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동양철학의 이해 (책소개)/7.동양철학이해

선진유가의 사상 (2011)

동방박사님 2023. 9. 16.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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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고대 중국의 유가학파의 기원에 관한 문제와 공자ㆍ맹자ㆍ순자로 대표되는 선진유가의 사상체계에 있어서 그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우주론ㆍ인성론ㆍ정치론에 관한 논의를 체계적으로 분석 정리했다. 먼저 제1장은 유가의 기원 문제에 대하여, 제2장은 공자의 천인론, 제3장은 공자의 인성론, 제4장은 공자의 정치론, 제5장은 맹자의 천인론, 제6장은 맹자의 인성론, 제7장은 맹자의 정치론, 제8장은 순자의 천인론, 제9장은 순자의 인성론, 제10장은 순자의 정치론에 대하여 수록하고 있다.

선진시기 유학의 사상 연구와 관련된 국내의 전문가들의 관심은 대부분 역사사상 및 윤리학적 문제에 집중되어 있는데 반하여 공자ㆍ맹자ㆍ순자의 우주론ㆍ인성론ㆍ정치론에 대한 문제에 관하여 상대적으로 적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이에 이 책이 국내의 학계에 연구범위의 다양성과 새로운 장르에 대한 개척이라는 의의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제1장 유가의 기원
1. 시작하는 말
2. 유가 학파의 연원
3. 유가집단의 형성
4. 맺는 말

제2장 공자의 천인론
1. 시작하는 말
2. 은대ㆍ주대의 天개념 및 천인론의 변화와 발전
3. 공자의 천인론
4. 맺는 말

제3장 공자의 인성론
1. 시작하는 말
2. 性相近과 習相遠
3. 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본성의 문제
4. 맺는 말 80

제4장 공자의 정치론
1. 시작하는 말
2. 덕치와 법치의 대립
3. 자기수양과 정치참여에 대한 구분
4. 예치의 실천
5. 맺는 말

제5장 맹자의 천인론
1. 시작하는 말
2. 내재되어 있으면서 초월해 있음
3. 知天, 事天, 立命
4. 맺는 말

제6장 맹자의 인성론
1. 시작하는 말
2. 비유를 통해 본 인성론
3. 인성론 관점의 갈림길
4. 맺는 말

제7장 맹자의 정치론
1. 시작하는 말
2. 정치사상의 핵심 개념
3. 현실문제에 대한 분석
4. 개혁정책 방안
5. 맺는 말

제8장 순자의 천인론
1. 시작하는 말
2. 天과 개인
3. 天과 사회
4. 맺는 말

제9장 순자의 인성론
1. 시작하는 말
2. 성악에 대한 현대학자들의 해석
3. 선과 악의 개념
4. 性惡善僞
5. 맺는 말

제10장 순자의 정치론
1. 들어가는 말
2. ‘예치’를 통해본 ‘정도’
3. 존군과 귀민의 정책
4. 맺는 말

참고문헌
색인
 

저자 소개

저 : 조원일 (趙源一)
 
대전에서 출생하고 성장기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유년시절에 처음 접한 고전에 매료되어 청소년시절을 동서양의 고전을 탐독하며 보낸다. 대학 졸업 후에는 臺灣으로 유학을 떠나 中國文化大學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그 뒤에 다시 중국으로 유학을 가서 北京大學 대학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8년 동안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남서울대학교 중국학과를 거쳐 현재...

책 속으로

제1장 유가의 기원

1. 시작하는 말
유가의 기원에 관한 문제는 현재까지도 학계에서 이견이 분분한 분야로서, 이 문제에 관하여 연구자들마다 제 각기 서로 다른 각도에서 조명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는 실정으로 아직 명확한 정설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현재 학계에 거론되고 있는 유가의 기원에 대한 학설은 대략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공자 일생의 사적이나 공자의 사상체계로부터 유가사상의 기원을 탐색하는 학설로서, 이러한 각도에서 연구한 결과의 특징은 공자를 사회개혁가로 보고 있다는데 있다. 전목(錢穆)과 크릴(H.G.Creel) 같은 학자가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
다음은 사회체제의 거시적인 변화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공자의 사상과 정치적 실천을 탐색하는 학설로서, 이러한 시각에서 연구한 결과는 공자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사회적 계층 및 학파가 발생했다고 하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조기빈(趙起彬)과 광아명(匡亞明) 및 카이즈카 시게키(貝塚茂樹) 같은 학자가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 그 다음은 '사'(士)나 '유'(儒) 등의 사회적 계층 혹은 사회적 단체의 실체로써 유가사상의 기원을 탐색하는 학설로서, 종합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여영시(余英時) 같은 학자가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 그 다음은 사상발전의 관점에서 유가사상의 기원을 탐색한 학설로서 '인'(仁)과 '예'(禮) 등의 개념의 변화를 중시한 점에 그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서복관(?復觀)과 아카즈카 키요시(赤塚忠) 같은 학자가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 끝으로 연구자 자신이 설정한 철학적 관점에 기반 하여 공자 사상의 의미를 묘사한 학설로서 사상의 자율적 발전을 중시한 점에 그 특징이 있으며, 이택후(李澤厚)와 모종삼(牟宗三)과 핑가레트(H.Finga- rette) 같은 학자가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 이상과 같은 학자들의 학설은 매우 심도 있는 연구결과라고 판단되지만, 본문에서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에 비춰볼 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에 있어서 보완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먼저 많은 학자들의 견해 속에는 공자 본인의 사상과 정치적 실천이 주요한 연구 대상으로 각인되어져 있으며, 일부 학자들과 같은 경우는 역사적 법칙의 공자에 대한 영향을 과도하게 중시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문제는 만일 유가를 일종의 사회세력으로 간주한다면 마땅히 유가의 집단으로서의 특색을 고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공자 사상의 본질이나 의미의 측면에만 집중적인 고찰을 하기 때문에 유가사상이 왜 형성되었을까? 라고 하는 문제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춘추전국시대의 사회에서 무슨 이유 때문에 유가사상이 출현했어야만 했는가의 문제에 대한 설명과 고찰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많은 연구 서적이 공자의 정치적 실천에 대하여 거론하고 있지만, 공자나 원시유가 사상의 정치성에 대해서는 거의 거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많은 학설들이 유가사상과 춘추전국시대의 국가들 사이의 대립적 측면만을 강조하여 유가학파와 춘추전국시대 국가들 간의 상호의존적 측면을 경시했다는 점이다. 만일 유가학파와 춘추전국시대의 국가들 사이에 대립적인 관계만 존재했다고 하면 유가의 세력이 어떻게 그처럼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겠는가? 본문에서는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유가집단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나 하는 사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중심으로 분석을 해보겠다. 유가집단과 그 사상의 연원은 어디에 있는가? 어떤 요인이 유가집단의 형성을 촉진시켰는가? 유가집단과 춘추전국시대의 새로운 형태의 국가와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유가집단과 춘추전국시대 국가들의 결합은 어떠한 문제를 발생시켰는가?

2. 유가 학파의 연원
유가집단의 연원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유가 학파의 세 가지 사상연원 즉 '유'(儒), '사'(史), '시악'(詩樂)의 측면과 유가집단의 주요한 사회적 모체로서의 '사'(士)의 실태 측면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유'(儒)의 원시형태에 관한 문제부터 살펴보기로 하겠다. '유'란 무엇인가? '유'에는 어떠한 사상 내함이 담겨져 있는 것인가? [설문해자]에는 "유는 부드러움이다. 술사의 호칭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유'자의 의미에서 언급하자면 중요한 함의는 '수'(需)부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 같은 경우는 '수'(需)자의 원래 형태는 '우'(雨)와 '이'(而)인데, '이'자는 머리를 풀어헤친 무당을 의미하며, 그것에 '우'자가 더해져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비를 청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무격'(巫覡)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고대의 중국 특히 춘추시대 이전의 중국사회에는 '사'(祀)라고 하는 씨족집단이 있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의 주요한 역할은 조상에 대한 의례를 담당하는 것으로 그들 즉 '사'의 신분이 높고 낮음의 관계없이 만일 '사'가 행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왕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조상에 대한 제례를 진행할 수 없었다. 춘추시대의 사람들의 관념 가운데에 있어서 조상 역시 공동체의 구성에 포함되었으며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이러한 부분에서 주의해야 점은 고대사회에 있어서 '무격'과 '사'에 관한 사회적인 신분과 역할이 한(漢)나라 이후에 보여 지는 사실들과는 다르다는 점에 반드시 유의해야 한다. 특히 춘추시대에 와서는 왕, 제후와 '무격'사이는 명확한 구분이 없었다는 점에 반드시 유의할 필요가 있다. 즉 국가 차원의 제사를 거행하는 때가 되면 왕, 제후는 큰'무격'으로 변했는데, 이것은 왕, 제후가 일정부분에 있어서는 무술(巫術)에 정통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상나라 시기에 특히 성행했던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춘추시대에 와서 완전히 소실된 것은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우제 의식을 거행하는 '무격'이 어떤 때에는 전문적인 민간'무격'일 수도 있지만 또 어떤 때에는 '무격'으로 분장하여 '무격' 역으로 각색된 왕이나 제후일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儒)와 '유가'의 관계는 과연 어떠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가? 라는 문제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춘추시대에 이르러 '무술'(巫術) 등 각종 의례에 관한 전문지식이 어떤 방법을 통하여 다음 세대로 전해질까? 라고 하는 물음에서 접근하는 편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즉 고대의 중국사회에서 전문적인 기능과 지식을 배울 수 있었던 곳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고대의 각 나라에서 운영하던 학교로 서주시기의 '벽옹'(?擁) 같은 경우가 그것에 해당된다. 다른 하나는 각 씨족의 내부에서 운영하던 학교이다. 중요한 점은 왕이나 제후 및 귀족들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학교나 씨족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선택하여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 본래 이러한 전문적인 지식들을 보유하고 있는 씨족집단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그들은 왕이나 제후가 주관하는 각종의 국가차원의 제사 의례에 참여하면서 '무술' 등의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왕이나 제후 귀족들의 자제에게 전수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비교적 중요한 전문적인 지식은 씨족집단 내부의 다음 세대에 전수하기도 했다.
춘추시대의 '유'는 '무술' 등 제사 의례와 관련된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던 씨족집단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 가운데 국가차원의 대규모적인 제사의 진행 및 준비를 담당하는 '대유'(大儒)와 민간차원의 소규모적인 제사의 의례를 담당했던 '소유'(小儒)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일찍이 "너는 군자다운 유자가 되어야지, 소인 같은 유자는 되지 마라."라고 언급했던 것이다. '유'와 '유가'의 관계에 대하여 적지 않은 학자들이 '무격'이나 '사'(祀) 등의 제사를 담당하는 집단을 유가의 원초적인 형태로 간주한다. 특히 근래의 고대문자학과 문화인류학의 발전은 갈수록 춘추시대의 '유'와 유가사상의 관련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러나 설사 그와 같다 손치더라도 앞에서 언급한 사실들로는 '무술'(巫術)을 담당했던 무당이나 신과 인간의 소통자의 역할을 했던 '사'(祀)가 갑자기 변하여 '덕치'(德治)나 '예치'(禮治)의 정치사상을 포함한 '유'(儒)로 변모 될 수 있었는가 라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한 해답을 주고 있지 못하고 있다. '유'(儒) 혹은 '사'(祀)는 도대체 어떻게 그러한 정치사상으로 발전할 수 있었을까? 라는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각도에서 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유'의 원초적인 형태는 민간차원의 제사의 의례를 담당했던 '무당'이면서 왕이나 제후 및 귀족들의 '교육자'임과 동시에 국가차원의 제사 의례 거행에서 빠져서는 안 될 조력자로서의 '유'였던 것이다.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전문적인 지식을 정치철학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다른 하나는 대체로 기술을 갖춘 모든 집단들과 마찬가지로 '유'의 존재형태는 씨족집단 위주로 이루어졌을 것인데, 그 가운데 국가차원의 행사에 영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을 만한 씨족단체가 있어서 그들이 평상시에는 '무술'(巫術)에 종사하다가 일단 정치적인 분쟁이 발생했을 때는 '유'는 왕이나 제후 및 귀족들의 입장을 지도하면서 집단적인 역량을 이용하여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볼 때 유가집단의 출현 이전에 '유'는 이미 정치집단으로서의 잠재적 가능성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정치철학의 발생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판단된다.
[논어]의 가치관을 분석해보면 원시유가가 '시'(詩)와 '음악'(樂)을 매우 중요시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공자는 "시에서 흥취를 갖게 되고, 예로써 자립하게 되고, 음악에서 완성시키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러한 공자의 언급 속에는 주어가 생략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흥취'와 '자립' 및 '완성'의 주체가 학습의 대상인지 아니면 인간의 덕성인지를 결정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최소한 원시유가가 '시'와 '음악'을 매우 중시했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고대의 중국인에게 있어서 '시'와 '음악'은 그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을까? 또한 유가에서 '시'와 '음악'을 학파의 이데올로기 형성수단으로 끌어들인 이후 '시'와 '음악'은 유가사상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현대의 문헌고증학 및 문화인류학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우리가 접하고 있는 [시경]의 원형은 연애가요와 제사의례용 노래였다. 이 가운데 두 번째 의미를 특별히 주시할 필요가 있는데, 제사의례용 노래의 제작은 '신'(神)에게 봉헌 드리기 위한 행위로서 고대인은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 경건하게 임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노래의 제작 행위에 대하여 고대인들은 최고의 지식과 사고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서주시기 말기에는 '시'의 창조는 제사의례용 노래의 범주에서 독립하게 되는데, 이는 인간의 창조적 사고의 시작이 '시'의 방식으로 나타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대인들은 '시'를 통하여 생활의 고달픔과 정치와 사회에 대한 비판과 미래에 대한 불안 등등 자신과 사회의 각종 관계를 표명하기 시작한다. 춘추시대에 와서 '시'에 대한 새로운 창조는 이미 종말을 고하고, 고대 선인들의 지적유산으로 변모하여 외교의전 등의 수사용으로 사용되는데 이러한 것이 '시'의 '단장취의'(斷章取義)라고 하는 것이다. '시'의 '단장취의' 형식이 춘추시대 귀족들의 언어생활에 영향을 준 것은 '시'의 수사적인 기능과 음운의 탁월성 때문만이 아니고 '시'의 내용 자체가 고대인들의 최고 지적활동의 결과였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논어]에서는 "공자께서 백어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주남과 소남을 공부하였느냐? 사람으로서 주남과 소남을 공부하지 않으면, 그는 마치 담벼락을 마주 대하고 서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라고 언급한 것이다. 이곳에서 "그는 마치 담벼락을 마주 대하고 서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라는 언급은 언어적인 측면에만 답보 상태에 빠진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사고와 지적능력 역시 답보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원시유가에 있어서 지식과 사고에 대한 육성 및 사고의 성심을 다하는 태도는 '시'의 학습을 통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원시유가에서 '음악'을 중요시한 이유는 두 가지 측면으로 귀납시킬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이유는 음악 자체가 가지고 있는 신비한 성질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선율의 일정한 조합은 인간의 정서를 동요시켜왔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제사의례 속에서도 음악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자리 잡아 온 것이다. 특히 더욱 장엄한 국가 차원의 의례에서 음악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졌던 것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예'(禮)와 '음악'을 합쳐서 '예악'(禮樂)라고 말하는 이유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하여 기무라 에이이치(木村英一) 같은 경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각종 의례에는 그것에 적합한 각종 음악이 있다. 또한 이러한 음악은 각종 의례가 순조롭게 진행 될 수 있게 하는 선율을 가지고 있다. 의례와 음악의 미묘한 조화에 의해서 참여자들이 일체감에 도취되는 것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고대의 '예악'은 상호 표리관계를 이루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사회 질서의 통일과 작위 신분의 차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것을 실현하는 신성한 방법이었으며 통치계층의 필수적인 교양이었던 것이다.

다음의 이유는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에게 있다. 고대 사회의 악사는 신비한 음악의 연주자 일뿐만 아니라 고대 지식의 전달자였다. '시'의 가사는 반드시 음악과 동반되었기 때문에 악사들은 필연적으로 '시'의 가사를 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史)의 지식전통과 원시유가의 관계는 어떠한가? 사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원시유가와 [상서]의 관계는 그다지 깊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원시유가와 [상서]의 관계가 그다지 깊지 않다고 하는 사실은 원시유가에게 역사관이 없었다거나 [상서]가운데의 가장 일찍 성립되었다고 간주되고 있는 [오고(五誥)] 등의 역사기록을 참고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춘추시대에는 각 나라에 사관(史官)이 있었는데, 그들은 한편으로는 서주시기 이래의 기록을 전수 받아 보존하는 작업을 하였으며 동시에 자신들 역시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을 했었다. 또한 원시유가의 합리적인 사고방식은 역사 공부를 통하여 터득된 것인데, 그것은 역사 지식의 누적을 통하? 역사의 경험을 배워 그것으로써 행동의 표준을 삼았기 때문이다. 신화적인 부분 이외에 그들의 경험은 실제세계를 초월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학습의 교훈은 인간의 활동이 주가 되었던 것이다. [춘추좌전]의 "천도는 멀고, 인도는 가깝다."라고 하는 기록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잘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유가집단의 또 다른 주요한 사회모체인 '사'(士)에 대해서는 유가집단의 성립이 '유'와 '사'계층의 융합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조명하고자 한다. '사'라는 글자는 갑골문 속에서 이미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으며, 상나라 시기에는 '사'자와 '왕'자가 거의 같은 의미로 쓰였다. 그러므로 '사'와 '왕'의 원래 글자는 모두 특권계층의 상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왕권의 강화에 따라 이러한 원래 글자는 '사'와 '왕'의 두 글자로 분화되어 그것들의 구분을 나타내게 되었다. 서주시기에 와서는 '사'자는 제사의례를 담당했던 관직을 지칭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해석은 아직까지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춘추시대에 이르러 '사'라는 명칭에는 새로운 함의가 부여되어 역사의 무대에 다시금 출현한다. 춘추시대의 '사'는 '국'(國)과 '도'(都) 등에 거주하던 씨족 공동체의 성원이었다. 그들은 평상시에는 공동체의 연장자로부터 '예'(禮)와 활쏘기 및 전차 몰기 등을 배우지만, 일단 전쟁이 발발하면 자신의 무기를 휴대하고 전장터로 출동하였다. 이러한 '사'계층은 기본적으로 통치계층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서복관(復觀) 같은 경우는 [시경] 속에 나오는 '사'개념의 분석을 통하여 '사'계층의 변천과정을 분석했는데 다음과 같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