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불교의 이해 (독서)/6.한국불교미술

미술사학자와 읽는 삼국유사

동방박사님 2022. 6. 30.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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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삼국유사의 기적을 미술사적으로 읽기
신이神異하고 신이한
천오백 년 전 삼국시대 이야기!


삼국유사에 나오는 기적은 모두 허구일까? 첨단 과학 시대를 사는 현대인은 그러한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오래전 이야기가 진실인지, 허구인지 지금에 와서 엄밀히 따질 일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당시 사람들이 그러한 기적을 믿고 두 손 모아 기도하며 찬탄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다양한 기록, 유물 등을 바탕 삼아 그때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추측해보았다. 그리고 당대인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진지하게 재구성해보았다. 먼 옛날 우리처럼 지금의 우리도, 이따금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는 세상에 살고 있으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기를 바라며 살고 있다.

 

목차

서문 『삼국유사』의 기적을 미술사적으로 읽기 5

황룡사 황룡의 실제 - 왜 궁궐 건축이 사찰건축으로 바뀌었을까? 12
가섭불연좌석의 정체 - 신라 불국토 만들기의 초석 22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 - 설화에서 역사 추려내기 32
이차돈과 흥륜사 - 이차돈은 왜 순교해야만 했을까? 42
무왕과 미륵사 - 왕권의 기초가 된 익산의 황금 50
황룡사 장륙상 제작지 - 문잉림은 어디인가? 60
흥륜사의 재구성 - 『삼국유사』에 흩어진 퍼즐 맞추기 70
자장 율사가 빚어낸 진주, 진신사리 80
사천왕사와 문두루비법 - 풍랑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90
원효의 뼈로 만든 진영상 - 설총의 뜻일까 원효의 바람일까? 102
의상 대사, 신라를 불국토로 만들다(上) 112
의상 대사, 신라를 불국토로 만들다(下) 122
진정 스님과 비로사 - 의상 스님의 후계자 132
전후소장사리, 우리나라 진신사리의 근원을 찾다 140
어산불영, 만어산에 드리워진 부처님의 그림자 150
요동성에 세워진 아소카왕 불탑 - 진신사리 신앙의 확산 160
익명성의 신화화 - 천· 지· 인이 빚어낸 불상 168
삼소관음중생사, 기적을 일으키는 불상 178
황복사와 신문왕 - 신문왕릉은 어디인가? 188
유가종의 태현과 화엄종의 법해 - 신라 고승의 마법 대결 198
깨어진 석굴암 천장돌 - 신라 스토리텔링 기법의 모범 208
백월산의 미륵과 아미타 - 미완을 완결시킨 설화 218
포천산의 다섯 비구 - 대중이 목격한 합동 성불의 기적 226
진표 스님의 점찰법회 - 종교와 혹세무민의 차이 236
단군 신화 - 전설과 역사의 변증법 246
 

저자 소개 

저 : 주수완
 
미술사학자.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고고미술사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과정을 거쳐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대승설법도상의 연구」(2010)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한국미술사연구소 책임연구원,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고고미술사학과 조교수를 거쳐 현재 우석 대학교 유통통상학부 조교수로 실크로드 교류사, 예술경영, 불교경제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솔도파의 ...
 

책 속으로

사실 이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대인이 용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용은 곧 임금이나 황제를 상징하는 동물이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삼국시대에는 용을 그리 신성하게 여기지 않았다. 물론 용왕이나 용은 신비로운 동물이기는 했다. 그러나 왕을 상징하거나 혹은 신처럼 떠받들어야 하는 존재는 아니었다. 때로 용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사악한 짐승으로 출현하기도 한다. 따라서 황룡사 건설 현장에 용이 날아갔다는 사실을 신성한 사건으로만 볼 수는 없다.
--- p.16

이에 대해 재야 역사가를 중심으로 반론이 제기되었다. 「탑상」 편 ‘가섭불연좌석’ 기사에 따르면, 일연 스님이 이것을 볼 당시 황룡사에서 일어난 두 번의 화재로 연좌석이 터져 갈라졌기에 절의 스님들이 쇠로 붙잡아 고정시켜 두었다고 했다. 그러나 현재 목탑지 위의 돌은 불을 맞은 흔적도 없고 갈라진 곳도 없기 때문에 연좌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연 스님의 기록은 황룡사 목탑이 건재했을 때의 기록이다. 아마 몽골군에 의해 황룡사가 소실될 때 쇠로 엮어 둔 연좌석도 결국 두 동강 나서 완전히 분리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중 한 조각을 목탑지에 옮겨두었기에 크기도 더 작아지고 갈라진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게 아닐까.
--- p.26

『삼국유사』에서 이차돈이 법흥왕에게 “소신이 저녁에 죽더라도 다음 날 아침에 불법이 행해져서 부처님이 다시 나투신다면 왕께 서는 길이 평안하게 되실 것입니다”라고 한 말은 어쩌면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물어 국법으로 다스린다면 왕은 위기를 모면하게 될 것이므로, 이후 흥륜사를 끝까지 완공시켜 불법을 일으켜달라는 부탁의 뜻으로 해석된다. 법흥왕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겠지만 정치적 상황이 너무도 급박했으리라. 그래서 왕실을 지키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이차돈이 죄를 뒤집어쓰도록 내버려두었을 것이다. 527년 아마도 8월 5일 아침, 이차돈은 참수되었다.
--- p.48

그런데 굳이 왜 이 거찰을 늪지 위에 세웠을까? 설화에 의하면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부처님이 출현한 신성한 연못을 굳이 메울 필요는 없었을 것 같다. 어쩌면 서동과 선화공주 부부가 본 미륵삼존은 물가에 위치한 새로운 사금 산지였고, 이를 대외적으로 비밀에 부쳐 작업을 하기 위해 미륵사라는 대형 작업장이 꼭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때 진평왕도 사람을 보내 공사를 도왔다 하니 과거의 해묵은 원한도 군자금 확보를 위한 양국의 합의 앞에 잠시 사라진 순간이었던 셈이다. 백제와 신라가 겨누던 칼을 잠시 내려놓게 만든 익산의 황금, 그 실체를 익산 미륵사지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에서 엿볼 수 있다.
--- p.57

흥륜사에 대한 일연의 애정은 그밖에도 『삼국유사』 곳곳에 실려 있다. 김현金現과 호랑이 여인의 사랑을 다룬 「감통感通」 편 ‘김현감호金現感虎’ 조에는 2월 초파일부터 15일까지 흥륜사의 법당과 탑을 도는 복회福會가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며, 「탑상」 편 ‘미륵선화 미시랑 진자사彌勒仙花 未尸郎 眞慈師’ 조에는 흥륜사의 승려 진자眞慈가 법당의 주존인 미륵상 앞에 나아가 발원했다는 이야기, 또 「탑상」 편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 조에는 827년 중국에서 돌아온 고구려 출신의 승려를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이 흥륜사 앞길에 나가 맞이했다는 기록, 「기이」 편 ‘사금갑射琴匣’ 조에서는 신덕왕神德王, 재위 912~917이 흥륜사에 가서 행향行香하려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p.77

670년 침공 때는 풍랑으로 인해 당나라 수군이 바다를 건너보지도 못하고 실패했기 때문에 『삼국사기』에는 아예 기록이 안 되었을 수도 있지만, 이듬해의 침공은 『삼국유사』가 전하는 것과 달리 실제는 풍랑에 의해 당나라 수군이 아예 당도하지도 못하고 궤멸된 것은 아닌 듯하다. 물론 그렇더라도 명랑 법사의 일기예보는 적벽대전, 인천상륙작전에서 바람의 방향이나 조수 간만의 시각이 중요했던 것처럼 매우 중요한 승패의 변수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보는 당시에는 과학이 아니라 마술에 가까운 예언처럼 보였을 것이다
--- p.94

의상이 신라로 돌아온 것은 당나라에 인질 겸 대사로 가 있던 김인문이 당이 곧 신라를 공격할 것을 알아차려 의상 스님에게 이 사실을 급히 본국에 알리라는 부탁을 받고서였다. 그래서 의상이 신라로 돌아온 것이 670년이었으니, 만일 650년에 유학한 사실을 받아들이면 의상은 중국에서 20년 동안 수학한 셈이고, 661년을 인정한다면 9년간 중국에 머무른 셈이다. 그러나 의상이 중국에서 떨친 위엄을 생각해보면 9년은 다소 짧아 보인다.
--- p.114

진정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진정은 군복무를 하면서 틈틈이 품을 팔아 간신히 노모를 봉양하며 집안을 건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노모가 혼자 집에 있을 때 한 스님이 집 앞에 와 철물을 시주해달라고 권해 노모는 집에 있던 다리가 부러진 솥을 시주했다. 그나마 재산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는데 그마저 주어버린 것이다. 지금이야 다리 하나 없는 솥은 처치 곤란한 폐기물이지만, 당시에는 금속이 귀했기에 팔면 조금이라도 살림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여하간 불심이 깊은 어머니였음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진정이 집에 돌아오니 노모는 막상 자신이 아들 의견도 안 묻고 시주한 것이 염려되어 상황을 털어놓았다. 이 또한 노모의 마음 씀씀이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진정은 당연히 찬성하며 어머니의 행동을 적극 지지했다. 그러고는 무쇠솥 대신 옹기그릇에 밥을 지어 먹었다.
--- p.133

그러나 인도 설화에서는 8만 4천 개 탑이 모두 인도 안에 세워졌을 뿐 중국에까지 세웠다고는 하지 않았다. 이 수많은 탑이 세워진 곳 중에 중국이나 고구려가 포함되었다는 이야기는 물론 후대에 해당 지역 사람들이 만들어냈을 것이다. 처음에는 인도에서 약간 벗어난 곳, 그러니까 실크로드나 버마(미얀마) 등에 아소카왕이 세운 탑이 있다는 정도로 그 범위가 조금 확장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사실이었을 수도 있다. 아소카왕이 인부를 보내 직접 탑을 세우지는 않더라도 8개 탑에서 나온 진신사리 일부를 보내 탑을 세우도록 지시하거나 종용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래서 실제 버마에는 아소카왕이 불교 전파를 목적으로 파견한 승려들이 가져온 진신사리를 모셨다고 전하는 탑이 세워져 있기도 하다. 스리랑카, 버마 등은 인도와 인접한 지역이므로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 p.162

마지막에 추가된 또 하나의 이야기는 직접 관음보살이 모습을 나툰 것은 아니다. 1173년에 이 절에 머물던 점숭占崇이란 스님은 불력이 깊었지만 글을 읽을 줄 몰랐다. 그런데 이 절을 탐낸 한 승려가 점숭의 이러한 약점을 노려 친의천사?衣天使를 찾아가 점숭이 주지 자격이 없다고 모함했다. 이 친의천사가 누구인지, 어떤 직책 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불교 교단에 관한 분쟁을 처리하는 관리가 아니었나 생각되는데, 여하간 진상을 조사하러 나온 친의천사가 시험 삼아 점숭에게 의례문을 거꾸로 주며 읽어보라고 하니 점숭이 술술 읽어 내려갔다. 천의천사는 점숭이 스스로 읽을 줄 몰라 도 이 절 관음보살께서 보살펴 필요할 때 읽게 하시는구나 싶어 점숭이 계속 주석하도록 했다는 이야기다.
--- p.184

이후 신문왕릉 공사가 재개되었는지 여부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공사가 재개되었기 때문에 별말이 없었던 것이라 생각되지만, 이번 발굴에서처럼 만들다만 무덤이 나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질 수 있다. 우선 왕릉을 조성하는데 신하가 나무 한 그루 때문에 이를 방해한다는 설정 자체가 특이하다. 물론 『삼국유사』는 이것이 정공을 미워한 독룡이 일부러 그 나무에 들어가 정공이 스스로 그 나무를 사랑하게 하여 죽음에 이르게 함으로써 복수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단순히 정공의 버드나무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신문왕의 무덤을 놓고 당시 모종의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 p.196

그런데 천신이 나타나 이 돌을 완성시켜놓고 돌아갔다고 했다. ‘필조畢造’, 즉 ‘조각을 마치다’라고 표현했는데, 단순히 이 돌은 구조적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보면 마치 연꽃과 연밥을 위에서 바라본 모습을 하고 있어서 정교한 조각에 가까우므로 조각을 완성했다는 표현을 썼을 것이다. 그럼에도 기본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돌이 세 쪽으로 갈라졌던 사실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조각을 할 수 없었을 것이므로, 결국 천신은 우선 이 세 개로 갈라진 덮개돌을 붙여놓는 작업을 한 뒤에야 연꽃 모양 조각을 완성했을 것이다. 자고 일어나 보니 전날 세 개로 쪼개진 덮개돌이 서로 붙어 있었고, 조각까지 완성된 단계로 석굴암 건립에 참여한 장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상황인 셈이다.
--- p.212

이것은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미 지장보살이 계를 내려주셨는데 자신의 목표는 미륵이라며 다시 수계를 받는 것은 자칫 지장보살에게 결례가 되는 게 아닐까? 지장이 주신 계는 석사급이고, 미륵이 주셔야 박사급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그런데 ‘관동풍악발연수석기’ 조에는 숭제 법사가 처음부터 지장과 미륵보살로부터 계를 받으라고 권하는 장면이 나오고, 실제 두 보살이 함께 나타나 계를 주는 장면도 나온다. 아마도 지장보살 수계가 미륵 수계보다 급이 낮아서가 아니라 진표 스님은 그 사상적 배경에 있어 지장신앙과 미륵신앙을 아우를 어떤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 p.240
 

출판사 리뷰

『삼국유사』의 기적을 미술사적으로 읽기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 1206~1289 스님은 본문에 해당하는 첫 장의 제목을 ‘기이紀異’로 하였다. 그리고 “성인은 예악禮樂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의仁義로 가르침을 베푸는 데 있어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언뜻 일연 스님 스스로 역사 서술에 있어 객관성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 같은 역사서가 객관적인 사실만 다루고 있는 것과 차별화하여, 사실은 이 괴력난신, 즉 기이한 일을 자신의 저서 첫 머리에서부터 다루게 될 것을 두고 미리 양해를 구한 것이다. 첫 장 ‘기이’는 ‘괴이하다’는 의미의 ‘기이奇異’와 표현은 다소 다르지만, 본문에서는 이미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이神異에서 나타난 것이 어찌 괴이하다 하겠는가”라고 하여 이러한 기적적인 사실을 역사 서술에서 결코 배제할 수 없음을 역설하고 있다. 그래서 책의 제목을 ‘사史’가 아닌 ‘사事’로 붙였으리라.

공식적으로는 『삼국유사』를 영어로 표기할 때 Memorabilia of Three Kingdoms라고 한다. 『삼국사기』와 구분해 History로 하지 않은 것은 맞지만, memorabilia가 ‘기억할 만한 일’, ‘주요 기사’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을 보면 일연 스님의 원래 의도를 완전히 전해 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유사遺事’, 즉 남겨진 이야기는 어쩌면 이렇게 기이한 일이어서 『삼국사기』에 실리지 못한 이야기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차라리 신화가 된 이야기, 전설이 된 이야기라는 뜻으로 Legend of Three Kingdoms라고 하는 것이 더 쉽고 잘 어울리는 듯하다. 일연 스님은 이러한 괴이한 일 가운데 진실, 특히 불교적 진실이 담겨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신화는 흔히 허황되게 지어 낸 이야기로 간주된다. 하지만 근대 이후 신화에 담긴 관념이 고대인의 정신세계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로 각광받은 것을 생각하면, 일연 스님의 이러한 설명은 마치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나 클로드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 같은 신화 연구자의 한 문장을 보는 것처럼 현대적으로 들린다.

이 책에서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비로운 사건에 담겨 있는 진실을 현대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해보고자 했다. 즉, 그저 오래 전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라 일연 스님이 생각했던 대로 그 전설 속 에 어떤 진실이 숨겨져 있다고 보는 시각에서 접근해보고자 한 것이다. 당시 일어났던 기적 같은 일은 마치 영화 〈광대들: 풍문조작단〉(2019)에서처럼 정치적인 의도로 조작된 사건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단순한 자연현상이거나 우연에 불과한 일이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신비로운 의미를 덧붙여 해석한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실제 그러한 기적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것을 당시에, 혹은 이후에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하기는 매우 어렵다.

지금도 종종 UFO가 나타났다거나 귀신이 사진에 찍혔다거나 하는, 정상적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사건이 보도된다. 그뿐인가. 정치적 네거티브 공방을 위해서는 있던 일도 없어지고 없던 일도 있던 일이 된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이 실제 있었는가 없었는가가 아니라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소문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본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작은, 그러나 퍼져나가기 쉬운 이야기는 누군가의 당락當落을 결정하기도 하고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들며 혁명을 촉발하기도 한다.

불경이나 성서, 혹은 그리스 신화는 워낙 방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사건의 인과관계를 구체적으로 기술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저 대의만 기록할 뿐이다. 나의 아버지는 기적에 대해 평소 이렇게 설명하셨다. 시작과 끝만 있고 그 과정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것이 기적이고 마술이라고. 종교 경전이 그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는 까닭도 그래서가 아닐까? 그래서 그 축약되고 함축된 기록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어느 정도 과정을 상상할 필요가 있다. 물론 종교적인 시각에서는 합리적인 해석보다 있는 그대로를 기적으로 받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그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세상에는 인과관계로 이루어진 과학 현상이라고 할지라도 그 것을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한 기적이라고밖에 간주할 수 없는 일이 무수히 많다. 또 인간이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세상에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그저 『삼국유사』의 신비로운 이야기가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이라거나 기적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려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과거에 일어났던 어떤 사건을 역사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사건이 실제 무엇이었는가보다 그 사건을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보고자 했는가가 더 중요할 수도 있음을 말 하는 것이다. 실제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실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에, 역사는 어쩌면 실제가 아니라 그 실제가 일으킨 파장을 살펴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미술사학자로서 신비로운 사건의 흔적이 담긴 유적과 유물을 만날 때마다 그에 얽힌 전설 같은 이야기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고민에 빠진다. 학문적으로는 그런 이야기는 배제하고 시작하는 것이 옳다고 하겠지만, ‘정말 그럴까’ 하는 의문을 항상 품어왔다. 예를 들어 많은 군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파티마의 성모를 재현한 조각상을 연구하면서 그 설화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시각미술로만 다룰 수 있을까? 지금의 우리 눈에는 어설픈 컴퓨터 그래픽 효과처럼 보일지라도, 과거 작가는 당시 기적으로 인한 감동과 충격을 최대한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필자에게는 사건 자체보다 작품에 담긴 화석화된 당대인의 충격이 더 객관적으로 다가온다.

원래 미술사라는 학문이 감성을 이성으로 번안해 독자에게 제시하는 일인 지라, 신화를 역사로 번안하는 작업과도 상당히 닮아 있다. 그래서 이와 같은 글쓰기가 가능했다. 화석화된 옛 사람들의 감탄과 충격을 끄집어내어 다시 부활시키기 위해 이 책에서 필자가 펼친 상상은 때로는 주관적인 추측에 불과할 수 있다. 다만 그저 보다 합리적인 설명이 나오기 전까지 하나의 가설로 간주해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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