나는 어떤 기록 보존 담당자도 볼 수 없었던─그들은 그 언어를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자료를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CIA와 그 밖의 정부 기관이 오랫동안 이 문서들을 간헐적으로 삭제한 정황이 있었지만 대부분 그것은 1951년의 자료를 손에 들고 있는 것과 같았다). 한국전쟁과 관련된 글을 쓴 미국 학자들이 대부분 한국어를 읽지 못한다는 것은 슬픈 사실이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인 윌리엄 스툭William Stueck은 242 기록군에 흥미로운 것이 있느냐고 내게 뻔뻔스레 묻기까지 했다. 당신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나는 말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 두 가지 신념은 내가 이 책들을 쓸 때보다 더 깊어졌다. 첫째는 특히 군대와 경찰에서 일본에 협력한 거의 모든 한국인을 다시 고용하기로 한 미군정의 결정이 무엇보다 가장 압도적이고 우선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1945년 한국인 항일 유격대를 추격하던 일본군 대좌였던 김석원이 1949년 여름 내내 38도선의 지휘관이 되리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반면 북한 지도부는 거의 모두 항일 유격대원 출신이었다. 또는 이것을 생각해보라. 일본군 장교이자 서로 좋은 친구 사이였던 두 사람이 1946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2기로 졸업했다. 그들은 박정희와 김재규다. 그 뒤 베트남에서 프랑스에 협력했던 장교들을 다시 채용하면서 되풀이한 이 근본적인 오판은 식민지에 반대한 투쟁을 거쳐 건국한 미국이 20세기 중반 무렵 그런 지향을 완전히 포기했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 신념은, 1945년에 등장한 인민위원회는 매우 중요했지만 한국전쟁 관련 문헌에서 거의 완전히 무시돼왔다는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좀더 깊이 인민위원회를 연구하면서, 특히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3년 동안 평화롭게 존속했지만 섬 인구의 적어도 10퍼센트가 끔찍하게 학살된 수치스런 유혈사태로 끝났고 그 학살은 미국인과 앞서 일본에 협력한 한국인 장교들이 주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누구나 곧 북한이 한국인 대다수가 반역자로 간주하는 사람들을 적대시함으로써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할 방법을 찾으리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게 됐다.

2권을 완성하고 몇 년 뒤 소련의 한국전쟁 관련 문서가 기밀 해제됐다. 내가 이 문서의 내용을 통찰하지 못했다는 비난이 상당히 빠르게 쏟아졌다. 그 문서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키는 데 소련이 더 강력하게 개입했음을 보여줬다. 242 기록군을 토대로 한 것이기는 했지만, 내가 북한의 독립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은 잘못이었다. 북한이 그의 승인 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하기에 스탈린은 너무나 엄청난 인물이었다. 소련이 이 전쟁에 참전하려 하지 않았다는 내 주장은 옳았다. 내가 살펴본 정보자료들에 따르면 개전 이후 소련 잠수함들은 한국 해역에서 신속히 퇴각했고, 조선인민군 군사 고문들은 철수하거나 귀국했으며, 1950년 후반 북한이 가장 큰 위기에 빠져 있을 때 스탈린은 그들을 위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중국이 참전한 부분적인 이유는 동북부의 자국 산업시설을 보호하고 이르면 1920년대부터 중국에서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한 수만 명의 한국인에게 보답하는 데 있었다고 나는 주장했다. 중국 학자들이 많은 새 문서를 바탕으로 한국전쟁과 관련된 뛰어난 저서를 여럿 냈지만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내 판단을 바꿀 이유를 찾지 못했다.

나는 ‘음모론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은 음모에 대한 많은 환상을 갖고 있지만, 도널드 트럼프에게서 보듯 그것을 입증할 사실은 거의 없다. 1950년 6월 마지막 주에 문서로 작성된 몇 가지 음모가 교차됐기 때문에 독자들은, 특히 2권을 읽으면서, 많은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문서보관소에서 내가 본 것과 같은 자료를 분석한 저명한 역사학자들이 자신의 논저에서 그 자료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을 보고─이를테면 장제스를 실각시키려는 미국의 쿠데타 계획─나는 그 증거들이 이런저런 문서보관소에서 묵혀지도록 내버려두는 것보다 증거가 있는 한 특정한 이야기를 따르기로 했다. 이 방법도 특정한 문서를 기밀 해제하지 않는 미국 당국 때문에 원활하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모든 작가가 바라는 탐구심 있는 독자들에게 봉사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나는 1945년 이후 이 유서 깊은 나라를 경솔하고 분별없이 분단시킨 미국의 고위 지도자들(당시 존 J. 매클로이보다 더 ‘고위’ 인사는 없었다)이 촉발한 분열에 나 자신을 개입시키지 않으려고 늘 노력했다는 사실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생산된 미 국무부의 많은 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유격대 출신의 한국인들이 집권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한국에 들어갔고, 이제 그들은 그런 유격대의 후계자들이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가지고 평양에 앉아 있다고 말한다(이것보다 실패한 정책은 생각하기 어렵고 해결책도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한국을 분단시킨 것이 내 조국이었기 때문에 나는 늘 책임감을 느꼈는데, 내 개인적 견해가 어떻든 남한이나 북한 가운데 어느 한쪽을 편들 수 없다는 뜻이다. 결과와 상관없이 나는 면밀한 역사적 탐구가 두 한국이 누려야 할 화해로 가는 최선의 처방이자 방법이라 믿고 있고 늘 그렇게 믿어왔다. 진실은 당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이 경우 진실은 주요 문서들에서 찾을 수 있는데, 거기서 역사의 배우들은 자신이 대중에게 한 말과 곧잘 정반대로 행동했다.
사람들은 한국전쟁에 대한 내 ‘견해’를 자주 묻고 나는 친절하게 대답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나는 이 두 책에서 이전의 기밀문서에 대한 내 판단의 근거를 제시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언젠가 누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 모두는 자신의 견해를 제시할 권리가 있지만 자신의 견해를 사실이라고 주장할 권리는 없다.

나는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준 한국인들에게 감사하면서 1권을 시작했다. 내가 한국어를 배워 읽을 수 없었다면 그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두 책 모두 한국어로 충실히 번역돼 한국에서 읽을 수 있게 돼 정말 기쁘다.
---「한국어판 서문」중에서
 

출판사 리뷰

한국어판 출간의 의의

지금 이 시점에서 『한국전쟁의 기원』을 펴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신복룡 교수가 말한 것처럼 한국전쟁은 매우 난해하고도 미묘한 성격을 안고 있다. 선전 포고가 없는 전쟁, 승패가 없는 전쟁, 미국이 승리하지 못한 최초의 전쟁, 악을 제거하지 못하고 오히려 분단을 고착화시켜 민족사적 비극을 극대화시킨 전쟁, 이데올로기적 결전(냉전)을 가속화시킨 전쟁, 무엇보다도 개전의 책임에 대해 가장 논란이 많은 전쟁이었다. 여전히 진행 중인 전쟁이고, 전쟁의 상대방인 북한은 이제 핵무장을 완성했고, 변함없이 한반도는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고, 38선 인근의 작은 도발도 톱뉴스가 되는 사회에서 이 전쟁은 결코 역사가 될 수 없다. 여전히 우리 현실을 강하게 규정하고 있는 현안이다. 아직까지도 유일하게 분단체제라는 말이 유효한 땅에서 한국전쟁은 겉으로 드러난 전투 양상과 개전의 책임론에 가려진 긴 시간 동안의 사회동학 문제가 다시 전면에 올라올 필요가 있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은 바로 이 측면에서의 탁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커밍스의 책에 대해서는 수많은 이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비판도 많이 이뤄져왔다. 그중 소련의 지령을 받은 북한의 대대적인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됐다는 전통주의 학설에 최초로 이의를 제기한 ‘수정주의’라는 점은 이제는 그다지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전통주의, 수정주의, 신수정주의 등의 담론의 틀에서 커밍스의 잭을 재조명하는 일은 입체적인 이 책을 지극히 평면적으로 단순화시키기 때문에 극도로 피해야 할 일이다. 사실이 잘못돼 수정해야 한다는 의미의 ‘수정’이란 말에 ‘주의’를 붙인 자체가 애초에 무리한 어법인 데다, 워낙 오류로 밝혀져 폐기된 입장도 많아 논의 지형 자체가 그 유효성을 상실했다고 보는 게 옳다.

『한국전쟁』을 쓴 정병준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1950년 6월에 전쟁이 시작된 것은 어느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커밍스의 주장을 비판했지만 정작 커밍스의 책을 통독해보면 커밍스가 이 전쟁에 대해 미국책임론에 크게 기울어져 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한국전쟁에서 지나치게 내부적 요소를 강조해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규정한 것에 대해서도 많은 비판이 있었지만, 이번 완역판을 찬찬히 읽어보면 커밍스가 ‘내전’을 강조한 이유는 미·소 양국의 대립으로만 이 문제를 바라보는 것에 문제제기를 하기 위함이었지, 그가 한국전쟁이 “내전적 성격을 띤 국제전”이라는 점을 부정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미국의 세계 전략에 따라 전쟁으로 귀결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복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커밍스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인 박명림 교수는 “남침설을 가장 강력하게 회의하며 이에 대한 반명제를 구명하려 시도해온 브루스 커밍스”라고 지적했지만, 커밍스는 북침설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고 애초에 지적했으며, 1950년 이전부터 중소규모의 유격전과 국지전이 1년 넘게 반복되며 10만 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의 전면전으로의 전환이 과연 남침이라는 말로 정리될 수 있는 것이냐는 회의감이자 더 정확한 실상에 대한 요구였을 뿐이다.

1952년에 『한국전쟁의 비사』를 펴내 전쟁이 일어날 걸 알면서도 이승만, 맥아더, 덜레스, 장제스 등이 침묵의 음모로 그것을 방조했다는 I. F. 스톤의 ‘남침유도설’에 더해 커밍스의 책에서도 그 부분이 재검토되고 있다. 이에 대해 커밍스를 ‘음모론자’로 보는 입장도 생겼지만 전쟁 당시 미 국무부의 딘 애치슨이 나중에 사석에서 “한국이 우리를 구했다”라고 말했던 건 사실이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의 세계 패권 추구에 필요한 국방비 증액과, 분열된 국론의 통일에 있어 한국전쟁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은 주지의 일이다. 한국 내부의 동학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농민’ 섹션을 너무 중시했고, ‘노동’과 ‘노동자’ 섹션이 갖는 중요성은 거의 다루지 않았다는 손호철 교수 등의 지적도 있었다.

아무튼 이제 『한국전쟁의 기원』은 그 육중한 몸체를 그대로 내보이게 됐다. 특히 번역되지 않아 소문만 무성했던 제2권은 분량도 1권의 두 배에 달하는 데다 1945~1947년을 다룬 1권에 비해 1947년부터 전쟁 발발까지를 다루고 있으며, 1권과는 달리 한반도의 상황보다 먼저 미국의 외교정책, 세계정책, 한반도정책, 소련정책, 일본정책 등을 매우 밀도 깊게 구체적으로 짚어 이 전쟁의 국제전적 측면을 정말 공을 들여서 그려내고 있다. 이제 커밍스의 책은 한국 사회에서 다시 읽히고rereading, 그럼으로써 이 책이 식민지시대부터 한국전쟁 때까지 이 사회가 겪은 여러 가지 격동적 변화와 그로 인해 배태된 사회적 갈등과 그 분출을 촘촘하게 그려낸 시대의 세밀화라는 점을 충분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분단체제의 출발점이었던 미 군정의 진주와 미국이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막고, 정치경제적으로 패권을 추구하기 위한 외곽 한계선을 설정하기 위해 이 땅에서 벌인 구체적인 일이 어떤 것이었는지 등에 대해서도, 식민지에서 우후죽순처럼 막 독립한 나라와 민족들을 통제하고 이것을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해 그들이 짰던 전략과 실수들, 그에 기반해서 이뤄졌던 사회 통제와 회유, 탄압 등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혁명이 아니면 해결하기 힘들 정도로 계급 갈등이 심각해 식민 권력이 물러난 무주공산에 사회주의 혁명의 분위기가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강력했다는 점, 그렇기에 북한의 남한 적화 야욕이 그 당시 문맥에서는 그다지 끔찍한 상상력이 아니었다는 점 등에 대해서도 진영과 이념과 매너리즘에서 벗어난 현실주의의 시각에서 많은 논의가 있었으면 한다. 여전히 민족적 현실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감정적이 되고, 피해의식에 휩싸여 있는 대중적 분위기에서는 철도 부설과 산업화 시설 같은 식민지 근대화의 측면을 여타 서방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의 나라들과 다른 한국의 특수성으로 인정한 커밍스의 입장은 불편할 수 있지만, 반대로 그가 이 책에서 미군정이 친일 세력을 그대로 용인하고 행정 권력으로 연착륙시킨 지점을 반복하여 강력하게 비판하고, 그것이 내전적 요소의 핵심으로 강조한다는 점은 우리에게 분명히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2권, 폭포의 굉음 1947~1950

1947년 초까지 한국과 그 내부의 분쟁이 사건의 과정을 좌우했다. 한국에서 냉전은 1945년에 시작됐으며, 한반도에서 전개된 미·소의 긴장과 한국의 사회·정치적 움직임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 전개되면서 미숙한 봉쇄 정책도 시작됐다. 1946년 중반 사실상 두 국가는 경계선으로 굳어져가고 있던 38도선의 방어물에 병력을 배치할 필요가 커지면서 경쟁을 강화하고 확대했다. 미국의 전면적 관리를 받는 남한만의 단독 국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은 해방된 이듬해에 중대한 전환점을 맞았으며 미국의 정책은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섰다. 가을 봉기에 대한 탄압은 식민 정부의 가공할 강압적 측면을 보여줬으며, 한국 정부의 관료들에게는 생명의 호흡을 줬다. 그때까지 사태를 지배해온 남한의 좌익은 세력을 잃고 활동의 중심을 평양으로 옮겼다. 1947년 중반 여운형은 사망했고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종속됐다.

1947년 초 트루먼 독트린과 일본의 산업부흥은 전체적인 중심을 이동시켰고, 그 뒤 3년 동안 외부 세력은 한국의 정세를 좌우했다. 한국의 봉쇄 정책은 그리스와 터키뿐 아니라 한국도 “방어선에 포함시키지 않기로 한” 애치슨의 결정을 미리 보여줬으며 고위층의 승인을 얻었다. 그러나 그 배경에 있는 것은 공산주의에 대한 하지의 우려가 아니라 거대한 초승달 지대라는 정치·경제적 상황이었다. 이는 마셜 플랜을 유럽에 적용하고 좀더 포괄적으로는, 루스벨트적 국제협력주의 수사를 계속 사용하면서도, 미국을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의 세계에서 점차 일방적인 역할을 하는 세계의 패권 국가로 변모시키려는 세계관이 동아시아 지역에 표출된 결과였다. 미국에게 한국의 중요성은 커져갔지만, 소련은 군대를 철수했으며 김일성은 중국의 국공 내전에 자신의 부대를 파병했다.

봉쇄 정책이 지지를 얻음과 동시에 반격 전략이 나타났는데, 그것의 운동법칙은 쇠락하던 앞 세대의 정치·경제적 상황에서 출발했으며 다국적기업보다는 개인 사업가나 국내 자본가에게 친화적이었다. 그들은 대체로 팽창주의를 표방했으며 선호한 전략은 반격이었다. “외교정책”은 초강대국인 미국에게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에 외교정책을 담당한 정부 기관은 일반 사회에 대해 거의 완전한 자율성을 가졌다. 당시 외교정책에 관심을 가진 부류는 귀족 혈통으로 미국 동부의 명문대를 나와 국무부 외교국에 근무하던 인물들로 실제로는 미국 동북부와 남부의 지역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뉴잉글랜드의 무역업자, 남부의 농장 경영자, 월가의 투자자들은 외교 문제의 배후에 있는 “특수 이익집단”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공업 수출업자라는 새로운 패권 세력이 형성됐으며, 1940년대 후반에는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제도가 급증하면서 평균적 미국인과는 거의 무관한 내부의 권력투쟁이 전개됐다. 그러므로 1차 한국전쟁과 2차 한국전쟁의 원형이 된 사건들은 1년 전, 즉 미국 정부 안에서 반격의 주장이 비등하고 미군의 마지막 전투부대가 한국에서 철수한 시점에서 형성되었다.
이처럼 반격을 추진하기로 의견이 모아진 까닭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는 “중국”이라는 상위구조의 존재로, 중국의 공산혁명 덕분에 보수파가 1948년 선거와 뉴딜에 설욕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재기한 일본이라는 정말 중요한 장치였는데 그 장치가 있던 지역의 정치·경제가 대부분 공산 세력의 지배 아래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미국 정계의 자유주의 세력과 보수 세력은 한국전쟁에 개입하기로 한 딘 애치슨의 6월 결정을 단합해 지지했으며, 그 뒤에는 서로 다른 이유에서 북진에 합의했다. 전자는 압록강에서 멈추기를 바랐지만, 후자는 중국이라는 미지의 황야까지 진격하려고 했다. 중국과 실제로 부딪쳤을 때 그들의 결속은 깨졌다. 반격 전략과 이전부터 그것을 지지해온 세력은 현실을 떠나 과거를 그리워하는 회고주의의 망각 속으로 옮겨갔으며, 봉쇄는 외교정책을 이끄는 지도층의 기본 선택지가 됐다.

한편 한국인이 사태의 진전을 장악하는 수단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면서 한국에서는 일종의 운동 법칙이 나타났다. 이승만은 미국의 후원과 유엔의 승인을 받고 거리에서 청년을 대규모로 동원해 세력을 강화했지만, 온전한 과정을 밟지 않은 경제는 악화됐다. 김일성은 소련제 장비와 중국식 훈련으로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 전쟁을 일으키기 1년 전 귀국시켰다. 북한은 (공산주의적) 수입 대체 공업화를 추진해 외국의 침략에 대항하는 기반을 건설한다는 우선적 전략을 추진하기 위해 식민지 시대에 도입된 중공업을 재건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49~1950년 남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유격대와 싸우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을 최소한 미국의 지원을 받아 보여줬다.

수확량이 늘어나고 일본과의 관계가 다시 형성되면서 경제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6월 25일에 시작된 전쟁은 한반도 안의 문제였고 식민지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대립의 결말이었다. 다시 말해 그 전쟁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몇 사람과 김석원을 중심으로 한 몇 사람이 싸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전쟁은 남한을 변화시켰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한국의 사회구조에 필요했지만 그 이전 5년 동안 실현되지 않은 혁명과 동일했다. 그 혁명은 자본주의적 혁명이었다. 전쟁은 지주제를 종결시키고 강제적 관리(국가 예산의 80퍼센트를 차지했다)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국가를 해방시킴으로써 변혁의 기간을 단축하고 가속화했다.

부유한 지주계급은 국가에 깊이 침투해 발전을 저해하고 관료 기구를 마비시켰다. 지주가 장악한 국회는 행정 권력을 외부에서 견제했다. 조병옥과 장택상처럼 굳은 정치적 신념을 가진 인물들은 지지자들과 함께 정부의 강압적 기관을 장악했다. 한국 지주계급의 저물어가는 권력과 이루 말할 수 없는 완고한 후진성 그리고 한국에서 전개된 계급 투쟁의 기본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실은, 세계 최강국이 자신들을 위해 끔찍한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도 자신들이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던 권리, 즉 남한과 북한에 있던 사유재산을 다시 확보하려고 완강히 버텼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이 전쟁의 목적이며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했다. 1950년 여름 북한이 이 계급을 숙청하고 지주를 토지에서 분리시켜 미국인의 처분에 맡기고 나서야 토지 재분배가 이뤄졌다.

한국전쟁이 한국인에게 총력전이었다면, 미국인에게는 자국의 패권을 구축하고 재편하는 계기였다. 애치슨이 말한 대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한국의 전쟁이 아니었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었다. 또한 1954년 애치슨은 회고록 집필을 돕고 맥아더의 위상을 약화시킬 목적에서 열린 한 학술회의에서 과거를 돌이켜보다가 무심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이 나타나 우리를 구했다.”

애치슨은 현대의 가장 중요한 냉전 사료인 국가안보회의 문서 68을 언급하며, 한국은 그 문서에서 요구한 거액의 국방 지출을 가능하게 만든 필요한 위기였다고 지적했다. 좀더 넓게 말하면 한국은 20세기에 미국이 추진한 국가 건설의 두 번째 물결을 가능하게 만든 위기였다는 것이었다. 뉴딜이 첫 번째 물결이었고 안보 국가가 두 번째 물결이었으며, 관련된 관료 조직은 1950년대 초부터 급격히 커졌다. 그 결과 한국전쟁은 대외적으로는 패권을, 대내적으로는 국가 건설을 추진한 계기가 됐다. 그러나 한국이 미국의 패권을 구축하는 데 좋은 기회였다는 것은 이제 연구서, 적어도 관련 학술서에서 일반적인 견해다. 한국이 봉쇄 정책의 세계화를 야기해 케넌의 제한적 봉쇄를 니츠와 덜레스의 무제한적 개입으로 확대시켰다는 것이 일반적 논의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패권의 구축과 재편을 논의했으며 “재편”을 통해서 어떤 새로운 역사를 발견했다. 또한 국가안보회의 문서 68에는 봉쇄의 세계화만 있던 것이 아니며 봉쇄와 반격 사이의 변증법도 다뤘다. 국가안보회의 문서 48은 중국의 공산혁명과 일본 산업 부흥의 시작을 해석하기 위해 미국이 추진해온 아시아 정책의 철저한 재평가가 끝났음을 시사했다. 거기에도 봉쇄와 반격 사이의 동일한 변증법이 보인다. 8월 하순 트루먼과 애치슨은 북진을 결정하고 워싱턴은 맥아더의 진격에 광범한 지지를 보냈다. 1947~1950년 위태위태하게 지속되어오던 봉쇄와 반격을 둘러싼 절충의 움직임은, 아시아에 대한 초당파적 협력의 결여와, 무엇보다 새로운 패권을 뒷받침할 재원이 부족한 채로 1950년 8월 하순부터 10월 하순까지 약 두 달 동안 진행된 북진 과정을 거치며 타협에 가까워졌다. 반격 정책은 재편된 조선인민군과 20만 명의 중국 “인민지원군”의 반격을 받아 전후 최대의 위기에 직면했으며, 그 결과 워싱턴에서는 어쩔 수 없이 확전을 중단했다. 1950년 겨울, 애치슨과 니츠 같은 중도파는 봉쇄 정책을 추진해야 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