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대한민국사 이해 (독서)/2.한국현대사

12.12 쿠데타와 나 (2024)

동방박사님 2024. 2. 27.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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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12·12 군사반란을 끝까지 막으려 했던
장태완 장군의 회고록 재출간!


1979년 12월 12일,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혼란했던 국정 속 자신들의 세력을 키워왔던 하나회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나회에 대한 여러 견제의 손길은 있었지만 결국 쿠데타는 일어나고 말았고, 전두환을 비롯한 수많은 군인들이 수도 서울로 진격했다. 당시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수경사령관이었던 장태완 장군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진압을 시도했으나, 결국 서울과 대한민국은 그들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나는 지난 세월을 침묵으로 일관해 왔다.” 장태완 장군의 회고록, 『12·12 쿠데타와 나』는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장태완 장군은 쿠데타를 막기 위해 죽음도 불사했지만, 결과적으로 진압 작전이 실패한 것에 대해 오랫동안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장태완 장군의 이야기는 여러 매체에서 다뤄진 적은 있으나, 그의 실제 삶과 정신에 대해서는 많이 담지 못했다. 이 책은 1993년 출간되었다가 절판된 '12,12 쿠데타와 나'를 재출간한 도서로, 독자의 가독성을 위해 맞춤법 수정과 교열 작업을 거쳤다. 다만, 저자의 의도를 그대로 전달하고자 하는 부분의 문장들은 원문을 그대로 사용했다.

목차

1장. 쿠데타라는 비극의 씨앗

6·25 한국전쟁부터 시작된 군인의 삶
군 내 사조직 하나회의 등장
윤필용 사건으로 드러난 군의 병폐
박 대통령의 비호하에 커 나간 하나회
무소불위의 권력, 차지철과 전두환의 등장
이병형, 김복동 그리고 나

2장. 10·26 이후 드러난 야욕의 발톱

10·26 박 대통령 시해사건 발생
정승화 참모총장 ‘2급 비상사태’ 하달
군인의 정치 참여를 경계했던 정 총장
얼떨결에 맡게 된 수경사령관 자리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보내온 김장값
작전참모 박 대령의 장군 진급 탈락

3장. 비운의 12·12 군사반란

연희동 비밀 요정에서의 주연
미뤄지는 최 대통령의 연행 재가
재가 없이 행해진 정 총장 불법 연행
치밀하게 계획한 정 총장 납치 작전
육본 B-2 벙커 속 다급한 상황
적으로 변한 전우들
행방 묘연했던 국방장관의 등장

4장. 고립무원 속 수경사령관

수경사로 옮겨진 육본 지휘부
경복궁과 보안사를 목표로 출동 준비
반란군 측 제1공수여단 병력 출동
진압군 측 야포단 서울 진입 실패
반란군 측 정병주 특전사령관 체포
심야에 열린 육본 참모회의

5장. 12·12 군사반란 그 이후

반란군 측 제1공수여단 서울 진입
반란군 측 육본·국방부 완전 장악
노 국방장관, 의문의 ‘상황 중지’ 명령
믿었던 부하 손에 서빙고로 압송
쿠데타 군부의 군권 장악과 수뇌부 물갈이
12·12 군사반란의 작전 평가
12·12 군사반란의 진상규명과 단죄의 당위성
12·12 군사반란의 교훈
12·12 군사반란의 법률적 검토

6장. 시련의 감방 생활 2개월

보안사 서빙고 특수수사대
죽음을 각오한 심문 조사
수사관의 끈질긴 배후 수사
처음으로 들은 가족들의 소식
전두환과의 만남 그리고 석방

7장. 아들을 가슴에 묻고

가택 연금과 아버님의 별세
난데없이 떠난 동해안 격전지 순례
가난하지만 단란했던 우리 가족
외아들의 가출과 죽음
아들을 가슴에 묻고
외동딸 현리의 결혼
나를 괴롭히는 심근경색증
생사의 기로 앞에서 남기는 증언

부록
장태완 장군 자력표
12·12 군사반란 시차적 상황
 

저자 소개 

저 : 장태완
 
1931년 9월 13일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연 신동에서 태어났다. 대구상고를 졸업한 후 1950년에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제20사단 본부사령, 수도사단 작전참모, 육군본부 군사연구실 실장 등을 맡다가 1979년 11월 16일부로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979년 12월 12일 ‘12.12 군사반란’의 진압을 시도했지만 다음날 새벽 무장해제 당하고 연행되었다. 이후 두 달간의 조사를 받고...
 
편 : 이원복
 
황해도 연백 출생.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중 6.25전쟁이 발발하여 학도병으로 지원했다. KLO부대원으로 차출되어 황해도 연백 일대를 중심으로 유격대로 활동 했고, 전후 참전 공로를 인정받아 1954년 2월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군 복무 당시에는 여러 지휘관 및 부대로부터 정훈 업무에서 두각을 드러낸 것을 인정받았다. 이후 중령으로 진급하여 1976년까지 근무하였다. 전역 이후에도 육군의 정훈에 크게 기여했다...

책 속으로

나는 생명보다 더 소중한 군의 명예를 더럽히고 군의 정통성과 통수 체계, 기강을 완전히 짓밟아버렸을 뿐만 아니라 국헌 문란을 일으킨 12·12 군사반란에 대한 공정한 진상규명과 주동자들에 대한 단죄를 누구보다 바라 왔다.

1963년 2월 18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원대 복귀하고 민정 이양을 하겠다는 선언 후 박 의장의 특혜와 비호를 받기 시작한 전두환 중심의 11기생들은 앞으로 정규 육사 출신들이 군의 기둥이 되어야 한다는 야망으로 하나회 결성에 나섰다.
--- p.25

윤필용 사건은 군부 내 사조직을 운용하며 권력을 내세워 각종 비리와 부정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단죄되었는데, 그 사조직의 핵심 인물들이 태풍의 눈을 피해 무사했다는 것이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 p.37

1979년 10월 27일 오전 3시경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 송수화기를 집어 들고 보니 육본 교육참모부 주번사관이었다. “차장님! 2급 비상경계태세가 발령됐습니다. 빨리 들어와 주셔야겠습니다.”
--- p.55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으나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많은 장군이 탐내는 자리가 바로 수도경비사령관인데, 그런 자리가 언감생심 하던 나에게 왔으니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 p.69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허화평 보안사 비서실장이 내게 김장값을 가지고 와서 전두환 장군이 나의 수경사령관 부임을 축하하는 식사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한 것이 12월 5일이고, 조홍 대령이 내게 와서 12월 12일 오후 6시 30분 단합 만찬에 초대하겠다는 말을 전한 것이 12월 8일이다.
--- p.80

내가 수도경비사령부에 도착한 것은 오후 8시였다. 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곧장 지하 상황실로 향했다. 내가 차에서 지시한 사항들이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실에 대기하고 있는 예하 부대 지휘관은 황동환 방공포병단장 한 명뿐이었다.
--- p.103

신 중령은 다음날 새벽 전두환으로부터 밀령을 받고, 나와 수경사에 모여 있던 육본 수뇌부들을 체포하는 데 앞장섰다.
--- p.110

“장 장군! 그렇게 흥분하지 말고 이리로 와. 이리 와서 우리하고 말 좀 하자고.” 그 말을 듣는 순간,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참고 있던 욕설이 내 입에 튀어나왔다.
--- p.126

어느 교량을 통하든 그들이 서울로 진입하는 것은 시간문제인 터라 그들이 어느 교량을 이용할 것인가를 박동원(육사 14기) 작전참모에게 검토시켰다.
--- p.144

나는 그동안 여기저기에 병력지원을 요청하는 전화를 걸었다. 처음에는 병력을 지원해 주겠다고 응했던 지휘관들은 시간이 지나자, 상부의 지시가 없다는 핑계로 곤란하다고 태도를 바꿨다.
--- p.161

“우선 관측 사격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럼 광화문 일대가 쑥대밭이 됨은 물론 민간인의 피해가 말도 못할 정도로 클 거요. 그러니 포격은 불가능하고 대신 조명탄을 준비해 두겠소.”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야포단의 서울 진입도 실패로 끝났다.
--- p.171

내가 합수부 측에 대한 최후 돌격을 포기하고 집무실로 다시 돌아온 직후, 그렇게 애타게 찾았던 노재현 국방장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이때가 12월 13일 새벽 3시경이었다. 이미 반란군 부대에 의해 서울이 완전히 장악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 p.204

12·12 군사반란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다. 거듭 말했듯 오래전부터 정권 찬탈을 목적으로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일부 정치군인들의 주도하에 치밀하게 계획된 쿠데타였다.

이 군사 쿠데타에서 득세의 자리에 오른 이들은 우선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군 수뇌부부터 물갈이를 시작했다.
--- p.214

담배 하나를 물고 단숨에 몇 모금 빨았더니 머리가 핑 돌면서 현기증이 일어났다. 당연한 일이었다. 4년 전에 담배를 끊었던 데다가 지난밤에 오만 악을 다 쓰면서 악몽 같은 밤을 지새웠으니, 현기증이 일어나는 게 무리는 아니었다.
--- p.243

내가 서빙고 분실에 감금되면서부터 보안사령부에서는 사병 두 명을 일주일씩 교대로 우리 집에다 상주시켜 놓고 주야로 출입자와 가족들의 일일 동향을 감시하고 보안사에다 보고하고 있었다.
--- p.264

그 사이에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지프차에 타고 있던 중대장이 나를 중대본부로 연행하려고 하기에 하는 수 없이 신분증을 내보였다.
--- p.291

지금도 확인되지 않은 유해의 소재를 계속 찾고 있지만 나는 우선 확인된 영령들에 대해서 속죄하기 위해 매년 한 번씩 개별적인 위령제를 올려주고 있으며 현충일이 되면 어김없이 국립묘지를 찾아가 37위가 잠들어 있는 묘소를 돌며 한 송이 국화꽃을 영전에 바치고 있다.
--- p.318

때때로 수술 후유증이 생길 때면 그곳을 찾아가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수술 4년 후인 1991년 11월에 대동맥류라는 또 다른 혈관질환이 발생했다. 다시 여동생의 도움을 받아 로스앤젤레스의 세인트 빈센트 병원에서 전에 나의 심장 수술을 담당했던 요코야마 박사의 수술을 받고 돌아왔다.
--- p.337

출판사 리뷰

6·25 한국전쟁부터 시작된 군인의 삶
하지만 막을 수 없었던 비극


장태완 장군은 6·25 한국전쟁 당시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치던 수많은 청년 중 한 명이었다. 대구상업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장태완은 육군종합학교 제11기로 입교했고, 단기 사관 교육을 받은 뒤 쉴 틈 없이 전선을 오가며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호국 용사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장태완은 육군보병학교 전술학 교관, 존경하는 한신 장군 부대의 검열단장 등을 거치며 장군으로 진급하기도 했는데, 이는 6·25 한국전쟁 3년 동안 임관한 장교 3만 명 중 최초였다.

이처럼 장태완 장군은 조국을 위해 헌신한 한 명의 군인이자,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한 명의 국민이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일명 ‘정치군인’이라 불리며 뒤에서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기는 이들도 있었다. 특히 1961년 5·16 직후 자신의 기반이 될 수 있는 군 내부 사조직 ‘하나회’를 만든 전두환이 바로 그런 인물의 전형이다. 전두환과 하나회는 매우 은밀하고 치밀하게 자기들끼리 주요 보직을 차지하며 권력을 키워 나갔으며, 장태완 장군은 회고록을 통해 그 과정을 매우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불충자 유구무언의 속죄하는 마음으로
나는 지난 13년간의 세월을 침묵으로 일관해 왔다”


1979년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하나회는 본격적으로 쿠데타를 준비했다. 청와대 경호실의 행정차장보를 거쳐 작전차장보의 자리에 입성한 전두환은 차지철과 함께 권세를 더욱 키워 나갔고, 12월 12일에 맞춰 치밀하게 계획을 만들어갔다. 그리고 이제 막 수도경비사령관으로 부임한 장태완 장군도 결국 그 농단에 당하고 말았다. 12월 12일, 장태완 장군은 비밀스러운 식사 자리에 초대받았으나, 알고 보니 그것은 수경사령관이었던 장태완 장군을 묶어두기 위한 함정이었으며, 조치를 취하러 뛰어나갔을 때는 이미 전두환과 하나회 세력이 수도 서울로 진격하고 있었다.

부임한 지 한 달도 안 되었지만, 장태완 장군은 수경사령관으로서 12·12 군사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취할 수 있는 모든 연락을 취했으며, 반란군 측 군인들을 설득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반란군이 육본과 국방부를 완전히 장악했고 장태완 장군은 국가가 무너지는 비극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장태완 장군은 서빙고로 압송되어 감방 생활을 보냈다. 그리고 석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쿠데타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왔다는 것을 회고록을 통해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절대 삶과 조국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고, 1993년 ‘12?12 쿠데타 진상조사위’에 공개 증인으로 나서며 다시 조국을 위해 헌신했다.

장태완 장군은『12?12 쿠데타와 나』를 통해 다시는 12?12 군사반란과 같은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랐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비극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하고, 누구보다 크게 절망했던 이의 목소리로 재현한 그날의 진실은, 대한민국에게 아주 중요한 역사적 지침이 되어줄 것이다.

이 책을 읽어야 할 사람들

1. ‘12·12 군사반란’에 관심 있는 사람들
2. 대한민국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
3.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들
4. 장태완 장군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
5. 하나회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