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역사이야기 (독서)/4.독립운동가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신화 김좌진 (2011)

동방박사님 2023. 9. 5.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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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백야 김좌진. 우리나라 사람이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민족운동가요, 교육가요, 항일혁명가였다. 김좌진하면 청산리대첩, 청산리대첩하면 만주 독립운동이 자연스럽게 연상될 정도로 ‘청산리대첩의 영웅’으로 자리 잡고 있다. 청산리대첩은 일제 식민지배로 신음하고 있던 우리 민족에게 전쟁을 통해 독립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대표적인 전투였고, 김좌진이라는 영웅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그는 대책 없이 군사 활동에만 주력한 것은 아니었다. 이 책은 무장투쟁은 물론 한인사회 안정화와 교육 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인 김좌진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목차

글을 시작하며

1 안동 김씨 명문가에서 태어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다
안동 김씨 명문가에서 태어나다
노비를 해방시키고 교육구국운동을 펼치다
민족운동가들과 교류하며 기호흥학회에 참여하다

2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추진하다
독립전쟁을 위해 광복회에 참여하다
광복회 만주 책임자가 되어 파견되다

3 청산리 독립전쟁을 준비하다
대한독립선언서 대표가 되다
서일과의 만남, 대한정의단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청산리대첩의 영웅들을 길러내다

4 만주 항일투쟁의 금자탑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다
결전의 장소 청산리
첫 승전 백운평전투
일본군 기마부대를 전멸시킨 천수평전투
최대의 승전 어랑촌전투
맹개골전투, 만기구전투, 쉬구전투, 천보산전투
국제연대를 위해 노령으로

5 다시 조국의 광복을 위해 매진하다
대한독립군단, 흩어진 동지들을 모으다
신민부 창립의 주역이 되다
무장투쟁을 주장하며 신민부를 이끌다

6 민족유일당운동을 펼치고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다
뭉쳐야 산다. 3부통합에 힘쓰다
혁신의회를 조직하다
아나키즘을 받아들이다
이루지 못한 꿈, 한족총연합회

7 아직도 조국을 위해 할 일이 많은데…
믿을 수 없는 비보, 김좌진의 순국
영웅의 마지막 길

김좌진의 삶과 자취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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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자 : 이성우
충남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문학석사와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근현대사를 전공하고 독립운동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현재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전임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출판사 리뷰

김좌진, 한인사회 안정화에 주목하다

김좌진은 무장투쟁을 중시했지만 한인사회 안정화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교육 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항일무장투쟁의 기반은 재만 한인사회였고, 한인사회의 안정 없이는 무장투쟁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김좌진은 재만 동포들의 생활기반 마련을 위해 생활 개선·영농방법 개선·실업 장려 등 동포들의 경제적 부흥을 위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한족총연합회 시절 동포들로 하여금 자치조직을 결성케 하고 경제적 이익을 증진시키고자 했던 것도 재만 동포들의 생활 안정을 가장 시급한 문제로 여겼기 때문이다.

김좌진은 교육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민족운동이 호명학교 설립에서 출발했듯이 교육사업에 대한 열정은 남달랐다. 김좌진은 신민부와 한족총연합회 시절, 50여 개의 학교를 세워 한인자제들을 교육했다. 교육사업은 한인자제들에게 항일의식과 민족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고, 동포들의 바람이기도 했다.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최전선에 서다

김좌진은 1920년대 만주 항일투쟁의 현장에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되어 상해로 떠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만주를 고집했다. 조국의 독립은 독립군 양성을 토대로 일제와의 전쟁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으며, 독립군을 양성해 국내로 진격할 수 있는 최적지를 만주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김좌진이 항상 ‘독립군 양성과 항일무장투쟁’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던 것도 같은 이유이다. 때론 무장투쟁론이 갈등을 빚기도 했다. 대한군정서가 일본군의 간도 출병으로 근거지를 이동해야 했을 때, 총재 서일은 ‘아직 일제와 독립전쟁을 벌일 시기가 아니며, 북만 오지( ??로 이동해 후일을 도모하자’고 했다. 하지만 김좌진은 독립전쟁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고 사령부를 이끌고 청산리로 이동해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일제에 의해 신민부 간부들이 체포되었을 때도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주장하며 ‘군정파’를 이끌었다. 북만지역에 공산주의세력이 확대되면서 동포들이 신민부에서 이탈할 때도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신념에는 변화가 없었다. 김좌진은 독립군 양성, 군비확충, 국내진격작전 등을 끊임없이 추진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평생 노력한 김좌진. 1920년대 만주 항일투쟁의 중심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