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한일관계사 연구 (책소개)/3.재일조선인

조선사람 : 재일 조선인 1세가 겪은 20세기

동방박사님 2022. 4. 9. 17:59
728x90

책소개

올해 아흔이 된 재일동포 1세가 귀중한 체험을 바탕으로 써 내려간 재일조선인의 역사. 현재 60만 명에 이르는 재일조선인은 토지나 삶의 기반을 잃고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징용, 징병으로 끌려간 사람들(1세)의 후손들이다. 재일조선인 1세들은 일제 식민지라는 역사적 상황에서 탄광, 철도나 댐 건설, 군수공장 등에서 가혹한 노동조건 아래 일하면서 일본 사회의 하층 노동자가 되었다. 재일조선인 1세는 식민지 시대에 황국신민을 강요당했지만, 해방이 되어서는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졸지에 국적을 박탈당하고 일본 속의 ‘난민’ 신세가 되었다.

오늘날 재일교포, 재일코리안, 재일한국인 또는 그냥 일본어 줄임말로 그냥 ‘자이니치’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니 사실은 차별과 불이익 속에서 이런 정체성마저 포기하고, 일본 말을 쓰고 일본 이름을 쓰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 책의 제목인 ‘조선 사람’이라는 말이 저마다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조금씩 다른 미묘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목차

머리말

1장 빼앗긴 조국
2장 유랑의 땅, 만주에서
3장 ‘만주국’의 실태
4장 식민지 지배 아래에서
5장 제국주의와 항일무장투쟁
6장 이향란, 야마구치 요시코
7장 가나자와에서 보낸 청춘
8장 해방 전후의 나날
9장 리승기 박사와 류종묵 스님
10장 어머니 조국의 통일을 향하여
 

 

저자 소개

저자 : 백종원
1923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유랑한 끝에 만주국의 수도 봉천(선양)에 정착했다. 봉천보통학교와 봉천 제1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가나자와 제4고등학교를 마치고 교토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건설통신사(현 조선통신사) 사장, 조선대학교 정치경제학부 학부장, 조선총련 중앙부의장, 재인본조선인체육연합회 회장 등을 지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교수ㆍ역사학 박사...
 
 

출판사 리뷰

역사의 사각지대, 재일조선인 1세의 비망록
의주에서 태어나 가족과 함께 압록강을 건넌 식민지 시대 유랑민의 삶. 만주국의 수도 봉천(선양) 교외에 정착한 이래 장쭤린 폭살 사건과 만주사변, 만보산사건을 현장에서 목격한 소년 시절. 태평양전쟁으로 치닫는 군국주의 아래에서 징병과 학도출진으로 학우들과 이별하는 고등학교 시절. 전쟁 말기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헌병대에 구속된 상황에서 조국 해방의 맞이하게 되는 교토대학 시절. 미 점령기 온갖 탄압과 수난을 겪으며 조선인 민족교육에 열정 쏟은 질풍노도의 시대.
이 책은 올해 아흔이 된 재일동포 1세가 귀중한 체험을 바탕으로 써 내려간 재일조선인의 역사이다. 1945년 해방 당시 독립된 조국에 돌아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우리말로 번역하려고 마음먹고 있던 교토대학 경제학부 학생은, 백발노인이 되어 펴낸 이 책의 일본어판(이와나미서점, 2010) 책에서 소회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 책은 복잡다단한 시대를 지나온 ‘살아남은 자’의 증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나는 재일조선인 1세로서 우리 세대가 전쟁과 식민지 시대를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던가에 관해 나름대로 젊은이들에게 이야기하고픈 마음이 간절하다.”(머리말에서)

현재 60만 명에 이르는 재일조선인은 토지나 삶의 기반을 잃고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징용, 징병으로 끌려간 사람들(1세)의 후손들이다. 재일조선인 1세들은 일제 식민지라는 역사적 상황에서 탄광, 철도나 댐 건설, 군수공장 등에서 가혹한 노동조건 아래 일하면서 일본 사회의 하층 노동자가 되었다. 재일조선인 1세는 식민지 시대에 황국신민을 강요당했지만, 해방이 되어서는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졸지에 국적을 박탈당하고 일본 속의 ‘난민’ 신세가 되었다. 오늘날 재일교포, 재일코리안, 재일한국인 또는 그냥 일본어 줄임말로 그냥 ‘자이니치’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니 사실은 차별과 불이익 속에서 이런 정체성마저 포기하고, 일본 말을 쓰고 일본 이름을 쓰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 책의 제목인 ‘조선 사람’이라는 말이 저마다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조금씩 다른 미묘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만주국’의 기억, 기시 노부스케, 이향란
지은이가 다닌 봉천보통학교와 제1중학교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가 세운 학교였다. 그 무렵 ‘만주국’의 수도 봉천은 일본의 대륙 침략의 거점이었고, 1936년부터는 대대적인 이민 계획에 따라 수많은 일본인이 ‘대륙으로, 만주로’를 외치며 모여들던 시대였다. 당시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국’ 산업부 차장으로 관동군과 연결되어 만주를 일본 식민지로, 대소련 전쟁의 기지로 바꾸기 위해 수완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른바 ‘이상국가’ ‘왕도낙토’를 부르짖으며 만주를 호령하던 만주국은 국제연맹의 승인을 받지 못했고, 결국 1945년 소련에 점령되어 GHQ(연합국최고사령부)에 의해 해체되기에 이른다.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기시 노부스케는 도조 히데키의 교수형이 집행된 이튿날 석방되어 뒷날 수상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의 외손자 아베 신조도 수상에 올랐고 오늘날까지도 일본 우익을 대변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그 시절 만주는 물론 중국 본토와 조선, 일본을 아우르는 동아시아의 대스타 이향란이 있었다. 일본의 만주 침략을 선전하는 영화 〈백란의 노래〉의 주연 배우이자 주제가 〈님은 언제 오시려나〉(何日君再來, 대만 가수 덩리쥔이 1980년대에 다시 불러 인기를 얻었다)를 부른 이향란이 지은이의 우상이었다고 고백한다. 본디 일본인이었던 이향란은 뒷날 대륙 침략에 이용된 자신의 과거를 숨김없이 반성하고 아시아의 친선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 애쓴 정치가 ‘야마구치 요시코’로 지은이와 인연을 이어 갔고, 뒷날 일본 국회의원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도 만나게 된다.

종군위안부와 강제징용
최근 한일 간에 외교 전쟁으로까지 비화된 이른바 ‘과거사 문제’에 대한 서술은 역사학자다운 치밀함을 보인다. 1992년에 발견된 육군성 병무국이 작성한 〈군위안소 종업부 등 모집에 관한 건〉이라는 문서에는 병무국장 이마무라 히토시(今村仁, 뒷날 대장으로 진급), 육군차관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郞, 뒷날 참모총장이 됨)의 도장이 찍혀 있다. 종군위안부 문제가 군이 조직적으로 실행한 국가 범죄라는 사실을 폭로하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또 자민당의 유력 정치가 아라후네 세이주로(荒船淸十郞)는 1985년 2월 10일 사이타마 현의 치치부(秩父) 후생회관에서 한 연설에서 “종군위안부로 사망한 여성은 14만2천 명이다”라고 했다. 내각의 장관을 지냈고 여러 정보통을 가진 인물의 발언이다.
과거사 문제를 두고 1993년 8월에 이른바 ‘고노 담화’가 발표되고 1995년 8월 15일에는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수상이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한다”고 말은 했지만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한 부분이 없었다. 종군위안부는 버마, 사이판, 필리핀, 오키나와 같은 격전지에서 성노예로 비인간적인 취급을 당하며 각 전선에서 일본군이 패퇴하고 붕괴될 때 살해되거나 헌신짝처럼 버려져 죽었다.
일본 지배 하에서 노동력으로 강제연행된 우리 동포는 6백만 명이 넘는다. 군인이나 군속으로 직접 전쟁에 동원된 사람만 해도 약 24만4천 명에 이르고 그 가운데 약 2만2천여 명이 전사했다. 지은이의 양아버지는 해군에 징용되어 기타치시마(北千島, 쿠릴열도) 방면으로 징용되어, 일본 패전 직전 1944년 5월에 돌아오던 배가 미군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하여 사망했다. 양어머니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남편을 잃은 바다에서 난 것이라고 해서 생선은 입에도 대지 않으셨다고 한다.

리승기 박사와 류종묵 스님
지은이가 경제학부 학생으로 해방을 맞은 시기, 교토제국대학에는 세계적 명성을 날리던 과학자 리승기, 이태규, 박철재 박사가 근무하고 있었다. 리승기 박사가 지도한 일본인 제자 여럿이 뒷날 노벨상을 받았고, 아인슈타인이 있던 프린스턴대학 고등연구원에서 연구하기도 한 이태규 박사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상 추천위원이 되기도 했다.
지은이는 치안유지법으로 헌병대에 구속된 채로 해방을 맞이한 리승기, 이태규, 박철재 박사와 함께 유학생동맹을 조직했다. 또 토론을 거듭하며 해방된 조국의 과학기술 건설에 초석을 놓는 데 세 분은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고 하루빨리 조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합의를 보고 곧바로 준비를 서둘렀다.
그리하여 리승기 박사는 귀국하여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학장을 맡았지만, 미 군정청 ‘국립대학교실시령’(국대안)에 반대하여 사직하고, 고향에 머물다 한국전쟁 때 김일성 주석의 초청으로 평양으로 가 교토대학 시절 발명한 비날론을 공업화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한편 경허, 한암을 잇는 선승인 류종묵 스님은 20년대 만주를 유랑하다 1929년에 태백산맥 심산유곡에 있는 오대산의 사찰에서 수행에 정진하던 승려였다. 1935년 일본으로 유학한 뒤 ‘도쿄 5산’의 하나인 격식 높은 사찰을 받아 만수사를 개창했다고 한다. 그 뒤로 만수사는 조선 사람들의 사랑방 또는 공회당 같은 곳이었다.
일본이 패전한 직후, 1945년 8월 강제징용된 조선인 노동자 3700여 명을 싣고 조국으로 향하던 해군 운송선 ‘우키시마마루’(浮島丸)가 마이즈루 만에서 기뢰에 부딪혀 순식간에 침몰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도쿄를 비롯한 간토 지방에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동포의 유골이나 연고자가 없는 사망자를 공양할 공간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한 스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곳곳을 찾아다니며 몇 년 동안이나 불행한 동포들의 영령을 공양했다. 드디어 1965년에 조선대학교가 있는 고다이라 시에 국평사를 개창했다. 류종묵 스님은 한반도 통일과 세계평화를 옹호하는 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아시아불교도평화회의에서 평화상을 수상했다.

겨레의 역사를 비껴가지 않은 개인사
“이 책을 읽는 내내 만감이 교차하면서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재일조선인의 생생한 역사 체험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 학대와 고통의 체험이 우리 민족의 통일운동과 민주화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임헌영의 추천사)

지은이는 이른바 명문대학을 나온 엘리트라고 할 수 있지만, 오늘날까지 개인의 입신출세와는 인연이 없는 고난의 한길을 걸어왔다. 이 책에는 교과서에서 배우거나 할머니 할아버지한테서 어렴풋이 들은 것 같은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기록하고 있는 이야기는 지은이가 생생하게 기억하는 만큼 구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각계각층의 동포들이 폭넓게 참가하여 동포들의 생활과 권리를 지키는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이 결성된 뒤 민족교육은 조직적으로 더 한층 발전했다. 독자적인 교과서도 편찬되고 도쿄와 오사카에는 사범학교가 설립되어 교원을 길러 내는 일에도 착수했다. 1946년 10월에는 도쿄조선중급학교가 문을 연 이래 1948년 4월까지 짧은 기간에 초등학교 566곳, 중급학교 7곳, 청년학교 33곳이 설립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시작된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은 온갖 박해와 탄압에 맞선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가장 강력한 탄압은 1948년 4월에 단행된 GHQ의 조선인 학교 폐교령이었다. 동포들이 온갖 고난을 견뎌 내며 하나하나 쌓아올린 민족교육을 단 한 장의 지령으로 폐쇄하려 했고 여기에 맞서 피를 흘리며 ‘4ㆍ24 교육투쟁’(한신교육투쟁)을 벌였다. 7년간의 일본 점령 기간 내내 한 번도 공포한 적이 없는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고베의 조선인 학교를 무력으로 폐쇄하고 동포들을 모조리 잡아 가는 무차별적인 ‘조선인 사냥’이 벌어졌다.
그런가 하면 연민이 느껴지는 개인사도 솔직하게 펼쳐진다. 조선대학교 정치경제학부 교수로 있던 1973년, 졸업을 앞둔 4학년 학생들을 이끌고 해방 후 처음으로 조국을 방문한 일이다. 1945년 만주국의 한적한 마을 역에서 어머니와 이별하고 철도로 한반도를 종단하여 부산에서 관부연락선을 탄 지 28년 만의 일이었다. 만주벌판 어딘가에 묻혀 있을 아끼던 누이동생, 그 뒤 국공내전의 전화를 피해 8로군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압록강에 다다른 사연, 전쟁의 폭격과 전투에서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아우, 또 다른 누이…….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고서야 식민지와 해방, 전쟁으로 점철된 겨레의 역사를 돌고 돌아 고향에 왔다는 뒤늦은 감회에 젖는다. 어머니는 100세를 한 해 앞둔 2006년에 돌아가셨다. 100세가 되면 일본에 있는 손자나 증손자들을 모두 데리고 평양에 가서 잔치를 열자고 가족들끼리 이야기하고 있던 무렵이었다.
해방되고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재일조선인의 삶은 안착할 수가 없다. 우경화되고 있는 일본 국내의 상황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있는 조국의 현실은 이들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다. 한평생 민족교육과 재일조선인 운동에 온 몸을 바친 백발노인은 젊은 세대들에게, 당부보다는 자기 고백과 다짐으로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