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역사기행 (독서)/3.통일평화기행

다크투어 : 슬픈의 지도를 따라 걷다

동방박사님 2022. 4. 6.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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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다크 투어, 슬픔의 지도를 따라 걷다』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한국전쟁 당시 목포형무소에서 실종된 오빠를 애타게 찾던 할머니를 떠나보낸 후, 할머니가 살아생전 내내 그리워하던 오빠의 존재를 찾아 무작정 여행길에 오른 저자의 특별한 여행기다. 여행길에서 그는 깔끔한 아파트 단지로 변한 목포형무소의 자리, 시민공원이 된 희생자들의 묘지 등 흔적도 없이 사라진 학살의 장소를 마주한다. 이를 계기로 저자는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여러 국가가 아름다운 풍경과 화려한 리조트로 은폐하고 있는 학살의 역사를 직접 찾아가 보기로 결심한다. 더 나아가 할머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날 속에 여전히 살고 있을 ‘학살 피해 유가족’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다크 투어를 시작한다.

 

목차

들어가며: 나의 특별한 여행기 · 7

목포의 눈물 · 11
한국 - 전라남도: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신들의 섬, 죽음의 섬 · 49
인도네시아 - 발리: 1965년 인도네시아 대학살

정글의 ‘구눙 티쿠스’ · 75
말레이시아 - 바탕칼리: 1948년 바탕칼리 학살

임을 위한 행진곡, 메이리다오 · 103
타이완 - 타이베이: 1947년 2 · 28사건

붉은 동백꽃 · 131
한국 - 제주도: 제주 4 · 3사건

못다 한 이야기 · 163
하늘과 우주를 넘어

나가며: 나와 이 여행을 같이한 이들에게 · 181
 

상세 이미지

저자 소개

저 : 김여정
 
대학을 졸업하고 오랫동안 국제관계 전문가로 국내외 시민단체 등에서 일하다가 우연한 계기로 회사를 그만두고 서울 보광동에 카페를 열었다. 카페 손님들로부터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보광동 이야기를 전해 듣고, 지금까지도 용산 사람들의 한국전쟁 경험을 채록 중이다. 보광동 이야기를 담은 『우리가 서로를 잊지 않는다면』으로 제8회 제주4·3평화문학상 논픽션 부문을 수상했다. 아시아 지역의 학살 사건과 그 유족들의 이...
 

책 속으로

다른 어부들은 그물을 털면서 떨어진 하얀 조각 같은 잔해를 모아서 코코넛 껍질에 넣었다. 나는 코코넛 껍질 안을 들여다보았다. 하얀 조각은 파도에 의해 조약돌처럼 둥글게 깎여 있어서 사람 뼈인지, 동물 뼈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어부는 그물을 다 털고, 코코넛 껍질을 하얀 수건에 싸서 어디론가 가져갔다. 그게 무엇인지 물어보았지만, 그들은 입을 다문 채 시선을 피했다.
--- p.53

타멕은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에게 산간 마을 청년들을 살해하라고 명령했다. 거부한다면 청년들의 숫자만큼 마을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타멕의 감시하에 마을 사람들은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날카로운 칼로 죽인 다음, 시체를 바다에 버렸다. 닭도 죽이지 못했던 와얀의 아버지는 살아남기 위해 칼로 사람의 목을 내려쳤다. 그는 죽는 날까지 그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p.66

이 구덩이 속에서 수천의 유골이 쏟아져 나왔다고 했다. 나는 구덩이 속으로 내려가 검은 모래 한 줌을 들어 올렸다. 총상에도 숨이 끊어지지 않았던 사람들은 검은 모래 속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을 것이다. 밀물 때가 되자, 파도가 해변으로 밀려왔다. 모래 구덩이에 스며든 바닷물은 학살의 흔적을 하나둘 지워냈다. 보석처럼 햇빛에 반짝이는 검은색 모래사장에 높은 파도가 몰아쳤다.
--- p.68

타이베이와 광주는 마치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 이곳에 온 것은 타이베이에서 독재에 반대하고 민주화를 위해서 투쟁하다가 고문받고 총살되거나 수용소에 보내졌던 사람들의 아픈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나는 굽이굽이 이어지는 골목길을 따라 걸으면서 타이베이에서 일어난 어두운 과거를 들췄다. 어두운 시대에 고통받은 타이베이 사람들의 아픔이 가슴속에 한가득 담겼다.
--- p.130

우붓 계곡을 뒤지며 뼛조각을 찾던 페툴루 마을 할머니도, 바탕칼리의 탄 삼촌도, 남편의 무덤을 찾아 류장리 산자락을 헤매던 할머니도, 김평담 할아버지도 이제는 모두 하늘의 별이 되었다. 나는 그들이 생각날 때마다 별을 본다. 별똥별이 내리는 날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발리에서는 별똥별을 하늘의 별이 된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이라고 여겼다. 별똥별이 내릴 때마다 아시아 곳곳에서 학살당해 별이 된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잊지 말아 달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 p.183
 

출판사 리뷰

전 세계가 공모한 기억 상실 속에서
기억의 목격자가 되기 위해 떠난 여행, 다크 투어

제28회 전태일문학상 르포 부문 수상작


남북정상회담이 있던 2018년, 인터넷은 김정은 위원장의 밈으로 넘쳐났다. 과거를 모른 채 자라난 젊은 세대에게 한국전쟁은 존재하지 않는 일이었으며 ‘김정은’이라는 인물도 그저 밈으로 소비될 뿐이었다. 베트남 전쟁이나 걸프 전쟁도, 노근리 사건도, 5월의 광주도, 제주 4·3사건도 모두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로만 존재하며,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제주도는 신혼여행이나 여름철 휴가지 외에 별다른 의미는 없다. 우리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다. 모래가 피로 물들었던 바닷가는 관광지가 되었고, 그곳은 사진만 찍고 지나가는 곳일 뿐이니 말이다. 조지 스타이너가 한탄한 것처럼 우린 모두 “계획된 기억 상실”에 걸렸다.

하지만 이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을 붙들고 아시아 학살지를 돌아다니면서 기억의 목격자를 자청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다크 투어, 슬픔의 지도를 따라 걷다』의 저자 김여정이다. 앰네스티를 비롯한 NGO에서 활동해 온 그는 학살 피해자 가족의 일원으로서 이 여행을 시작했고,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의 기원을 담아 이 책을 썼다.

너무 많은 죽음,
너무 적은 기록과 이야기


어떤 장면을 상상해 보자. 사람들이 길게 늘어선 채 굴비처럼 밧줄로 묶여 있다. 1947년 타이완 지룽항의 모습이다(2·28 사건).

“굴비처럼 밧줄로 엮인 사람들이 항구로 끌려오면 군인은 앞줄에 있는 한 사람만 총으로 사살했다. 앞사람이 사살되면 시체의 무게에 이끌려 뒷사람들이 줄줄이 바다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군인들은 총알을 아낀다는 이유로 사람을 굴비처럼 엮어서 죽였다.”(본문 126쪽)

말레이시아 바탕칼리 마을을 불태운 영국군은 “공산당 게릴라는 영혼이 없어서, 그들을 죽였어도 하나님 앞에 죄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인도네시아 추추칸 해변은 검은 모래밭이 하얀 백골로 덮일 정도로 시체가 쌓이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학살을 당한 것도 모자라 이웃을, 혹은 생면부지의 사람의 목을 칼로 내리쳐야 했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학살에 가담한 이들은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병을 얻어 죽었다. 이 모든 것은 입 밖에 내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기에 알고 있는 이도 없었다. 이 묻혀 있는 진실을 들추어내며 돌아다닌 저자에게 경찰이 다가와 협박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일일수록 기록해야만 했다. 세상에 알려야만 했다. 말레이시아의 탄 삼촌이 학살 사건을 세상에 알려 달라고, 기록해 달라고 부탁한 이후 더더욱 ‘다크 투어’와 그것을 기록하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의무처럼 느껴진 탓이다.

끝나지 않은 제노사이드…
인간이란 무엇인가


1947년 2월, 타이완에서는 전매국 단속원이 담배 파는 노인을 검거하며 구타하는 것에 시민들이 항의하는 과정에서 한 청년이 경찰 총에 맞았다. 이를 계기로 2·28사건이 시작되었고, 중국 본토에서 파병된 군인들이 약 3만여 명의 사람을 학살했다. 2021년 현재 진행 중인 미얀마 민주화운동에서는, 시위 두 달 만에 6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제노사이드는 옛날 일이라고, 문명화·세계화된 세상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우리는 또 눈과 귀를 닫은 채 스마트폰 속 세상으로 도망가버리면 되는 걸까? 아직도 학살은 현재진행형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 학살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일이다. 저자 김여정은 풍경 사진 찍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외면하는 진실을, 학살의 잔인함을, 남은 이들의 찢겨 나가는 듯한 고통을 발로 전한다. 학살 피해자들이 사형당하기 전 걸었던 그 길을, 옥바라지하던 할머니가 걷던 길을 따라 걸으며 물집 잡힌 발을 계속해서 옮긴다.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까지도 한국전쟁 당시 목포형무소에서 실종된 오빠를 애타게 찾던 할머니를 떠나보낸 후, 할머니가 살아생전 내내 그리워하던 오빠의 존재를 찾아 무작정 떠난 목포에서 깔끔한 아파트 단지로 변한 목포형무소 자리를 본다. 묘지는 시민공원이 되었고 학살을 기억하는 이는 동네에 하릴없이 앉아 부채질을 하는 노인들뿐이다. 우리는 정말 이렇게 과거를 소거한 채 살아도 되는 것일까? 인간으로서 최소한 우리는 자신의 현재뿐 아니라 자신을 만든 과거를 책임져야 하지 않을까? 저자 김여정은 『다크 투어, 슬픔의 지도를 따라 걷다』에서 학살 피해자들을 기억하는 일과 더불어 우리에게 인간의 의무를 묻는다.

이 여행에도 끝은 있을까?

여행이 즐거운 건 끝이 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 사진을 정리하고 사 온 기념품을 선물하면 여행이 일단락된다. 하지만 학살지, 슬픔의 지도를 따라 걷는 여행인 이 ‘다크 투어’에도 끝은 있을까? 수백수천만 명의 죽음의 무게가 담긴 걸음 하나하나가 결코 쉽게 떼어지지 않을 테다.

1990년대, 조지 스타이너는 ‘리멤브런서’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한 가지 제안을 한 바 있다. 저마다 전쟁 기념탑에 적힌 이름을 열 명씩 외워서 혼자서 혹은 가까운 사람에게 들려주자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 땅의 누군가는 그 이름을 기억하는 셈이니 말이다. 토벌대가 죽창으로 마을을 들쑤시고 불로 태우는 것을 직접 본 그날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외양간에서 소와 말이 내지르던 소리를 듣던 제주도의 김평담 할아버지는 밤마다 낡은 공책에 적힌 사람들의 이름을 소리 내 읽어 내려갔다. 제주 4·3사건 피해자들의 이름이었다. 그 어떤 개념을 떠나 김평담 할아버지는 본능적으로 학살을, 과거를 기억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가 세상에 남긴 위령비에 새겨진 성산 마을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소리 내어 읽었다. 비명처럼 울어대는 눈 폭풍 소리에 호명되는 이름들이 묻히지 않도록 소리 지르듯 크게 이름을 불렀다. 바다 깊은 곳에 던져진 사람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바다는 대답이라도 하듯이 ‘웅웅’ 거리며 울었다.” (본문 162쪽)

우리는 김평담 할아버지가 학살 피해자를 기록한 것을 또 기록으로 남긴 이 『다크 투어, 슬픔의 지도를 따라 걷다』를 읽을 뿐이지만, 이 슬픈 여행기를 읽고 기억하며 이 여행과 기록에 동참하게 된다. 어떤 여행은 끝이 있어 즐겁지만, 끝나지 않아야 하는 여행도 있다. 시신조차 찾지 못하고 생때같은 가족을 잃은 이들이 남아 있는 한, 이 여행에 끝이란 것은 있을 수 없을 테니. 저자가 걸었던 슬픔의 지도를 따라 책 속을 걸으며 우리는 과연 “계획된 기억 상실”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기억 상실에서 빠져나와 끝나지 않는 여행에 동참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