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역사기행 (책소개)/4.한일역사기행

조선통신사 옛길 걸은 까닭

동방박사님 2022. 3. 22.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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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저자는 『조선통신사 옛길 걸은 까닭』에서 “옛 조선통신사들이 사경(死境)을 넘나들며, 필사적인 노력으로, 통 큰 정치와 지혜로운 외교술을 발휘하여, 200여 년 동안 평화 시대를 선도한 것처럼, 이 시대에도 한 번 더 지혜롭고 격조 높은 외교술과 통 큰 외교로, 일본을 이 시점에서 용서하고, 상생의 길로 진정한 이웃사촌으로 동행하는 외교정책을 펴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강조한다. 이어서 그는 “이 지겨운 악연의 한·일 관계를 언제까지 후손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것인가?”라고 반문하면서 “이제는 조선통신사의 성신·교린·우호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우리 후손에게는 악연의 쇠사슬에서 벗어나 진정한 동반자로 상생의 복지국가를 만들어 나가도록 우리 세대는 어떠한 비난을 받더라도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호소한다.

목차

추천사 : ‘성신교린(誠信交隣) 문화 사절’ 조선통신사의 재조명

서문: 조선통신사 옛길을 53일간 걷고 배우다

1장 한국내 조선통신사 옛길을 걷다

1일 차(4월 1일)
설렘과 두려움으로 1,158km 대장정에 나서다
2일 차(4월 2일)
옛 지명인 ‘판교’와 ‘낙생’은 그대로인데

3일 차(4월 3일)
좌찬고개 넘으며 한·일·대만 ‘고향의 봄’ 합창

4일 차(4월 4일)
조선 후기 무장, 어제연 장군 생가 방문
☞ 휴게실: 조선 시대 통신사들이 주로 이용한 길

5일차(4월 5일)
옛 통신사 사행들이 휴식했던 ‘숭선참’은 수몰되고

6일 차(4월 6일)
탄금대에 맺힌 원한의 탄식은 아직도……
☞ 휴게실: 탄금대 율시(彈琴臺 律詩)

7일 차(4월 7일)
물 한 잔에 따뜻한 인정을 느끼며

8일 차(4월 8일)
문경새재 넘으며 한·일 평화·우정의 가교 되새기며

9일 차(4월 9일)
‘고모산성’ 성황당에 기원하며

10일 차(4월 10일)
용궁의 전설 깃든 ‘용궁토끼간 빵’을 상품으로

11일 차(4월 11일)
옛날 산적이 출몰하던 ‘백골고개(百我峴)’을 넘으며

12일 차(4월 12일)
숨 가쁘게 달려온 낙동강 물은 하회마을 감돌아 쉬어가네

13일 차(4월 13일)
영호루(映湖樓) 올라 시 한 수 읊조리고 싶었건만

14일 차(4월 14일)
의성의 조문국과 일본 천황가(天皇家)와의 인연은?

15일 차(4월 15일)
1만 명 운집했다는 조양각 전별연 그리워라

16일 차(4월 16일)
백릿길 걸어 신라 천년 고도 경주에 입성

17일 차(4월 17일)
일본 무장 ‘사야카’, 그는 왜 조선인 ‘김충선’이 되었을까?

18일 차(4월 18일)
천년 흔적 간직한 신라의 흙냄새가 코끝을 간질어

19일 차(4월 19일)
울산의 처용무와 학춤에 반해

20일 차(4월 20일)
조선조 향리 ‘대일 외교관’ 이예 선생 후손 환대 감사

21일 차(4월 21일)
21일간 한국 구간 걷기 끝마치니 만감이 교차

22일 차(4월 22일)
일본 총영사 초청 만찬 후 일본 여정 완보 의지 다져

2장 일본의 옛 뱃길을 버스로 가다!

23일 차(4월 23일)
해신제 지내고 넘던 쓰시마 뱃길 단숨에 넘다

24일 차(4월 24일)
아름답고 풍요로운 이키섬(壹岐島)에 ‘어죽’은 없었다

25일 차(4월 25일)
일본인의 로망, 해발 850m ‘노로국립공원(野呂山高原)’에 여장을 풀다

26일 차(4월 26일)
한·일 문화 교류 활성화 헌신하는 강정춘 씨
☞ 휴게실: 조선통신사의 숙소

27일 차(4월 27일)
도모노우라 ‘일동제일형승지’는 제 모습 잃어 가고
☞ 휴게실: 에도 시대 사람의 하루 걷는 거리

28일 차(4월 28일)
조선통신사 유적 활용도 드높이는 ‘우시마도’

3장 에도를 향해 옛길을 걷다!

29일 차(4월 29일)
춘풍(春風), 긴 제방 스쳐 고향 집 감도는구나!

30일 차(4월 30일)
일본의 레이와(令和) 시대 도래하는 순간에
☞ 휴게실: 조엄의 [해사일기]에 의하면……

31일 차(5월 1일)
2대 걸쳐 한국문화·정신 계승 ‘고려박물관’ 에 진한 감동
☞ 휴게실: ① 교토 문화답사 ‘쇼코쿠지(相國寺·상국사)’ 한글 유작 시
② 교토(京都)의 귀 무덤, 미미즈카(耳塚)

32일 차(5월 2일)
산조오하시 난간 청동(靑銅) 장식물 보고 놀란 옛 사행들
☞ 휴게실: 바다처럼 보이는 호수 ‘비와코(琵琶湖)’

33일 차(5월 3일)
조선인가도와·비와코호수변 한·일 우호 걷기 대회 열리기를

34일 차(5월 4일)
히코네 소안지(宋安寺)의 통신사 환대의 지혜·묘수

35일 차(5월 5일)
일본의 역사를 바꾼 하루 전쟁 ‘세키가하라’ 전쟁터

36일 차(5월 6일)
다루이에서 펼친 민간외교

37일 차(5월 7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동상 바라보며 회한에 잠겨

38일 차(5월 8일)
나고야 ‘묘렌지’에 기념 식수(植樹)하다

39일 차(5월 9일)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고향, ‘평화 도시’ 오카자키시

40일 차(5월 10일)
한·일 역사 수레바퀴는 앙숙·협력 교차 인연으로

41일 차(5월 11일)
죽을 힘을 다해 아라이 관문에 도착하다

42일 차(5월 12일)
옛 조선통신사 상생 지혜를 한·일 외교정책 밑거름으로

43일 차(5월 13일)
후쿠로이 시장 등 한·일 지자체장들, 긴밀한 우호 협력

44일 차(5월 14일)
소소한 선물에도 때로는 감동

45일 차(5월 15일)
우츠노야(宇津谷) 고갯길 빼어난 경관에 취하다

46일 차(5월 16일)
‘조선통신사 보고(寶庫)’ 세켄지 옛 절경은 간데없고

47일 차(5월 17일)
조선통신사를 위해 만든 ‘삿타토오게’ 절경에 매료

48일 차(5월 18일)
호텔 옥상에서 웅장한 후지산 보며 호들갑 떨다

49일 차(5월 19일)
참가자 평균 연령 72세 노인들, 하코네 고개에서 체력 과시

50일 차(5월 20일)
1,300년 전 고구려 유민들이 일본 열도로 이주했다니

51일 차(5월 21일)
폭우 대비 형형색색 패션의 참가자들

52일 차(5월 22일)
긴 여정 마무리 하루 앞두고 들뜬 마음 진정시키려니

53일 차(5월 23일)
1,200km 대장정 마무리하니 감격의 눈물만……

◎ 부록 ① ‘21세기 조선통신사 서울-동경 한·일 우정 걷기’ 교훈

◎ 부록 ② 내가 체험한 일본·일본인·일본 문화

저자 후기 : “조선통신사의 옛길을 ‘평화 순례 길’로 만들고파”
 

저자 소개

저 : 선상규
 
- 경남 진영 출생
- 농학석사·체육학석사·이학박사 학위 취득
- 한국에 처음으로 국제걷기대회를 도입하여 1995년에 경주에서 개최
- 조선통신사 옛길을 발굴하여 서울-동경 6회 완보, 서울-부산 2회 완보, 백의종군길, 한국일주 걷기 등 다양한 국내외 걷기 활동으로 걷기운동의 발전·확산에 선도적 역할 수행
- 생활체육 진흥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체육상’ 수상
 
 

출판사 리뷰

이 책은 지난 2007년부터 2년에 한 번 실시해 오고 있는 ‘조선통신사 서울-동경 한·일 우정 걷기 행사’ 전반을 아우르면서 2019년 제7회 대회를 중심으로 발로 쓴 현장의 생생한 기록을 담은 기행록이다. 이 책을 쓴 선상규 박사는 한국에 처음으로 국제걷기대회를 도입하여 1995년에 경주에서 개최한 인물이다. 조선통신사 옛길을 발굴하여 서울-동경 6회 완보, 서울-부산 2회 완보, 백의종군길, 한국 일주 걷기 등 다양한 국내외 걷기 활동으로 걷기운동의 발전·확산에 선도적 역할 수행해 생활체육 진흥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체육상’ 수상했다.

2007년은 임진왜란 후 최초의 조선통신사가 파견된 지 400년이 되는 기념비적인 해였다. 이 사업은 조선통신사의 성신교린(誠信交隣) 정신을 오늘에 이어서 한·일 관계를 회복하고 저자가 평생 천착해 온 걷기의 대중화와의 접목으로 두 나라 국민의 건강증진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취지에서 시작했다.

걷기에 대한 저자의 철학은 “육체적인 활동을 통해 건전한 몸과 마음을 만들며 나아가 미완성의 인간이 정신적인 자유를 얻어 원숙한 인간이 되게 하는 고급운동이고 걷는 일은 생각하는 일과 마찬가지”라는 거다. 한·일 양국의 회원들은 장장 53일에 걸쳐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어가서 배를 타고 대마도와 이키?岐섬 그리고 시모노세키(下?)에 상륙해서는 버스로 오사카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육로로 교토를 거쳐 최종 목적지인 도쿄까지 총연장 1,200km를 걷는 강행군이다. 참가자들의 평균 연령이 72세 안팎에 이른다. 민간교류를 위한 각종 활동 그리고 걸어가면서 보고 듣고 느끼며 생각하고 체험한 일들이 고스란히 이 책 속에 담겨 있다.

참고로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후 조속히 국교를 회복하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강한 여망에서 시작되었다. 100년의 혼란의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에도막부를 연 이에야스에게는 다행하게도 임진왜란에 대한 원죄가 없었다.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臣秀吉)에 의해 영지 교환이라는 명목으로 오랜 삶의 터전을 빼앗겼다.

당시 이에야스는 황무지에 가까운 에도(지금의 도쿄) 일대로 쫓겨 갔으며 새로운 영지를 개척하고 도시를 건설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것이 그가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 요청을 거부할 수 있었던 명분이었다. 덕분에 다른 영주들과 달리 자신의 병력과 자원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 영지를 빼앗긴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히데요시 사후 정권을 쟁취할 수 있었다.
한편 조선으로서는 일본에 끌려간 포로의 송환과 함께 일본의 국정을 살필 필요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만주에서 한창 떠오르고 있었던 여진족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킬 필요성이 절실했다. 그 결과 전란이 끝나고 채 10년도 되지 않은 시점임에도 이에야스의 요망에 부응해 통신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제1차는 사명대사를 대표로 하는 ‘회답 및 쇄환사’였으며 제4차부터는 양국의 국교가 회복되어 본격적인 대규모 통신사 파견이 이루어진다. 조선통신사의 규모는 보통 300~500명 정도였다. 기간은 당시는 바닷바람과 조수 그리고 일본 국내의 변화무쌍한 기후의 영향으로 6개월에서 길게는 1년이 걸렸다.

새로운 막부의 통치 철학으로 이에야스는 주자학을 택했다. 주자학 선진국인 조선에 대한 경외심과 배우고자 하는 이에야스의 절실한 마음이 조선통신사 실현으로 이어진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양국의 국교가 조속히 회복되는데 가장 큰 공로자는 조선 주자학의 거봉 퇴계 이황이 아닐까 생각된다.
제1차 통신사가 일본을 찾았던 1607년 이에야스는 정이대장군(쇼군·將軍)을 아들 히데타다에게 넘겨준 상태였다. 그렇지만 당시는 아직 오사카성을 중심으로 도요토미 집안의 잔당세력이 남아 있었던 불안정한 시기였다. 그래서 하코네(箱根)에서 서쪽은 이에야스 자신이 그리고 쇼균 히데타다는 하코네의 동쪽을 지키는 이원체제를 취하고 있었다.

제1차 통신사 일행은 에도로 가기 전에 슨푸(駿府: 지금의 시즈오카)의 이에야스에게 예방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렇지만 그는 현직 쇼군이 히데타다인 만큼 에도에서 국서 교환의 외교의례를 마친 다음에 귀로에 들러 달라고 정중하게 사양했다. 일행은 에도에 들러 히데타다에게 최고의 예우를 받은 후 국서 교환을 마치고 귀로에 슨푸의 이에야스를 찾아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제4차 통신사부터는 에도 막부의 쇼군이 습직 할 때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통신사 일행은 오사카에 도착해 일본 측이 준비한 배를 타고 요도가와(淀川)를 거쳐 교토로 간 다음에 육로로 에도(江戶·지금의 도쿄)까지 걸어갔다. 이들은 통과하는 지역마다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으며 지역의 다이묘(大名·영주) 학자 문인 승려 화가 일반 백성들과 폭넓게 교류하며 한류열풍을 일으켰다. 쇄국 상태의 당시 일본인들에게 조선통신사 행렬은 신기한 볼거리였으며 막부는 의도적으로 백성들이 구경하도록 장려했다.

우리 통신사 일행들이 일본에서 보고 느낀 충격 역시 작지 않았다. 이들이 오사카에 들렀을 때 도시의 번화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적의 출판과 판매가 활발한 데 놀란다. 당시 조선의 서적인 이퇴계의 [퇴계집]이 애독되고 있는 것을 보고 유학의 국제화를 실감하기도 했다. 1719년 제4차 통신사의 제술관으로 참여한 신유한은 ”오사카는 글을 청하는 사람이 다른 지방보다 곱절은 많아 어느 때는 새벽닭이 울도록 잠을 자지 못했다“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들은 일본의 발달한 문물 그리고 잘 사는 모습에 놀라움과 부러움을 느끼는 한편 억울하다는 생각도 했다. 어느 단원에서는 “남의 나라를 침략했던 야만스러운 왜인들이 벌을 받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잘 사는 것을 보니 배가 아플 지경”이라고 적었다. 당시 일본은 금광에 이어 대규모 은광의 발견으로 막부는 넉넉한 은을 보유하고 있었다. 통신사가 임무를 끝내고 에도를 떠날 때 쇼군은 상당량의 은을 일행들에게 선물로 나누어주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이 선물을 국내로 가지고 올 수가 없었다. 조정에서 금지했기 때문이다. 부득이 이들은 아까웠으나 강에 던져버렸다. 이를 주우려고 일본의 짐꾼들이 경쟁적으로 강으로 뛰어들었다. 당시 일본의 발달한 문물이나 정보가 국내에 유입되는 것을 조선조정은 엄금했다. 여전히 일본은 오랑캐며 상종하지 못할 나라라는 인식을 백성들에게 심어주고자 했다. 상공업의 발달로 부강해진 일본의 모습을 보고 왔지만 이를 철저히 무시했으며 국정에 반영시키지 않았다. 백성들의 살림이 윤택해지면 통치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영·정조 시대에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실학운동이 한때 일어나기도 했다. 그렇지만 기득권층의 반발로 이 불씨를 살리지 못한 가난한 나라 조선은, 상업으로 국부를 키우고 메이지유신 이후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에 성공한 일본제국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일본의 통치 철학은 주자학이었지만 민간에서는 오히려 이후에 들어온 양명학이 주류였다. 양명학은 사농공상에서 공업이나 상업도 모두 본업(本業)이라고 주장하며 주자학이 본업과 말업(末業)을 구분하는 것을 비판했다. 즉 직업은 달라도 도(道)를 이룰 수 있다는 것으로서 기술자 노동자 그리고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직업에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다.

통신사의 성공적인 접대를 위해 에도막부는 심혈을 기울였다. 동원한 인부가 33만여 명 말이 7만 7,600필 이렇듯 인마의 조달 물자운반 숙박 등에 쓰인 경비는 매회 100만 냥으로서 일본 국가재정 1년 치와 맞먹었다. 에도 막부는 통일 후 불안정한 국내정세 속에서 막부 지배의 정통성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막부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한 기회로 통신사를 활용했다.

그러나 조선통신사는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국민에게 잊혔다. 권력 핵심에 의해 의도적으로 평가절하되었다. 이는 조선통신사의 활동이 제대로 알려지는 것이 조선의 식민통치에는 불리했기 때문이다. 일본 국민 사이에 거의 잊혔던 조선통신사가 새롭게 기억되고 2017년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등재된 것은 선각자 재일교포 신기수 선생의 역할이 컸다. 신기수 선생은 [조선통신사의 여정]이라는 저서에서 “어둠의 역사’를 철저하게 검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불행은 사라지지 않는다. ‘빛’을 보는 복안적(複眼的)인 사고가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필자가 일본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기 시작한 것은 걷기운동 교류를 위해 일본을 왕래하기 시작한 1995년도부터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해 관계없이 일본을 왕래한 것이 100여 회 이상 이른다. 지난 30여 년 동안 필자는 일본의 참의원에서부터 현지사·시장·교수·신문사 사장 등은 물론 일반 시민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많은 인사와 교류해왔다. 이러한 교류 활동은 물론 걷기대회를 비롯한 각종 행사에 참여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은 첫째 일본인 정신의 저변에는 천황에 대한 충성심이 짙게 깔려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일본이 세계 강국으로 군림하게 된 기본 바탕에 장인정신이 살아 있었다는 점이다.

셋째는 왕따(이지메) 조직문화이다. 한 조직에서 단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든가 이질적인 행동을 하면 여지없이 왕따를 시킨다. 그래서 리더에 대한 충성심과 단체를 이탈하지(왕따가 되지) 않으려고 열성을 다하는 조직문화가 형성되다 보니 현지에서 이를 피부로 절감할 수 있었다. 넷째는 일본인의 철저한 약속 준수 의식과 사소한 것에도 가치를 부여하고 귀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옛것이라도 낡은 것이라 하찮게 여기지 않고 존재의 가치를 불어 넣어 생명력을 되살리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는 일본을 싫어하나 일본인의 문화와 생활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울 것이 있다”라며 “기초질서 의식과 항상 준비하는 습관, 초등학교(소학교) 초년생에게는 학습보다 인간윤리 교육을 우선해 시킨다는 사실과 봉사 정신과 책임감, 그리고 기록·관리·보존이다”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제7차 조선통신사 서울·동경 한·일 우정 걷기는 조선통신사의 자료들이 유네스코기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후 처음으로 실행한 행사이기에 유네스코에 등록되기 전과 후의 차이점도 비교하기로 하였다”라며 “실제 가보니 우리나라는 관련 연고지 지자체장들은 물론이고 향토 해설사까지도 조선통신사 자료들이 유네스코에 등록된 줄도 모르고 있는 곳이 많았는데 일본은 조선통신사 행렬이 자기 지역을 지나갔다고 홍보와 선전은 물론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고자 열성을 다하고 있었다”라고 안타까워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옛 조선통신사들이 사경(死境)을 넘나들며, 필사적인 노력으로, 통 큰 정치와 지혜로운 외교술을 발휘하여, 200여 년 동안 평화 시대를 선도한 것처럼, 이 시대에도 한 번 더 지혜롭고 격조 높은 외교술과 통 큰 외교로, 일본을 이 시점에서 용서하고, 상생의 길로 진정한 이웃사촌으로 동행하는 외교정책을 펴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강조한다. 이어서 그는 “이 지겨운 악연의 한·일 관계를 언제까지 후손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것인가?”라고 반문하면서 “이제는 조선통신사의 성신·교린·우호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우리 후손에게는 악연의 쇠사슬에서 벗어나 진정한 동반자로 상생의 복지국가를 만들어 나가도록 우리 세대는 어떠한 비난을 받더라도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호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