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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문학관 (윤동주생애 : 동영상 캡처) 2024-03-06

동방박사님 2024. 4. 13.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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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초반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옥은 함경북도 종성군 동풍면 상장포에 거주하다가 1886년 길림성 자동으로 이주하였으며, 독실한 장로교회 장로인 할아버지 윤하현 장로는 명동촌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아버지 윤영석은 1910년 명동학교의 설립자인 김약연의 누이동생인 김용과 결혼하고 명동학교에서 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19세기 말 조선인들이 간도로 대거 이주하게 된 것은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에 기근이 심해지자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서였다. 그런데 간혹 미국의 청교도처럼 종교적인 이유에서 새로운 촌락 공동체를 건설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구세동(救世洞영생동(永生洞낙원동(樂園洞명신동(明信洞)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와 달리 유교를 신봉한 김약연은 처음에는 맹자의 정치철학에 입각하여 '((()'의 이념을 실천하는 유교적인 이상촌을 세울 생각으로 1901년 서당인 규암재를 설립했다.

그러다가 이상설 등이 이웃 대불동에 설립된 서전의숙을 통해 신식교육의 필요성을 깨닫고 명동학교를 건립하였다. 이때 김약연은 서울청년학관을 졸업한 정재면을 교사로 초빙하였는데, 정재면은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드릴 것을 부임하는 조건으로 제시했다. 이에 김약연은 며칠을 숙고한 후 장로교로 개종하기로 결심하였으며,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여 장로교회 목사가 되었다. 이로써 마을에는 교회를 설립하고 학교에는 신앙교육을 실시하는 등의 기독교 공동체로 변모하는 한편, 이동휘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을 초청하여 부흥사경회를 열어서 신앙훈련과 민족정신 고취에 힘썼다.

김약연은 독립운동을 위한 교육에만 그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1811월 길림에서 무오독립선언에 서명한 39명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며, 19193월에는 '간도 독립선언포고문' 작성에 동참하고 동간도의 3·13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탓으로 일제에 체포되어 2년 동안의 옥고를 치렀다. 일본군 간도토벌대는 19201020일 명동학교를 파괴한데 이어, 1925년에는 명동학교를 폐쇄 조치했다. 이때까지 명동학교는 17년에 걸쳐 1,200여 명의 민족지도자를 배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