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세계국가의 이해 (독서)/6.아프리카

살아 있는 공포(2019) - 아프리카의 폭군들

동방박사님 2023. 10. 11.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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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아프리카에도 넬슨 만델라, 줄리어스 니에레레, 셍고르 등 시대를 앞서가는 탁월한 지도자들이 나왔다. 그러나 그 숫자는 많지 않다.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을 시작한 1960년대부터 지도자들이 많이 등장했으나 불행하게도 진정한 지도자는 찾아보기 어려웠고 많은 지도자들이 독재의 길을 택했다. 무지, 편견, 오만, 독선과 탐욕 등 부정적인 단어들로 무장한 절대 권력자들은 막강한 힘을 이용해 부를 축적하고 영구 집권을 꾀했다. 새천년을 맞이하면서 이러한 풍조는 크게 쇠퇴하고 선거를 통해 정권이 교체되는 순리가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아직도 일부에서는 영구 집권을 꾀하는 독재자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프리카의 현실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독재자들 중 장 베델 보카사Jean-Bedel Bokassa,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Francisco Macias Nguema, 그리고 이디 아민Idi Amin은 모두 동시대인이다. 보카사가 1921년생, 응게마는 1924년생 그리고 아민이 1925년생이니 비슷한 연배들이다. 이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45세 되던 해에 권좌에 올랐다. 8년 내지 13년간 통치했으며 1979년에 모두 권력을 잃었다. 이 3인방을 빼놓고도 이 책의 후미에서 기술 한 것처럼 아프리카에는 많은 독재자들이 있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지만 이들 세 명처럼 독특한 방식으로 국가에 해악을 끼친 인물은 드물다.

목차

들어가면서

무도한 독재자 3인방 | 아프리카 식 독재 | 유사점 | 집권 | 폐해 | 심리분석 | 유산

제1부.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적도기니 공화국 대통령
적도기니 공화국 | 응게마의 어린 시절과 정치적 성장 | 독립과 응게마 집권 |
숙청과 파괴 | 통치 | 응게마는 광인인가 | 쿠데타와 응게마의 최후 | 오비앙 정권과
오늘의 적도기니

제2부. 이디 아민, 우간다 공화국 대통령
우간다 | 이디 아민의 출생과 성장 | 대립의 정치 | 오보테의 집권과 통치 |
쿠데타와 아민의 집권 | 통치 | 대외관계 | 숙청 | 아시아계 추방 | 탄자니아 침공과
아민의 몰락 | 이디 아민 이후의 우간다

제3부. 장 베델 보카사,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중앙아프리카공화국 | 보카사의 출생과 성장 | 다코 정부 | 다코와의 대립 및 쿠데타 | 통치 |
숙청과 횡포 | 대외관계 | 커져가는 위기 | 황제가 된 보카사 | 정권 붕괴와 보카사의 최후 |
제2차 다코 정부 | 콜링바 정부 | 오늘의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제4부. 그 밖의 악명 높은 아프리카의 독재자들
모부트 세세 세코, 콩고민주공화국 대통령 |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 | 오마르 알 바시르,
수단 대통령

저자 소개

저 : 류광철
 
직업외교관 출신으로 주 아제르바이잔 대사, 주 짐바브웨 대사 등을 지냈으며 퇴임 후에는 신한대학교 석좌교수 겸 국제교류원장, 조선대학교 초빙객원교수, 국립외교원 명예교수 등을 지냈다. 오랜 시간 중동·아프리카에 관심을 갖고 관찰과 연구 및 강의 등을 계속해왔다. 외교부 중동과에서 근무했고 주 이라크 대사대리 시절 바그다드와 암만을 오가며 다양한 외교적 경험을 쌓았다. 중동·아프리카 및 이슬람에 관한 저서로 ...

책 속으로

응게마는 적도기니를 초토화시켰다. 그가 물러났을 때 국가에는 지성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인력이 한 명도 남지 않았다. 불과 십여 명의 기술학교 졸업생만이 남아있었다. 모든 정부 기능이 마비되었으며 각 부처는 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웠다. 1976년 마지막 남은 고위 공무원 그룹이 죽을 용기를 내어 국가를 봉건시대로 돌려놓은 고립정책을 완화해주도록 탄원서를 올렸다. 이들은 모두 응게마가 전임자들을 숙청한 뒤 손수 임명한 사람들로서 국가행정의 중추 세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벽을 향해 호소하는 것과 같았다. 응게마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114명의 탄원자 모두를 체포하여 고문과 가혹행위를 자행했으며 이들 중 많은 사람을 처형했다.
아민은 오랫동안 시골뜨기 정도로 간주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순수하고 매력적인 측면이 있어서인지 사람들은 경계심을 풀고 어떤 범죄도 저지를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겉모습이었을 뿐 베일에 감추어진 내면은 딴판이었다. 아민은 함께 있는 사람의 호의를 사려고 있는 친절 없는 친절을 모두 베풀 정도로 관대했으나 적대적인 사람에게는 거의 말을 건네지 않았으며 찬바람이 불 정도로 냉정했다. 아민이 재임 중 보인 잔인한 행위는 나치를 방불케 했다. 아민은 직접 수많은 사람을 살해했다. 감옥에 수감된 죄수로 하여금 망치로 다른 죄수를 죽이게 한 뒤 죽은 죄수의 고기를 먹도록 했다. 마을 주민 전체를 기관총으로 몰살한 뒤 시체를 악어에게 던져주었다. 아민은 이미 군 시절부터 인명을 극도로 경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보카사의 가장 큰 약점은 그의 허영심이었다. 그는 고등학교까지 마쳤으므로 학력에 대한 콤플렉스는 없는 편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높은 교육을 받고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이 있었다. 이들로부터 찬양과 숭배를 받으면서도 보카사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을 전지전능해서 감히 넘어다보지 못할 존재로 승격시키려 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칭호는 ‘파파 복Papa Bok’이었다. 국민의 아버지 정도 된다는 이야기다. 그의 우월한 이미지가 침해되거나 도전받는 일이 생기면 보카사는 과격해졌고 폭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아민이나 응게마와는 달리 상대방이 참회하고 용서를 빌면 심각한 죄를 저지른 경우라도 용서해주곤 했다. 자비로운 그의 이미지와 부합했기 때문이다. 수백만 세파프랑(CFA 프랑)을 횡령한 각료들이 무릎을 꿇고 죄를 뉘우침으로써 사면을 받았으며 파파 복의 자비로 더 높은 자리로 승진하곤 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파파는 생존을 위해 물건을 훔치다 방기 감옥에 수감된 잡범들에 대해서는 일체의 자비심도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무자비하게 구타당하기 일쑤였다. 이들을 용서해도 그의 이미지 고양에는 도움이 될 것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들어가면서」중에서

그러나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응게마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공포였다. 스페인 식민 정부가 물러간 뒤 온두 에두 살해부터 시작하여 1969년에 실행한 숙청은 조직적이고 잔인했다. 수백 명이 응게마의 직접 지시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수천 명이 그가 내린 판결로 인해 사형에 처해졌다. 질식할 것 같은 의심과 감시의 눈초리에서 누구든 어떤 일로도 체포될 수 있었다. 체포된 자의 죄에 대해서는 형식적인 조사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혐의가 있는 자에 대해서는 응게마에게 처벌을 상신하는 동시에 투옥시켰다. 처벌의 내용은 대부분 사형이었고 죄수들은 잔인한 방법으로 죽었다. 응게마가 죽인 사람들 중 많은 수가 부비 족이나 지식인들이었으나 그들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팡 족 중에도 많은 피해자가 발생했다. 응게마는 사람들을 처형하는데 종족이나 인종을 가리지 않았다. 1960년대 한창 성장하고 있던 국가의 리더들이 모두 희생되었다. 자치공화국 시절 11명의 장관들이 처형되었고 응게마 정부 각료 중 10명이 처형되었다. 1968년 이후 22명의 장관, 2명의 국회부의장, 다수의 보안부 요원과 고위공무원 37명이 처형되었다. 이 시대에 희생된 사람들의 숫자는 5만~8만 명에 이른다. 응게마 시대 적도기니를 ‘아프리카의 다카우’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74년 세계교회협의회는 “1968년 이래 적도기니에서 국가테러로 인해 많은 사람이 살해되었고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해외로 도피했으며 감옥은 죄수로 넘쳐나고 국가는 하나의 거대한 집단수용소로 변했다.”라고 발표했다. 이 단체는 적도기니의 30만 인구 중 8만 명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산했다. (…… 중략)
1976년 12월에는 국제사회에서 적도기니의 고립을 종식시켜 줄 것을 탄원한 고위공무원 100여명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다. 이들 중 많은 사람이 처형되었다. 적도기니에서 숙청 선풍이 불자 숙련노동자 와 지식인의 대탈출이 일어났다. 응게마 정부가 전복될 당시 단 한 명의 대학 졸업자도 적도기니에 남아있지 않았다. 코코아농장에서 강제 노역에 투입될 근로사단의 창설로 경제적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이제 일반 노동자와 농민들까지 줄을 지어 적도기니를 탈출했다. “인구 비례로 보아 이는 역사상 어느 나라에서 일어난 것보다 규모가 큰 대탈출이었다.” 탈출자의 숫자는 응게마 집권 내내 늘어났으며 1979 년 쿠데타로 그가 실각한 후에도 적도기니로 되돌아온 사람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 이르러 적도기니가 안정을 되찾으면서 귀국한 사람들이 일부 있었다. ---「제 1부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적도기니 공화국 대통령」중에서

아민은 1946년 영국의 왕립 아프리카 소총군단King’s African Rifles에 들어가 처음에는 접시닦이로 일하다가 보조 요리사가 되었고 나중에는 보병으로 근무했다. 무학인데다 5개 언어를 조금 안다고는 하나 제대로 구사하는 언어 하나도 없는 아민은 거구의 몸집과 장기인 완력에 의존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193센티미터의 장신으로 거구인 그는 1959~1960년 우간다의 복싱 헤비급 챔피언을 지냈으며 무패의 전적으로 은퇴했다. 럭비와 수영에도 뛰어나 영국군 장교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무슬림으로 무학이나 고분고분하고 명령에 복종하며 강건한 육체와 힘을 지닌 아민은 영국이 아프리카 병사에게 원하는 스 타일이었다. 아민은 1950년대 보병으로 근무하면서 케냐의 마우마우 반란 진압에 참가했고 1960~62년에는 장교로서 북부 우간다 카라마 종 지역의 정찰 책임을 맡았다. 이 당시 그의 도를 넘는 잔인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자칫하면 해임될 뻔 했으나 그의 능력과 충성심을 인정한 영국군 장교들의 호의로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민은 카라마종 인을 체포한 뒤 이들의 성기를 탁자 위에 내놓게 하고 침입 행위를 계속하면 성기를 자르겠다고 위협했다. 아민은 누비아인으로 구성된 진압부대를 이끌었다. 영국군 장교는 상대가 수상할 때는 우선 총부터 쏘고 나서 심문하라고 가르쳤는데 아민은 이를 금과옥조로 삼았다. 아민은 또한 소리 내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터득했으며 침묵하는 포로의 입을 열려면 어떻게 고문해야 하는 지도 배웠다. 1959년 아민은 당시 식민지 영국군에서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계급인 아판데(Afande: 준사관)에 올랐고 우간다로 돌아온 후 1961년 정규 장교로서 중위가 되었다. 우간다 인으로 중위까지 오 른 사람은 단 두 명에 불과했다. 그는 우간다의 카라모종과 케냐의 투르카나 유목민 사이에서 흔히 벌어지는 가축을 둘러싼 분쟁을 조정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아민은 1962년 독립 직후 대위로 진급했고 이듬해 소령이 되었으며 1964년에 육군 부사령관 그리고 1965년 육군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1970 년에는 합참의장직에 올랐다. 독립 당시 그는 영국군에 끝까지 남은 두 명의 우간다인 중 하나였다. 따라서 우간다 군이 창설된 후에는 초고속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무학인데다 지적 능력이 떨어져 진급할 때마다 그것이 마지막인 것처럼 보였으나 오뚝이처럼 계속 진급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보조 요리사에서 대령이 되었고 마침내 합참의장으로 정상에 올랐다. ---「제 2부 이디 아민 우간다 공화국 대통령」중에서

프랑스의 많은 식민지 중에서도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은 가장 혹독하게 약탈과 착취를 당하고 가장 허접스러운 행정에 시달린 국가였다. 50여 년 간의 강제노동과 약탈, 가혹행위, 무차별적인 살인으로 인해 고통을 받은 국민은 중앙정부의 어떤 정책도 신뢰하지 않았으며 유럽인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이 줄곧 취해온 친親프랑스 노선으로 볼 때 양국 간에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적으로는 인종 간 갈등이 심각했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 거주하는 대부분 프랑스인은 오만하고 착취적인 소부르주아들(노동자와 자본가의 중간계급에 속하는 소시민을 말함)로서 현지인을 내놓고 멸시하고 차별했다. 오지인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은 프랑스 관리들이 가장 기피하는 자리였다. 이곳으로 오는 관리들은 신참이거나 좌천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난폭한 성격이나 알코올 중독 또는 다른 반사회적 행동으로 공무원 사회에서 낙인이 찍힌 사람들이나 행정 경험이 전혀 없는 애송이 관리들이 이곳으로 왔다. 자리가 자주 바뀌었고 이직율도 현저하게 높았다. 예를 들어 1920년 40개의 관직 중 25퍼센트가 공석이었고 쿠앙고 주에서는 1906~1969 년, 63년 동안 책임자가 69명이 바뀌었다. 식민지 초기 수십 년 간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사람들은 차드와 나일 계곡으로 프랑스 영토를 확장해나가는데 주로 동원되었다. (…… 중략)
그의 정책은 환영을 받았고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이 그토록 갈망하던 강력한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이는 응게마나 아민과는 크게 다른 점이다. 응게마와 아민은 집권 첫날부터 무익한 정책을 남발하여 불신을 가중시켰다. 보카사의 잔인성과 권위주의에 관한 보도가 있었으나 사람들은 다루기 힘든 나라를 통치하는데서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사람들은 그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집권 초기 6개월 동안 보카사는 그동안 무질서했던 공공행정을 과감히 개혁했다. 일시적인 경제 호황도 그의 인기 상승에 기여했고 군사정권의 유용함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너무나도 빠르게 모든 상황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무질서와 무능이라는 과거의 타성이 행정에 다시 스며들어왔고 정책의 세부 사항까지 일일이 지시하는 보카사의 스타일이 그와 그의 부관 반자 사이에 쐐기를 박았다. 방기에서 소요가 일어나자 정권은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한 채 강경하게 진압했다. 1966 년 초 방기 공공도서관이 폐쇄되었고 외국 언론에 대한 통제가 이루어졌다. 《르몽드》 지 등의 반입이 금지되고 방기로 들어오려는 외국 기자들에 대한 비자 발급이 거부되었다. 언론 통제로 중앙아프리카공화국 국내사정에 관한 정보는 언론인보다 현지인에 의해 주로 전파되었다. 정권에 대한 비판이 점증하는 것을 알아챈 보카사는 자구책으로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제 3부 장 베델 보카사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중에서

모부투는 한편으로는 미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철저한 민족주의적 정책을 펼침으로써 권력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반대하는 자를 회유하여 자기편으로 끌어들였으며 회유할 수 없는 자는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5년여 정비 작업 끝에 1970년까지 모부투는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장악한 절대적인 독재자가 될 수 있었다. 모부투는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1974년 세기의 대결 로 알려진 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먼 간 복싱 헤비급 세계챔피언 전을 수도 킨샤사에서 성사시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모부투의 놀라운 재능은 부의 축적에 있었다. 1973년 모부투는 경제적 독립을 이룬다는 핑계로 농원, 대농장, 목장, 공장, 도매상점 및 소매상점 등 외국인이 소유하는 2천여 개의 기업을 몰수했다. 몰수한 기업은 국가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모부투와 그의 친족들에게 주어졌다. 모부투는 국가 수입의 3분의 1 정도를 직접 관리했으며 중앙은행을 개인 금고처럼 다루었다. 그의 사업 영역은 농업, 광업, 무역, 금 융, 다국적기업, 다이아몬드 거래 등 끝이 없었고 외국회사들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았다. 1970년대 말까지 모부투는 아프리카에서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 1980년대 모부투의 재산은 최소 50억 달러에서 150억 달러까지 추산되었다. 그는 이렇게 긁어모은 막대한 재산으로 지중해의 프렌치 리비에라 해안, 파리, 브뤼셀, 스페인, 포르투갈, 스위스, 이탈리아, 코트디부아르, 세네갈, 모로코와 브라질 등 각국에 막대한 부동산을 사들였다.

무가베Robert Gabriel Mugabe는 한때 아프리카 최고의 풍요로운 나라로 알려진 짐바브웨(구舊 남 로디지아)를 바닥으로 끌어내린 장본인이다. 짐바브웨를 백인의 손에서 해방시킨 투사이자 건국영웅이 자기 손으로 만든 국가를 다시 망가뜨렸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복합적인 이유가 있지만 무가베의 권력욕이 짐바브웨를 파탄에 빠뜨렸다. 라이벌 관계였던 만델라와는 여러 면에서 대비가 된다. 만 델라는 종신 대통령이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의 임기를 마친 1991년 81세의 나이로 깨끗이 은퇴했다. 그러나 권력욕이 강한 무가베는 권력의 끈을 놓지 않았고 위기가 닥칠 때마다 도박사 기질을 발휘하여 승부수를 던졌다. 1990년대 인기가 떨어질 때는 모잠비크 내전 종식과 콩고 내전 개입이라는 카드로 인기를 만회했으며, 1999년 헌법개정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자 백인 농장 몰수라는 강수로 위기를 극복했다. 2008년 노조지도자 출신 모건 창기라이Morgan Tsvangirai가 이끄는 민주변화 운동(MDC: Movement for Democratic Change)에게 선거에서 패하자 연정을 구성하여 위기에서 벗어났으며 2013년 선거에서 승리하자 다시 짐바브웨 아프리카민족연맹 애국전선(ZANU---「PF: Zimbabwe African National Union-Patriotic Front. 이하 본문에서 애국전선이라고 줄임) 단독 정권으로 복귀했다. 국제적인 고립과 날로 악화되는 경제 속에서도 악착같이 정권을 지키며 아내 그레이스에게 권력을 물려주려 했던 93세 된 아프리카의 공룡 무가베는 결국 집권 37년만인 2017년 11월 군부 쿠데타에 의해 실각하고 그의 부관이던 음난가그와Mnangagwa가 정권을 잡았다

1993년 수단은 미국이 작성한 국가 테러리즘 지원 국가의 리스트에 올랐다. 알 바시르가 이슬람주의를 옹호하면서 수단이 테러조직의 온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알카에다가 대표적인 예이다. 1990년대 초 오사마 빈 라덴이 수단에 와서 알카에다의 훈련 캠프를 설치하고 자금을 모금했다. 이밖에도 헤즈볼라, 하마스, 팔레스타인 이슬람지하드, 이란의 이슬람혁명 수호대 등 많은 이슬람 테러 조직들이 수단에 훈련 캠프를 차렸다. 1991년 심각한 기근으로 식량이 부족하자 국제구호기구와 유엔은 수단에 10만 톤의 식량을 긴급 지원키로 했는데 마침 걸프전이 터졌다. 이때 수단이 사담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많은 국가들이 불참을 선언함으로써 식량 지원은 무산되었다. 곧이어 수단은 불량국가Rogue State로 지목되었다. 알 바시르는 서방의 제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1994년 프랑스 정보기관이 카를로스 재칼을 체포하는데 협조했고 1996년 클린턴 정부의 요청에 부응하여 오사마 빈 라덴을 추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서방국가와의 관계가 개선되지 않았다. 알 바시르는 북부 수단의 국민에 대해 이슬람 율법을 엄격히 지키도록 강제했다. 음악, 춤, 결혼식 피로연 등이 모두 금지되었으며 율법을 어긴 여성에게는 공개적으로 태형을 가하고 있다. 여성이 바지를 입었다는 것만으로도 태형에 처해지고 있으며 여성들은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모든 활동을 남편에게만 의존하고 있다. 여성에 대한 통제는 가혹할 정도로 엄격하다. 알 바시르 치하에서는 고대에서나 볼 수 있는 노예거래도 횡행하고 있다. 약 20만 명의 노예가 거래된 것으로 추산되는데 대부분은 비 이슬람 흑인 여성과 아이들이다. 이들은 무슬림 아랍인에게 두 당 50 달러 정도에 거래되고 있다.
---「제 4부 그 밖의 악명 높은 아프리카의 독재자들」중에서
 

출판사 리뷰

아프리카 독재의 그늘
-아프리카 독재자들의 폭정은 언제 끝날 것인가-


아프리카에도 넬슨 만델라, 줄리어스 니에레레, 셍고르 등 시대를 앞서가는 탁월한 지도자들이 나왔다. 그러나 그 숫자는 많지 않다.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을 시작한 1960년대부터 지도자들이 많이 등장했으나 불행하게도 진정한 지도자는 찾아보기 어려웠고 많은 지도자들이 독재의 길을 택했다. 무지, 편견, 오만, 독선과 탐욕 등 부정적인 단어들로 무장한 절대 권력자들은 막강한 힘을 이용해 부를 축적하고 영구 집권을 꾀했다. 새천년을 맞이하면서 이러한 풍조는 크게 쇠퇴하고 선거를 통해 정권이 교체되는 순리가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아직도 일부에서는 영구 집권을 꾀하는 독재자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프리카의 현실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독재자들 중 장 베델 보카사Jean-Bedel Bokassa,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Francisco Macias Nguema, 그리고 이디 아민Idi Amin은 모두 동시대인이다. 보카사가 1921년생, 응게마는 1924년생 그리고 아민이 1925년생이니 비슷한 연배들이다. 이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45세 되던 해에 권좌에 올랐다. 8년 내지 13년간 통치했으며 1979년에 모두 권력을 잃었다. 이 3인방을 빼놓고도 이 책의 후미에서 기술 한 것처럼 아프리카에는 많은 독재자들이 있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지만 이들 세 명처럼 독특한 방식으로 국가에 해악을 끼친 인물은 드물다.

이 3인방은 살육을 저질렀을 뿐 아니라 국가를 파괴하고 민족과 종족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장본인들이다. 3인방이 남긴 상처는 엄청났다. 최소 30만 명이 죽고 200만 명이 난민이나 실종자가 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불구가 되었다. 종족 간의 증오심이 극대화되었고 정치적 정당성은 실종되었다. 사회적으로 연결된 고리들이 끊겨 극심한 분열이 생겼으며 경제 붕괴, 파산, 사회적 갈등, 정치적 쇠퇴 등 부정적인 유산만이 남았다. 독재가 끝나자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문제는 그대로 남았다.

응게마 이후에도 적도기니에서 독재는 계속되었다. 덜 잔인하지만 더 부패한 라틴 아메리카 식 카우디요Caudillo 군사독재가 응게마의 미치광이 독재를 대신했다. 광신적인 사회적 억압과 예측할 수 없는 테러가 응게마 시대의 통치 수단이었다면 지금은 돈이 모든 것을 대신한다. 적도기니가 산유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삼촌으로부터 권력을 탈취한 오비앙은 어느덧 40년간 권력의 정상에 있는 아프리카 최장의 집권자로서 절대적인 군주가 되었다. 그는 입으로는 민주주의와 다당제를 외치나 실제적으로 적도기니에 이러한 고상한 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늬만 있을 뿐이다. 적도기니에서는 지금도 주기적인 체포, 무자비한 구타, 숙청 등이 행해지고 있다. 인권과 민주주의는 실종된 지 오래다.

우간다와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사정도 크게 나아진 것이 없다. 독재 시절이 끝나자 테러와 게릴라 전쟁 시대를 거쳐야 했다. 정치는 여전히 지역과 종족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우간다에서는 오랜 내전 끝에 1986년 무세베니가 정권을 잡아 정세는 안정되었으나 30년 이상 장기집권하면서 독재의 폐해가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다. 선거 부정, 만연한 부패, 인권 유린, 빈부격차, 국가부채 등 문제가 겹겹이 쌓여 있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권력을 잃은 보카사가 다시 돌아와 무기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가 나중에 사면을 받았다. 그는 곧 사망함으로써 세인들의 뇌리에서 잊힌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보카사의 집권을 가능하게 만든 사회적 요소들은 아직도 건재하다. 수도 방기에서는 반역, 군부 동요, 부족 간 분쟁, 분리주의, 폭력, 부패, 비효율적인 행정 등이 여전히 판을 치고 있다. 내전도 종종 발생하고 있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은 여전히 아프리카에서 가장 낙후된 국가 중 하나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제 아프리카도 환경이 크게 바뀌고 있으며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변하고 있다. 우선 많은 나라에서 다당제가 확립되고 언론의 비판적인 기능도 강화되었다. ‘치타 세대’로 알려진 새로운 시각을 가진 젊은이들은 모바일 폰이나 SNS 사용에 능하다. 이들은 다른 나라의 사정을 잘 알고 있으며 자국 정치인과 정부를 비판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선거 때마다 모바일 폰 등 디지털 기기를 활용하여 눈을 부릅뜨고 부정을 감시한다. 앞으로는 과거처럼 독재가 쉽지 않고 특히 장기 집권을 꿈꾸는 자들은 국내외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여 좌초할 가능성이 높다. 하루아침에 정치, 사회의 구조가 바뀌고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는 마법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아프리카는 시련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희망의 길을 걸어온 저력을 가지고 있다. 아프리카의 저력이 발휘될수록 독재자들이 설 땅은 줄어들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