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기독교 근대유산 (2016~) (여행)/3.수원.경기

파주 대원 장로교회

동방박사님 2018. 11. 13.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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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대원 장로교회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대원리에 위치한 대원교회 (예장합동)는 경기도 파주시 최초의 교회이다. 1901년 죽원교회러 설립된 대원교회 (1957년 명칭변경)는 당시 죽원리(현 대원리)라는 마을에 살던 주민 6명 (기도경, 임봉준, 배영윤, 김경재, 송석현, 송태근)이 서울시 은평구 구파발로 오가며 장사를 하던중 복음을 접하고  이마을에서 에배가 드려지면서 교회가 시작되었다. 1902년 임봉준시가 미북장로교회 선교사 노해리 목사에게 세례릃 받아 교회 최초 세례교인이 되었으며, 11904년에는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가 이교회에 와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며 50여명의 신자오 증가하였고, 그해 임봉준집사가 안수를 받았다. 이때 인연으로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서울 새문안교회와 서교동교회등 20여 교회가 형제교회로 현재까지 교류하고 있다.

1905년에는 죽원1리에 20평의 목조초가 에배당을 건축하고 초대교역자로 최덕준 전도인이 부임하였다.


대원교회가 세상에 주목을 받은 것은 1949년 3월 주일학교에 출석을 하던 36명의 봉일천 국민학교 학생들이 십게명의 제2게명을 지키겠다는 믿음으로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혜 퇴학 처분을 받은 사건 때문이다. 이들 집에서도 쫓겨났다고 한다. 1949년 시골학교 봉일천 초등학교에 다니던 대원교회 주일학교 학생은 약50여명,

그 주 주일학교에 성경말씀은 "나 이외에 다른신을 섬기지 말라"는 성경 주제로 주일학교 에배가 진행 되었다. 다음날 월요일 아침 조회시간에 국기에 대한 맹세차레에 전교학생들은 땅바닥에 엎드려서 태극기에 절을 하고 있고 약 50여명의 학생들은 서서 앞만 주시하고 있었다. 그 당시 대원교회 초등학교 6학년 이었던 남준호 선생을 필두로 50여명은 절하지 않고 두 손을 모은 채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 이외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어느 누구도 시키지 않았는데 어린 학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이에 초등학교에서는 난리가 났고 사회 분위기상 일제시대 후 민족관이 확실하게 잡혀가고 있던 시절이라 이 일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곧 학생들에게 대한 엄한 징게가 예고되고 있었던 터였다.

이 일은 바로 마을에 있는 부모들 까지도 알게 되고 그 당시 대원교회 시무목사님 께서 모두 교회로 모이라고 해서 대책회의를 한 결과 " 하나님께서 갈구하는 것이 해결방법이다" 라고 해서 모든 교인이 동참하여 며칠을 계속하여 기도만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50여명중 36명의 어린 학생들은 토학이라는 결론으로 학교를 포기 하게 되었으며 교회도 경찰관들의 감시를 받게 되었고, 당시 담임목사엿던 최중해 목사도 경찰서에 가서 감시를 받게 되었고, 당시 담임목사였던 최중해 목사도 경찰서에 가서 이 일때문에 고생을 했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도 대원교회 교인들은 합심하여 기도를 하였고 문제의 해결을 하나님께 맡겼다.

그 당시 학교퇴학이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로 생각하던 시기라 온통 교회와 집안이 난리가 났지만 모두룰 기도외에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퇴학을 당한지 약 한달 후에 이 사건이 각종 언론, 신문사에서 취재보도 되었고, 그당시 대통령 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이 알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당시 부통령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이 알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당시 부통령 이었던 이시형 장로를 주측으로 국무회의를 하여 새롭게 태극기 배례를 정하였는데, 오른손 왼편 가습에 올려 놓은 방법 (국가에 대한 주목)으로 채택하고 퇴학처분을 받았던 36명의 어린 학생들은 다시 학교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부통령 이었던 이시형 장로가 대원교회의 예배에도 참석하였다고 한다.

이 사건을 기념하여 대원교회는 지난 2003년 교회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교회 앞마당에 " 십계명 신앙비"를

세웠다.당시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했던 어린이 들 중 이상구집사와 반사(교사)로 이들을 가르쳤던 송재혁 선생님이 원로 장로로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또 신앙비 뒤편을 보면 에배당 건물이 아랫부분은 돌로 되어 있고, 윗부분은 붉은 벽돌로 되어 있는데 6.25전쟁이 발발해 교회당이 소실이 되었을때 1953년 미군 공병대가 교회당을 지어준 흔적으로 아랫돌로 지어진 부분이 미군 공병대가 지어준 것이고, 윗 부분은 나중에 교회당을 개축해서 생긴 모양이라고 한다.

원래는 교회가 위치한 마을의 이름은 "죽원리'가 아니라 "대원리"라는 마을 이름이 있었다고 한다. 옛날 조선왕조 대원군 행차때 길에서 마을사람들이 대원군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환영을 거창하게 하여 대원군에게 관심을 끌게 되었는데 자기의 직호와 같은 마을 이름이 사용되어서 다시 대원군이 마을 이름을 지었는데 큰대 (大)를 대죽(竹)자로 바꾸어서 이름을 하사한 후에 "죽원리"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런데 죽원리가 "죽었니 ~ 죽었니? 로 발음이 되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은 옛 이름 그대로 "대원리"로 환원 했다고 한다.

(길대석기자  기독포커스 2018.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