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기독교 근대유산 (2016~) (여행지)/6.대전.충남

강경 기독교 전래

동방박사님 2016. 10. 30.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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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 기독교의 전럐

  19세기 금강 유역의 대표적인 포구였던 강경은 당시 전국 3대 시장의 하나로 온 나라의 상선이 모이는 원격지 교역의 창구이자 넓은 강경평야를 배후에 가진 곡창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 이후에는 충남 제2의 일본인 거주지로서 식민행정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강경의 기독교는 1896년 침례교 계통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들은  한국인 사역자 지병석의 집이 있던 북욱리(북정) 137번지 부근의 옥녀봉 일대 7천여평을 매입하여 충청도 선교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비록 재정적인 문제로 말미암아 그 선교사들은 얼마뒤 철수하였지만 강경과 인근 칠산의 침례교회는 1901년 여름 4-50명의 신자들이 주일마다 함께 모여 독자적으로 집회를 갖고 있었다.  그 후 강경침례교회(당시는 봉대교회)는 또 다른 선교사 펜윅(M.C. Fenwick, 편위익)의 인도를 받으며 한국 침례교의 전신인 '대한기독교회'의 유력한 교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강경 지역 기독교 전래와 관련하여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당시 강경 남쪽 황산포에 있었던 황산교회의 존재이다.  그 때 황산은 전북 여산군 북일면 지역으로 남장로교 군산스테이션의 선교 구역이었다.  황산교회가 설립된 시점은 1905년에서 1906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그 교인들은 하루 16시간씩 돗자리를 짜면서 생활하는 영세한 사람들이었지만 자력으로 예배처소를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 황산교회는 설립 7-8년만인 1913년 그곳의 행정구역이 바뀌면서 선교사들의 양해 아래 강경의 감리교회와 통합되었다.

  강경의 기독교는 19세기 말 침례교 계통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지만 그 후 강경 선교를 주도한 교파는 감리교였다.  1903년 공주에 스테이션을 설치한 북감리교 선교사들은 그곳을 근거지로 하여 점차 영역을 넓혀 갔고 그 사역자 들의 발걸음은  곧 논산을 거쳐 강경에 이르렀다.  강경감리교회(현 강경제일 감리교회)는 그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기독교 지향의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여 대개 1907년 무렵 조직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08년 3월 연회(年會)에서 강경포구역을  신설하고 이용주 전도인을  파견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여기서 하나의 구역이 설치 되었다는 것은 그 구역 안에 1개이상의 신앙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을 뜻하며 북감리교 선교 담당자들의 총회였던 연회는 보통 전년도 상황을 근거로 자신들의 조직을 개편했으므로 강경에는 1907년에 이미 선교사들이 인정하고 있는 신자집단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당시공주에서 교육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던 윌리암스(Frank E. C. Willianms, 우리암) 역시 1907년 무렵 강경교회가 시작되었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강경감리교회는 조직된 지 불과 1년 만인 1908년 만동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강경성결교회는 1918년 경성성서학원(현:서울신학대학)을 졸업한 정달성의 활동으로 시작되었다.  정달성의 강경 목회는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어느정도 기반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시작되었던 부여의 다른 성결교회들과는 달리 강경성결교회는 먼저  목회자가 파견되어 개척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강경성결교회 첫신자는 여학생 한 명이었다.  또 그 후에 들어온 교인들도 남편도는 아버지의 반대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또 모임 장소도 퍽 비좁았다.  강경성결교회가 안정을 찿기 시작한 것은 매일 새벽 두시 반 부터 남녀교우 40여 명의 기도회로 큰 은헤를 받아 1922년 겨울 이후였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923년에는 새로운 예배당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결국 건축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