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한국근대사 연구 (독서)/4.대한제국사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2010)

동방박사님 2024. 3. 22. 08:08
728x90

책소개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그와 관련된 역사 속 비화

조선의 마지막 왕인 고종은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며 대한제국을 건립한다. 하지만 허울 뿐인 제국은 일본의 힘에 굴복하고 대한제국은 단명하고 만다. 영친왕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다. 조선의 제 28대 왕통을 계승했지만, 형님이자 선왕인 순종이 승하했을 때는 이미 나라가 사라져 계승할 왕위도 없어진 뒤였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그에게 비루한 삶을 강요했다. 해방되기 전에는 볼모로 일본에 끌려갔고, 해방된 뒤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견제로 귀국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친왕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때가 오기까지는 모든 것을 꾹 참고 기다리라는 고종의 마지막 가르침을 가슴에 새긴 영친왕은 황태자로서의 기품과 격조를 잃지 않았으며, 작은 일이라도 조국과 민중에 봉사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 늘 고심했다. 영친왕의 평전을 쓴 저자인 김을한은 식민지시대의 대표적인 저널리스트로, 타계할 때까지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귀국을 위해 노력했다. 이 책에 담긴 영친왕과 관련된 다양한 비사는 한국 근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목차

끝 없는 한, 마르지 않는 눈물(無窮限不盡淚)·김을한
영친왕과 덕혜옹주, 그리고 내 아버지 김을한·김수동
영친왕을 위해 곡하다(哭英親王)·박종화

제 1부·왕조의 석양
도쿄에서
해방은 되었건만
이승만과 영친왕
윤대비의 기품
가엾은 덕혜옹주
사랑의 귀공자
의친왕과 이건 공
명성황후는 미인이었다
세 번의 통곡
고종의 고심
마지막 가르침

제 2부·망국의 볼모
정략결혼의 안팎
만년처녀 민 규수
여운형의 도쿄 방문
신혼마차에 날아든 폭탄
유럽 여행
상해임시정부의 영친왕 납치 기도
헤이그에서
10년 만의 득남
마지막 황제 부의와의 만남
하얼빈에서
불타는 민족혼
도쿄의 제 2 종묘

제3부·자유 없는 자유인
일본의 패전
평민으로 산다는 것
아들의 미국 유학
환국은 통일 후에
홍사익 중장의 비극
헐버트 박사의 귀국
6·25전쟁
밀항 학생들을 구하다
고집스러운 이 대통령
구황실 재산처리법
이승만과 요시다의 호랑이 문답
왕저는 사라지고
문제의 패스포트
이중의 국제결혼
지난한 국적 환원

제4부·창덕궁의 봄
창덕궁으로 환궁한 윤대비
창덕궁의 괴화(怪火)
주영대사를 고사하다
영친왕 쓰러지다
박 대통령과의 면담
덕혜옹주의 귀국
그리운 조국으로
고독의 왕자, 침묵의 왕자

에필로그
영친왕 연보

저자 소개

저 : 김을한 (金乙漢)
김을한은 식민지시대의 대표적인 저널리스트였다. 동명(東溟) 김을한은 190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을사년에 태어났다 하여 이름을 을한(乙漢)으로 지었다. 병자호란 때의 충신 김상헌의 후손인 그는 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양정고보 2학년 때 3·1운동을 맞았다. 그 직후 도쿄로 유학하여 와세다대학에 진학했다. 그곳에서는 김기진 등과 함께 극단 토월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귀국한 직후인 1924년, 조선일보 한기악 편집...

책 속으로

영친왕이 손수 라이터를 켜 담뱃불을 붙여줄 때는 진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아무리 민주주의 시대라 하더라도 일국의 황태자였던 이가 그렇게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너무나 소탈한 영친왕의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고 머리가 저절로 숙여졌다. 영친왕은 조국을 떠난 지 거의 반세기나 되었는데도 우리말을 잊어버리기는커녕 나보다도 더 잘했다. 게다가 궁중에서나 쓰는 우아한 말을 들으니 ‘역시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진심으로 경탄하게 되었다. --- p.21

“그때 이 대통령의 심리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도 걸핏하면 무슨 대군의 몇 대손이라는 것을 내세우면서, 황태자는 그만두고라도 개인적으로도 전주이씨 종손인 이은 씨에 대해서 어찌 그리 냉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전 국민이 영친왕을 동정하고 있었고 그만큼 인기도 대단했으므로 그것이 싫었던 것 같습니다.” --- p.33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났다가 무슨 까닭으로 만리타향에서 산송장의 신세가 되었단 말인가? 그 처참한 광경을 보고는 병원에 갔던 것을 오히려 후회하게 되었다. 이제는 하루바삐 덕혜옹주를 데려다가, 죽더라도 조국에서 죽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깊이 하게 되었다.--- p.50

영친왕님은 그때 복건에 초립을 쓰시고 연두 두루마기에 남빛 전복을 입으셨다. 나하고는 생일까지도 같은 동갑장이 열한 살의 아기인지라 그분도 세상을 모르는 듯 소파에서 뛰어놀고 계셨다. 나는 그분과 함께 뛰어놀고 싶은 충동을 가슴에 품은 채 그저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는데, 그분은 아침부터 와서 고생을 치른 우리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대로 천진하시기만 했다.--- p.103

다이쇼 일왕의 뒤를 이어서 황태자로 있던 히로히토(裕仁)가 쇼와(昭和) 일왕으로 등극하는 것을 본 영친왕은 문득 “나도 황태자였는데···” 하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라 자신도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잠시라도 일본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더욱 간절했던 것이다.--- p.119

왕전하의 경우와 똑같은 불행한 길을 걷게 되신 것인데, 옹주의 몸이었고 더구나 말이 없고 심신이 약한 분이었습니다. “마음을 굳세게 먹으셔야 됩니다”라고 말씀드리면 덕혜옹주는 다만 “예” 하고 대답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었는데, 서울로 귀국해서 어머님의 장사를 치르고 와서는 더욱 말없는 옹주가 되고 말았습니다.--- p.136

하얼빈 역두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의 조난비는 뒤집어 말하면 안중근 의사의 의거비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앞에 서 있는 영친왕의 가슴속에는 이토의 죽음을 조문하는 마음과 안 의사의 의거를 찬양하는 정반대의 생각이 서로 엇갈려서 형언할 수 없는 감회에 잠겼다.--- p.146

그들은 볼모로 잡혀온 영친왕의 신세를 동정했던 것이다. 영친왕의 눈물은 여학생들의 마음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서글펐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자 여사가 그를 따라 눈물을 흘린 것은 영친왕을 동정하는 여학생들이나 그들로부터 동정을 받는 영친왕이 다 같이 가여웠기 때문이다.--- p.153

영친왕은 문득 40년 전의 일을 회상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손에 이끌려 외종사촌 엄주명과 함께 처음으로 일본에 왔을 때 잠시 아카사카 이궁에서 묵었던 일이 생각난 때문이었다. 혼란한 영친왕의 머릿속에는 “조선독립 만세!”라는 민중의 부르짖음과 함께 “이왕전하!” 하고 자기를 환호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에는 “아니야, 아니야. 내가 무엇을 했다고?” 하는 생각과 함께 회한의 눈물이 흘렀다.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가?--- p.179

나는 의장대를 지휘하던 원용덕 중령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고 덤으로 다시 한 번 연주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군인답게 선뜻 쾌락하면서 “국빈을 위해서 또 한 번 받들어 총!” 하고 호령했다. 수십 자루의 총이 수풀처럼 일제히 높이 들렸다. 군악 소리도 요란히 울렸다. 좌우로 박사를 부축해 안은 우리는 형언할 수 없는 감회를 품고 지휘관의 선도를 따라 의장대를 사열했다. 헐버트 박사의 노안에도 눈물이 어렸다.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조선왕조 500년의 마지막 페이지

광복절이 언제인지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100년 전 나라를 잃은 경술국치일이 8월 29일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말 그대로 치욕스러운 날이기 때문에 드러내놓고 기념한다는 것이 언감생심이었던 사회 분위기 탓도 있다. 그러나 승리와 영광의 역사만큼이나 패배와 아픔의 역사 또한 기록하고 반추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팔봉 김기진이 말했듯 ‘조선왕조 500년의 마지막 페이지’인 영친왕의 생애를 예사롭게 넘길 수는 없을 것이다.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영친왕이라는 열쇠구멍으로 들여다본 왕조의 몰락과 왕실 사람들의 말로, 그리고 이를 둘러싼 현대사 이면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당사자들의 생생한 육성에 실어 들려주는 소중한 기록이다. 이와 더불어, 황태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간 영친왕 이은 씨의 안타까운 운명과 인간적인 면모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 책에는 영친왕뿐만 아니라 그와 인연을 맺은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아버님 고종과 형님 순종은 물론이고 덕혜옹주, 명성황후, 윤대비 등 왕가의 여인들, 그리고 의친왕과 이우 공을 비롯한 왕손들의 다채로운 에피소드는 쓸쓸하지만 때로는 흐뭇한 왕실의 뒤안길을 보여준다. 영친왕의 황태자비로 간택되었다가 파혼 당함으로써 평생 처녀로 늙었던 민갑완 여사, 고종을 도와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 말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평소의 소원대로 한국 땅에 묻힌 헐버트 박사의 뒷이야기는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이승만과 박정희, 이토 히로부미와 맥아더 같은 역사적 인물들도 선연이든 악연이든 영친왕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오사카 역에서 중국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를 만난 것도 영친왕의 비극적인 삶에 방점을 찍는 장면이었다.

격조의 왕자, 침묵의 왕자

영친왕은 기울어진 나라의 운명처럼 신산한 삶을 살았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가 되어 조선의 제 28대 왕통을 계승했지만, 형님이자 선왕인 순종이 승하했을 때는 이미 나라가 사라져 계승할 왕위도 없어진 뒤였다. 열한 살 어린 나이에 일본에 끌려갔고 일본의 왕족과 정략결혼을 했으며 1963년에 귀국할 때까지 50여 년을 일본에 머물렀다. 해방되기 전에는 일제의 볼모로 묶여있었고, 해방되고 나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견제로 귀국할 수 없는 신세였다. 이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온화하고 성실한 영친왕은 황태자로서의 기품과 격조를 잃지 않았으며, 작은 일이라도 조국과 민중에 봉사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 늘 고심했다. 6·25전쟁으로 한국에 주둔한 유엔군을 위해 『A First Book of Korean』이라는 한국어 교본을 저술한 일이나, 공부를 하려고 일본에 밀항한 청소년들을 구제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쓴 일 등은 이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영친왕의 담백한 성품을 잘 보여주는 일화도 있다. 제 3대 국회에서 ‘구황실 재산처리법’을 제정하여 고궁과 왕릉을 포함한 구황실의 모든 재산을 국유화했다. 한국 정부는 심지어 도쿄에 있는 영친왕의 저택마저 (주일대표부 건물로 쓰기 위해) 국유라며 내놓으라고 우겼다.
뜻 있는 일본 변호사 한 사람이 막대한 구황실 재산의 계승자인 영친왕에게 소송을 권했다.

“전하, 한국 정부에서 전하의 재산을 다 빼앗고 생계비도 드리지 않는 것은 법률위반이므로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 꼭 이깁니다. 재판을 거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변호는 제가 무료로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영친왕은 잘라 말했다.
“선생의 호의는 고마우나 이것은 우리나라 내부의 일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리고 나는 아무리 곤란하더라도 내 나라 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할 생각은 없소이다.” (p234)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의 후손들이 매국의 대가로 받은 땅을 자기 것이라고 우겨서 끝끝내 그것을 삼켜버리는 후안무치가 횡행하는 요즘, 염치란 무엇인지를 우아하게 가르쳐주는 본보기라 하겠다.

때가 오기까지는 모든 것을 꾹 참고 기다리라는 고종의 마지막 가르침을 가슴에 새긴 영친왕은 무척이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기쁠 때는 미소를 약간 짓고 슬플 때는 억지로 참고 있다가 아무도 없는 밤중에 이불 속에서 혼자 우는 것이 제 2의 천성이 되었다. 말년에는 실어증마저 겹쳤다. 그리운 조국에 돌아온 뒤 7년간 병상에 누워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깊은 한을 품은 채 영면했다. 나라를 빼앗긴 죄과 때문에 역사와 백성 앞에서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는 왕가의 업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최후였다. 하나뿐인 여동생 덕혜옹주도 정신병에 걸려 말을 잃었으니 남매의 운명 또한 기구했다.

한은 끝이 없고 눈물은 마르지 않는다

저자 김을한과 영친왕의 만남은 운명적이다. 김을한의 백부 김황진은 오랫동안 고종니제를 곁에서 보필한 시종이었고, 아내 민덕임은 명성황후의 친정인 여흥 민씨 가문의 여식으로서 덕혜옹주의 유치원 시절 동무였다. 저자 스스로는 신문사 특파원으로 도쿄에 주재하던 1950년부터 영친왕과 개인적인 인연을 맺었으며, 이후 영친왕이 서거할 때까지 어려운 처지의 영친왕에게 망국의 충신처럼 헌신했다.
김을한은 기자다운 엄밀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냉정한 사가(史家)의 눈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깊은 애정과 연민을 담아 이 책을 서술하고 있다.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가련한 운명을 안타까워하고 그들이 선조의 땅에서 눈을 감고 뼈를 묻게 하겠다는 김을한의 뜨거운 마음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문장은 읽는 이로 하여금 인간 영친왕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게 만든다. 그가 쓴 서문의 제목이 ‘끝없는 한, 마르지 않는 눈물(無窮限 不盡淚)’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영친왕을 위해 곡하다

이 책의 원본인『인간 이은』의 제작에는 당대 최고의 고수들이 참여했다. 영친왕이 서거한 이듬해인 1971년 출간된 책의 장정(裝幀)은 운보 김기창이 그렸고 제자(題字)는 일중 김충현이 썼다. 작가 김팔봉과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이 추천사를 썼으며 월탄 박종화가 영친왕의 영전에 바치는 시 「영친왕을 위해 곡하다(哭 英親王)」를 헌정했다. 영친왕을 위해 울어줄 이 많던 시절이었다.

추천평

조선 500년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는 영친왕이다. 영친왕 이은 씨의 파란만장하고 또 기구한 일생이야말로 우리의 머리와 가슴과 피를 뜨겁게 하는 기록이 아닐 수 없다. 동명 김을한 씨의 『인간 이은』은 그 시대환경과 한일 두 나라의 인정·풍토 가운데서 영친왕의 인간상을 가장 정확하게 부각시킨 문장이다. 1950년 이후 영친왕을 가까이 모셔온 동명은 누구보다도 자연인 이은 씨를 잘 아는 사람이다. 영친왕 이은 씨의 일생을 우리 독자에게 소개하는 동시에 망국 왕조의 역사를 회상시키는 기록을 남기는 일에 동명만한 적임자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 김팔봉 (작가)
영친왕은 한마디로 말해서 비극의 주인공이다. 좀 더 일찍이 세상에 태어났더라면 한 나라의 군주가 되었을지도 모를 분이 시대를 잘못 만나서 망국의 통한을 품은 채 거의 일생을 볼모로 지낸 일을 생각하면 인간적인 동정을 금할 수 없다.
- 장기영 (전 「한국일보」 사장)
김을한 씨의 서술은 대체로 정확하며, 아주 어려운 시기에 왕전하의 잘못된 국적을 다시 고치고 가여운 덕혜옹주마저 본국으로 모셔오게 해준 그 노고를 고맙게 생각한다.
- 영친왕비 방자 여사
김을한 씨는 다년간에 걸쳐 우리 가족 일에 관해서 여러 가지로 상세한 자료를 수집해왔다. 김을한 씨는 이 저작을 통해서 정확한 역사와 부친에 관한 일을 자세히 소개하고, 한일관계의 복잡함을 말하고 있다.
- 영친왕의 아들 이구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