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기독교 근대유산 (2016~) (여행)/9.군산.전북

군산소개와 세관본부

동방박사님 2016. 11. 13.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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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소개

군산은 전북의 서북단 금강하류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다. 원래 군산이라는 지명은 지명은 지금의 고군산도 였다.섬이 무리지어 있어 군산도라 했고 조선 전기에는 그곳에 해군 파견부대인 군산진이 설치되있었다. 그러다가 군산진이 지금의 군산으로 옮겨 오면서 그곳을 고 군산도라 하고 이곳을 군산이라 칭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군산에 조창이 생긴 연대는 중종7년 (1512년)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전라도 세곡을 용안현 특성창에서 서울의 경창에서 해상으로 수송하다가 중종 7년 군산포로 옮긴것이다. 그 후 군산창은 촉구, 만겨,함열, 김제.금구. 전주. 남원 등 부근 7개 고을의 세곡(稅穀)을 모아 경창으로 모냈기 때문에 七邑京創)이라 했다. 이는 개항 전무터 군사이 배후지에 미곡집산지로 국가적 유통의 중심지 였음을 보여여준다. 뿐만 아니라 개항 이전 군산 부근은 상어빚로서 장시가 크게 발달했다.


금강과 금강지류인 무명천 (현 경포천)을 통해 만경, 강경, 서천 방향으로 해상운송이 용이했기 때문에 경포시장과 경장시장이 있었다. 특히전주 가동에 자리 잡은 경장시장 (현 군산고등학교 부근 팔마산 자락)이 16세기 무렵 옥구군 경장리 (현 경장동)에 개설되어 오구군은 몰론 군산, 방면 이외에도 임피, 전주, 함열, 강경,한산 까지 상거래가 폭넓게 이루어 졌다.


군산음 진남포와 목포가 개항된 다음해인 1899년 5월에 마산, 성진과 함께 개항되었다. 군산은 항구로서 내륙으로 금강의 수로를 이용하여 작은 배로 300리(120km)까지 통할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더구나 그 배후에는 전북 충남에  펼처진 최대의 곡창지대가 펼처저 있었고, 인근 강경시장은 조선3대 시장의 하나로 물자판매액과 출시 상인의 성황을 보인 유명한 시장 이었다. 즉 일제는 군산과 강경을 인천-경성. 진남포 평양처럼

밀접한 관계를 멪게 함으로써 미곡의 반출, 수입상품의 유통구조를 구축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개항 당시인 1899년 군산은 511명의 조선인이 거주 했으며 일본인은 77명(13%)이었다. 그러나 그후 일본인이 계속 늘어 1905년에는 1,620명 (31.4%)이었다. 그러나 그후 일본인이 계속늘어 1905년에는 1,620명 (31.4%( 1914년에는 무려 4,742명 (47.1)으로 증가 하였다. 당시 일본인들은 토지를 직접 매수하거나 구입한 토지를 담보로 더 많은 면적의 토지를 확보했다. 도 미곡상, 고리대, 잡화상으로 군산 상권을 장악했다. 이는 일제강점기 군산이  미곡을 수출하고 또 일본으로 부터 가공품 등을 수입하는 상업도시 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구 군산세관 본관

이건물은 군산항을 통해 드나들던 물품에 대해 세금을 거두던 세관이 있던 곳이다. 군산하을 개방한 조선은

광무3년 (1899)인천 세관 관할로 군산세관을 설치했으며, 1906년에는 인천세관 군산 지사를 설립하고 1908년 에 이 청사를 준공했다. 독일인이 설계한 이건물은 벨기에에서 붉은벽돌을 수입하여 유럽양식으로 건립 했는데. 한국은행 본점과 같은 양식이다. 바깥벽은 붉은 벽돌이지만 내부는 목조로 건축했으며 슬레이트와 동판으로 지붕을 올리고 그위에 세개의 뾰족한 탑을 세웠다. 이건물은  건축사적 의미외에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에서 쌀 등을 빼앗아 가던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으로서 역사적 교훈을 주는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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