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기독교 근대유산 (2016~) (여행지)/3.수원.경기

수원지역의 기독교수용과 성장

동방박사님 2017. 3. 13. 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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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지역의 기독교 수용과 성장

미감리회는 1880년대까지 인천과 서울을 근거로 선교활동을 펼쳤지만 1890년대 부터는 평양 원산과 함께 수원에서도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미감리회는 서울과 이남지역을 관할하는 수원순회구역을 조직 하였는데

여기에는 수원, 시흥,오산, 이천 광주주지역이 포함되어 있었다.1890년대에 이미 오산이나 광주 등지에서는 여러 신앙 공동체가 생겨 났지만 수원은 외세에 대한 반감이 강해 성안으로 진출이 어려웠다.


서울 이남 지역의 선교가 활성화 되기 위해서는 수원의 성안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 급무였다. 1901년 미감리교회 선교사 스크랜턴은 신실한 신앙을 지닌 김동현을 통해 화성 안에 가옥을 구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구입하려는 가옥이 화령전 (華寧展) 과 너무 가까웠기 때문에  화성유수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화성유수는 기독교의 교당을 짓는 것을 신성모독으로여기며 가옥구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일로 인해 김동현은 감옥에 같혔으며 거래를 취소한 이후에야 풀려다. 화성유수는 화령전 부근 이외의 장소는 허용한다고 하면서 성안의 몇군데를 추천하였다. 따라서 수원 및 공주 순회구역장이었던 스웨어러는 김동현 대신 이명숙을 통해 북문 안 보시동의 13칸자리 초가를 구입 하였다. 이로서 수원 성안에 선교 근거지가 마련 되었다.

 

1902년 2월17일 남자3명과 여자 4명이 신자로 등록하면서 수원 성안의 최초교회당인 수원읍교회, 오늘의 수원 종로교회 가 탄생한 것이다.그리고 베크의 도움으로 15명으로 매일학교를 개설하였는데 이것이 지금의 삼일학교와 매향학교의 시작이다. 교회가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1908년 수원종로교회를 중심으로 "수원지방"이 조직되어 1912년에는 수원지역 뿐만아니라  제천, 음성을 포함한 충북지역과 여주, 이천 등의 경기동부, 그리고 남양, 안산 등 경기 서부를 관할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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