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한국역사의 이해 (책소개)/3.고려시대사

바다에서 발굴한 고려사 (2023)

동방박사님 2023. 11. 27.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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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고려, 바다를 달리다
우리가 몰랐던 고려 시대 바다 이야기

주꾸미가 찾아낸 고려 보물선

2007년 5월 14일,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주꾸미를 낚던 어부가 청자 대접에 빨판을 붙인 주꾸미 한 마리를 건져 올렸다. 어부의 신고를 받고 조사에 나선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발굴팀은 해당 지점에서 청자 8,000점을 비롯하여 선체, 목간, 선상 생활용품 등 총 2만 4,887점이나 되는 유물을 건져 올렸다. 2009년에는 태안 마도 1호선이 8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연이어 태안 마도 2호선과 3호선도 출수되었다. 불과 5~6년 사이에 고려 시대 선박 4척이 700~800년 동안 잠자고 있다가 세상에 나온 것이다. 선박 안에는 화물표에 해당하는 각종 목간을 비롯하여 도자기, 곡물과 같은 적재물, 그리고 숟가락, 젓가락, 빗, 장기알 등 선원들의 일상용품 등이 적재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봉인되었던 고려 시대의 타임캡슐은 그렇게 예고 없이 한꺼번에 열렸다.

목차

머리말
프롤로그_마도 1호선 뱃길을 떠나다

01_갯벌이 지켜준 고려 시대 타임캡슐

1_800년 전의 약속
수신자 정보를 담은 화물표, 목간│배에 실린 석탄의 용도는?
2_마도 해역에서 발견된 고려 시대 선박들
주꾸미가 찾아낸 보물선│마도 2호선에 실린 청자 매병은 꿀단지? 참기름 단지?│육식을 좋아했던 고려인들?│정권 실세 김준에게 배송할 물품을 실은 마도 3호선│고려 사람들도 즐겨 먹었던 밤과 오이
3_마도 1~3호선 화물은 조세인가 선물인가
마도 1~3호선을 사선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관료들의 전세를 조운선으로 운송해준 사례들

02_나라 살림의 버팀목, 고려의 조운제도

1_조운이란 무엇인가
12개 조창에서 13개 조창으로│조창은 전라도에 집중 … 경상도는 주로 육로에 의존│왜구의 약탈에 흔들린 후기 조운제도
2_조운을 통해 운송된 물자들
콩·팥·보리보다 대우받았던 피│홍합도 즐겨 먹은 듯
3_조창 사람들의 삶
고려 조창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진성창 터│바지를 걸치지 않았던 뱃사람들│스스로 죽음을 택할 만큼 고된 조창민의 삶

03_고려의 배, 서해를 누비다

1_문헌을 통해 본 고려 시대의 배
1,000여 척의 배를 이끌고 강화도를 떠난 삼별초│원나라의 일본 원정에 동원된 고려 배│중국에서 출수된 펑라이 3호선의 수수께끼
2_외국인의 눈에 비친 고려의 배
앞쪽에 철로 된 뿔이 달린 과선│서긍이 본 고려의 선박│고려 배는 먼 바다를 건널 수 없다고?
3_황비창천명 동경 속의 배는 고려 배인가
삼족오·두꺼비·토끼 등 고려 특유의 문양 등장

04_고려의 바다, 고려의 뱃길

1_합포에서 예성항까지
거제도 견내량에서 여수 가막만까지│고려 시대 조선소가 있던 장흥 천관산│백제·가야·왜의 교류 거점, 변산 죽막동
2_섬이 될 뻔했던 태안반도
미션 임파서블, 운하를 뚫어라│암반 때문에 실패한 운하 공사
3_모든 배는 벽란도로: 벽란도에 대한 진실과 오해
고려에서 송으로 가는 세 개의 항로│송나라 사신 접대를 위해 섬에 세워진 건물들│고려 사신 우대를 비판한 소동파│아라비아 상인들 왕래는 과장됐다│100척 이상의 선박이 상주했던 벽란도

에필로그_그 많던 배들은 어디로 갔을까
몽골제국 체제에선 해로보다 육로 발달│국제적 고립을 자초한 ‘조선 중화주의’│일제강점기 때 맥이 끊긴 조선의 조선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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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 : 문경호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의 사학과와 역사교육과에서 학위를 받았다. 대전관저고?대전외국어고?대전과학고 교사, 공주대 강사 등을 거쳤으며, 지금은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는 《재중 한인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공저, 2022), 《고려시대 조운제도 연구》(2014), 《중학교 역사 교과서》(공저, 2013), 《재외교포를 위...

책 속으로

2007년에는 태안선이라 불리는 고려청자선이 출수되었고, 2009년에는 태안 마도 1호선이 8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연이어 태안 마도 2호선과 3호선도 출수되었다. 불과 5~6년 사이에 고려 시대 선박 4척이 700~800년 동안 잠자고 있다가 세상에 나온 것이다. 선박 안에는 화물표에 해당하는 각종 목간을 비롯하여 도자기, 곡물과 같은 적재물, 그리고 숟가락, 젓가락, 빗, 장기알 등 선원들의 일상용품 등이 적재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봉인되었던 타임캡슐이 예고 없이 한꺼번에 열린 것과 같았다고나 할까
--- p.7

1200년대 초의 어느 봄날, 전라도 해안가에서 청자와 곡물을 싣고 개경으로 떠나던 뱃사람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배가 가라앉을 때 뱃사람들은 무사히 대피했을까? 개경에서 식량과 반찬거리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배가 침몰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상심했을까? 단순히 바다에서 출수된 유물들을 소개하기보다 그들의 마음을 글에 녹이고 싶었다. 또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잘못 알려진 유물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 p.8~9

마도 1호선의 비밀을 풀어준 열쇠는 화물표에 해당하는 목간이다. …… 마도 1호선의 목간에는 발송인(또는 선적 책임자), 발송지, 보내는 물건의 종류와 수량, 개경에서 받는 수취인 등 매우 구체적인 정보가 기록되어 있었다
--- p.24

마도 1호선에서 출수된 석탄은 매우 희귀한 유물이다. 그것이 고려 시대의 유물인지, 훗날에 섞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그러나 고려 선박에서 석탄이 출수된 것이 매우 특별한 일임은 틀림없다
--- p.27

국내에서 처음 출수된 고선박은 신안선이다. 신안선은 1323년 원나라에서 고려를 거쳐 일본으로 가다가 침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1984년에는 완도군 약산면 어두리 해변에서 12세기 중후반에 침몰한 것으로 보이는 고려 시대 선박이 출수되었다. 완도선이라 이름 붙여진 이 배 안에는 약 3만 점의 도자기가 실려 있었다. 이후 서남해 해안에서는 안좌선, 달리도선, 십이동파도선, 대부도선 등이 연이어 출수되었다
--- p.34

태안 마도 해역에서 고려 시대 선박이 처음 출수된 것은 2007년이었다. 그해 5월 14일,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주꾸미를 낚던 어부가 청자 대접에 빨판을 붙인 주꾸미 한 마리를 건져 올렸다
--- p.35

태안 마도 2호선은 2009년에 1호선 인근에서 출수되었다. 남아 있는 배의 규모는 길이 12.6미터, 너비 4.4미터 정도이며, 형태는 마도 1호선과 매우 유사하다. 배가 침몰한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목간에 적힌 인물들이 활동했던 시기를 고려할 때 1208년 또는 그보다 약간 앞선 시기로 추정되었다
--- p.41

마도 2호선 역시 1호선과 마찬가지로 중앙 관료들에게 전달할 곡물과 각종 먹거리를 싣고 개경으로 향하던 운송선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마도 2호선에 실린 곡물이나 자기 역시 지방에서 서울의 군인들에게 올려 보낸 조세 또는 공물의 성격이 강한 물품들이라고 생각된다
--- p.47

2011년에 출수된 태안 마도 3호선 역시 1·2호선 인근 마도 해역에서 발견되었다. 남아 있는 배의 규모는 길이 12미터, 너비 8미터이며, 전체적인 형태는 앞서 출수된 1·2호선과 마찬가지로 밑바닥과 이물, 고물이 모두 평평한 상자형이다
--- p.49

태안선을 제외한 마도 1~3호선은 대체로 생김새나 출수 유물이 매우 유사한 것을 보면 관선으로 볼 수 있다. 마도 1~3호선에 적재된 물건이 개인의 토지에서 생산된 지대地代인지, 관리에게 지급한 토지에서 거둬들인 전조田租인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에 따라 다소 시각차가 있다
--- p.59

태안 마도 1~3호선이 침몰한 시기가 대개 무신 집권기에 해당한다는 사실도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목간에 따르면 선적된 물품 대다수는 대장군, 별장, 낭장, 견룡 등의 무인들이었다. 이 시기에 특별히 지방에서 중앙으로 올라가는 물자가 많아지면서 해난 사고가 잦아진 것인지, 무신 집권기 이후 하급 무관들의 수조지가 개경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 설정되면서 국가가 이들의 수조지에서 생산된 물자들을 운송해준 것인지 등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상정해볼 수 있다. …… 이 시기에 무신들의 물자 수탈이 증가하면서 의도적인 파선이 늘어났을 수도 있다
--- p.70

전근대 시기의 조세는 화폐가 아니라 현물로 징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보통은 벼와 콩으로 징수했는데, 가을걷이 후 해안이나 강가에 설치된 조창에 보관하다가 강물이 녹기 시작하는 다음해 2월이 되면 바다를 통해 운송하도록 했다. 이것을 고려~조선시대에는 조운漕運, 조전漕轉 또는 조만漕輓이라고 했다
--- p.72

고려의 조운은 자국의 지리적 특성과 형편을 잘 고려하여 만든 최적의 운송 시스템이었고 평가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고려 건국 이후 14세기 중반 무렵까지 고려의 바다가 평화로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고려에서 기초를 마련한 조운제도는 고려 말 왜구 침략으로 잠시 동요된 시기도 있었지만, 곧 재개되어 조선 건국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 p.74

12세기 이후부터 서서히 동요된 조운제도는 몽골 침입 시기를 겪으면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13개의 조창을 중심으로 조세를 운송하던 제도가 흔들리면서 서서히 군현별 조운제도가 나타났다. 군현별 조운제도란 각 군현이 소속된 조창에 내던 방식 대신 군현별로 조운선을 마련하여 각 군현의 조세를 스스로 내는 제도를 일컫는다
--- p.81

조운을 통해 운송되는 물자는 곡류로부터 부식류, 도자기, 옷감, 약재까지 매우 다양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은 조세로 징수한 곡류였다
--- p.83

고려 시대 관리들은 국가로부터 받은 수조지(사전私田)에서 조세를 쌀이 아닌 다른 품목으로도 징수하여 운송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이를 입증하는 목간들이 마도 3호선에서 출수되기도 했다. 전출田出을 대신해서 전복 젓갈과 꿩 세 마리, 또는 생전복을 바친다고 쓰여진 목간이 그것이다
--- p.87

고려 시대의 조창은 판관이라는 관리가 파견된 독립적인 행정구역이었다. 판관 밑에는 실무 행정을 맡아보는 색리色吏(서리)가 있었고, 배의 운항을 책임지는 사공, 그리고 노를 젓거나 화물을 싣고 내리는 격군 또는 수수水手가 있었다
--- p.93~4

조창 주민들의 삶은 고되고 힘들었다. 1년에 한 번씩 목숨을 건 항해를 해야 했을 뿐 아니라 틈나는 대로 배를 보수하거나 새로 짓는 공사에 동원되었다. 성공적으로 개경까지 다녀오면 다행이었지만 조운선이 침몰하거나 운송하던 곡식이 상하면 배상 책임도 져야 했다. 또한 조창에 남은 조세가 있을 때는 도둑이 훔쳐가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도 그들의 임무였다
--- p.100

고려의 평저형 선박은 바닷물을 누르며 항해한다. 따라서 속도는 다소 늦지만, 외판과 외판의 양 끝단을 파내어 겹치게 나무못을 박아 단단히 고정될 뿐 아니라 복원력이 좋아 충격을 받거나 바람이 크게 불어도 타격이 적다. 1274년 원의 일본 원정에서 고려 배가 격퇴되지 않고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조선 기술과 관련이 깊다
--- p.114

고려 선박에 대해 풍부한 자료를 남긴 인물로는 1123년 고려에 온 서긍을 빼놓을 수 없다. …… 그는 고려의 배에 대해 “고려는 바다에 접해 있는데도 선박기술이 매우 단순하다. 중간에 돛대 하나를 세웠는데, 배 위에는 누각이 없으며, 노와 키만 두었다”라고 기록했다
--- p.125

황비창천명 동경煌丕昌天銘銅鏡은 항해하는 배를 가운데에 배치하고, 윗부분에는 ‘황비창천煌丕昌天’이라는 명문을 넣어 주조한 거울을 일컫는다. …… 이 동경이 그동안 한국의 선박 연구자들에게 주목받은 것은 동경 속의 배가 고려 선박일 것이라는 추정 때문이었다. …… 그러나 최근 한·중 양국의 고선박과 동경에 관한 연구 결과를 살펴보면 그러한 추정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음이 확인된다
--- p.132~33

이전의 황비창천명 동경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을 모방하여 제작하다가 원형 동경이 만들어질 무렵에는 고려식으로 완전히 재해석하여 제작했다고 볼 수 있다
--- p.139

조선 시대의 연안 항로(조운로)에 대해 비교적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조선 시대의 문헌과 고려 시대 조창의 위치, 고려 시대 선박의 출토지 등을 참고하면 고려 시대의 연안 해로를 어느 정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 p.144~45

고려·조선 시대에도 운하를 시공하려 했던 적이 있었다. …… 고려 시대에는 서산과 태안의 경계, 부평에서 김포까지 굴포를 시도했고, 조선 시대에는 서산과 태안의 경계, 태안의 의항, 안면도 등지에서 굴포를 시도했다
--- p.158

고려 시대에는 연안 항로를 이용한 물자 운송도 많았지만 국제 무역도 활발했다. 고려와 교역한 나라로는 송, 거란, 여진, 일본, 탐라, 우산국, 그리고 대식국이라 불렸던 아라비아 등이 있다
--- p.168

많은 나라가 드나들던 고려의 국제무역항 벽란도의 모습은 어땠을까? …… 벽란도는 전시에 동원되는 병선과 상인들의 선박이 모여 있던 곳이기도 했다. …… 벽란도 일대에는 동원할 수 있는 선박이 100척 이상이 정박해 있었을 것이다
--- p.178~80

한국의 해양사 연구는 문헌 중심으로 이뤄지던 이전의 풍토에서 벗어나 수중 발굴, 선박 복원, 세계 여러 나라들과의 협력 연구 등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 고려 시대의 자료들을 토대로 이론과 실제를 함께하는 해양사 연구 풍토가 자리 잡아 가기를 기대한다
--- p.197~98
 

출판사 리뷰

고려 시대의 바다와 뱃길, 그리고 배

한국역사연구회에서 새롭게 기획한 ‘금요일엔 역사책’(한국역사연구회 역사선)의 두 번째 책인 『바다에서 발굴한 고려사』는 오랜 세월 갯벌에 묻혀 있다가 봉인 해제된 고려 시대 보물선에서 출토된 유물을 토대로 고려 사람들의 생활상과 조운 등의 제도를 살피고 서해를 누비던 고려 시대의 선박과 뱃길을 고찰한다.

2006년 썩고 부서져서 절반밖에 남지 않은 신안선을 본 후 고선박에 관심을 가지게 된 저자 문경호(공주대 역사교육과 부교수)는 고려 보물선에서 출수된 유물의 단순한 소개를 넘어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잘못 알려진 유물들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통해 고려 사람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펼쳐 보인다. 서해를 누비던 고려 시대 배를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러 사료를 통해 고려 시대 연안 항로를 추정해서 자세히 안내해준다. 저자가 길어 올린 고려 시대의 바다와 뱃길, 그리고 배는 어떤 모습일까. 그 속으로 들어가보자.

생소하지만 다채로운 고려 바다

저자가 바다에서 발굴한 고려사는 생소하지만 다채롭다. 저자는 출수된 유물을 통해 고려 사람들도 밤과 오이, 홍합 등을 즐겨 먹었음을 알려주기도 하고, 콩이나 팥, 보리보다 피가 더 대접받았음을 전해주기도 한다. “지리적 특성과 형편을 잘 고려하여 만든 최적의 운송 시스템”이었던 조운제도가 나라 살림의 버팀목으로 기능할 수 있었던 이유를 고찰하기도 하고, 원나라의 일본 원정에 동원되기까지 했던 고려 배의 특징을 소개하기도 한다.

1년에 한 번씩 목숨을 건 항해를 해야 했을 뿐 아니라 틈나는 대로 배를 보수하거나 새로 짓는 공사에 동원되고 조창에 도둑이 들지 못하도록 지키는 일까지 해야 했던, 그래서 스스로 죽음을 택할 만큼 고됐던 고려 시대 뱃사람들의 삶을 전하는 대목에서는 가슴 먹먹해지기도 한다. 태안 마도 1~3호선이 침몰한 시기가 무신 집권기에 해당한다는 점을 통해 해당 시기에 특별히 지방에서 중앙으로 올라가는 물자가 많아지면서 해난 사고가 잦아진 것인지, 무신들의 물자 수탈이 증가하면서 의도적인 파선이 늘어난 것인지 등 여러 가지 가능성을 살피는 대목에서는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기도 한다.

고려 선박은 이미 10여 척이나 출토되었다. 국내외 여러 기록을 통해 규모나 형태를 파악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고려 시대 해양사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그리 높지 않다. 저자는 “고려 시대 해양사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여러 가지 유물과 자료를 토대로 “고려 시대의 바다와 배, 항로”를 개괄한 이 책에는 그러한 저자의 바람이 담겨 있다. 저자의 기대처럼 “고려 시대의 자료들을 토대로 이론과 실제를 함께하는 해양사 연구 풍토가 자리 잡아 가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