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전쟁교훈여행 (2010~) (여행)/1.접경지역 DMZ 44

파주DMZ 해마루촌

파주 DMZ해마루촌 해마루촌에 가려면 우선 민통선을 넘어야 한다. 무장한 군인들이 삼엄한 경비에 휴전선이 가까이 있음을 알 수 있고, 민족분단의 아픔도 깊이 체험할 수 있다. 이곳은 민간인이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는 까닭에 사전에 마을과 반드시 협의를 가져야 한다. 마을에서 인솔자가 나오면 외부인의 출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민통선에서 마을에 이르는 진입로 주위로는 온통 수풀이고 간간히 마주치는 군차량에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다 싶었는데 눈 앞에 펼쳐지는 유럽풍의 자그마한 마을이 그저 신비롭기만 하다. 그래서 모든 집이 조립식 철제집으로 제작되어 유럽형팬션의 모양을 하고 있다. 담장이 없이 모두가 한 형제처럼 어우러져 살아가는 행정상의 마을이름인 '수복마을'을 마다하고 해가 뜨는 마을이란 뜻의 '해마루촌'이..

파주DMZ 허준묘 (동의보감 )

허준의 일생 허준선생은 조선 중기의 의관으로 1537(중종32) ~1615(광해군7) 까지 살았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청원 (淸源), 호는 구암(龜巖)이다.. 무과출신으로 용천부사를 지낸 허론(許論)의 서자로 선생은 무과에 지원하지 않고 29세인 선조7년 (1574) 의과에 급제하여 내의원(內醫院)에 들어간 후 헤민서 봉사를 거쳐 전의(典醫)로 발탁되어 왕실의 진료에 많은 공적을 세웠다. 특히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허준은 선조의 피난지인 의주까지 호종(扈從 :ㅇ항의 가마를 수행함)하여 왕의 곁을 조금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모셔 호종공신(扈從功臣)이 되었으며, 그 뒤에도 어의로서 내의원에 게속 출사하여 의료의 모든 행정에 참여하면서 왕의 건강을 돌보았다. 그러던 중 1596년에 선조의 ..

파주시

파주시 파주시는 임진강과 한강의 풍부한 수자원과 산과 수려한 자연경관 그리고 맑고 깨끗한 천혜의 자연경관을 간직한 명품도시로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에 유구한 역사와 세계적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연관된 조선의 명재상 황희, 조선의 대 유학자 율곡 이이 선생등 자랑스런 역사의 인물 또한 광범위하다. 파주시는 한국 전쟁의 상흔을 조금은 더 생생하게 경험하고 통일의 염원를 가장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임진각을 비롯란 통일 안보 평화관련 시설이 자리잡고 있는 통일의 중심도시로 해마다 많은 관광객 들리 찿아 오고 있다.

파주 마장호수와 흔들다리

파주감악산 마장호수와 흔들다리 호수의 맑은 물바람, 시원한 나무테크 산책로와 둘레길, 야생화 가득한 하늘계단에 국내 최장인 흔들다리 (길이 220m 폭1.5m 카누 카악등의 수상 레포츠시설 까지 테마형 관광 휴양시설이 새롭게 조성되어 평소 마장호수를 즐겨 찿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설레게 한다.

철원 백마고지

백마고지 전투지 1952년 10월6일 철원 서북방 395고지 [효성산 남단]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9사단은 중공군 제38군 3개 사단의 공경을 받았다. 이때부터 10월15일까지 열흘간 395고지를 사이에 두고 12차례 전투가 반복되면서 여러차례 주인이 바뀌었지만,UN군의 지원을 받은 국군 9사단은 마침내 고지를 장악 하였다. 전투 과정에서 국군 제9사단은 총 3천 4백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 하였고, 중공군도 1만 4천명이 죽거나 다치고 포로가 되었다. 극심한 공중 포격과 포격으로 민둥산이 되어버린 모습이 마치 백마에 누어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이후부터 395고지 일대를 백마고지라 부르게 되었다.

철원 백마고지 기념관

백마고지의 유래 백마고지는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 위치한 해발 395m의 야산으로 전쟁 전에는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던 무명고지에 불과했으나 전선이 고착되면서 부터 철의 삼각지 좌견부를 감제하는 중요 지형지물로 유명해진 곳이다. 명칭의 유래는 작전기간 중 포격에 의해 수목이 다 쓰러져 버리고 난 후의 형상이 누어있는 백마처럼 보였기 때문에 백마고지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설과 당시 참전했던 어느 연대의 부연대장이 외신기자의 질문에" 화이트 호스 힐" (White Horse Hill)이라고 대답하여 비롯 되었다는 설. 또 전투중 9사단을 방문 격려한바 있는 이승만 대통령이 조선시대 임경업장군이 평북 의주군에 백마산성을 쌓고 중국 오랑캐에게 저항 하였던 지명을 따라 백마산이라고 명명했다는 설이 있으나 일반..

철원 백마고지 전적비

백마고지 전적비 철원군 북방에 있는 백마고지는 6.25동란 당시 피비린네 나는 격전지였다. 1952년 10월6일 중공군으 대공세에의해 10일간이나 계속된 백마고지 전투는 약 30만발의 포탄이 이 지역에서 사용되었으며, 고지의 주인도 24번이나 바뀌었다. 이 전투에서 1만4천명의 사상자를 낸 중공군 2개 사단이 완전히 와해 되었으며, 국군 제9사단은 백마고지 전투의 대승을 계기로 백마사단이라고 명명되었다. 격렬했던 전투 끝에 남은 흙먼지와 시체가 뒤섞여 악취가 산을 뒤덮을 정도 였고, 서로의 포격에 의해 고지의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는데 마치백마가 옆으로 누워있는 형상이라하여 백마고지로 불려지게 되었다. 당시 이 백마고지 사수를 위해 용감하게 싸운 국군 제9사단 장병의 넋을 추모하기위해 이곳에 백마고지 ..

철원 미육군 공병부대 전적비

미육군 공병부대 전적비 한국전쟁당시 미 육군 공병은 최선봉에서 적과 싸우며 기동부대의 전진로와 보급로를 건설하고, 후퇴 시에는 아군의 안전한 철수를 위해 장애물을 설치하며 가장 늦게 전장을 떠나는 방패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한탄강 일대의 험준한 산악과 단애로 형성된 하천은 공병의 임무수행을 매우 어렵게 하였다.그러나 전통에 빛나는 미 공병부대는 성공적으로 모든 임무를 수행하여 공격부대 작전을 성공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대한민국국민이 미 육군공병을 잊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피와 땀으로 건설한 교량과 도로를 통해 수많은 피난민이 남에서 자유를 얻었고, 특히 전후까지 그들을 우리에게 장비와 기술을 제공하여 한국의 전후 복구와 경제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한탄강 일대의 험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