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전쟁교훈여행 (2010~) (여행)/5.일본다크투어

한국인피폭자 위령비

동방박사님 2017. 8. 8.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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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피폭자 위령비

재2차 세계대전 당시일본의 징용으로 끌려간 한국인 가운데 원폭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비. 1970년에 세웠으며 평화의 종 근처에 있다. 위령비 밑에는 2527명의 사망자 명단이 함께 묻혀 있다.

한국인 피폭자 위령비는 이 자리로 옮겨지기까지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처음에 이비는 1970년 4월

평화기념공원  바깥에 건립 되었다. 인류사상 최초의 원폭피해지로서 세계평화를 호소하는 히로시마시 였지만 이 비의 공원재 건립에 고나해서 만큼은 엄격한 제한을 두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식이 알려지면서 위령비는 "민족차별의 상징"으로 부각 되었다. 한때 "한국 이라는 국명을 붙이는 것과 관련하여 재일 거류민단과 조총련사이에 마찰이 일면서 남과 북이 대립하는 상황까지 빚어졌다. 희생자 중에는 "조선인" 도 있다는 것이 조총련의 주장이다. 당시 히로시마시는 공원 내에 이비를 세우면서 다른 새로운 공작물을 세울수 없다는 이유로 크게 반대 했다. 하지만 공원 내에 하나 둘 다른 비석이나 조각물 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한국민단이 1975년에 위령비 이전을 시에 요청 했으나 별다른 이유 없이  또다시 거부 당했다. 1980년대 초반에는 조총련도 공원 내에 " 조선인의 피폭자 추도비를 세우겠다 며 시에 허가를 요청 했으나 히로시마시는" 하나로 통일하라" 며 이역시 거부 했다. 민단과 조총련간의 합의가 이루어 지지 못하고 시간만 흘러가던중 1998년 히로시마 측에서 민단이나 조총련이 아닌 별도의 민간 위원회 이설을 요청하면 허가 하겠다고 밝혀서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 되었다.1999년 2월  재일 한국인을 중심으로 "위령비 이설 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성금과 모금으로 1500만 엔의 경비잔액을 모을 수 있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1999년 7월 오랜 숙원 이던 위령비의 공원내 이전이 실현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