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미술의 이해 (독서)/5.현대미술

현대 미술의 결정적 순간들

동방박사님 2022. 1. 13.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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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기존의 미술책이 사조나 인물(작가)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현대미술의 결정적 순간들』은 전시를 중심으로 그 배후에서 미술사를 움직인 작가, 비평가, 아트딜러 등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현대미술의 결정적 순간들: 전시가 이즘ism을 만들다』는 20세기 현대미술의 ‘결정적 순간’을 품은 전시들의 역사와 맥락을 짚어낸 전영백(홍익대학교 교수)의 역작이다. 기존의 미술책이 사조나 인물 등을 중심으로 다루는 데 그쳤다면, 이 책은 전시사(展示史), 즉 전시를 중심으로 그 배후에서 미술사를 움직인 작가, 비평가, 아트딜러 등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아리송한 현대미술이 여러 행위자의 인간사와 겹쳐지는 지점에서 미술사는 특유의 역동성과 구체성을 회복한다. 특히 기존의 틀을 깨는 대담하고 도발적인 시도로서 ‘첫 전시’의 역할을 조명해, 현대미술의 꽃인 ‘이즘’(ism, 주의)의 탄생과 전파를 구체적으로 추적한다.
저자는 20세기 모던아트의 문을 연 야수주의와 입체주의를 시작으로 표현주의, 다다, 초현실주의, 추상미술을 거쳐 팝아트, 누보 레알리즘, 미니멀리즘, 개념미술의 중요 전시와 ‘이즘’을 소개한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중요 전시나 작품은 본문 중간중간 별면을 구성해 더 깊이 설명했다. 300여 컷의 도판을 실었으며, 이 중 전시 전경을 소개하는 도판은 당시의 뜨겁고 생생한 분위기를 잘 느끼게 해준다.

목차

책을 열며

1. 야수주의 전통에 도전한 파격적 색채 실험
2. 입체주의 관찰된 세계의 분석적 시각 탐구
3. 표현주의 심리의 초상, 직접적인 감정의 투사
4. 다다 뒤집는 생각, 일탈의 구상: 개념이 중요하다
5. 초현실주의 현실과 꿈이 이루는 제3의 세계: 보이는 세계가 다가 아니다
6. 유럽 추상미술 묘사를 벗어난 시각의 자율성: 재현으로부터의 해방
7. 뉴욕 스쿨과 추상표현주의 눈을 위한, 눈에 의한, 눈의 추상
8. 팝아트 어깨에 힘을 뺀 비非권위적 미술
9. 누보 레알리즘 환영을 벗고, 있는 그대로 접하는 현실
10. 미니멀리즘 무관심하고 익명적인, 그래서 쿨한 미술
11. 개념미술 아이디어가 미술이다

책을 마치며

주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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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 : 전영백
 
연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에서 석사, 영국 리즈대학교(Univ. of Leeds) 미술사학과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술사학연구회 회장을 지냈으며, 2002년부터 영국의 국제학술지 Journal of Visual Culture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홍익대학교 박물관장 및 현대미술관장을 지낸 바 있고, 현재 홍익대학교 예술학과(학부) 및 미술사학과(대학원) 교수로 재직 ....

 

책 속으로

책은 20세기 모던아트를 열었던 야수주의와 입체주의를 선두로 표현주의, 다다, 초현실주의 그리고 20세기 전반의 주요 흐름인 추상미술을 다룬다. 추상은 데 스테일, 바우하우스, 아모리쇼, 앵포르멜 그리고 뉴욕 스쿨의 추상표현주의로 나눠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더니즘의 골격에 저항하는 포스트모던 움직임으로 팝아트와 누보 레알리즘 그리고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을 알아볼 것이다. 책은 앞서 언급했듯이, 이 모든 ‘이즘’들이 그들의 첫 전시를 통해 등장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전시는 미술의 역사에 등단하는 관문이자 희비극이 엇갈리는 전쟁터이고 미술계의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플랫폼이기 때문이다. _ 10쪽

작품이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장(site)으로서 전시는 미술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는 역사적 현장이다. 서양의 현대미술사가 파리에서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전시체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 파리에서는 현대미술의 아방가르드를 선보일 새로운 전시체제가 마련돼 있었다. _ 13쪽

야수주의가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05년 파리에서 열린 《살롱 도톤》이었다. 《살롱 도톤》은 야수주의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 선보인 첫 전시였는데, 비평가 루이 보셀(Louis Vauxcelles)은 야수주의 작품으로 둘러싸인 알베르 마르크(Albert Marque)의 청동 조각상을 보고 “야수의 우리 속에 갇힌 도나텔로”라고 평하였다. 이 용어가 후일 야수주의를 명명하는 단어로 사용된 것이다. _ 21쪽

야수주의와 입체주의라는 모던아트의 두 갈래를 이해하는 데에 그들의 모체인 세잔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야수주의 화가 누구에게나 세잔의 영향력은 컸고 그중 마티스가 색채를 중심으로 고전주의 맥락에서 세잔을 수용한 것은 위에 강조한 바와 같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와 전혀 다른 방식에서 세잔의 회화를 해석한 것이 입체주의를 태동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는 브라크의 공이 크다. _ 47쪽

피카소의 작업과 ‘원시’ 부족미술의 관계는 1907년 봄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그는 먼지를 뒤집어쓴 채 아무도 찾지 않던 파리 트로카데로 민속박물관의 전시실을 방문했다. 또한 그보다 한 해 전인 1906년, 그가 스타인을 방문했을 때 콩고 가면을 보았던 것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표현적 영감을 준 영향으로는 마티스의 〈푸른 누드〉(The Blue Nude)를 들 수 있다. 이는 피카소가 아프리카 조각의 자유로운 조형을 어떻게 그림에 구체적으로 나타내는지의 미적 표현방식에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_ 56쪽

《앙데팡당》은 살롱 큐비스트들의 작업이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 첫 전시이자, 앞서 언급했듯 입체주의Cubism 용어가 발생된 전시다. 글레이즈, 메챙제, 레제, 르 포코니에, 들로네와 같은 작가들이 참여하였고, 전시는 이 그룹의 위원장 르 포코니에가 이끌었다.
이 전시의 오프닝은 하나의 열광적인 사건과도 같았다. 이미 장안의 화제였고 대중의 주목을 하나로 모은 전시였다. 큐비스트들의 작업은 제41전시실과 제43전시실에서 전시되었다. 그중 관심과 논쟁은 제41전시실에 집중되었다. 그러한 동요의 중심에 있던 작품들은 르 포코니에의 〈풍요〉(Abundance), 레제의 〈숲속의 누드〉(Nudes in a Landscape), 글레이즈의 〈플록스를 든 여인〉(Woman with Phlox) 그리고 들로네의 〈에펠탑〉(Eiffel Tower) 등이었다. _ 66쪽

표현주의는 독일을 중심으로 1905년에 형성되어 1920년대까지 지속됐다. 대상에 대한 시각적 관찰에 충실히 그리는 방식이 아니라 작가의 내면, 심리, 감정에서 발현된 의지에 따라 주관적으로 나타내는 미술의 방식이다. 여기에는 다리파(Die Bruke), 청기사파(Der Blaue Reiter) 그리고 부분적으로 신즉물주의까지 포함시킬 수 있다. _ 85쪽

1905년 6월, 다리파의 창립 멤버 네 명, 즉 프리츠 블라일(Fritz Bleyl), 에리히 헤켈(Erich Heckel), 에른스트 키르히너(Ernst Kirchner), 카를 슈미트로틀루프(Karl Schmidt-Rottluff)는 미술가 공동체가 제 기능을 다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했다. 이후 1910년까지 막스 페히슈타인(Max Pechstein), 에밀 놀데(Emil Nolde), 오토 뮐러(Otto Muller) 등이 합세하였다. 이후 1913년 베를린에서 그룹이 해체된 후에도 이들은 오랫동안 표현주의를 지지했다. ‘다리파’라는 명칭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인간은 짐승과 초인을 잇는 하나의 밧줄이다. 심연에 놓인 밧줄…. 인간은 다리 지 목표는 아니다”에서 유래되었다. _ 87쪽

청기사파의 첫 번째 전시는 1911년 탄하우저(Thanhauser) 갤러리의 제4~6전시실에서 열렸다. 16일 동안 진행된 이 전시에는 여덟 개 도시에 사는 14명의 작가의 작품 43점이 전시되었다. 칸딘스키는 〈인상-모스크바〉, 〈즉흥 22〉, 〈구성 V〉 등 세 가지 범주의 작품 모두를 출품했고, 마르크는 〈노란 암소〉와 〈숲속의 사슴〉(Deer In The Foest II) 을 선보였다. _ 93쪽

이렇듯 20세기 초 독일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된 표현주의 작품들을 탄압한 끔찍한 전시가 열렸다. 이는 역사의 격동 속에 미술사에 씻지 못할 오점을 남긴 전시로, 이른바 ‘퇴폐미술전’이었다. 나치는 표현주의를 포함한 모던아트를 비난하고 조롱하며 파괴했다. 그들은 순수하고 원시적인 정신성과 분방한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출하는 것, 인간 내면에 잠재된 불안과 위선을 폭로하는 것은 비非독일적인 것이며, 타락과 퇴폐라고 단정했다. 이 전시로 인해 많은 작가들이 핍박받고 심지어 자살했으며, 소중한 작품들이 압수, 소각되거나 경매로 넘어가 버렸다. _ 115쪽

다다(Dada) 는 1916년 중립국이었던 스위스의 취리히에 있는 카바레 볼테르(Cabaret Voltaire) 에서 결성되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의 불안한 사회 속에서 기존 체제와 전통적 미학을 반대한 운동이다. ‘다다’라는 용어는 리하르트 휠젠베크(Richard Huelsenbeck)가 휴고 발(Hugo Ball) 과 함께 사전을 펼치고 그 위에 나이프를 꽂아 우연히 정한 용어다. 그들은 이렇게 발견한 단어야말로 이성적 계획이나 미학적인 범주를 벗어난 예술을 지향했던 다다의 정신에 적합하다고 여겼다. 체계적인 조직을 갖춘 미술집단이라기보다 여러 도시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난 다다는 취리히를 시작으로 베를린, 쾰른, 하노버, 파리 그리고 뉴욕까지 확산되었다. _ 127쪽

그런데 오늘날엔 이처럼 유명한 뒤샹의 〈샘〉이 당시에 제대로 전시되지 못했다는 점은 기억할 만하다. 이 작품은 본래 언급한 대로 작가의 가명 ‘R. MUTT’로 뉴욕의 《앙데팡당》(1917)에 출품되었으나 결국 집행부는 이를 전시하지 않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 당황스러운 작품이 예술작품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쟁이 있었고, 그 기준에서 〈샘〉은 부적격이었다. 그런데 작품을 거부할 수 없는 《앙데팡당》에서 이 작품은 공식적으로 거부될 수 없었기에, 전시되지 못하고 칸막이벽 뒤에 숨겨져 있게 되었다. 뒤샹은 이것이 뉴욕에서 “나름의 잡음을 일으킨 소동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이후 그는 레이와 함께 이 “외설적인” 작품을 찾으러 그랜드센트럴 팰리스를 방문한다. 그리고 칸막이 뒤에 숨겨져 있던 샘-소변기를 결국 찾아내고 다수의 시선을 받으며 보란 듯이 이를 갖고 나온 것이다. _ 145쪽

1920년대 초,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불운한 기운이 감도는 시기에 다다와 더불어 미술사에서 가장 급진적인 미술그룹인 초현실주의가 형성되었다. 느슨하고 산발적이었던 다다와 달리, 초현실주의 운동은 브르통을 중심으로 모인 예술가들 및 문학가들이 만든 상당히 조직적 집단이었다. _ 149쪽

1938년 1월, 파리의 보자르 갤러리에서 열린 대규모 《초현실주의 국제전》(Exposition Internationale du Surrealisme)은 초현실주의의 영향력을 과시하기에 충분했다. 14개 국가의 60명의 작가들이 참가했고, 229점의 작품이 출품되면서 《초현실주의 국제전》은 그 명칭 그대로 ‘국제적’이었다. 전시의 기획은 브르통과 엘뤼아르가 맡았고, 전시 전체의 설치는 뒤샹이 총 책임을 맡았다. _ 154쪽

《금세기 미술》은 1942년 10월 구겐하임의 갤러리에서 개최되었다. 이곳은 본래 복층으로 된 의상실이었으나, 구겐하임이 프레드릭 키슬러(Frederick Kiesler)를 전시 디자이너로 고용하여 자신이 수집한 유럽의 모더니스트 아방가르드 작품을 위한 전시공간으로 만든 것이었다. 《금세기 미술》은 추상미술과 초현실주의 그리고 다다 및 키네틱(Kinetic) 아트 등 유럽의 아방가르드 작품들을 미국에 전격 소개한 점에서 미술사적인 의미가 크지만, 이 갤러리미술관(gallery-museum)의 전시공간기획이 가진 실험성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_ 162쪽

《초현실주의 제1차 서류전》은 《금세기 미술》의 전시와 거의 같은 시기, 자세히 말해 그보다 일주일 앞서 개최되었다. ‘프랑스 구호단체 조정위원회’가 후원한 이 전시는 전쟁 포로를 위한 자선 전시였기에 미술관이 아닌 위원회 건물의 2층 홀에서 이뤄졌다. 비평가 헨리 맥브라이드(Henry McBride)는 당시 전시에 대한 논평에서 “전쟁 물자가 잔뜩 쌓인 건물 자체의 기이함이 초현실주의 회화의 그것을 능가한다”고 언급할 정도였다. _ 168쪽

모던아트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추상미술은 20세기 전반을 압도했다. 앞서 본 바대로 20세기 초 야수주의와 입체주의 이후 1910년대 후반부터 다양한 추상의 움직임이 있었다. 모던아트의 주축을 이룬 추상미술은 다양한 문화적 토대 위에 결집된 미술그룹을 기반으로 196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이 도래하기 전까지 활발한 담론과 전시를 펼쳤다. 현대미술에서 추상을 추구하고 실천했던 그룹들은 구체적으로 네덜란드의 데 스테일(De Stijl), 독일의 바우하우스(Bauhaus), 프랑스의 앵포르멜(Informel) 그리고 뉴욕 스쿨이라 할 수 있다. _ 173쪽

데 스테일의 건축 모델과 스케치는 1923년, 한 달 동안 파리의 레포르 모데른 갤러리(L’effort Moderne gallery)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다. 이 전시는 데 스테일의 첫 전시인 동시에 파리에서 열린 최초의 건축전이었다. …이 전시에 출품된 데 스테일의 건축작품 중 중요한 것은 반 두스뷔르흐와 판 에스테런의 건축 프로젝트와 리트벨트의 작업으로, 이들의 첫 번째 건축 프로젝트인 〈대저택〉(Hotel Particulier)과 두 번째 프로젝트인 〈개인 주택〉(Maison Particuliere)이었다. _ 194쪽

1923년 여름, 바우하우스의 첫 전시가 열렸다. 이는 창립 4주년을 맞아 학교체제를 정비하고 이제까지의 활동을 총결산하는 전시였다. 이 해는 앞서 언급했듯 바우하우스 교육이념과 방향을 전환한 해이기도 했다. 그로피우스는 ‘예술과 기술-새로운 통합’(Art and Technique-a new unity)이라는 전시 개막강연과 그 무렵 발표한 「바우하우스의 이념과 조직」이라는 논문을 통해 예술과 기술의 통일을 주장했다. 그는 기술이란 과거의 수공예 기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던 기술인 기계기술을 가리킨다고 밝혔다. 따라서 수공예 기술은 수공예가를 양성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손의 기술적 능력을 기르는 데에 있는 것으로, 수공예 교육은 수단이지 목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한 수공예와 공업은 서로 계속해서 접근하고 있고 공방과 공업 기업체와의 결부도 서로 유용하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바우하우스는 과거의 미술학교 및 공예학교에서부터 기계시대의 대량생산에 적응하는 산업디자인의 실천 교육기관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_ 211쪽

앵포르멜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의 공포와 고통을 실제적으로 담아낸 지극히 체험적 미술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여준 초기의 전시로 앵포르멜의 대표주자 포트리에의 《인질들》(Les Otages)이 있다. 1945년 파리의 르네 드루앵(Rene Drouin) 갤러리에서 개최된 이 전시에서 포트리에는 유사한 방식으로 제작된 소규모 그림 40개 이상을 일렬로 배치했다. 전쟁의 폭력과 정치적 압박으로 인한 인간의 고통을 실제적으로 담은 작품들로, 그 파격적 표현과 반복적 형상은 관람자들에게 전쟁경험의 공포와 불안을 소환했다. _ 220쪽

뉴욕 스쿨(New York School)은 1940년대에서 1960년대에 걸쳐 뉴욕에서 형성된 추상회화그룹을 일컫는다. 뉴욕 스쿨을 지칭하는 표현방식으로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와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이 있는데 이는 종종 혼용되기도 한다. 비평가 해럴드 로젠버그(Harold Rosenberg)는 제스처를 통해 유기적이고 다이내믹한 표현주의적 추상을 가리켜 ‘액션 페인팅’이라 명명했는데, 이후 추상표현주의의 유사한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_ 255쪽

뉴욕 스쿨은 1950년대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를 소개한 대표적 전시로는 《9번가 전시》(9th Street Show)와 《새로운 미국의 회화》(The New American Painting)를 들 수 있다. 그런데 《9번가 전시》가 열리기 전인 1950년의 봄, 9번가 전시에 참여한 대부분의 작가들이 참여한 두 전시가 있었다. 이는 참고로, 그린버그와 마이어 샤피로에 의해 새뮤얼 쿠츠 갤러리에서 기획된 1950년의 《새로운 인재》(New Talent Exhibition)와 같은 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개최된 《오늘날의 미국 회화》(American Painting Today)였다. _ 289쪽

팝아트는 195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까지 풍미했던 소비주의와 대중문화에 기반한 미술의 움직임이다. ‘팝아트’라는 용어 자체는 1954년경 영국 비평가 로렌스 알러웨이(Lawrence Alloway)가 고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대중문화에 기반한 미술작품보다 매스미디어의 생산품을 지칭하기 위한 말이었으나, 1960년대 초, 팝아트는 그러한 종류의 미술에 대한 통칭이 되었다. 만화책, 광고물, 포장, TV나 영화의 이미지 등 모든 것을 활용하면서 문화적으로 ‘좋은’ 취향과 ‘나쁜’ 취향 사이 경계를 흐렸다. 따라서 이 새로운 미술이 시사하는 바는 미술적 혁신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전통미술과 기존의 미술을 거부하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고급’문화와 대중적인 ‘저급’문화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자 하는 욕구와도 관련돼 있다. 이는 대중 이미지나 대량 생산된 공산품 등을 작품의 재료로 채택하여 대량 소비사회의 특성을 담아냈다. _ 305쪽

미국 팝아트의 대표작가인 워홀은 광고 일러스트레이터이자 그래픽 디자이너로 전문적 미술 경력을 가진 후 이를 순수미술로 활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팝아트를 만든 작가다. 미국 팝아트의 대표 주자로서 그는 상업미술을 주로 하던 시절부터 생활 속의 모든 것들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 표현방식으로는 대중 스타의 얼굴이나 대량 생산품을 실크스크린 판화기법을 활용해 기계적으로 반복 배열한 스타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처음부터 상업미술과 순수미술 사이의 경계에 있던 작가였다. _ 324쪽

1962년 미국 팝아트의 역사적인 전시는 뉴욕의 시드니 재니스 갤러리에서 개최되었다. 그런데 그 명칭은 처음부터 팝아트가 아니었다. 전시의 제목은 재니스가 프랑스의 비평가 피에르 레스타니(Pierre Restany)와 함께 “새로운 리얼리스트들”(New Realists)이라 정했는데, 문자 그대로 프랑스의 누보 레알리즘을 그대로 번역한 말이었다. _ 340쪽

누보 레알리즘은 1960년대 프랑스를 중심으로 형성된 새로운 미술 경향으로, 1950년대 유럽 미술계를 지배하던 추상미술과 급변하는 소비사회 사이에서 비판적 시각을 갖고 현실참여적인 실천을 특징으로 한다. 재현이나 감성적 추상이 아닌, 오브제나 물질적 재료를 직접 활용하며 퍼포먼스도 과감하게 실현한 전위미술 운동이다. _ 349쪽

누보 레알리즘 작가들이 각성하고자 했던 ‘리얼리티’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과학과 산업의 발달로 도시화되고, 자본주의 물질문명이 팽배한 소비사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술의 새로운 창작을 모색하고자 한 누보 레알리스트들은 사회적 환경을 ‘표상’(representation)하고자 한 게 아니라 스스로 체험하는 현대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현실을 직접 ‘차용’(appropriation)하여 ‘제시’(presentation)했다고 말할 수 있다. 레스타니는 누보 레알리즘이야말로 당대의 그 어떤 다른 동향보다도 사회학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누보 레알리스트들의 사회에 대한 접근방식을 “객관적 현실(reel objectif)의 직접적인 차용”이라 불렀다. _ 351쪽

1958년 4월 말, 파리 시내에 위치한 이리스 클레르(Iris Clert) 갤러리에서 클랭이 기획한 《텅 빔》의 오프닝이 열렸다. 전시는 제목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는 전시를 위해 모든 가구를 치우고, 진열장의 금속 프레임과 천장을 제외한 모든 벽을 흰색 물감으로 칠해 벽에 남은 다른 작품들의 흔적을 지워내며 공간을 마련했다. 전시 계획은 어느 날 밤 클랭이 레스타니, 아르망, 팅글리, 클레르와 모여 논의할 때 세워졌다. 클랭은 갤러리 전체를 회화적 감성으로 채우고 싶다고 말했고, 클레르는 그 전시의 제목을 ‘텅 빔’(Le Vide)으로 제안했던 것이다. _ 356쪽

1963년에서 1965년 사이, 뉴욕을 기반으로 한 일군의 작가들이 오브제를 다루는 독특한 3차원 방식의 미술을 선보였다. 미니멀리즘이라 불리는 이들의 작업은 일종의 추상미술이면서 극도의 형태적 단순함을 지녔으며 의도적으로 표현적 내용을 배제한 것이었다. _ 371쪽

최초의 미니멀리즘 전시는 1966년 뉴욕의 유대인 미술관(the Jewish Museum)에서 열렸다. 제목은 《일차적 구조들》(Primary Structures)로서 ‘미국과 영국의 젊은 조각가’라는 부제를 내건 이 전시에 42명 작가의 51점이 출품되었다.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 키너스턴 맥샤인(Kynaston McShine)은 새롭게 등장한 ‘조각’에 대한 최초의 대형 전시를 구성하고자 했다. _ 390쪽

이렇듯 서구 주체중심주의에 기반한 모더니즘을 비판한 모노하를 전시에 포함시킨 것은 《또 다른 일차적 구조들》의 전시 의도에 어쩌면 가장 의미 있고 적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미국 미니멀리즘을 서구중심적으로 인식하려는 것을 스스로 깨고, 글로벌 맥락에서 1960년대의 미니멀리즘과 관계된 작업을 서구 밖에서 초청하여 함께 전시했다는 것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미니멀리즘에 대한 논의를 국제적인 범주로 확대시킨 시도였던 것이다. _ 414쪽

‘개념미술’(Conceptual Art)이란 작품의 결과물보다 작가의 창조적 발상이 더 중요하다고 보고, 아이디어 자체가 작품이 된다고 보는 미술이다. 전통적인 미술관 전시와 미술시장의 매매구조에 저항하고, 미술의 본질과 역할에 관하여 근본적 질문을 제기한다. 당시의 젊은 미술가들은 ‘미술이란 무엇인가’ 또는 ‘미술이 무엇일 수 있는가’ 같은 근본적 물음에 다시 집중했으며, 그들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논의는 1966년과 1972년 사이에 활발하게 진행되어 ‘개념미술’이라는 범주로 등장하였다. 이와 같이 개념미술은 1960년대 말에 명명되나 그 조짐은 이미 20세기 초 뒤샹에게서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 그의 말 “아이디어가 미술이 될 수 있다”는 이를 함축적으로 나타낸다. _ 415쪽

시겔롭이 기획한 《1월 전》은 1969년 뉴욕 이스트 52번가의 매클렌던(McLendon) 빌딩의 한 사무실에서 열렸다. 《1월 전》은 개념미술의 대표적인 그룹전시로, 시겔롭은 전시 설명문에서 “전시(전달되는 아이디어)는 카탈로그로 구성되고, (작품의) 물리적 제시는 카탈로그를 보완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전통적인 전시 형태를 거부하였다. 아이디어가 전시의 형식을 지배했고, 작가는 인쇄물 등 직접적 재료로 그의 아이디어를 드러내었다. _ 427쪽

1969년 3월, 개념미술의 역사에서 시작을 알리고 새 장을 연 전시 《태도가 형식이 될 때》가 스위스 베른(Bern) 쿤스트할레(Kusthalle)에서 개최되었다. 전시의 기획자 제만은 당시 스위스 베른의 쿤스트할레 관장으로 이미 실험적인 전시를 다수 기획했으며, 시겔롭의 『제록스 북』이 출간되었을 때 딜러와 작가들을 만나기 위해 뉴욕을 방문한 적도 있었다. 제만은 전통적인 예술이 거부되는 세계적 추세를 관찰하며 더 이상 관습적 전시가 시대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국제적 스케일로 파격적인 전시를 계획했던 것이다. _ 432쪽

최근의 미술은 포괄적 의미에서의 개념미술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만큼 개념미술의 영향은 근본적이고 그 효과는 어느새 우리의 시각에 스며들어 있다. 이제 우리는 미술작품을 볼 때 그 표현에 앞서 아이디어를 먼저 헤아려 보고 작품의 의미가 내게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 의미란 것이 내가 사는 시대와 연관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는지를 고려하게 된다. 더구나 전시를 보러 갈 때는 어떠한가? 작가의 이름뿐만 아니라 전시의 기획을 유심히 살펴보는 것은 비단 전문가만이 아니다. 기획자의 창의력이 얼마나 새로운 전시와 미술작품의 의의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이렇듯 기획자의 역할이 크게 부각된 것이 바로 개념미술 이후의 상황인 것이다.
미술은 우리를 보게 할 뿐 아니라 생각하게 한다. 1960년대 말 이후 미술은 아름다움보다 앎을 택했다. 미술은 이미 레테의 강을 건넌 것이다. _ 454쪽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전시, 현대미술의 방아쇠가 되다
『현대미술의 결정적 순간들』은 현대미술의 중요한 분기마다 결정적 역할을 한 전시들을 소개한다. 이때 단순히 이런 일이 있었다고 소개하는 수준을 넘어 그 사건의 주인공들이 빠져든 고뇌, 맞닥뜨린 사건, 성공과 실패, 전후 맥락과 미술사적 영향력을 고루 다룬다.

① 야수주의, 입체주의
처음으로 현대미술이 등장하는 무대는 프랑스 파리였다. 당시 파리는 여러모로 미술의 중심이라 할 만했다. 18세기부터 19세기 말까지 서구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전시회로 군림한 관전살롱이 열리고 있었고 미술에 대한 파리 시민들의 관심도 굉장했다. 왕립 관전 살롱은 8주간 50만 명에 달하는 관람객이 방문할 정도였다.
비록 주류는 아니었지만 이런 기름진 토양에 현대미술도 점차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물론 현대미술이 단번에 호응을 끌어낸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대부분의 관객이 현대미술의 서막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현대미술 작가들은 마치 선전포고를 하듯 전시회를 개최하고 작품을 소개했다. 대표적으로 야수주의의 《살롱 도톤》과 입체주의(Cubism)의 《앙데팡당》이다. 특히 야수주의는 사조의 이름 자체를 전시에서 얻었다. 1905년의 제3회 《살롱 도톤》에서 그들의 작품을 처음 본 평론가들이 “야수들”이라고 평가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마티스, 블라맹크, 드랭 등의 회화는 정말 야수처럼 강렬하고 공격적인 색채와 파격적인 표현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특히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이 큰 화제가 되었다.

“스타인은 풍부한 형상언어가 진부한 주제를 신선하고 새롭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알아봤고, 독창적 표현방식에 감탄했다. 그녀가 문학가로서 고심하던 부분과 일정 부분 상통하는 면이 있었고, 스타인은 〈모자를 쓴 여인〉에서 가공하지 않은 강렬한 여성성의 표현에 주목했다. 이는 다른 그림들처럼 감미롭고 감상적인 처리가 아닌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_ 32쪽

야수주의가 《살롱 도톤》에서 그랬던 것처럼, 입체주의 역시 《앙데팡당》에서 이름을 얻었다. 1911년 열린 《앙데팡당》은 “열광적인 사건”이었다. 많은 이가 이 충격적인 전시를 보러 왔다. 당시 《앙데팡당》은 심사위원 없이 자유분방하게 작품을 전시했는데, 그래서인지 대부분 관람객이나 비평가는 굉장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행히도 같은 해 10월 열린 《살롱 도톤》에서 입체주의는 체계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한다. 물론 《살롱 도톤》의 심사위원들도 입체주의에 부정적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정식적으로 평가받은 데 의의가 있다. 피카소가 1907년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발표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입체주의가 처음 소개된 것은 이보다 앞선 일이지만 ‘이즘’으로 정립되기 시작한 것은 1911년의 《앙데팡당》과 《살롱 도톤》에서였다. 전시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② 표현주의, 다다, 초현실주의
야수주의와 입체주의가 파리에서 현대미술의 뿌리를 내리고 있을 때 독일에서는 표현주의가 등장했다. 다리파, 청기사파가 주축이 된 표현주의는 프랑스 현대미술에 영향받으면서도 “정신성의 깊이와 내면세계의 충동”이라는 독일적인 정체성을 점차 강하게 띠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반전의식과 패배주의 등이 결합해 신즉물주의로 이어진다.
다리파는 키르히너, 놀데 등이 활동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아웃사이더’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스스로 전시 장소를 모색했다. 개인화상, 후원자 등을 찾아 발품을 팔았고 1907년부터 3년간 드레스덴의 개인 갤러리들에서 전시를 열 수 있었다. 대규모 전시가 아니다 보니 아담한 공간에서 단순한 액자에 넣은 그림을 가깝게 볼 수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세련된 전시 스타일이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부르주아 관람객을 대상으로 점차 알려지게 되었다.
청기사파는 칸딘스키와 마르크의 주도로 창립되었다. 그들의 첫 전시는 1911년 탄하우저 갤러리에서 열렸는데, 작가 14명의 작품 43점이 전시되었다. 규모가 큰 건 둘째 치고 애초에 “‘청기사파’라는 동질적 그룹의 작업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전시 동선도 복잡하게 구성해 관람객이든 평론가든 후하게 평가하지 않았다. 청기사파가 ‘이즘’으로 정립된 것은 1년 뒤인 1912년 『청기사 연감』을 출간하면서부터다. 그들은 이 책을 “‘내적 필연성’을 드러내는 자신의 작품을 대중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글’이라는 사회적 방편”으로 활용했다.
한편 스위스에서는 다다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다는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인 1916년 스위스에서 시작되었는데, 당시의 암울한 사회상을 반영해 기존 체제와 전통적 미학을 반대했다. ‘다다’라는 명칭 자체가 사전을 펼치고 칼을 꽂아 우연히 걸린 단어다. 정체성이 이러하다 보니 체계적인 조직을 갖춰 활동하기보다 여러 도시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했다. 시작은 스위스 취리히였고 베를린, 쾰른, 하노버, 파리를 지나 뉴욕까지 확산된다.
다다의 스타는 누가 뭐래도 뒤샹일 것이다. 프랑스에서 살롱 큐비스트로 활동하던 뒤샹은 1915년 뉴욕으로 건너온 후부터 회화를 접고 레디메이드 작품에 집중한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샘〉이다.
뒤샹의 〈샘〉이 현대미술에 미친 영향력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이 제대로 소개되지조차 못할 뻔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몇 명이나 될까? 뒤샹은 이 작품을 ‘R.MUTT’라는 가명으로 1917년 뉴욕에서 열린 《앙데팡당》에 제출했다. 집행부는 이 작품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작품을 거부할 수 없다는 《앙데팡당》의 규칙상 반려하지 못하고 대신 칸막이벽 뒤에 숨겨놓았다. 이를 안 뒤샹이 작품을 찾아 모두가 보란 듯이 당당히 들고나왔다. 이후 스티글리츠에게 〈샘〉의 사진을 찍도록 했고, 그 사진은 『맹인』 제2호에 실렸다.

“무트 씨의 〈샘〉은 비도덕적이 아니라 부조리하다. 욕조보다 더 비도덕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철물점 쇼윈도에서 매일 볼 수 있는 가구류다. 무트 씨가 샘을 자기 손으로 만들었느냐 안 만들었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는 그것을 ‘선택했다’. 그가 일상생활의 평범한 오브제를 취하여 그것의 일상적 의미가 사라지도록 배치했다. 새로운 제목과 새로운 관점을 통하여 그는 그 오브제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창안해낸 것이다.” _ 146쪽

다다만큼이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것이 바로 초현실주의다. 1938년 파리에서 열린 《초현실주의 국제전》에서 미술사적 의미를 획득한 초현실주의는 1942년에 뉴욕에서 열린 《금세기 미술》과 《초현실주의 제1차 서류전》에서 절정을 맞았다.
《초현실주의 국제전》에서 단연 주목받은 것은 달리의 〈비 오는 택시〉였다. 갤러리 로비에 설치된 이 작품은 관람객에게 문을 지나 다시 밖으로 나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내부와 외부의 반전이라는 공간구성은 그 자체로 파격이었다. 초현실주의의 실용적인 면이 주목받은 것도 이 전시의 특징이다. 전시에서 선보인 가구 디자인, 의복 패션 등이 상류층을 중심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이렇듯 파리의 《초현실주의 국제전》은 초현실주의의 독자적 미학을 넘어 미술 전반에 발상의 전환과 창작의 단초를 제시했다.”
뉴욕에서의 아방가르드 전시는 아트딜러 구겐하임의 역할이 지대했다. 구겐하임은 1942년 《금세기 미술전》을 마련할 때 건축가 키슬러를 고용하여 파격적인 전시공간을 만들었다. 키슬러는 관람객과 작품 사이의 장애물을 없애고 “인간적 견지”에서 관람할 수 있도록 공간을 구성했다. 작품을 절대 만져선 안 되는 전시가 아니라 건드려도 보고, 앉아서 쉬어도 보는 전시가 탄생한 것이다. “이것은 구겐하임의 신념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③ 추상미술
추상미술은 모던아트의 꽃이라 불릴 만하다. 20세기 전반의 야수주의, 입체주의 이후 다양한 추상미술의 움직임이 있었다. 이는 1960년대 포스트모던 아트가 도래하기 전까지 활발히 현대미술을 추동했으니, 네덜란드의 데 스테일, 독일의 바우하우스, 프랑스의 앵포르멜, 미국의 뉴욕 스쿨이 대표적이다.
데 스테일은 보편성과 순수한 추상을 추구한 추상미술 운동으로 미술뿐 아니라 산업디자인과 가구, 건축 디자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대표작가로는 몬드리안, 반 두스뷔르흐, 리트벨트가 있는데, 이들의 첫 전시는 1923년 파리의 레포르 모데른 갤러리에서 열린 건축전이다. 미술의 중심지에서 당당히 데 스테일을 알린 이 전시에서 네덜란드는 모던 디자인과 건축이 시작된 곳으로 인정받는다.
바우하우스는 독일에서 1919년부터 1933년까지 운영된 일종의 공동체였다. 이곳에서 선생과 학생은 장인과 견습공의 관계로 지냈다.

“바우하우스는 순수미술의 이상과 디자인의 유용성을 총체적으로 추구했고, 이를 통해 다양한 미술 형태를 생산하고자 했다. 시대를 앞서간 이 기관은 현실과 괴리된 이전의 아카데미즘에 반대하여 실제 삶과 연관된 교육을 추구하였다.” _ 200쪽
바우하우스의 첫 전시는 1923년 열렸다. 이 전시에서 바우하우스는 이제까지의 활동을 총결산했다. 여기서 바우하우스는 ‘기술’의 새로운 차원을 제시한다. 즉 과거의 수공예에서 벗어난 기계기술을 바탕으로 예술과 기술의 통일을 선보인 것이다. 유럽 각지에서 1만 5,000명이 찾아오고 여러 매체에서 보도되었으니, 이 전시는 대성공이었다.
추상미술 작가들이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는 불행히도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 때였다. 극도의 불안감과 죽음의 공포가 사회 곳곳에 팽배했다. 연장선에서 실존주의가 등장했으니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철학이자 운동이었다.
앵포르멜은 예술에서의 실존주의라 할 수 있다. 유럽 문명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원시적 세계를 동경하며, 광인이나 어린아이의 시각에서 미술 창작을 시도했다. 대표작가로는 포트리에, 뒤뷔페, 타피에 등이 있는데, 모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전시를 개최했다. 특히 타피에가 《또 다른 미술》을 열며 전쟁 직후 파리의 미술 경향을 규명하면서 앵포르멜 개념을 정식으로 제시했다. 그는 전시도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술은 다른 곳에서, 그 바깥에서, 우리가 다르게 지각하는 실재의 또 다른 측면에서 이루어진다. 미술은 다른 것이다. …진정한 창조자들은 발작, 마술, 무아지경 같은 예외적인 것만이 불가피한 메시지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_ 232쪽

사르트르는 타피에가 앵포르멜의 선구자로 꼽은 볼스의 작품에 대해 “세계 안의 존재의 공포를 시각화하는 실존적 행위”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유럽에 앵포르멜이 있었다면 미국에는 추상표현주의가 있었다. 뉴욕 스쿨이 이끈 추상표현주의의 중심에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작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유럽의 최신 모던아트를 미국에 소개하는 동시에 미국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모던아트를 만들어나갔다. 당시 미국은 1913년에 열린 《아모리쇼》가 유럽 아방가르드를 성공적으로 소개한 뒤로, 뉴욕 현대미술관 등 대규모 미술관을 짓고 뉴딜 정책으로 예술가들을 여러 사업에 대거 동원했다. 구겐하임 같은 아트딜러도 활발히 활동했으니 가히 “미술의 새로운 르네상스”였다.
뉴욕 스쿨의 작가들은 액션 페인팅으로 유명한 폴록과 색면회화로 유명한 로스코, 뉴먼, 스틸 등이 있다. 그중 폴록은 제작 기법의 측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뒤샹이 소변기를 전시품 받침대 위에 올려놓는 간단한 행위로 상식을 뒤흔들었듯이 캔버스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젤을 벗어난 캔버스는 미술작품의 축을 수직에서 수평으로 전환하고, 캔버스에 뿌려진 물감은 형태가 아니라 작가의 움직임, 즉 사건을 보여준다. 유럽의 미술 전통을 일거에 깨뜨린 폴록의 작품은 그 자체로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자신감이었다.

④ 포스트모던 아트
1960년대 초에 들어서면 유럽이든 미국이든 사회적·정치적·문화적 상황이 변하기 시작한다. 간단히 말해 자본주의 사회의 리얼리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대신 대안과 개혁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술도 이런 변화를 피해갈 수 없었다.

“당시 미술계의 주류를 이루던 모더니즘의 절정이었던 추상표현주의는 개인 주체의 정신과 내면으로만 침잠하는 양상을 띠었다. …더 이상 미술의 향방을 제시할 창의력이 고갈돼 있었다. 이러한 급변하는 시대상황은 그에 맞는 새로운 미술을 요구했고, 작가들은 개인보다는 사회 및 외부적 현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_ 303쪽
이런 이유로 등장한 것이 바로 포스트모던 아트다. 팝아트는 포스트모던 아트의 여러 갈래 중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영국에서 태동한 팝아트는 미국에서 꽃피웠는데, 영국에서 열린 《이것이 내일이다》와 미국에서 열린 《새로운 리얼리스트들》이 대표적인 전시다. 다만 같은 영어권이라도 영국과 미국의 팝아트는 성격이 달랐다. 전자가 “자본주의 테크놀로지와 스펙터클을 다루면서 비판적 태도를 견지”했다면 후자는 누구든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 대표적인 작가가 바로 워홀이다.
워홀은 상업미술과 순수미술 사이의 경계에 있던 작가였다. 그는 “팝아트를 그저 단순히 상업적이고 가벼운 것으로 치부해버릴 수 없게 한다.” 실제로 재난과 죽음을 다룬 그의 연작은 어둡고 무거운 리얼리즘을 느끼게 한다. 그러면서도 극적인 개인사, 신비로운 분위기와 패션 등 포스트모던적인 수사(rhetoric)로 허상적인 이미지의 시대를 예견했다. “한마디로 표면과 깊이가 함께 가는 것이 워홀의 작업이었다.”
미국에서 팝아트가 유행하던 시기 프랑스에서는 누보 레알리즘이라는 과감한 전위미술 운동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누보 레알리즘 작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팽배한 물질문명과 소비사회를 단순히 ‘표상’(’representation)하는 데서 벗어나 이를 ‘차용’(appropriation)하고 다시 ‘제시’(presentation)하고자 했다. 굉장히 사회적 운동이었던 누보 레알리즘은 이렇게 새로운 리얼리티를 획득했다.
누보 레알리즘의 주요 전시로는 클랭의 《텅 빔》과 아르망의 《가득 참》이 있다. 클랭의 전시는 제목 그대로 텅 빈 공간을 보여준다. 그의 의도는 ‘무형의 정신’(intangible spirit)으로 공간을 가득 채워 비물질적 회화를 전시하는 것이었다. 이를 상업 갤러리에서 시도했다는 것도 놀라운데 “누보 레알리즘은 자본주의 소비사회와 어떤 방식으로든 관련을 가져야 했기 때문이다.” 돈을 내고 입장한 관람객들이 항의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아르망의 《가득 참》은 《텅 빔》에 대한 일종의 응답으로, 이번에는 갤러리를 온갖 쓰레기로 가득 채웠다.

“《텅 빔》과 《가득 참》의 두 전시는 서로 반대되는 방법을 통해 같은 목적지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클랭과 아르망은 …결국 당대 예술에 대한 적의를 공유했던 것이다. 클랭이 보여준 물질에 대한 거부는 아르망이 구현한 고급미술에 대한 거부와 만난 셈이다.” _ 364쪽

뉴욕에서 등장한 미니멀리즘도 포스트모던 아트의 주요한 갈래다. 저드, 모리스, 플래빈, 안드레 등이 주축이 된 미니멀리즘은 가장 이론적으로 잘 무장된 포스트모던 아트다. 몇몇 작가는 전문적으로 비평을 겸하기도 했다. 특히 저드와 모리스는 미니멀리즘 미학을 정리해 책으로 출간할 정도였다.
최초의 미니멀리즘 전시는 1966년 열린 《일차적 구조들》이다. 미니멀리즘 특유의 익명성, 침착함 등을 잘 보여준 이 전시는 특히 작품을 받침대 위가 아닌 벽이나 바닥에 직접 설치했다. 당시에는 굉장히 파격적인 시도였는데, 이로써 “고귀한 예술과 승화를 추구하는 모더니즘 미학에 대한 도전과 반항”을 드러냈다.
전시에 관한 대부분 비평은 우호적이었다. 《일차적 구조들》은 유럽에서의 68혁명과 미국에서의 반전운동 등 해방과 자유를 갈구하는 움직임과 잘 맞아떨어졌다. 이 전시에서 소개된 젊은 작가들의 작업은 무엇보다 기존 체제에 대한 저항과 변혁으로 받아들여졌다.
『현대미술의 결정적 순간들』에서 소개하는 포스트모던 아트의 마지막 갈래는 개념미술이다. 개념미술은 “작품의 결과물보다 작가의 창조적 발상이 더 중요하다고 보고, 아이디어 자체가 작품”이 된다고 본다.

“개념미술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 미술경향으로, 이전까지 미술의 핵심이었던 시각성에 반대하며 시각적 환영을 거부한다. 이는 미니멀리즘의 대상(object)조차 버리고 아이디어와 의미를 강조하며 미술의 본질에 대해 탐색한다.” _ 416쪽

개념미술의 대표적인 전시로는 《1월 전》과 《태도가 형식이 될 때》가 있다. 특히 《태도가 형식이 될 때》는 “개념미술의 시작을 알리고 새 장을 연 전시”로 평가받는다. 반(反)형식,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 개념미술, 대지미술 등 다양한 조류를 포괄한 이 전시는 작업의 과정과 행위, 즉 작가들의 ‘내적 태도’를 강조했다. 당연히 작품의 재료, 행위, 형태를 굉장히 폭넓게 허용했다. 심지어 참여 작가 69명 중 15명은 다른 곳에서 수행한 작업을 언급하는 정보나 문서를 전시했다.
이러한 개념미술은 포스트모던 아트의 다양한 흐름 중 한 갈래이자 ‘수뇌부’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포스트모던 아트의 주요 특성도 개념미술이 1960년대 말에 제기했던 문제의식에 기반을 둔다.

새로운 ‘이즘’은 없다
야수주의부터 개념미술까지 현대미술의 여러 전시와 사조, 작가를 소개한 『현대미술의 결정적 순간들』은 끝에서 “오늘날 미술에서는 더 이상 새로운 ‘이즘’은 없다”라고 선언한다.

“1960년대 후반 후기구조주의의 세례를 받은 미술사는 더 이상 유사한 것끼리 범주화하고 한데 묶어 생각의 서랍에 분류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 역사의 교훈을 통해 우리는 제한적 범주로 분리하는 방식의 ‘이즘’을 지양한다. 이제 ‘이즘’의 역사는 끝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여전히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최근의 유효한 ‘이즘’은 개념미술과 ‘포스트미니멀’(post-minimal) 이다.” _ 463쪽

연장선에서 이제 우리는 미술작품을 볼 때 표현에 앞서 작가의 아이디어를 먼저 헤아려 본다. 그리고 전시 기획자의 아이디어도 살펴본다. “기획자의 창의력이 얼마나 새로운 전시와 미술작품의 의의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더불어 미술작품이 내게 던지는 의미를 생각해보기도 한다. 이때 의미는 ‘나’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 ‘내가 사는 시대’와 연관된다.

“미술은 우리를 보게 할 뿐 아니라 생각하게 한다. 1960년대 말 이후 미술은 아름다움보다 앎을 택했다. 미술은 이미 레테의 강을 건넌 것이다.” _ 454쪽

오늘날 현대미술과 관련된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겉으로 보기에는 세계적인 수준의 현대미술 전시가 심심치 않게 열리는 등 대중의 관심이 높다. 최근에도 바로 얼마 전인 4월 7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마르셀 뒤샹》이 열렸다. 100여 일간의 전시 기간에 20만 명이 넘게 관람했다고 한다. 이어지는 전시로 8월 4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데이비드 호크니》가 열린다. 하지만 좀더 살펴보면 “현대미술은 이해하기 어렵다”, “현대미술은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이다” 등의 오해와 곡해 역시 만연하다.
그 이유는 아마 미술사 전반에 대한 맥락, 특히 현대미술의 꽃인 전시에 대해 공부해볼 기회가 없어서이지 않을까? 새로 출간된 『현대미술의 결정적 순간들』이 독자들에게 현대미술을 제대로 보는 법을 제시하는 책으로 다가갈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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