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한국역사의 이해 (독서)/4.한국학연구

한국의 기원을 찿아서 (한국사의 진실)

동방박사님 2022. 9. 18.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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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역사는 한 나라, 한 민족이 살아오면서 획득한 인적, 물적, 정신적 기록의 총합이다. 역사의식이 없는 국가와 민족은 존재 근거를 상실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역사적 정체성은 그만큼 중요하다. 우리가 한민족으로서의 역사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어야 남·북한과 간도로 3분된 한민족 통합도 가능하다. 선진국 대한민국은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우크라이나와 중앙아시아 등 외국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 역사는 우리 민족의 생존에 필요한 정신적 공간(Spiritual Lebensraum)이다.

한 민족이 생존해 나가기 위해서는 물리적 공간뿐 아니라, 역사적 공간 확보도 필요하다. 역사의식을 갖고 있어야 나라를 유지할 수 있고, 발전해 나갈 수 있다. 수많은 소수민족 역사가 보여주는 것처럼 언어말살(Linguicide)과 함께 역사말살(Historicide)을 당하면, 민족 자체가 없어진다. 세계정세가 근본적으로 바뀔 때 한반도 통일은 물론, 한민족의 역사적 공간을 재통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어야 북만주의 ‘사슴이 뛰어 노는’ 눈 덮인 자작나무 숲과 하천에서 탄생한 해모수의 ‘부여의 꿈’, 추모의 ‘고구려의 꿈’을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민족 이동과 전쟁을 중심으로 관찰하여, 핵심사건 20개를 전후맥락에 따라 기술하는 방식으로 우리 역사 흐름을 설명했다. 우리 역사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친 중국사, 몽골사, 중앙아시아사, 일본사도 활용했다. 특히 오늘을 사는 독자들이 역사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시대 역순으로 편집됐다. 이 책을 통해 민족 이동과 전쟁사를 살펴봄으로써 한국과 한민족의 기원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목차

01 중국 국·공 내전과 한반도 분단 14
02 조선의 식민지화를 결정한 러·일 전쟁 28
03 동학농민봉기와 청·일 전쟁 40
04 간도와 서압록강(비류수·파저강, 혼강) 일대 상실 52
05 병자호란과 만절필동(萬折必東) 64
06 인조반정과 조선의 굴욕 76
07 백운동 서원 건립과 임진왜란 88
08 몽골의 베이징 포위와 길 잃은 조선 100
09 조선의 북진, 함경도 독립전쟁 112
10 성리학 도입과 조선 건국 122
11 몽골 울루스(제국)의 일부가 된 고려 136
12 동아시아의 균형자(Balancer), 고려 144
13 후삼국 통일의 길을 닦은 김궁예(金弓裔) 156
14 후고려(발해), 헤이룽장(아무르강) 이북 진출 166
15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 선혈로 물든 백강(白江) 하구 178
16 제국(帝國)으로 가는 길을 잃은 고구려 190
17 흉노 왕자 김일제(金日?)의 후손, 경주 진입 204
18 기마(騎馬) 북방계 민족의 농경(農耕) 야요이인(彌生人) 축출 218
19 단군조선과 위만조선 230
20 동아시아의 게르만, 부여족(扶餘族)의 남하 244
 

저자 소개 

저 : 백범흠 (白範欽)
 
1962년 12월(陰曆), 경북 예천생 주요 이력 2021.9 한·중·일 협력사무국 사무차장 2021.8 연세대학교 겸임교수 2019.2 강원도 국제관계대사(1급) 2016.4 주(駐)프랑크푸르트총영사(1급) 2014.4 중국청년정치대학 겸임교수 2014.1 주(駐)다롄영사사무소장 2012.12 주(駐)중국대사관 총영사 2008.8 외교부 통상정책총괄과장 2006.8 주(駐)제네바국제기구대표...
 

책 속으로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 체결로부터 127년이 지난 오늘, 과거의 위세(威勢)를 회복한 중국(왕이 외교부장)은 2022년 8월 9일 칭다오에서 개최된 한·중 외교장관(박진-왕이)회담에서 「한국이 독립자주노선을 견지할 것」을 요구했다. 127년 전 전승국 일본이 패전국 청나라에게 요구했던 것과 판박이다. 한국을 속방화(屬邦化)하는데 필요하니 미국과의 관계를 정리하라는 뜻이다. 우리 지도자들은 왕이가 내뱉은 말의 함의를 제대로 해석은 했을까?
--- p.29

후금군은 명군을 분산·고립시킨 후 각개 격파했다. 조선군은 9000여 명이 사상당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지만, 나머지는 강홍립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후금군에 항복했다. 당시 집권 성리학 사대부들이 융통성을 갖고, 국제정세 변화를 제대로 읽는 사람들이었다면, 조선은 명나라가 아닌 후금과 동맹하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 조선은 후금과 함께 무능한 군주들의 악정(惡政) 하에 가뭄과 전염병 등 재해와 내란으로 쓰러져 가던 명나라를 선제공격했을 것이다. 청과 명의 의도를 정확하게 읽었더라면, 청·명 전쟁의 희생양이 되는 것만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 p.82

정권을 획득한 신진사대부들은 소중화주의의 관점에서 조선을 오랑캐 몽골, 여진, 왜 등과는 다른, 즉 한족의 명(明)과 비슷한 나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화이론(華夷論)’과 ‘소중화주의’는 조선 중기이후 교조화, 종교화되었다. 중화 숭앙을 고수한 성리학자들의 숭앙대상은 명(明)에서 19세기 말 이후 개화에 성공한 일본으로 바뀌었다. 1945년 광복 후 숭앙 대상은 한국에서는 미국 등 서구, 북한에서는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으로 바뀌었다.
--- p.132

고구려는 중국 내전에 개입함으로써, 고구려와 중국 몽골고원 유목국가 간 정족지세(鼎足之勢)의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을 만들어 냈어야 했다. 당이 부흥한 이후의 천리장성 구축과 642년 10월 연개소문의 반란에 이은 영류왕 시해는 버스 지나간 뒤 손 흔드는 격이었다. 압록강 유역 산악지대 국내성에서 평야지대 평양으로 수도를 이전한 후 한족이 이식한 낙랑문화의 안락함에 젖어 야성을 잃어가던 고구려는 중국 내전 동향을 수수방관하다가 선비족 국가 당(唐)의 소모전에 놀아났다.
--- p.179

다수 사학자들은 『송서(宋書)』 백제전과 『자치통감』 등 중국 역사서에 명백히 나와 있는 ‘백제의 랴오시 진출’을 부정한다. 310년대 초 산시성에 거주하던 남흉노 유연, 유요와 갈족 석륵의 사마씨 서진(西晉) 침공 이후 탁발선비 북위(北魏)가 439년 화베이 전체를 통일하기까지 랴오시를 포함한 중국 대부분은 정치·군사·사회적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이 시기를 기록한 중국 사서가 부여울과 부여암, 부여숭 부자(餘嵩과 餘崇) 등 ‘부여(扶餘)’ 또는 ‘여(餘)’씨 인물 다수가 화베이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뿌리를 가진 부여인과 연합한 백제의 랴오시 진출을 긍정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 p.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