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역사문화기행 (2006~) (여행지)/5.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신촌의역사

동방박사님 2018. 10. 19.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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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땅 신촌新村

신촌 新村 이라는 지명은 '새로운 마을" 이라는 뜻의 일반명사에 가까워 새로 생긴 마을은 모두 신촌이라 불렀다. 때문에 여러 곳의 신촌 "新村"이 서울 곳곳에 존재 했다. 농경지를 새롭게 개척해 새로 생겨난 마을, 전쟁이나 재해를 입은 이주민들이 개척한 마을 등 그 지명의 유래도 다양하다. 서대문구 신촌의 지명은 조선초기 하륜 河崙이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자 '모악주산론" 母岳主山論" 을 펼친 이래, 새롭게 발견한 땅이라는 뜻에서 "새터말"이라고 부르던 것을 한자로 표시한 것이라고 전한다.

이지역이 "신촌'이라는 지명이 공식적으로 부여된 시기는 갑오개혁 이후이며, 1936년에 경성부에 편입되어 고양군 연희면 신촌리新村里에서 신촌정新村町이 되었다. 이후 1936년 서대문구 신촌동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현재 우리가 흔히 쓰는 신촌지역의 범위는 법정동인 신촌동과 차이가 있다. 신촌동은 연세다학교와 그 주변지역으로 한정되지만, 신촌의 지역성과 문화를 말할때의 신촌은 지하철 2호선 신촌역을 중심으로 신촌로터리에서 연세대학교로 이어지는 창전동 일대와 이화여자대학교 및 인근 상권까지도 포함하여 말한다. 따라서 이번 전시에서 다루는 신촌은 신촌동 주민센터가 관할하는 5개의 법정동인 신초노동, 대신동, 대현동, 창천동, 봉원동의 일부지역을 포함한다.


전시를 열며

신촌은 새로운 문화와 문물이 유립되고 대중적으로 수용되어 확산되는 땅이었습니다. 근대 경성의 교외 지역에 연희전문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가 들어서면서 신촌은 서구사상과 근대교육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현대서울 신촌은 문학청녀들과 음악가들이 활동하는 대안에술의 문화중심 이었으며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견인했던 학생운동의 기지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새로운 의상과 미용을 선도하던 패션거리였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청년들의 삶과 이상과 열정으로 구축된 그들의 문화아지트를 중심으로 신촌시대를 조명합니다. 신촌의 골목골목이 기억하고 있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회상합니다.

서울역사박물관장 송인호  


신촌의 역사'

신촌이라는 명칭은 "새터말"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조선초기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려고 할 때 하륜이 무악산(연산)남쪽, 지금의 연희동과 신촌 일대에 도움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하고 '새터말'이라 불리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이후 신촌일대는 한양외곽의 한적한 농촌지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의 경성개발 정책은 신촌일ㄷ가 경성의 주변부에서 중심지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연희 전문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의 이전과 경의선 이설은 대학생과 청년들을 신촌으로 유입시켰다. 1936년 경성부에 편입되고 경성시가지 계획에 의해 교외거주지로 부상한 것은 이후 신촌의 도시화를 이끄는 주요 요인이었다. 광복 이후에는 1960년대부터 급속도로 진행된 인구증가를 통해 학생과 서민의 주거지로 변모했다. 이후 도로망의 확충, 지하철 2호선 개통 등으로 신촌지역은 서부지역 교통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이는 전성기 신촌이 새로운 문화의 발생과 확산의 핵심장소로 거듭나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 신촌


조선 건국 당사 무악산 (현재의 안산) 남족 연희동 일대는 유학자이자 풍수지리가였던 하륜河倫이 새로운 수도로 강력하게 주장한 지역으로 이태부터 "새터말 新村 " 이라 물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 북악 (백악)  아

래경복궁 일대가 수도로 결정된 후 새터말은 한양도성의 외곽지역에 위치한 한적한 농촌지역으로 남았지만 조성왕조는 이 지역에 연희궁 衍禧宮, 서잠실 西蠶室, 의열묘 義烈墓, 등을 두어 중앙조정과 밀접하게 관련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시촌지역은 도성과 한양서부지역을 오가는 길목에 위치해 중계지 기능을 담당하였다. 신촌은 한강벼의 서강과 양화진으로 이어지는중간지점인데, 양화진으로 가는 고려시대로 부터 요중지였던 강화지역으로 연결되는 주요 간선도로 였다. 신촌지역은 구릉지와 하천이 어우러진 지형으로 한강진 도진 渡津 취락 및 한양도성에 근접한 지리적이점으로 특히 조선후기 부터 점차 거주인구가 증가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의 길지吉地 새터말

하륜은 현재의 신촌지역인 무악산(안산)의 남쪽 지역을 새로운 도읍지로 정하자는 "무악주산론 毋岳主山論"

을 펼쳤다. 이곳은 한강과 발로 연결되고 한반도의 중심부에 위치하기 때문에 새로운 도읍지 후보로 부각될 수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왕조의 도읍지로는 다소 협소하고, 풍수지리상으로 주산(主山)이 빠지고 산수山水

가 좋지 못하다는 점으로 인해 최종 도읍지로 선정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풍수적 길지로 부각되면서 이곳에 조선초기 3대 이궁離宮 중 하나인 연희궁衍禧宮이 설치되는 등 계속해서 조선왕조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세종 때에는 이곳이 양잠소養蠶所 서잠실西蠶室이 운영되었고 성종때는 장녀 신숙공주의 묘를 두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영조 대에는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였던 영빈이씨의 묘인 " 의열묘義烈墓"가 위치하는등 이 지역은 니궁과 왕실의 묘가 집적되어 있던 조선왕조의 길지였다.



한양 서부 교통의 요충지

조선시대 새터말(신촌)지역은 한양 서부 교통의 요충지였다. 조선시대 교통로는 크게 육로와 수로로 나눠 볼 수 있다. 대규모운송은 주로 바다와 하천을 활용했고, 그 외의 운송은 육로가 보완했다. 서대문과 서소문, 그리고 남대문에서 시작된 3개의 도로들은 아현고개에서 합쳐지며, 아현고개와 대현고개를 넘어 지금의 신촌로터리 부근에서 서강, 양화도(망원정), 성산리, 연희궁(가좌동) 등으로 이어져 육로와 수로를 연결해 주었다. 특히 양화진으로 가는 길은 조선시대 10대로 중 하나인 강화대로로, 고려시대부터 중요시된던 간선도로였다. 또한 조선시대 전국 5개의 봉수로중  제3봉수로 (평안북고 강계-무악산 동봉)와 제4봉수로가 (평안북고 의주-무악산서봉) 무악산 (안산)을 거쳤다.


한양의 새로운 정착지 연희방 延禧坊

신촌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시기는 조선후기 부터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전국적으로 농촌사회가 피폐해지면서 고향을 버린 고향을 버린 유민들은 삼문(서대문, 서소문, 남대문)등지에 모여 들었다.한양의 도성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환경조건이 탁월한 미개척지 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촌지역에 정착인구가 점차 증가하면서 농지가 확대되어 갔고 다양한 추락들이 자리 잡시 시작하였다.

그 결과 영조 대에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북부 명통방을 페지하고 인구밀도가 높았던 도성밖에 상평방, 연은방, 연희방을 신설하였다.


어제표의록 御製表義錄

1764년(영조40) 영빈이씨의 의열을 기려 영조가 간행한 어제서 御製書이다. 영빈이씨가 죽고 왕세손 正祖을 책봉冊封한 후손들을 위해 지은 것이다. 서문이나 발문은 없고 본문만 적혀 있다. 본문에서 영조는 1762년 사도세자를 아사餓死케 한 일을 후회한다는 내용의 반교문 頒敎文을 내렸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764년 한국한 중앙연구원 장서각


백자청화 영빈 이씨 묘지 白瓷靑華 映嬪 李氏 墓誌

1973년 연세대 내 루스채플 건물을 짓기위해 실시한 발굴조사 당시 출토되었다. 묘지墓地는  돌아가신 분의 나고 자란 연대, 가족관계,성품, 활동상을 적어 무덤속에 함께 묻는 것이다. 묘지문에 영조가 직접 짓고 글을 금성위 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썼다. 묘지문에는 영빈 이씨의 가계와 영조와의 사이 낳은 1남6녀에 관한 내용과 영조가 애도하는 마음을 표한 글이 적혀 있다.

1764년 연세대학교 박물관 ㅣ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11호

백자청화 영빈 이씨 명기  白瓷靑華  映嬪  李氏 名器

연세대학교 경내에 있던 영빈이씨의 묘인  수경원을 1970년 경기도 고양시의 서오릉 西五陵으로 옮기면서 그자리에 루스채플 건물을 짓기위해 실시한 발굴조사(1973년) 당시 출토된 명기明器 이다. 모두22점이다.

1764년  연세대학교박물관 ㅣ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11호


수경원 신사례

영빈 이씨의 묘소인 수경원의 운영에 대한 기본 규정과 연간. 수입 지출 내역을 항목별로 기재한 책이다. 1899년 (광무3)  장조를 추승한 후 수경원으로 새로 봉해진 후 추가로 내려진 전답을 분배하는 운용규정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수경원지록  綏慶園 誌錄

연희궁 내 수경원이 고종의 명으로 1899년 승격되면서 만들어진 조성기록이다. 산도 山圖와 함께 원 圓의 격식을 갗추기위하여 정자각, 비각, 홍살문 등 건물과 석물등을 새롭게 조성한 내용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수경원 비문 綏慶園 碑文

1899년 (광무3)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가 안장된 수경원 (綏慶園)의 비문을 탁본하여 장황한 첩이다. 탁본은 두 권으로 나위어져 있는데, 전시되어 있는 1권은 비의 전면을 탁본한 것으로 "대한소유영빈 수경원"이 전서로 쓰여 있다.                                                                                   1899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안형석봉 鞍峴夕烽

겸재 정선이 영천현령에 부임하던 시절 한강변의 경치를 그린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 수록된 그림이다. 양천현 관아가 궁산 (가양동)에서 건너편 안현을 바라보고 그린 것이다. 안현은 지금의 안산 鞍山으로 동봉과 서봉에 각각 봉수가 있었다. 그림에 보이는 봉홧불은 평시에 아무 일이 없다는 것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1740년 간송 미술재단

 


의열 묘도 義烈 墓道

의열묘역 義烈墓域을 중심으로 산세의 모양을 실경산수화풍에 가깝게 그린 그림이다. 묭력 주변에 전답과 가옥이 표현되어 있고 아래쪽에 와우산과 그 너머의 한강의 밤섬이 그려져 있어  실경적 요소가 충실히 표현되었다. 영빈이씨의 묘역을 조성한 뒤 그린 것으로 주측된다                                 한국학중앙연구언 장서각 


경국대전 經國大典

조선시대봉수제도는 고려시대의 봉수제를 바탕으로 하고, 세종중기 이후 약 20년간 게속된 야인野人 과의 실전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세조때 [경국대전]이 명문화 되면서 확립되었다. 경국대전 봉수조를 보면 5개의 봉수로중 제 3봉수로 (평안북고 강계-무악산동봉)와 제4봉수로 (평안북고 의주- 무악산서봉) 2개의 봉수로가 무악산 서봉)2개의 봉수로가 무악산 (안산)을 거쳤다                                                           16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