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한국역사의 이해 (독서)/9.한국문화

남도 명량의 기억을 걷다 (2024) - 이순신 '조선수군 재건로' 44일의 여정

동방박사님 2024. 4. 8.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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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조선수군 재건로’ 500여 킬로미터,
구국의 길에 깃든 명량대첩의 생생한 발자취


임진왜란의 변곡점이 된 명량대첩. 세계 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이 전투의 주역들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어린 ‘구국의 길’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그 이야기의 중심에 이순신 장군이 있다. 모함으로 감옥에 갇혔다가 백의종군한 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고, 조선수군을 재정비하여 명량대첩을 이끈 그가 전라도 백성과 함께한 길. 총연장 500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이 길은 경남 진주에서 하동을 거쳐 구례에서 곡성, 순천, 보성, 장흥, 강진, 완도, 해남, 진도와 우수영에 이른다.

이 책에는 1597년 8월 3일(음력)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된 이순신이 조선수군을 재건하며 명량대첩에 이르는 44일의 여정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늦여름에서 스산한 가을에 이르는 ‘남도 이순신길-조선수군 재건로’에서 우리는 당시의 긴박한 상황과 마주한다. 육로와 바닷길을 따라가노라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하나가 된 이순신과 조선수군의 거친 숨결이 훅 끼쳐오는 듯하다. 탄식과 설움에 겨운 울음소리와 함께 남도의 많은 전쟁터에서 여러 형태로 구국의 길을 걸었던 남도인들의 의로운 투쟁의 흔적이 사무치게 다가온다.

이 책에 실린 220여 장의 사진(저자가 찍은 것이고, 일부 드론 사진은 이우철의 작품)은 400여 년의 시공을 넘나들며 마주하는 현장의 생생한 모습을 로드무비처럼 전해준다. 보며, 느끼며, 읽으며 깨닫게 되는 뿌듯함 가운데 ‘걷고 싶어지는 길’로 안내한다. 본문 맨 뒤에 실린 ‘조선수군 재건로 주요 현장 찾아가는 길’은 현장 답사를 위한 내비게이션의 첫 버튼 역할을 한다.

목차

● 추천사
옛사람 만나고 이야기 나누며, 그 시절로 시간여행을
이 시대의 『난중일기』에 비견될 만한 이야기
생각은, 알고 있는 만큼 발원한다
구국의 길, 조선수군 재건로를 기억하다
● 출간에 부쳐
‘조선수군 재건로’ 따라가는 첫발을 떼면서

1. 이순신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나?

이순신에게 다시 공을 세울 기회를
의금부에서 풀려나 아산 거쳐 남도로
칠천량에서 조선수군 궤멸…제해권 상실

2. 조선수군 재건, 절체절명의 순간에 서다/ 1597년 8월 3일, 진주·하동·구례

구례현청 도착…성 안팎은 텅 비어 있고
병참물자 확보, 시간과의 싸움

3. 섬진강변 따라 숨 가쁘게 달려 곡성·옥과로/ 1597년 8월 4일, 곡성

힘없고 가진 것 없는 백성이 무슨 죄인가?
어디가 강이고 땅인지 분간할 순 없지만

4. 청야책에서 살아남은 병참창고를 찾아서/ 1597년 8월 8일, 순천

다량의 활과 화살, 총통을 손에 넣고
군관들 속속 합류…마음은 벌써 남해안으로

5. 군량미 확보했는데 조선수군 철폐라니/ 1597년 8월 9일, 보성

봉인된 곡식 그대로…군량미 걱정 ‘끝’
전시 상황과 일본군 이동 경로도 파악하고
수군 철폐하라!…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수군 철폐령 속에서도 조선수군 재건 그대로
이젠 해안으로…배 타고 바다로 나아갈 준비를
향선 얻어타고 조선전함 찾아 회령포로

6. 병참활동 끝내고 조선전함과 함께 바다로/ 1597년 8월 18일, 장흥

조선함대 회수…우리에겐 죽음만 있을 뿐
요새화된 판옥선으로 개조…수군 재건 일단락

7. 해상에서 적응 훈련하며 전투 준비 시작/ 1597년 8월 20일, 강진·완도

마량에서 강진 찍고, 도암 거쳐 북평으로
‘마지막 통제영’ 고금도 거쳐 완도·해남으로

8. 만신창이 된 이순신, 몸 추스르고 다시 바다로/ 1597년 8월 20일, 해남

군율로 군사 마음 다잡고, 민심도 안정시켜
일본전함과 첫 만남…해상추격 ‘자신감’ 회복

9. 열세한 병력으로 어떻게 일본군 물리칠까/ 1597년 8월 29일, 진도

일본군의 계속된 정탐…조선수군 적극 공격
결전의 시간 임박…수군진 우수영으로 옮겨

10.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을 것/ 1597년 9월 15일, 울돌목

한 사람이 길목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해
초요기를 올려라! 조선수병이여, 진군하라!
일본군 전함에 맞선 판옥선의 우위 확인
바닷물 역류…포수와 사수 총공격 명령
일본전함 갈팡질팡, 일본수군은 혼비백산
승전 현장에 명량대첩비와 전첩비 ‘우뚝’

● 바다의 중요성 알았던 이순신, 지금 우리는?
● 조선수군 재건로 주요 현장 찾아가는 길
 

저자 소개

저 : 이돈삼
 
남도에 살고 있다. 산과 들, 섬과 바다, 강변에서 해찰을 즐긴다. 오늘도 발품을 팔며 남도 골골샅샅을 하늘거리고 있다. 자연과 역사, 문화는 물론 마을과 고샅, 나무와 꽃도 관심 대상이다. 주된 일터는 전남도청이다. 《오마이뉴스》 《전남일보》 《대동문화》 등 신문과 잡지, 텔레비전과 라디오 등 매체를 통해 남도여행을 이야기하고 있다. 5·18사적지 안내해설사(5·18기념재단), 5·18역사해설사(전라남도)로도 ...

책 속으로

이순신은 송대립, 황대중 등 군관 9명과 병사 6명을 대동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조선수군 재건의 첫걸음이었다. 진주에서 하동, 구례, 곡성, 순천, 보성, 장흥, 해남, 진도로 이어지는 ‘남도 이순신길-조선수군 재건로’의 출발이다. 명량대첩을 준비하는 길이기도 하다. 일본군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며 병참을 확보해야 할 이순신에게는 ‘희망’보다는 절망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이순신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전라도에서, 전라도 백성과 함께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 p.46~47, 「1장 “이순신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나?」중에서

여염집만 빈 게 아니었다. 현청도 싸늘했다. 현감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해 주민을 분산시키는 소개령(疎開令)이 내려진 뒤였다. 말 그대로 무인지경이었다. 이순신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초가을 하늘이 유난히 높았다. 집 나가 오갈 데도 없이 산속에서 헤매며 굶주림에 시달리고, 밤 추위에 떨고 있을 백성이 떠올랐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 p.75, 「3장 “섬진강변 따라 숨 가쁘게 달려 곡성·옥과로」중에서

당시 부유창이 있던 터에는 현령비만 덩그러니 서 있다. 높이 150㎝가량 된다. 돌담이 줄지어 선 마을 한복판이다. 일제강점기에 주암면 행정복지센터가 있던 자리다. 여기에 ‘남도 이순신길-조선수군 재건로’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그날의 상황을 묘사한 이순신의 일기와 함께 불에 타는 군량미, 조선군사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자부심이지. 우리 마을에 이순신 장군이 다녀갔고, 또 우리 마을이 그만큼 중요한 곳이었다는데.” 보행보조기를 밀고 돌담길을 따라 지나가던 한 어르신의 말이다.
--- p.94, 「4장 “청야책에서 살아남은 병참창고를 찾아서」중에서

마을에 샘터도 있다. 당시 동헌과 객사 터는 모두 빈집으로 남아있다. 폐가가 되다시피 했다. 잡초 무성한 곳은 관리들이 유흥을 즐기던 자리라고 했다. 마을에 고목도 많았는데, 모두 폐사했다고 한다.
조양창이 있던 뒷산에 시누대도 많았다. “저기 산 아래 들판이 군마 조련장이었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병사들이 훈련하고 말도 훈련시킨 곳이었다고 해요.”
--- p.115, 「5장 “군량미 확보했는데 조선수군 철폐라니」중에서

이순신이 바닷길을 따라 강진과 해남으로 가는 사이, ‘남도 이순신길-조선수군 재건로’는 회진에서 해안을 따라 강진 마량으로 간다. 영화 〈천년학〉 세트장이 있는 선학동(仙鶴洞)마을에도 들른다. ‘천년학’은 이청준의 소설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임권택 감독이 만들었다.
--- p.169, 「6장 “병참활동 끝내고 조선전함과 함께 바다로」중에서

고금도는 이순신과도 뗄 수 없는 섬이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명나라 진린과 함께 마지막 본영을 두고 일본군을 무찌른 곳이다. 이순신을 모신 사당 충무사와 월송대(月松臺)가 있다. 월송대는 이순신의 시신을 안치했던 곳이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의 유해가 옮겨졌다. 이순신의 유해는 월송대에 10여 일 안치됐다가 충남 아산에 묻혔다.
--- p.187, 「7장 “해상에서 적응 훈련하며 전투 준비 시작」중에서

마을 한가운데 방죽샘이 있다. 당시 조선수군이 먹는 물로 이용했다는 우물이다. 정교하게 깎은 돌기둥을 육각형으로 세워 튼실해 보인다. 암반에 세워진 명량대첩비도 우수영에서 만난다. 1688년(숙종 8)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박신주가 전라우수영 동문밖에 세운 비석이다.
“여그가 바닷가였어. 간척하기 전에. 그래서 암반이 있어. 비석도 옛날부터 여그 있었고. 우리 어렸을 때 여그서 연 띄우고 다마 치고 놀았는디. 그때 일본놈들이 이 비석을 강제로 뜯어가부렀어. 그것을 다시 돌려놓은 거여.” 명량대첩비 앞에서 만난 마을 어르신의 말이다.
--- p.215, 「8장 “만신창이 된 이순신, 몸 추스르고 다시 바다로」중에서

임진왜란의 승패는 바다에서 결정됐다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순신은 바다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바다를 누비며 백성을 지키고 나라도 살렸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바다의 중요성에 대해 얼마나 인식하고 있나? 혹여 잊고 지내는 건 아닐까? 우리나라 지도를 거꾸로 봐야 한다. 지도를 거꾸로 세우면, 우리 앞에 큰바다 태평양이 펼쳐진다. 그 바다의 중심에 대한민국이 자리한다. 그 자리에 이순신과 장보고를 내세워야 한다. 바다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로 하고, 우리가 잊고 지낸 그 바다를 되찾아야 한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이다. 그것만이 살 길이다. 바다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날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 p.265~266, 「바다의 중요성 알았던 이순신, 지금 우리는?」중에서

출판사 리뷰

‘남도 문화의 전령사’가 들려주는
이 시대의 『난중일기』─“지도를 거꾸로 보자”


저자 이돈삼은 오랫동안 각별한 애정과 열정으로 발품 팔며 남도의 자연과 사람을 만나고, 유구한 역사와 문화에 눈을 맞춰 왔다. 이 책에서 우리는 남도사랑이 짙게 배어 있는 그의 발걸음을 따라 4세기 전, 치열했던 순간의 주역들이 힘겹게 걸어간 길고 긴 고통과 인내의 길을 함께한다.

조선수군 재건로 44일의 여정에서 저자는 우리가 정유재란 당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그 시절 그곳으로 떠나는 시간여행의 동반자가 되어 준다. 중간중간 인용된 『난중일기』는 생사를 넘나드는 현장의 숨 가쁜 상황을 보고 느끼게 할 뿐만 아니라 의향(義鄕) 남도의 문화와 유적에 스민 선인들의 숨결과 정신까지 생생하게 전해 준다.

이순신 장군과 백성이 걸어간 의로운 투쟁의 길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이 책은 ‘이 시대의 『난중일기』’(노기욱, 추천사)라 할 만하다. 책 말미에서 저자는 우리가 잊고 지낸 바다를 되찾아야 함을 역설한다. 지도를 거꾸로 보면 바다의 중심에 자리한 대한민국. 바다가 미래를 좌우하는 날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오늘, 조선수군 재건과 명량대첩의 자취를 통해 ‘바다를 새롭게 인식하고 살길을 찾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힘과 지혜를 모아서 풀어가야 할 과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