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기독교 근대유산 (2016~) (여행)/2.강화.인천

강화 중앙교회

동방박사님 2017. 10. 23.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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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중앙교회 (1900)

근세 100년의 강화역사는 기독교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강화복음화와 함께 일제 강점기이 민족운동, 교육운동, 3.1만세운동 등 커다란  사건들이 기독교인 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 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사와 지역사의 중심에 강화중앙교회가 크게 자리잡고 있어 "강화의 예루살렘교회"라 불린다. 이와 같은 흐름에서 교회가 역사를 이야기 할때 크게 네가지, 즉 복음, 민족(강화), 교육, 강화중앙교회 라는 요인이 상호보완적 관계로 연결지으며 발전한 것이 특징이다. 둘째 지역사회에서 민족의 정치사회적 현실과 교회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민족적신앙"의 역사. 셋째, 복음과 민족의 종교역사적 전통과 만남으로 이루어지는"토착적신앙"의역사. 넷째, 민족구원과 교육운동을 통한 "계몽적신앙"의 역사.


더리미에서 벌어진 "피의세례" 를 기억한다면 순교자 들이 다녔던 교회도 둘러보아야 합니다. 읍내 중앙시장 뒤족 언덕위에 듬직하게 앉아 있는교회, 그 곳은 김동수, 김남수 등이 신앙생활을 했던 강화중앙교회입니다.

김동수 권사 형제들은 1907년 군대가 해산되고 강화주민들이 군인들과 함께 일본군과 대항하는 과정에서 죽임을 당햇습니다. 일본군은 김동수 권사 형제들을 더리미 해변으로 끌고 가서 처형했습니다.

정문 앞에는 큼지막한 "김동수 순국비가 있고, 현관에 강화기독교 역사자료실이 있습니다.


김동수권사 3형제 순국 (殉國)

1907년 한국군대 해산으로 발생된 정미의병운동 때, 일본군은 강화의병 진압과정에서 일진회를 앞세워 의병 가담자 뿐 아니라 평소 배일성향을 지니고 있던 영향력있는 인물을 제거함으로써 강화 사람들의  독립의지를 꺽으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동수권사가 "태서신사 (泰西神史)"를 일었다는 것과 교회 강론에서 주민을 선동하였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죄 없이 체포된 3형제를 포승줄로 묶은 채 서울로 압송한던 중 갑곶나루터를 지나 더리미 갯벌 해변에 세워놓고 갑자기 뒤에서 일본 칼로 후려쳐 죽였다. 순국96주년이  되던 2003년에 교회정원과 더리미 순국터에 기념비를 세우고 그해부터 추모 예배를 드려오고 있다



강화 중앙교회의역사

더리미에서 벌어진 "피의 세례" 를 기억한다면 순교자들이 다녔던 교회도 둘러보아야 합니다. 읍내 중앙시장 뒤쪽 언덕 위에 듬직하게 앉아 있는교회. 그곳은 김동수, 김남수 등이 신앙생활을 했던 중앙교회 입니다.

김동수 권사 형제들은 1907년 군대가 해산되고 강화주민들이 군인들과 함께 일본군과 대항하는 과정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일본군은 김동수 권사 형제들을 더리미 해변으로 끌고가서 처형 했습니다.. 정문에는 큼지막한 "김동수 순국기념비가" 있고 현관에는 기독교 역사자료실이 있습니다.


1892년 가을, 인천을 담당하고 있던 존스목사가 강화도에 들어 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문 앞에서 거절을 당햇습니다. 외국인에 대한 강화 사람들의 혐오감 때문 이었습니다. 강화도는 두차레 양요(洋擾)를 겪은 지역입니다. 1866년 병인양요 (프랑스) 1871년 신미양요 (미국)로 인해서 강화도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특히 신미양요때 광성보 전투에서는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조선군 35명이 전사한 일도 있었습니다. 미국인 목사가 들어 왔을때 신벼의 안전을 보장 해 줄 수 없다는 강화유수의 대답을 듣고 존스목사는 발길을 돌려야만 햇습니다. (중략~계속)





돌림자 신앙 (김봉일전도사)

잠두교회 초기 교인들은 한결같이 이름자의 끝이 일 (ㅡ)자로 끝났다. 교회를 개척한 주선일, 김각일, 김봉일, 허진일, 최족일, 박능일 등이 그러하다. "일" 자돌림으로 끝나는 이름은 우리나라 어느지역에서도 찿아 볼수 어뵤는 독특한 것으로 강화교인의 결단력 있는 신앙정신이 엿보인다. 이돌림자 신앙은 예수믿고 기독교인이 되면서 거듭남과 헌신의표시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교인들이 주안에서 서로 형제됨을 결의하는 의미이다. 더욱 특이한 것은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 등 3대애 걸처 "일자돌림" 가정도 있다


민족의 지도자 조봉암 (曺奉巖)선생

조봉함 (1899~1959)선생은 1910년 잠두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교회일을 보며 엡윗 청년회 활동을 하던 1919년 강화3.1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엇다. 출소 후 일본과 러시아에서 유학을 하였으며 상해에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해방후 제헌국회에 당선되어 헌법기초에 참여하였고, 두 번의 국회부의장을 역임 하였다. 초대 농림부 장관시정 농지 개혁을 주도 하였으며, 1956년 3대 대통렬 선거에서 차점으로 낙선 되었다. 그 해에 진보당을 창당 했으나 1959년 간첩되의 누명을 쓰고 사형당하였다. 사후52년이 되는 2011년 대법원으로 부터 무죄판결을 받았다   






강화진위대장 이동휘(李東輝)권사

이동휘 (1872~1935) 권사는 기독교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이다. 함경남도 단천 출생으로 1902년 참령 (參領)이 되어 강화부 진위대장으로 부임하였다. 1905년 진위대장을 사임하고 "기독교야 말로 쓰러져가는 나라와 민족을 구할 수있다".는 생각에 잠두교회 (강화중앙교회)의 김우제 전도사를 찿아와 기독교에 입문하였다.

72개 보창학교를 설립하여 복음전파와 민족교육을 통한 국권희복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그리하여 "강화바울"이라고 불렀다. 1907년 강화의 정미의병운동을 지휘 하였으며, 1915년 북간도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5년 시베리아에서 서거하였다. 1995년 정부는 건국훈장을 추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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