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한국근대사 연구 (독서)/5.동학혁명.의병

오늘과 마주한 3.1운동

동방박사님 2022. 8. 5. 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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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오늘의 나’의 눈으로 바라보고
6가지 개념으로 새롭게 구성한 3·1운동


3·1운동은 늘 거족적인 운동으로 기억되어왔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민족사적 성과, 즉 과거사로서 평가받았다. 하지만 3·1운동의 역사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서 수많은 오늘의 나를 만나게 된다. 집단이 아닌 개인 주체의 시각에서 보면, 나를 통해 과거와 현재는 이어지게 된다. 여기서 오늘의 나는 2017년 거리에서 민주주의의 봄을 맞았던 촛불시민으로서의 나이기도 하다.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100주년기획위원회 위원장과 대통령직속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기획소통분과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정인 교수는 민주주의의 눈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재해석·재구성하는 작업을 지속해오고 있다. 3·1운동은 민주주의 관점에서 근대와 현대를 나눌 만큼 획기적인 분기다. 이 책은 3·1운동을 ‘공간, 사람, 문화, 세계, 사상, 기억’이라는 6가지 개념으로 새롭게 바라본다.

민주주의적 시각에서 3·1운동의 역사를 재구성한다는 것은 곧 역사의 개인화, 역사의 현재화의 구현을 의미한다. 즉 3·1운동을 일군 사람들과 공감하고 소통하며 그 역사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2017년, 1700만의 개인을 비폭력 평화시위로 이끌어냈던 힘을 1919년 만세시위의 현장 속에서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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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문 | 3 · 1운동의 민주주의적 해석: ‘오늘의 나’의 눈으로 본 3 · 1운동

1장 공간 : 북부, 그리고 도시에서 발화하다
3 · 1운동을 잉태한 서울의 3월 1일 시위 | 3월 1일의 만세시위: 평양, 진남포, 선천, 의주, 원산, 안주 | 7개 도시 만세시위의 의미 | 만세시위의 발상지, 북부지방 | 도시가 시위를 촉발하다 | 시위가 농촌으로 번지다

2장 사람 : 스스로 나서 함께 싸우다
천도교, 주류로 부상하다 | 학생, 역사에 등장하다 | 새로운 풍경, 여학생의 만세시위 | 만세시위에 나선 노동자와 농민 | 누구든지 조직하고 참여한다

3장 문화 : 저항문화의 기원을 이루다
3 · 1운동의 발명품, 만세시위 | 지하신문, 3 · 1운동을 북돋우다 | 만세시위 확산의 수단, 등사기 | 시위의 신문화, 태극기와 애국가 | 연대의 문화가 수립되다 | 독립투사를 위한 법정투쟁이 시작되다

4장 세계 : 만세시위를 바라보는 세 개의 눈
서양 열강이 주목한 제암리 학살사건 | 5 · 4운동 발발의 자극제가 되다 | 일본의 눈에는 폭동이었다

5장 사상 : 민주주의, 평화, 비폭력을 외치다
독립선언서, 민주주의를 말하다 | 민주공화국으로 가는 길 | 민주공화국의 탄생 | 독립이 곧 평화다 | 비폭력의 저항정신이 빛나다

보론 기억 : 교과서로 익힌 상식을 짚어보다
교과서로 배운 3 · 1운동 | 3 · 1운동의 배경 | 3 · 1운동의 전개 | 3 · 1운동의 의의 | 북한은 3 · 1운동을 어떻게 생각할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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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 : 김정인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한국 근대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에서 예비 교사들에게 한국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국 근현대 민주주의 역사와 현대 대학사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독립을 꿈꾸는 민주주의』, 『오늘과 마주한 3·1운동』, 『대학과 권력』, 『역사전쟁, 과거를 해석하는 싸움』 등이 있습니다....
 

책 속으로

1987년 6월 항쟁을 대표하는 사진 중에 한 남성이 대형 태극기를 들고 도로 한가운데를 달리는 사진이 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친 사람들이라면 ‘어, 언제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궁금해한다. 6월 항쟁은 서울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사진 속 거리는 부산 시내다. 서울이 민주화운동의 중심지이기는 하나, 서울에서만 시위가 일어난 게 아니라는 사실은 종종 망각된다. 1960년 4월 19일에도 서울 경무대 앞에서만 시위가 일어난 것이 아니다. 부산, 광주, 인천, 목포, 청주 등에서도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거리로 나섰다. 이렇게 굳어진 서울 중심의 역사상은 3·1운동을 이해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1919년 3월 1일에 서울에서만 시위가 일어난 줄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서울이 3·1운동을 잉태한 곳은 맞지만, 이날 서울 말고도 6개 도시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여기에는 아픈 분단의 역사도 영향을 미쳤다.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이 6개 도시는 모두 북부지방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의 군사분계선 너머 북녘 땅에서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시위는 ‘눈에서 멀어진 만큼’ 잊히고 말았다. 6개 도시의 만세시위를 잊으면, 바로 다음 날부터 어떻게 만세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3·1운동 100주년, 분단과 함께 역사에서 지워진 공간인 북부지방의 3·1운동에 새삼 주목하게 된다. ---「1장 공간」중에서

1700만 명. 2016년 가을에 시작되어 한겨울을 거쳐 2017년 초봄까지 이어진 촛불시민혁명에 참여한 연 인원수다. 수많은 사람들이 2017년의 시작을 알리는 제야의 종소리를 추운 거리에서 촛불과 함께 맞았다. 압도적 숫자보다 놀라운 것은 성별과 세대, 계급과 계층을 넘어 너 나 할 것 없이 촛불을 들었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촛불로 가득한 광장을 자발적으로 찾아온 시민들은 생전 처음 보는 주변 사람들과 연대감을 느끼며 양보하고 배려했다. 내 주변에 온통 나처럼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로 가득하면 행복할 수 있음을 경험했다. 100년 전, 3·1운동에서도 사람들은 똑같은 경험을 했다. 식민지민으로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서로 더불어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야말로 같은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빛을 발했다. 누구나 조직하고 누구나 참여하는 자발성이 3·1운동의 전국화와 일상화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3·1운동으로 민족만 부상한 게 아니었다. 새로운 근대 주체들이 등장했다. 종교계는 3·1운동의 모의와 발발의 주역이었다. 천도교는 교단 차원에서 3·1운동에 헌신하면서 민족운동 진영 안에 주류로 자리를 잡았다. 3·1운동에서 역사상 처음 운동세력으로 등장한 학생은 만세시위의 확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만세시위에 앞장선 여학생의 모습은 시대 변화를 더욱 실감하게 했다. 노동자와 농민은 만세시위에 참여하며 운동주체로서의 위상을 자각할 수 있었다.
… 3·1운동에 함께한 경험은 두 달 넘게 이어진 만세시위로만 끝나지 않았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노동자대투쟁이 이어졌듯이, 2017년 촛불시민혁명 이후 미투(me too)운동이 일어났듯이, 3·1운동 이후에는 사회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시위대의 일원이던 학생, 청년, 여성, 노동자, 농민이 학생운동, 청년운동, 여성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의 주체로 거듭난 것이다. ---「2장 사람」중에서

평화시위라는 말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촛불시민혁명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비폭력 평화시위였다. 많게는 하루에 200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반정부운동이었지만, 폭력은 없었다. 토요일마다 전국 곳곳에서 열린 집회에 모여든 사람들의 손에는 거리에서 받은 유인물이 쥐어져 있었다. 연설과 공연으로 어우러진 집회가 끝나도 사람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촛불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거리행진을 벌였다. 100년 전 3·1운동 당시 만세시위라고 다르지 않았다. 만세시위 주동자들은 사람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었다. 시위대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연설을 듣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순서가 끝나면 대형 깃발을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며 거리행진에 나섰다.
3·1운동 이래 저항 시위는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저항 시위에서 특정한 지도자나 단체가 부각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3·1운동에서 강자인 제국주의에 맞서는 약자에게 연대는 절박한 문제였다. 그렇게 종교 연대, 종교와 학생 연대가 빛을 발한 3·1운동의 연대문화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 재판에서 벌어진 법정투쟁도 운동가와 변호사가 함께 싸우는 일종의 연대투쟁이었다. 이 저항문화의 기원에 3·1운동이 자리하고 있다. ---「3장 문화」중에서

세계화의 시대다. 세계인이 함께 유튜브를 보며 공감하고 소통하는 보편의 시대다. 지금 세계인은 4·19, 6월 항쟁, 촛불시민혁명으로 이어지는, 일본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이후 세 번의 시민혁명에 성공한 한국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민주주의가 퇴조하고 극우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는 유럽에서 지식인들은 한국 민주주의의 역동성에 찬사를 보낸다. 100년 전, 3·1운동 당시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때 세계는 제국주의와 식민지로 분할되어 있었다.
3·1운동 당시 만세시위 한복판에 있던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느꼈을 것이다. ‘아, 일본의 폭압적 독재하에 숨죽이고 있던 우리 모두는 자유와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하나의 민족이었구나!’ 그렇게 한국인을 감동시킨 3·1운동을 과연 타자인 외국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세계가 모두 한국인의 독립투쟁에 감동하며 지지를 보냈을까. 세계가 제국주의와 식민지로 분할되어 있는 이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 영국 등 서양 열강은 한국인의 독립투쟁보다는 제국주의 지배하의 식민지에서 일어난 반란이라는 시각으로 3·1운동을 바라봤다. 3·1운동을 한국인의 독립투쟁으로 높이 평가한 것은 제국주의에 신음하는 식민지, 그리고 식민지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민족이요 나라들이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3·1운동을 다르게 읽었던 것이다. ---「4장 세계」중에서

평화가 시대의 화두로 떠올랐다.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을 때, 한국인들은 삼팔선이 군사분계선으로 바뀌었을 뿐, 분단을 해결하지 못한 것에 대해 울분을 토했고 또한 불안해했다. 그 심리를 스스로 ‘휴전평화’라 불렀다. 이제 분단과 그로 인한 갈등이 해소되어 휴전평화를 끝내고 진정한 평화의 시대를 맞을 수 있을까. 100년 전에는 3·1운동이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한국의 독립이 없이는 동양평화도 세계평화도 없다.’ 독립된 세상이 되어야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절박한 호소는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가 찾아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과 맞닿아 있다.
오늘의 평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민주주의다. 대통령 탄핵과 정권 교체를 이뤄낸 촛불시민혁명이 평화시대의 초석을 놓았다. 비폭력 평화시위, 즉 촛불시위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 조문을 노래하며 ‘이게 나라냐’라고 물었다. 이 헌법 제1조 조항은 1919년에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3·1운동은 일본을 민주주의의 적이라 규정했고, 민주주의 논리로 자주독립과 인류평등을 주장했으며, 이를 위한 민주공화국을 탄생시켰다. 나아가 3·1운동은 세계를 향해 한국 독립이 민주주의와 평화를 이루는 길이라 주장했다. ---「5장 사상」중에서

누구나 학교를 다니는 시대에 교과서는 상식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지금 고등학생들은 5천 년의 긴 역사를 400쪽에 압축해놓은 한국사 교과서를 배우고 있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반복적으로 배운 역사이기도 하다. 이때 수학능력시험 공부를 위해 암기한 역사가 역사학을 전공하지 않는 한 평생의 역사 상식이 되기 마련이다. … 3·1운동은 한국사에서 손에 꼽는 중요한 사건으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반복적으로 배운다. 고등학교에서 가장 깊고 넓게 배우는데, 그것이 3·1운동의 상식을 형성한다.
…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오늘날 고등학교 교과서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3·1운동의 기억은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교과서로 배운 3·1운동의 상식 전부가 애초부터 교과서에 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3·1운동은 일본의 지배를 받던 1919년에 일어났다. 대사건이었지만, 조선총독부가 학교에서 가르칠 리가 없었다. 1945년 해방은 곧 학교에서 3·1운동을 배우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실제로 해방 직후에 등장한 한국사 관련 교과서에는 빠짐없이 3·1운동이 들어갔다. 하지만 오늘날 교과서에 등장하는 3·1운동의 기억이 그때 모두 형성된 것은 아니다.
---「보론 기억」중에서
 

출판사 리뷰

지금 우리에게 3·1운동은 어떤 의미인가, 어떤 의미여야 하는가

2019년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학계, 문화계, 정치계를 망라하여 이를 기념하려는 움직임으로 분주하고,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도 전에 없이 뜨겁다. 그 추앙의 열기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고귀한 희생’이라는 가치와 조우하게 된다. 독립운동가의 고귀한 희생 위에 오늘의 우리가 있음을 감사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는 곧 나와 관계없는 먼 과거의 일로 3·1운동을 치부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3·1운동은 늘 거족적인 운동으로 기억되어왔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민족사적 성과, 즉 과거사로서 평가받았다. ‘100년 전에 일어난 위대한 역사’인 것이다. 이처럼 자신이 속한 집단이 해석하고 재현한 역사를 관습적으로 자신의 역사로 동일시하게 되면, 과거는 나와 상관없는 객체로 전락하기 쉽다. 그렇기에 더욱 중요한 것은 3·1운동을 ‘어떻게’ 기릴지에 대한 고민과 무엇을 계승해 미래로 나아갈지 모색하는 것이 아닐까? 마침 우리는 100주년의 직전에 3·1운동을 재현했다. 2016년 늦가을부터 2017년 봄에 걸친 평화시위로 정권 교체를 이루어낸 촛불혁명이 그것이다. 1919년 봄 만세시위에 참여한 평범한 누군가와 2010년대 후반의 ‘오늘의 나’는 어떻게 이어져 있을까? 이러한 관점으로 3·1운동을 재해석, 재구성한 것이 바로 이 책 김정인 교수의 『오늘과 마주한 3·1운동』이다.

3·1운동 100주년으로 주목받는 역사학자, 김정인 교수

저자 김정인 교수는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가장 바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역사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한국 근대사를 전공했고, 2004년부터 춘천교대에서 사회과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현재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100주년기획위원회 위원장과 대통령직속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기획소통분과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뿐 아니라 방송국과 신문사 들이 준비하는 3·1운동 특집 프로그램 관련 자문을 두루 맡았으며, 2019년에 들어서는 각종 언론 매체로부터 인터뷰와 대담 요청을 받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를 전공한 역사학자가 비단 그만은 아닐진대, 왜 김정인 교수가 이토록 주목받는 걸까? 그 가장 큰 까닭은 그의 새로운 관점에 있다. 바로 ‘민주주의’의 눈으로 한국 근현대사와 독립운동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집합적 주체인 ‘민족’의 눈으로 한국 근대사가 재구성되었고, 침략과 저항의 이분법적 구도로 한국 근대 역사상이 수립되어왔다. 하지만 김정인 교수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경험한 세대로서, 19세기 이래 한국사에서 진보와 변화를 이루려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이상이 자유와 평등, 즉 민주주의였음을 발견했다. “민주주의는 시대에 따라 사회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피어나고 발전하는 역사적인 존재다.” 해방 직후에 나온 잡지 『민주주의』에 실린 '민주주의에 대하여'라는 글에 나오는 문구다.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아직 한국 근대사 연구에서 민주주의는 역사적 존재로 온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특히 2017년의 촛불혁명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은 분위기 속에서 맞게 된 3·1운동의 100주년에 김정인 교수가 중차대한 역할을 맡고 크게 관심을 받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민주주의의 눈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재구성하다

저자는 이처럼 민주주의적 시각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재해석, 재구성하여 19세기부터 3·1운동과 민주공화정의 탄생까지는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2015)에, 3·1운동 이후부터 해방 직후까지의 독립운동사는 『독립을 꿈꾸는 민주주의』(2017)에 담아 출간했다. 특히 『독립을 꿈꾸는 민주주의』는 그해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콘텐츠에 선정되었고,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의 ‘국경을 넘는 어린이·청소년 역사책’ 청소년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두 책을 가르는 3·1운동은 민주주의 관점에서 근대와 현대를 나눌 만큼 획기적인 분기다. 1801년 공노비해방으로 시작되는 민주주의 역사의 도도한 흐름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시대라는 도약기를 거쳐 1919년 민주공화정의 탄생을 낳았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을 포함한 한국인 사회는 민주주의를 실현하며 독립의 꿈을 키워왔고, 그것은 해방 직후 새로운 독립국가 건설을 꿈꾸는 다채로운 민주주의론들로 꽃을 피웠다. 저자는 두 책을 쓰면서 새삼 3·1운동이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 깨달았고, 그 속에서 수많은 오늘의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민주주의적 시각에서 3·1운동의 역사를 재구성한다는 것은 곧 역사의 개인화, 역사의 현재화의 구현을 의미한다. 즉 3·1운동을 일군 사람들과 공감하고 소통하며 3·1운동이라는 역사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저자는 이러한 역사의 현재화와 개인화의 경험을 나누고자 이번 책을 썼다.

책의 내용

『오늘과 마주한 3·1운동』은 ‘공간, 사람, 문화, 세계, 사상, 기억’이라는 여섯 가지 개념을 화두로 3·1운동을 새로이 바라본다. 특히 각 장 서두에서 2017년의 촛불혁명을 중심으로 100년을 사이에 둔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만나고 이어지는가를 밝혀, 독자들이 3·1운동의 현재적 의미와 의의를 성찰할 수 있게 했다.

1장 공간
북부지방이 3·1운동의 전국화를 이끌었고, 이때부터 농촌이 아닌 도시가 시위를 촉발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는 데 주목한다. 서울이 3·1운동을 잉태한 곳은 맞지만, 이날 서울 말고도 6개 도시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여기에는 아픈 분단의 역사도 영향을 미쳤다.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이 6개 도시는 모두 북부지방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의 군사분계선 너머 북녘 땅에서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시위는 눈에서 멀어진 만큼 잊히고 말았다. 하지만 6개 도시의 만세시위를 잊으면, 바로 다음 날부터 어떻게 만세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2장 사람
3·1운동을 통해 천도교가 한국인 사회 주류로 부상하고 학생과 여성, 노동자와 농민이 저항주체로 탄생했다는 사실과 말 그대로 ‘누구나’ 만세시위를 이끌고 참여하면서 3·1운동이 전국화·일상화되었다는 점을 다룬다. 3·1운동에 함께한 경험은 두 달 넘게 이어진 만세시위로만 끝나지 않았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노동자대투쟁이 이어졌듯이, 2017년 촛불시민혁명 이후 미투(me too)운동이 일어났듯이, 3·1운동 이후에는 사회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시위대의 일원이던 학생, 청년, 여성, 노동자, 농민이 학생운동, 청년운동, 여성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의 주체로 거듭난 것이다.
3장 문화
오늘날 저항문화의 기원인 비폭력 평화시위로서의 만세시위, 다양한 인쇄매체와 태극기와 애국가의 등장을 살펴보고, 한국인만의 독특한 연대문화와 인권 변론을 통한 법정투쟁도 3·1운동에서 본격화되었다는 점을 다룬다. 3·1운동 이래 저항 시위는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저항 시위에서 특정한 지도자나 단체가 부각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3·1운동에서 강자인 제국주의에 맞서는 약자에게 연대는 절박한 문제였다. 그렇게 종교 연대, 종교와 학생 연대가 빛을 발한 3·1운동의 연대문화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4장 세계
3·1운동에 전 세계가 열광한 것이 아니며, 각자 제국주의, 반(半)식민지 등의 처지에 따라 다르게 보았다는 점을 서양, 중국, 일본의 사례를 통해 살펴본다. 미국, 영국 등 서양 열강은 한국인의 독립투쟁보다는 제국주의 지배하의 식민지에서 일어난 반란이라는 시각으로 3·1운동을 바라봤다. 3·1운동을 한국인의 독립투쟁으로 높이 평가한 것은 제국주의에 신음하는 식민지, 그리고 식민지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민족이요 나라들이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3·1운동을 다르게 읽었던 것이다.
5장 사상
3·1운동이 지향했던 민주주의, 평화, 비폭력주의에 대해 다룬다. 100년 전 3·1운동이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한국의 독립 없이는 동양평화도 세계평화도 없다.’ 독립된 세상이 되어야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절박한 호소는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가 찾아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과 맞닿아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조항은 1919년에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3·1운동은 일본을 민주주의의 적이라 규정했고, 민주주의 논리로 자주독립과 인류평등을 주장했으며, 이를 위한 민주공화국을 탄생시켰다.
보론 기억
3·1운동의 역사상이 ‘거족적인 항일투쟁’으로 고정화되어가는 과정을 살핀다. 가장 좋은 분석 대상은 교과서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학생들은 한국사를 배운다. 역사학을 전공하지 않는 한, 수학능력시험 공부를 위해 암기한 역사가 평생의 역사 상식이 되기 마련이다. 3·1운동은 한국사에서 손에 꼽는 중요한 사건으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반복적으로 배운다. 고등학교에서 가장 깊고 넓게 배우는데, 그것이 3·1운동의 상식을 형성한다. 교과서에서 어떻게 3·1운동에 관한 상식을 만들어왔는지를 해방 직후부터 오늘날까지 추적한다.

1919년 만세시위의 현장에서 발견하는 ‘오늘의 나’
중국의 5·4운동을 주도한 베이징대학 학생 푸쓰녠은 3·1운동에 대해 ‘비폭력혁명으로서 정의의 결정체’이며,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도 실천한 혁명으로 반드시 배워야 하는 정신’이라고 썼다(책 168쪽 참조). 이것이 곧 1919년과 2017년의 저항시위를 관통하는 평가가 아닐까. 나아가 이러한 불가능을 넘어선 능동적 힘의 근저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100년의 세월 동안 민족의 잣대로 해석되어왔던 3·1운동을 오늘의 ‘나’,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가치로 다르게 볼 기회를 갖고, 1700만의 개인을 비폭력 평화시위로 이끌어냈던 힘을 1919년 만세시위의 현장 속에서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