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역사이야기 (독서)/4.독립운동가

이회영과 젊은 그들 아나키스트가 된 조선 명문가 (2009)

동방박사님 2023. 9. 5.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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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조국의 독립과 이상사회 건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동지들, 그 100년의 기억.


『이회영과 젊은 그들』은 조선 최고 명문가 출신이나, 기득권을 유지하기보다는 조국 해방을 위한 독립운동을 택했던 우당 이회영과 그 동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 책에서는 과거의 사건들에 대한 치밀한 추적과 객관적 자료들을 통해 평생 동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아나키스트 이회영을 재조명하고, 그들의 활동을 통해 당시 독립운동의 모습을 살필 수 있게 한다.

이회영은 1910년 강제로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어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자 여섯 형제 일가를 모두 이끌고 만주로 가 독립운동에 전념한다. 책에서는 이회영이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기까지의 과정과 망명 후 그의 활동,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한 모습, 어떻게 아나키즘을 받아들여 아나키스트가 되었는지 등의 내용을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또, 저자는 극심한 가난으로 인한 고통을 참고 견뎌내며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최후를 맞이해야 했던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생생하게 전하며, 이를 통해 지배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부족한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목차

저자의 글

1. 왕조의 마지막 두 풍경
이완용의 밀사 이인직/내가 죽어야 할 의리는 없으나/떠나는 사람들 /횡도촌, 망명자들의 촌락

2. 일가 망명
망국을 막기 위해/헤이그 밀사사건/북풍 부는 만주로

3. 독립군의 요람, 신흥무관학교
모든 것을 버리고 만주로 떠나다/이 머리는 자를 수 있지만/작위와 은사금에 환호하는 집권 노론/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4. 고종이 망명한다면
밀입국을 단행하다/고종 망명이 갖는 폭발성

5. 북경과 상해를 오가며
임시정부를 둘러싼 파문/독립운동가들의 단골 거처/임시정부도 사회주의도 버리고

6. 아나키즘의 깃발
양명학과 아나키즘/아나키즘으로

7. 의열단과 다물단
의열단의 직접행동과 유자명/조선총독부 폭파와 다나카 대장 암살사건/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다/다물단의 밀정암살이 준 충격

8. 극도의 곤경 속에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발족하다/극심한 자금난/일제의 체포를 피해 수만 리를 걷다

9. 만주운동의 새바람
김좌진과 연합하다/일본 조계지의 은행을 털다/자유연합적 지방자치에 대한 반발

10. 1930년대, 상해의 풍경
일제를 공포에 빠뜨린 아나키즘 조직들/백정기와 윤봉길의 엇갈린 운명

11. 무장투쟁의 길과 순국
무장투쟁의 길로/운명의 만주행/밀고자들

12. 망명자들의 최후
만주로 간 선비들/신채호의 순국

13. 남은 동지들
죽기 위해 제비를 뽑는 사람들/공포의 서간단/재일 거류민단장 사살사건/일제가 점령한 상해에서/무장투쟁으로 최후의 승리를/미완의 과업/되살아나는 역사

이회영 가계도
이회영 연보
참고문헌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 : 이덕일 (李德一)
 
숭실대학교 사학과와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8년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를 창립한 이래 우리 사회 양대 사대주의 역사관인 조선 후기 노론사관과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을 해체하는 한 길을 걸어왔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등의 저서를 통해 남한 강단사학의 노론사관을 비판했고,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우리 안의 식민사관》 등을 통해 남한 강단사학의 정설인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을 비판했다. 현재 《조...

책 속으로

이회영의 생애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고위층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의 실천이라는 말로는 그 의미를 전달하기가 부족하다. 이회영의 만주행은 국망 직후 집단 망명한 것과 같은 또 다른 승부수였다. 22년 전(1910년) 온몸을 던져 일제와 대결했던 것처럼 다시 일제와 대결하겠다는 신념의 표출이었다. 온몸을 던지지 않고서 어찌 일제를 구축驅逐하고 인간해방과 광복을 실현하겠느냐는 신념의 실천이었다. 만 65세 노인이 무장투쟁을 결심하고 상해 황포강 부두에서 영국 선적의 남창호南昌號 제일 밑바닥 4등 선실에 자리를 잡는 광경에 어찌 비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비장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뛰어넘는 진정한 인간의 길인 것이다. --- p.8, 「저자의 글」 중에서

한일합병 조약체결 소식을 듣고 매천 황현이 고향 구례에서 목숨을 끊던 1910년 8월 하순, 이회영은 북쪽으로 향했다. 이동녕과 장유순 그리고 이관직李觀稙(1882~1972년)이 함께 하고 있었다. 종이장수 차림인 이들은 다락령(659미터)을 통해 강남산맥을 넘어 초산진에 다다랐고, 초산진에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향했다. 이제 남은 길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것뿐이었다. 나라를 되찾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군사를 길러 일본군을 내쫓는 길과 교육으로 후세를 길러 독립하는 길이었다. 양자택일의 방법이 아니라 양자결합의 길을 택해야 했다. 군사를 기르는 것은 지금의 급선무이고 교육은 미래를 위한 준비였다. 무장투쟁과 교육사업은 우당 이회영이 평생에 걸쳐 일관되게 실천한 이념이 되었다. --- p.54, 「2. 일가 망명」 중에서

이회영은 북경의 자금성 북쪽 후고루원後鼓樓園의 한 가옥을 빌려 살았는데, 이곳은 곧 수많은 독립운동가들로 북적거리는 사랑방이 되었다. 북경에 온 독립운동가들은 일단 이회영의 거처에서 몇 달을 보낸 후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북경에서 이회영과 함께 지낸 아들 이규창은 “그 당시 국내에서 맘을 품은 인물, 즉 청년들은 중국 북경에 오면 반드시 나의 부친을 뵙게 되고 대체로 우리 집에 거주하게 된다”고 회상했다. 북경의 이회영 거처는 모든 독립운동가들이 한번씩은 거쳐 가는 필수 코스였던 것이다. --- p.115, 「5. 북경과 상해를 오가며」 중에서

“나는 자유연합이 독립운동의 견지에서 가장 적절한 이론이라고 본다. 사실 모든 운동가들의 사상이 무엇이든 간에 실제로는 무정부주의의의 자유연합 이론을 그대로 실행하고 있는 거다. 3·1운동 이전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숱한 단체와 조직이 생겼지만, 그 모든 단체와 조직은 단원 자신들의 자유의사에 의해 결성된 것이지 강제적 명령에 맹종하여 결성된 것이 아니다. 강철의 조직이라고 부르는 공산당도 적색赤色 러시아처럼 정권을 잡은 후에 강제와 복종의 규율이 생긴 것이지 그들 역시 그 전에는 운동가들의 자유합의에 의해서 행동했던 것이다.” --- p.143, 「6. 아나키즘의 깃발」 중에서

상해에서 발행되던『한민韓民』1936년 5월 25일자는「서간도 초기 이주와 신흥학교 시대 회상기」라는 글을 게재했는데, 이회영 일가가 안동현을 거쳐 삼원보로 이주해 신흥무관학교를 건립하는 과정에 대해 서술했다. 이 글의 ‘이석영의 공功’이란 소항목에서는 이석영이 수많은 재산을 신흥무관학교 운영에 모두 쏟아 붓고도 “나중에는 지극히 곤란한 생활을 하면서도 일호의 원성이나 후회의 개식이 없고 태연하여 장자長者의 풍이 있었다”고 전했다. 또한 이석영이 2년 전(1934년) 상해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전하면서 그의 부인도 1936년 5월 11일 상해의 조카 집에서 유명을 달리했다고 전한다. 그뿐만 아니라 셋째 이철영은 1925년에 이미 사망했으며, 여섯째 이호영은 1933년에, 첫째 이건영도 1940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다섯째 이시영을 제외한 다섯 형제 모두 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잃은 것이다.
--- p.281, 「12. 망명자들의 최후」 중에서
 

출판사 리뷰

조국의 독립과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동지들, 그 100년의 기억!
1910년 8월 22일 강제로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한 일제는 그해 10월 7일 대한제국이 망하는 데 큰 공을 세운 76명의 조선인들에게 작위와 은사금을 내려주었다. 일본 귀족과 유사한 공·후·백·자·남의 작위를 수여해 귀족으로 임명하고 은사금도 주어 작위에 걸맞은 경제생활을 하도록 보장한 것이다. 비록 군사력으로 영토를 점령했다고 해도 이들 매국 사대부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일제가 그리 순조롭게 대한제국을 병탄할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다. 이른바「한일병합조약문韓日倂合條約文」제5조에는 “일본국 황제폐하는 훈공勳功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히 표창에 적당하다고 인정된 자에게 영작榮爵을 수여하고 또 은급恩級을 부여한다”고 명기해놓기도 했다. 수작자授爵者들 대부분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유력 가문 출신으로, 국망國亡의 위기를 맞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기는커녕 오히려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는 데 적극 협력했던 것이다. 이렇게 매국 수작자들이 일제의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지 두 달 후, 대륙에서 불어오는 차디찬 바람을 무릅쓰고 만주로 떠나는 40여 명의 무리가 있었으니 바로 우당 이회영과 그 형제 일가였다.

최근 역사의아침에서 펴낸『이회영과 젊은 그들』은 1910년 강제로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어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자 여섯 형제 일가를 모두 이끌고 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펼치며 전 재산은 물론 목숨까지 민족해방을 위해 바친 이회영과 여러 동지들에 관한 글이다. 이 책에서는 세칭 삼한갑족三韓甲族(예로부터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으로 불린 명문대가 출신인 이회영이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기까지의 과정과 망명 후 그의 활동은 물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한 모습, 어떻게 아나키즘을 받아들여 아나키스트가 되었는지, 극심한 가난으로 인한 고통을 참고 견뎌내며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최후를 맞이해야 했던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뿐만 아니라 엄형순, 유자명, 이을규, 이정규, 정화암, 백정기, 김대락, 오면직, 김종진, 유림 등의 아나키스트들에게 사상적 구심점이 되어주고 함께 독립운동을 펼친 모습과 당시 중국에서 이루어진 독립운동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재조명했다. 조국의 독립과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몸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동지들의 일생은 현재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해줄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 우당 이회영.『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개정판 출간!
한일합병 조약체결 소식을 듣고 매천 황현이 고향 구례에서 목숨을 끊던 1910년 8월 하순, 이회영은 이동녕과 장유순 그리고 이관직과 함께 북쪽으로 향했다.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무관학교 설립의 적지를 물색하기 위해서였다. 일행은 한 달 남짓 남만주 일대를 돌아다니다가 귀국했다. 이회영은 형제들에게 전 가족이 만주로 이주해 일제와 싸우자고 하며 “이것이 대한 민족된 신분이요, 또 왜적과 혈투하시던 백사白沙(이항복) 공의 후손된 도리라고 생각한다. 여러 형님들과 아우님들은 나의 뜻을 따라주시기를 바라노라”고 설득했다. 여섯 형제는 모두 가산을 정리했는데, 급하게 팔다 보니 제값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회영 형제 일가가 가산을 정리해 마련한 자금은 약 40만 원의 거금이었다. 당시 쌀 한 섬이 3원 정도였는데, 이를 2000년대 쌀값으로 단순 계산하더라도 약 600억 원이나 된다. 이회영은 여섯 형제 중 넷째인데, 위로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이 있었고 아래로 이시영과 이호영이 있었다. 가문 배경으로 보면 그 누구보다 기득권을 유지하려 했을 것 같으나 이회영을 비롯한 형제들은 기득권에 연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듯 평생 동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이회영을 재조명한『이회영과 젊은 그들』은 2001년 웅진닷컴에서 펴낸『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을 개정한 것이다. 전작에서는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아나키즘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기술한 반면, 개정증보판『이회영과 젊은 그들』에서는 이회영의 아나키스트적 색채보다는 그가 아나키즘을 사상적 바탕으로 어떻게 독립운동을 위한 기초를 다졌으며, 여러 동지들과 독립운동을 전개해나갔는지에 중점을 두었다. 또한 당시의 실상을 엿볼 수 있는 생생한 컬러사진 50여 컷을 새로 넣었으며, 최근 발표된 자료를 근거로 이회영이 대련 수상경찰서 유치장이 아닌 여순감옥에서 고문사당했다는 사실을 추가로 밝혀냈다.

헤이그 밀사파견을 주도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이른바 을사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서울에 온 1905년. 이회영의 집에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의정부 참찬 이상설과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 활약하는 이동녕 등이 그들이었다. 그들은 의논 끝에 조약 체결을 막기 위한 여러 방책을 세웠으나 일제의 방해로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조병세와 민영환이 자결했고, 이 소식을 들은 이상설도 자결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이상설과 이회영은 새로운 운동방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이상설은 만주 용정촌으로 망명해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서전서숙을 열었다. 1907년 4월 3일 이상설은 이동녕, 정순만과 함께 용정촌을 떠났다. 혼춘에 학교를 하나 더 세우겠다는 것이 명목이었다. 그러나 이상설의 목적지는 혼춘이 아니었다. 그가 가려는 곳은 만국평화회의가 열릴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였다.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사람은 고종의 특사 자격으로 헤이그로 향했는데, 이 헤이그 밀사사건의 배경에도 이회영이 있었다. 당시 일제는 궁내 곳곳에 일본의 간자를 심어두고 고종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으나 이회영은 대신 조정구와 내관 안호형을 통해 고종에게 밀사파견을 주청했다. 고종은 헐버트에게 신임장을 전달했고, 이회영은 헐버트에게 신임장을 받아 비밀연락망을 통해 간도에 있는 이상설에게 전했던 것이다. 헤이그 밀사사건은 알려진 대로 구체적 성과를 이루어내지 못했고, 이상설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고종의 국외 망명을 추진하다!
국내에 남아 독립운동을 벌이던 이회영은 1910년 여섯 형제 일가를 모두 이끌고 만주로 집단 망명했는데, 1913년경 그곳을 떠나야 했다. 일제가 이회영을 비롯해 이시영, 이동녕, 장유순, 금형선 등을 체포 또는 암살하기 위해 형사대를 파견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이회영은 일제의 허를 찌르기 위해 국내로 밀입국을 단행했고, 고종을 국외로 망명시키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중 드디어 방안을 찾아냈다. 아들 이규학의 신부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규학은 1917년 어머니 이은숙과 함께 국내로 왔다. 이회영이 5년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자 이회영을 찾아 귀국했던 것이다. 신부례 상대인 조계진은 조대비의 친족이자 고종의 조카딸이었다. 이미 결혼한 지 3년이 지난 1918년 11월에 신부례를 올린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때 고종의 망명계획에는 이회영·이시영 형제와 이득년, 홍증식, 민영달, 조완구 등이 가담했다. 이회영이 고종의 시종 이교영을 통해 의사를 타진하자 고종은 선뜻 국외 망명계획을 승낙했다. 고종이 국외 망명을 결심하던 1918년 말, 10년에 가까운 일본의 무단통치는 한계에 봉착해 있었다. 고종이 개전조칙을 내리면 전국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전 민족적 결전의 날이 무르익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자금이 마련되고 행궁까지 준비되어 구체화되어 가던 고종의 망명계획은 의외의 사태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다. 당사자인 고종이 예기치 못하게 급서한 것이다. 이회영은 고종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진 조국을 떠났다. 두 번째 망명이었다.

백성을 깨우치기 위해 교육기관을 설치하다!
이회영이 중국으로 망명한 목적은 항일무장투쟁과 교육입국을 위한 것이었다. 항일무장투쟁으로 나라를 되찾고, 되찾은 나라를 바로세우기 위한 교육이 이회영이 평생에 걸쳐 실천한 삶이었다. 1911년 이회영과 이동녕, 이상룡 등 집단 망명가들은 대고산 아래에 이주 동포들의 안착과 농업생산을 지도하는 자치기관으로 경학사를 조직했고, 서둘러 무관학교를 설립했다. 그들이 고구려의 옛 고토를 찾은 이유는 광복군을 양성해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였다. 이회영과 이동녕 등은 현지 중국인의 옥수수 창고를 빌려 신흥강습소 개교식을 강행했으나 현지 중국인들의 비협조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학교 이름을 강습소라 한 이유도 중국인들의 의혹을 피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그런데 이회영은 당시 누가 보더라도 무모한 일이었지만 중국 총리대신 원세개를 만나 담판을 짓고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12년 6월 합니하에 새로운 교사를 완성하고 신흥무관학교 낙성식을 열었다. 정신적으로는 국사관으로 무장하고, 육체적으로는 군사훈련으로 무장한 독립전사를 배출하는 곳이 신흥무관학교였다. 이철영, 이동녕, 이상룡, 여준, 이광 등이 교장을 역임한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12월 김연, 변영태, 이규봉, 성주식 등 40여 명의 청년들을 특기생으로 배출한 것을 비롯해 1919년 11월 안도현 삼림지역으로 이동할 때까지 약 3,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중국은 물론 국내에서 벌어진 수많은 항일무장투쟁의 현장에서 주축으로 활약했다.

독립운동가들의 벗이 되어 사상적 기틀을 제공하다!
우리나라에서 아나키즘은 독립운동의 한 형태로 수용되었다. 귀족 출신의 이회영이 아나키스트가 된 것은 개인적 성향 외에도 아나키즘이 독립운동 이론으로나 해방 후의 정부 수립 이론으로 적합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회영의 아나키즘 이론은 ‘만인이 평등하다’는 원리를 실천해나가면서도 공산주의처럼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빠지지 않고 개인과 사회의 자유를 확장할 수 있는 현실적 방책이었다. 이회영이 아나키즘을 자신의 사상으로 확정지은 때는 1923년 9월로, 이회영은 이미 57세로 환갑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회영은 여러 청년들과 교류하며 아나키즘이란 사상이 자신의 평소 지론과 맞다고 생각을 굳힌 뒤 아나키스트를 자처한 것이다. 이회영은 천진에서 살던 1927년 김종진이 방문하자 토론 끝에 그를 아나키스트로 전향시킬 정도로 단단한 이론적 토대를 갖추고 있었다. 이회영이 아나키스트가 된 것은 젊은 아나키스트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회영과 북경의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조직적 운동을 전개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1924년 4월 말 북경에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무련)을 조직했다. 그들은「정의공보」를 발행해 자신들의 운동노선을 천명했는데, 이회영이 극도의 궁핍 속에서도 그 발행자금을 부담했다. 후일 이회영과 젊은 아나키스트들은 남화한인청년연맹(남화연맹)이라는 아나키즘 조직을 건설해 상해의 일인들과 친일 주구들을 공포에 몰아넣는다. 만주사변 발발과 때를 맞추어 결성된 남화연맹은 무련의 산하 기관으로 이회영, 유자명, 백정기, 정화암, 이강훈, 엄순봉, 오면직, 김동우, 김광주, 나월환, 이용준, 박기성, 원심창, 김광주, 이규창 등이 참석한 창립대회에서는 이회영을 의장에 추대했으나 이회영은 한사코 거절했다.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만주로 떠나다!
중국으로 망명한 뒤 이회영은 상해와 천진을 오가며 의열단, 다물단, 흑색공포단, 남화한인청년연맹 등을 조직하고 일제의 고관, 군부 수뇌, 친일파 거두, 기관을 공격하는 등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그러던 중 1932년 윤봉길이 홍구공원에서 일본군 최고사령관 시라카와 대장을 비롯해 여러 명을 암살하는 거사를 일으켰다. 이 사건은 한인들의 항일의지를 세계에 과시한 쾌거였다. 그렇지만 상해를 점령한 일본군은 물러가지 않았고,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공간은 더 좁아졌다. 이회영은 여러 동지들과 중국의 아나키스트들과 상의한 후 상해를 떠나 만주를 새로운 운동무대로 삼으려 했다. 만주로 가서 중국 당취오 부대와 연계해 암살단을 조직해 일본 천황 등을 제거하고 무장부대를 조직해 만주를 점령한 일본군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1932년 11월 초, 이회영은 상해의 황포강 부두에서 영국 선적인 남창호에 올랐다. 허름한 중국옷을 입은 이회영이 자리 잡은 곳은 제일 밑바닥인 4등 선실이었다. 이회영은 흔들리는 남창호 밑바닥에 자신의 몸을 맡겼다. 1910년 망명한 때로부터 만 22년의 장구한 세월을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살아온 이회영은 그간 숱한 고초를 겪었지만 이제 새로운 투쟁의 역사가 열릴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회영은 일제 밀정의 밀고로 대련 부두에서 체포되어 여순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여순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은 이회영은 마침내 1932년 11월 17일 고문사하고 말았다. 일제는 고문사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이회영의 시신을 서둘러 화장하고 이회영의 딸에게 그 소식을 알렸다. 이회영은 고문받는 동안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죽음을 각오한 항거였고, 젊은 동지들을 지키기 위한 칠순 노인의 외로운 투쟁이었다. 이렇듯 이회영은 여순감옥에서 인간해방, 민족해방의 제단에 자신의 몸을 바쳤다. 삼한갑족의 후예로 태어나 전 재산과 생애, 목숨까지 인간해방, 민족해방에 바친 것이다.

이회영에 대한 동료들의 회고!
“우당 형제들은 참으로 그 형에 그 동생이라 할 만하다. 여섯 형제의 절의는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 -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독립운동가)

“우당 집에서 밥 얻어먹지 않은 사람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다.” - 금산錦山 유석현劉錫鉉(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은 1931년 해마다 여러 차례 동북의 화인, 신빈, 통화, 해룡, 유하 등 한국인이 많은 곳에 오셔서 독립운동을 지도하셨다. 신분은 점쟁이, 상인으로 가장해 다녔고, 학교를 세우고 자금을 지원하셨다.” - 김소묵金小?(동북의용군 대원)

“집 안에 거느리고 있던 종들을 자유민으로 풀어놓기도 했고, 남의 집 종들에게는 터무니없게도 경어를 썼다. 당시의 양반들이나 판서의 집안으로서 이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당치 않은 짓’이었다.” - 권오돈權五惇(다물단 단원)

“쌀이 없어 종일 밥을 못 짓고 밤이 다 되었다. 때마침 보름달이 중천에 떴는데 아버님께서 시장하실 텐데 어디서 그런 기력이 나셨는지 처량하게 퉁소를 부셨다. 하도 처량하여 눈물이 저절로 난다며 퉁소를 부시니 사방은 고요하고 달빛은 찬란한데 밥을 못 먹어서 배는 고프고 이런 처참한 광경과 슬픈 일이 어디 있겠는가.” - 이규창(이회영의 아들)

“민족주의 태내胎內에서의 무정부주의의 성장, 그 사상적 성숙, ? 투쟁단계 그리고 전시戰時의 전투체제로 전환 등의 과정을 우리는 우당이란 한 사람의 생애에서 읽어낼 수 있다. 우당의 최후는 이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의 장렬한 산화였다.” - 하기락(아나키즘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