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한국근대사 연구 (독서)/6.근대한반도전쟁

조선인들의 청일전쟁 (2024) - 전쟁과 휴머니즘

동방박사님 2024. 4. 23.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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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역사가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의 역사
130년 전 조선인들이 치러낸 ‘남의 나라 전쟁’

130년 전 전쟁을 지금 소환하는 이유

지금으로부터 꼭 130년 전인 1894년 7월 시작된 청일전쟁은 한중일 동북아 3국의 운명을 가른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청나라는 서양 열강이 아닌 ‘섬나라’에 참패한 것을 계기로 온갖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패망이 가속화되었다. 일본은 ‘늙은 대국’에 압승을 거두며 근대화의 선도국임을 입증하며 이후 러일전쟁을 거쳐 태평양전쟁까지 군사적 제국주의의 길을 달려나갔다. 조선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기까지 하지만 타력에 의한 자주독립국의 한계에 부딪쳐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미국과 중국의 대결 구도, 러시아와 북한의 제휴, 중국과 대만의 갈등 등 한반도 주변 정세가 심상치 않은 만큼 청일 양국의 틈바구니에서 원치 않는 전장戰場이 되어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를 입은 것은 물론 국가 운명도 비틀린 당시 조선의 역사를 들춰내는 것이 반면교사로서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목차

책을 내면서

서설-동아시아 삼국의 청일전쟁사
청일전쟁 주요 연표

[1부] 은폐와 진실: 일본군의 왕궁 점령과 ‘보호국’ 구상

1. 일본군의 조선 왕궁(경복궁) 점령에 대한 재검토
1─조선 파병 결정과 전쟁으로 가는 과정
2─왕궁 점령 실행의 구체상
왕궁 점령계획과 세부 기획자들|왕궁 점령의 실제 상황|일본 측의 사후 조치
3─왕궁 수비병의 활동에 대한 재인식

2. 1894년 7월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대한 반향
1─피란과 그 후유증
‘서울 엑소더스Seoul Exodus’|지방의 사례
2─민심 수습책과 서울 빈민 조사
3─인식론의 방향
왕실의 ‘이중외교’|정부 관료의 입장|재야유생과 의병의 논리|동학농민군의 인식과 대응

3. 청국군의 동향과 일본군의 출동
1─청국군의 출병과 동원
병력 편성과 출병|청국군의 요구사항과 영접 준비|영접관 편성과 영접 내용|동원 내용 분석|동학농민군 진압 준비
2─일본군의 조선 파병과 동원
대본영의 출병계획과 실행|혼성여단의 아산 출병|물자와 인부 징발|병참체계 구축

4. 일본의 조선정책: ‘보호국’ 구상과 실현 과정
1─전시 조약과 장정의 강제
〈조일잠정합동조관〉과 〈(조일)양국맹약〉|〈신식화폐 발행장정〉 시행
2─‘보호국화’의 내용과 결과
3─보호국 프로젝트의 연쇄

[2부] 야만의 전쟁과 휴머니즘: 풍도 해전·성환 전투

1. 풍도 해전과 성환 전투
1─풍도 해전과 지역민
풍도 해전과 결과|지역민의 대응
2─성환 전투와 청국군의 ‘선승후패’
3─청국군의 패주
4─프랑스 신부 살해사건
5─조선인 피해 상황

2. 동원 시스템과 군표 발행계획
1─동원 시스템
일본인 인부 모집과 파견|조선인 인부 동원
2─대용증권(군표) 발행계획

3. ‘야만의 전쟁’과 선전
1─일본군 서울 개선식과 전리품 순회 전시
2─‘전쟁영웅’의 신화와 현실
3─‘황은皇恩’으로 은폐된 가족의 비극

4. 전쟁과 언론인의 윤리와 책임
1─종군기자: 전쟁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
2─일본 주요 언론에 보이는 ‘조선 이미지’
김옥균 암살 관련 보도|동학농민군 관련 보도|관군·청국군과 일본군에 대한 상반된 논조|정치·사회상의 왜곡 전달
3─한 일본인 종군기자가 본 청일전쟁과 조선: 니시무라 도키스케의 《갑오조선진》 분석
니시무라 도키스케의 행적|서울 사정과 민심 동향|주요 정치가와 ‘조선 개혁’|일본군과 청국군·조선 군인들|동학농민군의 동향

[3부] 반성 없는 역사의 반복: 평양 전투와 평안도의 현실

1. 평양 전투 직전 청·일군의 동향
1─후발 청국군의 인력 동원·징발과 민원
청국군의 평양 도착|물자 및 인력 징발|전쟁 준비와 동향
2─일본군의 인력 동원과 현지 징발
북상 행군|비협조 관리의 교체|인마 징발의 실상
3─중화 전투와 지역민의 반일운동
일본군 선발정찰대 파견과 전투|현지 주민의 저항

2. 평양 전투의 내용과 평가
1─선교리·모란대·현무문 전투
선교리 전투|평양성 전투|전투 결과
2─청국군 패주 후의 상황
‘평양 제노사이드Pyongyang Genocide’|량치차오와 청국 정부의 패인 분석|일본군 제1군 사령부 편성과 북상
3─전쟁특수와 모험상인

3. 평양과 평안도의 현실
1─‘전시 대징발’
물가 폭등과 한전 시가 앙등|징발의 여러 사례|되돌려받지 못한 군용수표
2─지역별 황폐상과 후유증
경기 북부·황해도·평안도 상황|패잔 청국군의 음행과 노략|일본군의 일탈과 지역민의 질고|병참부의 촌락 및 가택 수색
3─청국군 포로와 조선인 참살 사례
평양 전투 포로 참수|참살의 일상화

4. 북진 물자와 노동 인력
1─수송과 병참
인원 편성과 수송|병참지 상황
2─임금과 인력
임금 지급체계의 혼선|일본인 인부들의 패행
3─압록강 전투와 조선인 인부의 도강

맺음말을 대신하여- ‘유원지의’와 ‘내자불거’의 상생 네트워크

저자 소개 

저 : 조재곤
 
국민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국민대학교 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동국대학교를 거쳐 현재 서강대학교 연구교수로 있다.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시기의 한국 근대 경제와 정치·사회 변화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는 『한국근대사회와 보부상』(혜안, 2001), 『보부상: 근대 격변기의 상인』(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그래서 나는 김옥균...

책 속으로

청일전쟁의 첫 단추는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사건이었다. 당시 일본의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이 사건의 경위에 대해 일본군 보병 1개 연대와 포병, 공병이 조선 정궁인 경복궁에 입성하려 할 때 조선군이 발포했기에 일본군이 이를 추격하여 궁궐로 들어간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는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을 ‘메이지 27년 7월 23일 전쟁’이라고 표현했다. 일본 참모본부도 이를 ‘한병韓兵의 폭거’라 하면서 우발적 사건으로 축소하여 기술하였다
--- p.38

일본군의 조선 출병의 가장 큰 명분은 일본인 ‘거류지 보호론’이었다. 일본은 동학농민군이 투쟁을 중단하면서 조선의 치안이 진정됨에도 불구하고 이 ‘거류지 보호’를 들어 출병했다. …… 그러나 일본 조계는 인천 주재 영사 노세 다츠고로를 통해 혼성여단의 인천 진주에 대해 항의했다
--- p.46

7월 23일 당일 오토리 공사는 독판교섭통상사무 조병직에게 공식 서한을 보내 궁궐 부근에서 조선 병사가 “아무 이유 없이” 일본 호위병에게 발포하여 부득불 대응 차원에서 발포하게 되었으니, 조선 정부가 “부당한 행위”에 대해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조회했다. 이에 대해 7월 24일 조병직은 궁궐 밖이 아니라 궁궐 안으로 일본군이 “난입”함에 따라 총격전이 있었음을 언급하고, 일본군은 즉시 궁궐에서 철수하라고 주장했다
--- p.57

조일 양국 간 병력 교체는 왕궁을 점령한 지 한 달여 만인 8월 24일 오전 11시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궁궐에서 철수한 일본 군대는 광화문 바로 옆의 장위영으로 이동하여 일정 기간 주둔했다. …… 일본의 궁궐 내 경찰 파견에 대해 조선 정부는 반발했으나, 결국 일본이 무기를 반납하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후 입궁하는 모든 사람은 일본군의 증명서를 받아야 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통행할 수 없었다
--- p.64

조선 왕궁 수비병은 7월 23일 하루에만 궁성 안과 밖에서 세 차례, 북악산에서 두 차례 등 총 다섯 차례 적극적으로 항전했다. 시간 순으로 궁성 내 평양 병사(징상 기영병徵上 箕營兵) 500명의 1차 교전에 이어 광화문 밖 서편 장위영 병사 300명의 2차 교전, 창경궁 흥화문 앞 통위영병 200명의 3차 교전 및 오전과 오후에 걸친 경복궁 북방 북악산(백악) 퇴주 조선 병사의 두 차례 교전(평양 병사와 장위영 병사의 연합공격)이 이어진 것이다
--- p.66

황현은 이렇듯 병사들의 항전 의지가 충만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종의 사격 중지 명령으로 “모두 통곡하면서 끝내 성을 버리고 흩어져 달아났다”고 썼다
--- p.69

왕궁 점령 한 달 전부터 일본군은 서울 사대문을 매일 오후 7시 반에 폐쇄해 자유로운 왕래를 차단했다. 서울에서 관리를 하던 김약제는 …… 요충지도 모두 일본 군대가 장악하자 인심이 점점 변하여 도성 사람들은 노인네를 부축하고 어린애를 이끌며, 꼬리를 이어 도성을 빠져나갔다는 것이다. 그는 “도성 밖의 10분의 9가 비었고, 길 위에 사람들의 통행이 매우 드물었다. …… ”
--- p.77

일본군은 왕궁 점령 과정에서 500여 년에 걸쳐 내려온 조선 왕실의 보물 및 관청의 집기, 군영의 무기들을 대대적으로 약탈했다. 일본과 가까웠던 개화 인사 김윤식마저 성안의 인가는 대부분 세간을 모두 버리고 떠나서 텅 비었고, 내별고內別庫에 쌓아 둔 돈·재화·잡물들은 모두 일본인이 약취했다고 지적했다
--- p.88

일본영사관에서는 일본에서 보낸 3만 엔으로 인천에서 백미 367석을 구입하여 마포 현석(현 서울 마포구 신수동 일대)에 쌓아 두었다. 그리고 조선의 신화폐와 미곡을 반반씩 제공하기로 하고 …… 총 2,613호에 총지급액이 백미 391석 9두 5승, 금전 7,678원 75전이었다. 이는 일본 당국이 서울 상황 전반을 조사하여 통치 전반에 활용하는 한편 피란 과정에서 이반된 민심을 일시적이나마 수습하고자 하는 복합적인 의미를 가진 조치였다
--- p.95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을 전후로 한 청·일군의 동향을 살펴보면, 먼저 청국군 다수는 평양을 중심으로 조선 북부 지역에 포진하였다. 충청도에서는 동학농민군 토벌을 위해 각처로 파견되었던 청군의 일부가 아산으로 귀환하였다. 240 반면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은 이후 곧바로 교전을 위해 청국군 주력이 주둔하던 아산 지역으로 전함을 대거 급파하는 형국이었다. 7월 25일 오토리 게이스케 공사는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해 청국군을 축출하는 데 일본군의 협조를 요청한다는 형식적 절차를 마련하였다. 이날 일본 해군은 아산 앞바다 풍도 일원에 있던 청국 함대를 기습적으로 선제 공격했다
--- p.122

7월 25일 오전 7시와 8시 사이에 북양해군 소속 순양함 제원호와 남양수사 포함 광을호로 구성된 청국 함대가 요시노·아키츠시마·나니와 등 3척으로 구성된 일본 함대와 남양만 앞바다에서 맞닥뜨렸다. …… 요시노호는 오전 7시 25분 사정거리 3,000미터에서 청국 함대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때 광을호는 달아나다가 충청도 서산군 해안에서 암초를 만나 좌초되자 군인들을 상륙시킨 후 폭파되었다. 전투 과정에서 청국군은 10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했다
--- p.235

고승호에 승선한 1,116명의 중국 군인 중 871명은 사망했고 나머지 245명만이 목숨을 건졌다. 이 배 …… 선장 골즈워디 이하 18명은 구조되었지만 나머지 5명의 영국 선원, 필리핀과 중국 선원 56명은 수장되었다. 살아남은 일부 병사들은 고승호 침몰 후 프랑스함과 독일함·영국함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된 사람도 있었고 섬이나 육지로 헤엄쳐서 겨우 목숨을 구한 사람들도 있었다. …… 이 배에 동승했던 청국 북양해군 고문 독일인 콘스탄틴 폰 한네켄은 그해 7월 28일 자 증언에서, 물에 빠져 익사 위기에 있던 청국 군인에게 총격을 가해서 겨우 170여 명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 p.238

청국 군함을 궤멸시킨 일본은 곧바로 아산만의 백석포에 군대를 상륙시켜 평택을 거쳐 성환의 직산에서 청국군과 대회전을 펼쳤다. 조선은 본격적으로 청일전쟁에 휩싸이게 되었고 …… 일본군은 성환에서도 청군을 대파하면서 조선의 중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고, 패잔 청군은 관동과 관북을 거쳐 평양으로 퇴주했다
--- p.244

당시 서산·해미·홍주·덕산·예산 지역은 태안에서 온 청국 병사와 7월 29일의 성환 전투에서 패배하여 흩어진 병사들이 들어와 마을을 약탈하자 주민들이 놀라 달아나는 등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반면 일본은 그 와중에서도 전리품 획득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
--- p.247

성환 전투는 갑오년 전쟁 기간 중 청일 쌍방 간 제1차 지상전으로 비록 규모가 작은 전투였지만 그 영향은 매우 컸다. 스기무라에 따르면, 성환의 승전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의 인심은 평온을 되찾아 종로의 큰 상점들도 7월 30일부터 문을 열었고, 8월 1일부터 시내는 점차 인적이 많아져 거의 이전 모습을 회복했다고 한다. ……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아산 전첩의 결과, 경성 부근은 이미 중국 군대의 형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조선 정부는 완전히 우리 제국이 장악하는 가운데 기쁜 소식이 곧바로 전국에 퍼지게 되었다”라고 평가했다
--- p.257

8월 1일 일본 천황 메이지는 〈선전조칙〉을 공식 발포했고 같은 날 청국 황제도 〈개전조칙〉을 발포함으로써 전쟁을 공식화했다. 원래 일본의 선전포고 초안에는 ‘청국 및 조선국에 대한 전투를 선언’한다는 것이 들어있었는데, 최종안에서는 ‘조선국’이 삭제되었다. 조서에서 메이지는 조선이 ‘독립국가’임을, 광서제는 ‘중국의 번속’임을 강조했다. 전쟁에 임하면서 청국과 일본은 각각 조공을 매개로 하는 화이질서와 국제법을 명분으로 하는 공법질서를 조선에 제시했다
--- p.262

각읍의 연이은 보고에 의하면 서산·해미·홍주·덕산·예산 등지에서는 태안에서 온 병사와 성환 방면에서 흩어진 병사들이 퇴로를 찾지 못하고 마을로 들어와 약탈하여 놀란 백성들이 모두 흩어졌다고 한다. …… 청국군이 물러나자 7월 29일부터 일본군이 백석포를 거쳐 아산으로 들어왔다. 일본군은 객사와 산비탈 등에 주둔하는 한편 민가와 관청 건물에 들어가 남아 있는 전곡과 집기 등을 빼앗고 사직단과 관청의 장부를 불태웠다
--- p.269

청국군이 강원도 춘천에 도착한 것은 8월 22일 무렵이었다. 이곳에서도 청국군은 “가는 곳마다 횡포가 무쌍하여 백성의 재물을 함부로 빼앗고 젊은 부녀들은 만나는 대로 능욕 강간하며 길가의 집에 있는 개와 닭·소·도야지 등속은 있는 대로 다 잡아먹거나 끌고 가며 골골마다 조선 관가(즉, 관청)에서 주민을 강제로 부역을 시켜 짐도 지게 하고 부상병을 업게 하고 가마도 메게 하는데 …… 섭 대인(예지차오)·마 대인·왕 대인 등을 멘 십여 명의 교꾼들이 까딱 잘못하면 칼이나 총개머리로 사람을 막 때린다고 합니다”라 기록되어 있다
--- p.273

8월 18일 일본군은 짐꾼 중 짐을 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품삯을 주지 않았고, …… 이에 짐꾼으로 동원되는 것을 피해 조령에서 충주에 이르기까지 50리 근처 5개 동 백성들이 모두 피란하는 바람에 마을들은 텅 비게 되었다. …… 이 기간 병사와 유민 등의 피란은 섬까지 이어졌고 또는 나라 밖인 중국 지린 변강 및 산둥 지역 덩저우까지 이어졌고, 각종 유언비어도 난무했다
--- p.277

청일전쟁 기간 군표 발행을 결정하게 된 것은 개전 후 4개월 만인 1894년 11월부터였다. …… 군용수표는 군대 이동, 군수품의 대가, 차마 인부의 임금 지불을 위해 발행하며 …… 일본공사 오토리는 북진 일본군이 일본 지폐와 은화를 한전과 교환하여 사용토록 할 계획이었는데, …… 조선 정부에 증권 30만 원을 교부해 일본 백동화나 지폐를 교환자금으로 삼되 …… 그러나 예산 문제로 현금과 교환을 위한 지불준비금으로 총액의 3분의 1인 10만 원만 보내도록 했기에 문제의 소지가 있는 증권이었다. 따라서 대다수 조선인은 증권 받기를 거절했고 …… 이 기간 일본 외무대신은 노무자에 대한 임금 지불의 지연이 민중봉기의 한 원인이 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 p.298

일본군 개선부대는 50~60명의 조선인 인부가 전리품인 깃발과 나팔, 종, 큰북 등을 들고 선두에 섰고, 보·기·포병, 공병대·치중대·위생대 등 각 부대가 차례로 정렬했다. 오전 5시, 개선부대가 일본군 막영지 동남방에 세운 개선문 밖에 집합하자 고종이 파견한 이완용이 오전 7시경 용산 근방에서 일본 군대를 맞이했다 …… 당일 오토리 공사와 오시마 혼성여단장은 경복궁에 입궐하여 고종을 알현했고, 오후 5시 친군 장위영 내에서 군부대신 조희연이 일본군 장교들을 초청하여 축하연을 거행했다
--- p.302

일본군이 서흥부사 홍종연에게 나무칼을 씌우고 조사하는 모습을 묘사한 종군화가의 그림, 평양 공격의 상세한 전투지도, 일본군이 청국 간첩에게 칼을 씌어 금천군수를 비롯한 조선인 관리에게 인도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도 게재했다. 동학당과의 전투 과정에서 생포한 농민군 부상자를 일본 군의가 붕대를 매주고, 부사가 친척 등에게 넘겨 준 사실뿐 아니라, 수령 등 91명을 포획하고, 청풍에서 수령 등 130명을 죽인 사실도 게재했다
--- p.369

그가 본 서울의 일반민들은 수시로 모여서 무엇인가를 우왕좌왕 논의하고 소문을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인 대다수는 청일 간의 전투에서 일본의 승리를 믿지 않았다. 도키스케는 이에 대해 “하등 감각 없이 이를 관망한다”고 개탄했다. …… 전쟁의 풍문을 계층별로 느끼는 감이 달랐다고 했는데 ‘하등 인민’들은 허황된 말이라 하고, ‘중등 인민’은 승패의 사실이 아직 판명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오직 ‘상등 사회’의 몇몇만이 믿는다는 것이다. 조선인들은 청국이 일본을 어린아이처럼 우습게 본다고 느끼고 있었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평양 대승의 보도를 접한 일본 거류민들은 집집마다 국기를 걸고 축배를 들었고, 오토리 게이스케 공사가 서울 주둔 일본 군인을 초대해 축하연을 연 사실을 기록했다
--- p.388

성환과 아산의 전투에서 패한 예지차오 등은 관동과 관북으로 우회, 퇴주하여 평양에서 합류했다. 경복궁에서 왕실 호위를 하다가 일본군에 무장해제당하고 쫓겨난 평양의 기영箕營 징상병徵上兵도 합류했다. …… 고종은 자신이 발표한 정령은 왜인의 협박과 핍박에 말미암은 것으로 본인의 의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뜻을 외무참의 민상호를 통해 청국에 전달한 바 있다
--- p.412

당시 청국 측 기록에서도 압록강 변 의주부터 평양까지 이어지는 “연도의 시가에서는 한 사람의 흔적도 찾을 수 없고, 밭 가운데 수수와 조도 각 군대의 말먹이로 다했고, 옷 궤짝과 가구·솥이 도로에 널려있다”면서 가을 수확을 거둘 수 없게 되어 이들을 진휼하지 않으면 민심이 돌이킬 수 없게 된다며 8월 중순 평양 이북의 심각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p.420

북상하는 일본군은 개성의 전신국을 점령하고, 평양 방면으로 가는 전신도 차단하면서 전진했다. 일본 군대의 북진에 조선 정부는 미리 각 연도의 지방관에게 가급적 일본 군대에 편의를 제공할 것을 명했다. 일본군은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관내 각 군현의 지방관에 대한 인사권에 간여하여 교체하기도 했다. 9월 4일 혼성여단은 황해도 서흥부에 도착했다. 이때 청국군과 내통하면서 일본군의 징발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방해하는 것을 독려한 혐의로 서흥부사 홍종연을 가두고 참모 나가오카 가이시가 직접 취조했다
--- p.435

성환 전투 때와 마찬가지로 조선인의 반일 감정과 동원된 인부들의 도망은 계속되었다. 일본군 부대가 황해도 강령을 왕복하면서 해주 서쪽 취야장에 머물던 때 최윤학이라는 자가 일본군들에게 취사를 제공한 일로 동학농민군에게 살해당하고 가산도 모두 빼앗긴 일이 있었다. 8월 경기도 장단에서는 일본군 군량 수송 명목으로 군의 좌수 남형철이 ‘군량을 실어 보내는 수레를 대신하는 돈’이라 가칭하고 각 동 집강執綱을 비롯한 촌민을 수탈하고 각 면과 각 동에 강제로 징수하는 등 폐해를 일으켜 동민들이 원정原情을 올렸고, 그 결과 그는 다음 해 4월 경기감영을 거쳐 법부 고등재판소로 압송되었다
--- p.447

8월 말 오토리 공사가 평양에 밀정으로 밀파한 이규진의 보고에 따르면, “서흥부 이북의 조선인은 모두 청군에 가담했고, 일본인을 잡아들이는 자에게는 한 사람당 2,500관의 상금을 내걸어 수렵인은 소총을 손에 들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작업을 폐하고 각자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길을 막고 있어, 마치 청군에게 일본인을 끌고 가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것과 같다”라면서, “청군보다 중화·황주 부근의 조선인이 더 위험하다”고 부연했다
--- p.462

청국 병사들은 안주·병현·창광산 등 세 갈래 길로 나뉘어 모두 군장·기계·치중 및 금은전백金銀錢帛을 버리고 맨손으로 도주했다. 마침 큰비가 내려 습한 숲에서 진흙탕을 밟아 넘어지는 등 아비규환의 상황이었고, 강을 건너다가 익사한 자가 10명 중 5~6명이었다 한다
--- p.473

평양 전투 당시 참혹한 병란으로 평양성 전체가 잿더미로 변했고, 선화당 밑에 시체가 즐비했는데 일본군을 피해 있다가 포격으로 희생된 이들이었다. 그 시체들을 성밖으로 끌어내어 모두 불에 태웠으나 열흘 동안 태워도 다 타지 않았다 한다. 서양인 선교사의 일기에서 알 수 있듯이, 평양의 여러 전쟁터에서 청국군 시체 일부는 땅 위에 노출되어 있거나 흙을 약간 그 위에 뿌린 정도여서 지독한 악취가 나는 등 참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 p.480

당시 평양은 인구 2만여 명의 도시였다. 그러니 청국군 1만 5,000여 명의 군량과 군수 등을 대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인직의 신소설 《혈의 누》에도 평양 전투의 피란 상황 묘사가 매우 생생하다. …… 이인직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남의 나라 싸움에 이렇게 참혹한 일을 당하는가. …… 무죄히 죄를 받는 것도 우리나라 사람이요, 무죄히 목숨을 지키지 못하는 것도 우리나라 사람이라, 이것은 하늘이 지으신 일이런가, 사람이 지은 일이런가”라고 부연했다
--- p.490

평양 전투 당시의 상황을 반추해 보면, 평양성의 담장은 높고 넓으며 형세도 험하여 방어하기에 좋고 청국군의 양식은 족히 한 달 정도의 여유가 있었으며 무기와 탄약도 부족하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군을 방어하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예지차오는 적과 싸우려는 의지가 없이 겁을 먹고 황급하게 철퇴를 감행했고 결국 전투는 완패했다. 반면 일본군의 경우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평양 출병 부대 전원이 보급과 병참의 미비로 크게 곤경을 겪고 있었다. …… 만약 전투가 이틀 이상 계속되었더라면 일본군은 탄약과 양식 공급이 어려워 포위공격전은 실패하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p.494

평양 전투 직후부터 시작된 일본군 북진에 갑오개화파 정부는 적극 협조했고, 선유사 권형진을 평안도 지역에 파견하여 전쟁 수행 협조와 민심 수습을 도모했다. 평양에 도착한 권형진은 …… 청국의 수백 년 압제를 벗어나게 해준 일본군에게 현지 주민들은 물심양면으로 협조해야 하며, 일본군은 주민들을 해치지 않을 것이므로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의 포고문이었다. 권형진은 이후 평양을 출발하여 북진하는 일본군의 인마와 미곡 징발에 협조했다
--- p.502

평양 북부의 정주는 집들이 알아볼 수 없도록 부서졌고, 의주는 청국군의 약탈과 방화로 3,000호 가옥 중 2,000호 이하만 남게 되었다 한다. 평양은 6만여 명의 주민이 전쟁 시 1만 5천 명으로, 안주는 3,000호가 300호로 10분의 1 규모로 줄어들었다. 성천은 650호의 가옥이 250호로, 순안은 600호의 가옥이 60호로, 황해도 황주의 주민은 3만 명이 6,000명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 p.536

신천은 촌락이 불타고 인민의 7할이 피란 후 돌아오지 않아 10분의 7은 경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다. 도로의 인민은 모두 물건을 지고 멀리 외곽으로 몸을 숨겼고 특히 부녀자들은 산중 또는 벽촌에 무리를 이루어 피란 가는 모양이었다. 오키는 그중에서도 평양·황주·순안·중화 부근의 피해가 가장 심해, 이 지역 사방 7~8리[조선 리 70~80리]는 모든 물건을 약탈당해 실로 닭과 개 하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지경에 빠졌다고 한다
--- p.539

웨이루쿠이 군은 조선에 들어와 이르는 곳마다 노략·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조선을 구호하는 군으로서 도리어 조선을 유린했기에 이것이 곧 조선 사람들을 격하게 해서 왜에게 이용되는 바가 되었습니다. 그 후 의주로 도주했는데, 의주 사람들이 성을 막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두려움이 심했고 또한 원한이 깊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p.544

출판사 리뷰

한국인의 시각에서 본 이 땅의 ‘고래 싸움’

그 역사적 의미에 비해 지금까지 우리는 청일전쟁에 관해 다소 무관심한 편이다. 역사 교과서에서 청일전쟁을 다룬 글은 길어야 한 쪽을 넘지 못한다. 조선 정부가 동학농민군 토벌을 요청하자 정나라 군이 진주했고, 일본군이 톈진조약에 따라 거류민 보호를 빌미로 출병했다가 전투가 벌어졌으며 그 결과 조선의 ‘보호국화’가 가속화되었다는 설명에 그치는 정도다. 게다가 당장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관련서도 많지 않을 뿐더러 그나마 일본과 중국 번역서가 주류다. 중국 출신의 작가 진순신이 쓴《청일전쟁》이 많이 읽히는 편이지만 이는 군담류의 ‘소설’이고, 진지한 연구서로는 하라 아키라나 하라다 게이이치 등 일본 학자들의 저술이 나왔지만 묵기도 했거니와 어디까지나 일본의 시각에서 다뤘다는 아쉬움을 떨칠 수 없다. 당시 조선인들의 이 전쟁을 어떻게 바라봤고, 어떤 피해를 겪었으며, 정부는 어떻게 대응했는지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의 학술연구교수로 한국 근대사를 꾸준히 천착해온 지은이가 “남의 나라끼리의 전쟁이되 조선인들이 치러야 했던” 청일전쟁을 꼼꼼하고도 치밀하게 짚은 이번 책은 그 이유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한중일의 다양한 자료를 망라한 실증적 분석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이 책은 청일전쟁의 역사를 온전히 담아낸 것은 아니다. 역사교과서에서 무심코 지나치는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사건을 청일전쟁의 단초로 해서 압록강 전투까지만 다루고, 중국 본토에서의 전투와 전쟁에 마침표를 찍은 시모노세키조약까지는 소략하게 다뤘기 때문이다. 그나마 ‘황해해전’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꼼꼼하고 치밀한 사료 수집과 중국·일본의 연구성과를 섭렵해 청일전쟁을 온전히 그려낸 점은 일반 독자든 연구자든 놓칠 수 없는 미덕이다. 이를테면 청나라 제당파帝黨派와 후당파后黨派 간의 갈등, 평양전투의 전과를 허위보고한 예지차오의 말로 등이 중국 측 자료 덕분이라면 경복궁을 점령했던 일본이 민심을 달래기 위해 실시한 빈민구호사업의 선정기준과 지원금액이나 일본군의 북상경로를 상세히 전하면서 동원했던 조선인 인부의 임금까지 적시한 것 등은 일본 자료에 힘입은 것이다. 공문서는 물론 사적인 일기, 참전병 기록, 당시 신문기사 등 등 책에 인용된 다양한 자료를 접하다 보면 ‘과연 이 정도까지’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새삼 드러난 일본 군국주의의 민낯

상세하다 보니 읽을거리도 적지 않다. 이를테면 일본 군국주의의 민낯을 보여주는 ‘전쟁영웅’을 둘러싼 가짜 신화 만들기가 그렇다. 성환 전투에서 총탄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부대 선두에 서서 진군나팔을 입에서 떼어놓지 않았다는 ‘안성 진격의 나팔 병졸’ 시라카미 겐지로가 실은 안성천을 건너다 익사했을 가능성이 크며 게다가 실제 나팔 병졸은 기구치 고헤이였음에도 국정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신화화됐단다. 평양 전투 시 평양성의 현무문을 열었다는 일등졸 하라다 주키치는 그에 관한 군가가 여러 나올 정도로 ‘군신軍神’으로 대우받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서는 술에 빠져 큰 빚을 지는 바람에 훈장도 박탈당하고 ‘비국민’으로 잊혀졌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지역할당제에 따른 징집 명령서를 받은 홀아비가 마을대표의 입영 독촉을 견디다 못해 아들을 죽이고 종군했다는 기사도 미쳐 돌아가는 일본 군국주의의 민낯을 보여준다.

이 책은 한마디로, 한국 사학자가 한중일의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그려낸 청일전쟁 조감도라 할 수 있다. 워낙 다양한 자료를 동원한 덕분에 관련 연구자들에게도 자신의 연구에 든든한 디딤돌이 되어줄 노작勞作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