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한국역사의 이해 (책소개)/3.고려시대사

고려의 가을 (김영수) - 여말선초의 인물과 사상

동방박사님 2022. 12. 3.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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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책은 여말선초 정치가들의 사상과 실천을 다루고 있다. 14세기 말은 한국 역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대 중 하나로서,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다. 이 책이 소개하고 있는 공민왕, 이제현, 이곡, 이색, 신돈, 우왕, 이인임, 최영, 정몽주, 태조 이성계, 태종 이방원, 정도전, 조준, 신덕왕후, 이지란, 조영규, 조영무 등은 이 격동기를 살다간 사람들이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나뉘어 있다. 1부는 14세기 중엽을 전후한 고려왕조의 개혁자들로서 공민왕, 이제현, 이곡, 이색, 그리고 신돈을 살펴보았다. 2부는 공민왕대의 개혁이 실패한 뒤 반동의 시대를 살아간 정치가로서 우왕, 이인임, 최영, 정몽주를 살펴보았다. 3부는 고려왕조를 포기하고 조선건국의 역성혁명에 헌신한 이성계, 이방원, 정도전, 조준, 신덕왕후 강씨, 그리고 조영규 등 정몽주의 암살자들을 살펴보았다.

목차

들어가며 4

1부 고려의 개혁

1장 공민왕 ·16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7
친정(親政), 소통의 정치 ·19
반원정책과 독립 ·28
부서진 희망 ·32
공민왕은 왜 실패했나 ·38

2장 이제현 ·46
고려의 마르코 폴로 ·47
나의 사랑 충선왕 ·62
11개조의 개혁상소, 그리고 성리학 ·84
홍건적과 왜구의 시대 ·100
새로운 희망의 종언 ·106
이제현의 역사학 ·121

3장 이곡 ·128
팍스 몽골리카의 경계인(marginal man) ·129
금의환향 ·138
고려판 정신대, 공녀제 폐지 상소 ·147
네모난 벽옥, 그래서 외로운 ·162
바람에 실려간 한반도 최초의 노마드 ·172

4장 이색 ·178
한국 성리학의 아버지, 유종(儒宗) 이색 ·179
청년 이색의 6개조 개혁 상소 ·187
역사와 정치에 대한 침묵 ·199

5장 신돈 ·206
적과 친구가 갈리는 인물 ·207
집권 ·217
공민왕의 포로 ·225
고려적 대안의 종말 ·234

2부 고려의 쇠망

6장 우왕 ·242
환경과 운명의 희생양 ·243
철저한 패배 ·249
허수아비에서 광인으로 ·261
체화된 운명 ·268

7장 이인임 ·278
고려의 앙시앙 레짐 ·279
천재, 신념보다 환경에 따르는 ·287
개혁의 가장 높은 벽 ·297
폭정의 시대 ·304

8장 최영 ·312
고려의 자베르 ·313
충절의 화신, 빗나간 좌표 ·321

9장 정몽주 ·332
조선의 정신적 건국자 ·333
전쟁 영웅의 처형과 불행한 의식(unhappy consciousness) ·340
역사와 진리의 분열에 대한 의문 ·348
한국 성리학의 초기 리더 ·356
르네상스적 인간 ·364
위대한 죽음, 춘추적 인간의 탄생 ·370

3부 조선의 건국

10장 이성계 ·380
이성계 가문의 엑소더스와 귀환 ·381
눈부신 군공 ·388
황산대첩, 구국의 영웅으로 ·396
역성혁명의 꿈, 『대학연의』 ·407
정도전과의 만남, 무장에서 정치가로 ·416
왕과 휴브리스, 그리고 불행 ·422

11장 이방원 ·428
정몽주 암살 ·429
아버지 이성계에게 버림 받다 ·461
1차 왕자의 난, 아버지와의 투쟁 ·474
육조직계제, 왕권의 강화 ·479
사병 해체 ·488
토끼를 잡으면 사냥개는 삶는다 ·499
태종우(太宗雨), 정치를 위한 변명 ·508

12장 정도전 ·516
조선의 영혼을 바꾸고 싶다 ·517
10년간의 절망과 유랑 ·531
역성혁명의 결의 ·539

13장 조준 ·556
제갈량을 흠모한 호걸과 경세가 ·557
최영 아닌 이성계를 선택하다 ·563

14장 신덕왕후 강씨 ·574
곡산 강씨의 흥망성쇠 ·575
이성계의 정치적 동지, 제2인자 ·598

15장 이지란 ·610
이성계의 분신, 여진족 대추장 ·611
천하라는 사슴을 다툰 의형제 ·616

16장 정몽주의 암살자들 ·622
조영규, 감히 명령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623
조영무, 이방원의 남자 ·628
고여, 이성계의 영원한 호위무사 ·637

결론 ·642
참고문헌 ·663
찾아보기 ·671
 

저자 소개 

저 : 김영수
 
현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이다. 1997년 서울대학교에서 「고려말과 조선조 건국기의 정치적 위기와 극복과정에 관한 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통령실 연설기록비서관,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영남대학교 정치행정대학 학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 『건국의 정치: 여말선초, 혁명과 문명전환』(이학사, 2006)은 한국정치학회 학술상(2006), 제32회 월봉저작상(2007)을 ...
 

책 속으로

역사는 행복이 자라는 대지가 아니다. 역사 속에서 행복한 시기는 빈 페이지이다. 불행한 시기에 역사는 오히려 창조의 에너지로 충만하다. 한국 역사에서 가장 큰 변화가 몰아닥친 14세기 말과 19세기 말도 그랬다. 그 변화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역사가 바뀌었다. 14세기 말은 변혁에 성공하여 조선이 건국되었다. 19세기 말은 실패하여 나라가 망했다. 어떤 경우에도 변혁을 위한 에너지는 심대했다.

이 변혁에 의해, 14세기에는 한국의 전통적 정체성이 탄생했다. 19세기에는 근대적 정체성을 향한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공민왕대 이후 40여 년 동안 고려는 부단한 전쟁과 기근, 폭정을 겪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매우 창조적인 시대였다. 고려말의 구세주의적 지식인들은 국가의 타락과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고난을 슬퍼했다. 이 위기를 극복할 대안으로, 이들은 성리학을 받아들여 변혁 운동에 헌신했다. 그 결과 1392년 조선이 건국되었다.
--- p.4

고려말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뛰어난 자질과 원대한 이상을 갖고 쓰러져 가는 나라와 백성을 구하고자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나라와 백성은 물론이고 그 자신조차 구하지 못했다. 운명의 여신이 그를 버렸고, 삶은 비극으로 끝났다. 몽골 왕비 노국공주와의 순애보적 사랑은 그 한 사례이다. 공민왕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그녀는 그토록 원하던 아들을 낳다 세상을 떠났다. 그 뒤 공민왕의 영혼은 죽었다.

뛰어난 화가였던 공민왕은 손수 그녀의 초상을 그려놓고, “밤낮으로 식사를 대할 때면 슬피 울며, 3년 동안 고기반찬을 들지 않았다. 벼슬에 임명받거나 사신으로 나가는 신하들은 모두 능에 가서 궁중에서 예를 행하는 것과 같이 하게 하였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산 사람처럼 대한 것이다. 지극한 사랑은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되었다. 죽어서도 그는 노국공주 옆에 묻혔다. 노국공주의 정릉과 나란히 선 공민왕릉은 고려의 유일한 쌍릉이다. 가슴 뭉클한 이야기다.

하지만 공민 왕의 실패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지고한 사랑은 결과적으로 국가와 백성의 안위를 위태롭게 했다. 국가와 정치를 담당하기에는 그는 너무 인간적이었다. 국가와 정치의 최고 목적은 인간을 위한 것이지만, 그 목적을 위해 때로는 인간을 넘어서야 한다. 그런 사례는 역사에 숱하다. 사실 공민왕은 왕건과 더불어 고려가 낳은 가장 걸출한 왕 중 하나였다. 한 시대를 넘어 고려왕조의 마지막 희망이 그의 어깨에 지워져 있었다. 시대도 그러했고, 지위도 그러했고, 능력도 그러했다. 하지만 공민왕은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 p.17-18

조선건국의 관점에서 볼 때, 이색의 역할과 의미는 양면적이다. 조선은 그의 사상에서 배태되었으나, 그 자신은 조선건국에 반 대하는 정치세력의 정신적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조선은 세 개의 큰 변동 속에서 탄생했다. 첫째는 대륙에서의 원명교체, 둘째는 전제개혁, 셋째는 유불(儒佛) 사상교체이다. 이중 이색이 가장 크게 기여한 부분은 유불교체이다.

이색을 통해 성리학이 비로소 고려의 정치와 역사의 전면에 부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배출된 인물들이 조선건국의 주역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전제개혁에 반대했다. 원명교체에 따른 대외정책 변경에도 소극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색의 종국적인 정치 행로는 자신의 정신적 산물과 대결하는 것이었다. 정신과 세계가 분열된 것이다. 정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세계의 변화가 더 컸다. 이색의 개인적 삶이 불행해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 p.182-183

최영(崔瑩, 1316-1388)은 어떤 의미에서 고려말의 자베르였다. 옳은 길에 온 삶을 바쳤는데, 생의 마지막에 무언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역설적이고 비극적인 삶이다. 『레 미제라블』의 자베르 경감이 그렇다. 그는 범죄자의 아들로 감옥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법 은 밤하늘의 별 같은 것”이란 신념을 가지고 법의 수호신이 되었다. “밤하늘의 별은 조용하지만 흔들리지 않는다. 그 별을 보고 사람들은 좌표로 삼는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가면 별은 항상 정해진 그 자리에 서 있다.” 확실히 그런 사람이 없으면 사회는 정글일 것이다. 법은 인간다움의 조건이다.

그런데 법이란 무엇인가? 자베르는 이 질문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장발장 때문에 자베르는 이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그를 파괴했다. 그는 발밑 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고, 다리에서 몸을 던졌다. 역설이란 하나의 가치를 다른 가치로부터 보는 것이고, 그로부터 생겨나는 깊은 크레바스이다. 그 깊이가 비극의 깊이이다. 최영은 자베르와 달리 자신의 삶에 내포된 역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가치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죽었다. 비극적 죽음이었지만, 정신적으로 비극적이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부조리 가 아닌 순교로 이해했다. 그런 견결함이 최영을 역사의 충신으로 만들었지만, 그런 둔감성이 그 삶의 비극성을 잉태한 것이다.
--- p.313-314

이 제문은 정몽주 자신의 정신적 운명에 대한 예언이다. 그 역시 정치 속에서 그의 정신을 완성하고자 했으므로, 그것은 또한 그의 정치적 운명이기도 하다. 그도 본질적으로 김득배와 같은 죽음을 맞이했다. 정치적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정략의 희생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득배와 달리 그는 자신의 죽음에 내포된 이념적 의미를 자각하고 있었다. 정몽주의 죽음은 조선인의 영혼을 울렸고, 단순한 정치적 사건을 넘어 정신적 사건이 되었다. 정몽주는 세계와 인간의 크레바스를 죽음을 통해 연결시켰다. 이것이 성리학의 이념이 세계와 정치 속에 존재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정몽주의 죽음은 순교가 되었다.

이성계와 정도전이 조선을 세웠지만, 조선의 정신적 탄생은 근본적으로 정몽주의 죽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송시열은 정몽주가 “조선 문명의 창성을 열어놓아서 우리 동방 사람으로 하여금 망극한 은혜를 받게 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죽음이 기독교의 탄생에서 가진 의미와 본질적으로 같다. 플라톤은 이 세계에서 정신이 실현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대개 불교처럼 산중(山中)이나 혹은 예수처럼 십자가 위에서만 실현되는 것이다. 정몽주의 절규는 세계 속에 나타난 정신의 고통을 상징하고 있다. 세계는 정신이 살기에 험난한 곳이다.
--- p.353-354

건국 후 이성계가 겪은 불행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정신적 안식처인 신덕왕후 강씨가 먼저 세상을 하직했다. 제1차 왕자의 난으 로 아들 방번과 방석, 사위 이제, 고굉(股肱)의 신하 정도전, 남은이 피살되었다. 조온, 조영무, 이무, 조준 등 이성계의 은혜를 입은 오랜 신하들도 모두 이방원 편으로 돌아섰다. 재위 7년만인 1398년 그는 왕위에서 내려왔다. 사실상 이방원에 의해 폐위당한 것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아들과 신하, 왕위 모든 것을 잃었다.

1399년 이성계는 과부가 된 경순공주를 비구니가 되게 하였다. 머리를 깍을 때 그녀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이성계 자신도 불교에 깊이 귀의했다. 하지만 슬픔과 분노는 사라지지 않았다. 일찍이 노승 신강(信剛)에게 “방번과 방석이 다 죽었다. 내가 비록 잊고자 하나 잊을 수가 없구나!”라며 비통해했다. 언젠가 정종과 이방원이 베푼 잔치에서 “밝은 달은 발에 가득한데 나 홀로 서 있네. 산하는 의구한데 사람은 어디 있는가?”라는 시를 지은 뒤 “나의 이 글귀에는 깊은 뜻이 있다”고 말했다. 깊은 고독과 외로움 속에 홀로 울고 있었던 것이다.
--- p.425-426

모든 국가의 탄생에서 볼 수 있듯이, 새로운 국가는 정통성, 제도, 관습을 결여하고 있다. 그러한 상황하의 질서는 일차적으로 폭력을 수반하는 강력한 권력과 강인한 정치적 인격에 의해 수립된다. 이 때문에 마키아벨리는 심지어 “어떤 악덕을 행사하지 않으면 자기 나라를 구제하기 힘든 경우에는 그 악덕에 대해 비난받는 것을 너무 우려해서는 안 된다”는 극단적인 충고까지 하고 있다. 이러한 충고는 인간적으로 권장될만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정치가의 잔인성이 오직 인간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마키아벨리가 묘사하고 있는 건국자의 과업은 ‘인간성’(humanity) 의 가장 가혹한 시련으로 보인다. 악 속에서 인간성을 지킬 수 있는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가는 정치의 필요성 때문에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모든 존재가 되도록 요구받는다. 그는 필요에 따라 신이 되거나, 또는 인간이 되어야 하며, 또는 야수가 되어야 한다.

즉 군주는 때로는 인간 외의 다른 존재, 즉 비인간이나 혹은 초인간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군주의 삶은 대체로 그들의 인간성을 파괴해왔다. 크세노폰(Xenophon)은 참주 히에로(Hiero)를 통해 “영혼이란 인간 의 행복과 불행이 깃든 곳입니다. (…) 나는 나 자신의 경험상, 군주는 가장 좋은 것은 거의 공유하지 못하며, 대개 가장 나쁜 것을 소유한다는 점을 명백히 알고 있소.”라고 말하고 있다(On Tyranny).

신을 제외하고 이러한 불행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우정과 헌신이다. 세종과 달리 태종에게는 우정을 나눌 친구가 없었다. 그는 누구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가장 가까운 사람 들은 언제든지 반역자가 될 수 있었다. 그의 형제들이 그러했으며, 민씨 형제 같은 측근이 그러했다. 그러나 태종은 ‘정치에의 헌신’을 통해서 자신을 구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우(太宗雨)’라는 다소 신화적인 이야기는 그 점을 암시하고 있다.
--- p.512-513

이 정도전은 더 이상 나주 동루에서 훈시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천민들의 따뜻한 배려에 ‘감동’하고, 또한 ‘부끄러움’을 느 꼈다. 이 감사와 부끄러움이야말로 정도전이 새롭게 체험한 백성이었다. 이러한 체험은 이색의 문하에서 형성된 그의 학문적?정치적 태도에 근본적인 전환을 초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대저 남들 이 만들어 놓은 음식을 먹는 자는 남의 책임을 맡아야 하고, 남들이 만들어 놓은 의복을 입는 자는 남의 근심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삼봉집』 「經濟文鑑」) 그것은 관습적인 정치의식에 대한 반론이었다.

왕과 지배 엘리트들이 백성에게 무슨 은혜를 베풀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것은 정치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바에 대한 의문이었다. 또한 정치가들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와 그들의 무엇에 근거하여 존재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러한 자각은 경전을 통한 앎과 근본적으로 다른 무게감을 가지게 한다. 정도전은 최고 통치자 역시 백성으로 인해 존재하며, 따라서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을 위해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p.551-552
 

출판사 리뷰

이 책은 여말선초 정치가들의 사상과 실천을 다루고 있다. 14세기 말은 한국 역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대 중 하나로서,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다. 이 책이 소개하고 있는 공민왕, 이제현, 이곡, 이색, 신돈, 우왕, 이인임, 최영, 정몽주, 태조 이성계, 태종 이방원, 정도전, 조준, 신덕왕후, 이지란, 조영규, 조영무 등은 이 격동기를 살다간 사람들이다.

인간은 역사의 격류를 피할 수 없다. 14세기 말을 살아간 인물들도 그랬다. 저마다의 입장에 따라 역사에 몸을 던지고, 시대를 직조해갔다. 역사에 의해 파괴되기도 하고, 역사를 창조하기도 했다. 이 시대를 쉽게 산 인물은 없다. 그들의 삶 속에는 역사가 남긴 온갖 상처가 아로새겨졌다. 그렇게 한 시대가 지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나뉘어 있다. 1부는 14세기 중엽을 전후한 고려왕조의 개혁자들로서 공민왕, 이제현, 이곡, 이색, 그리고 신돈을 살펴보았다. 2부는 공민왕대의 개혁이 실패한 뒤 반동의 시대를 살아간 정치가로서 우왕, 이인임, 최영, 정몽주를 살펴보았다. 3부는 고려왕조를 포기하고 조선건국의 역성혁명에 헌신한 이성계, 이방원, 정도전, 조준, 신덕왕후 강씨, 그리고 조영규 등 정몽주의 암살자들을 살펴보았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할 무렵 고려는 국가적으로 붕괴 직전이었다. 무엇보다도 토지를 관장하는 전시과 제도가 와해되어, 가난한 농민은 토지를 빼앗기고 자녀를 팔거나 노비로 전락했다. 세수를 확보하지 못한 국가 역시 재정이 무너져 군대도 유지할 수 없었다. 고려말의 군대는 호족과 군벌의 사병이었다. 40여 년간 왜구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 권문세족으로 불리는 소수 귀족집단이 독점적인 특권집단을 형성해 실질적으로 국가를 지배했다.

공민왕은 “세신대족은 친당이 뿌리를 맞대어 서로 감싸”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때문에 부패의 한 쪽 고리를 잘라도 소용이 없었다. 개혁은 이들과의 투쟁이었다. 공민왕은 즉위 초부터 개혁을 강력히 추진했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쳐 홍건적의 난이 발생하고, 사랑하는 노국공주가 난산으로 죽는 불운이 겹쳤다. 좌절한 공민왕은 폐인이 되어 폭정을 거듭하다가 암살되었다.

1259년 고려가 몽골에 항복한 후 100년에 걸친 팍스 몽골리카의 평화가 도래했다. 국경이 사라지고 길이 열리자 고려인들은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갔다. 이제현, 이곡, 이색 등은 팍스 몽골리카의 자식들이었다. 몽골제국이 열어놓은 코스모폴리탄의 세계로 들어가 제1차 세계화의 세례를 흠뻑 받은 그들은 고려와 세계를 잇는 브릿지가 되었다. 그들을 통해 세계는 고려 속으로 들어와 혁신의 씨앗을 뿌렸다.

이제현은 만권당을 통해 몽골제국이 배양한 최선의 자양분을 흡수했다. 14세기 말 고려의 변혁운동은 이제현의 사상적 전파를 통해 배태되었다. 이곡은 몽골제국의 정치 세계에 들어가 그 일원으로서 평천하의 이상을 직접 실현하고자 했다. 아들 이색은 아버지가 닦아 놓은 길 덕분에 원나라 태학에서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고려에 돌아온 그는 1367년 성균관을 중흥했다. 여기에 새로운 사상에 목말라하는 정몽주, 정도전, 권근 등 젊은 지식인들이 결집했다. 성리학을 새롭게 받아들인 젊은 지식인들은 구세주의적 열정으로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고려 사회와 국가의 쇠락을 걱정하면서,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국가사회를 꿈꾸었다.

1374년 공민왕이 암살된 후 어린 우왕이 즉위했다. 그러나 출생이 불분명한 그는 정통성이 취약했다. 이인임은 권문세족들과 연합해 우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국가를 장악한 뒤 완전히 사유화했다. 최영의 무력은 그의 권력을 지키는 방패가 되었다. 최영은 진정한 애국자였지만, 신진 유신들의 정치적 비전에는 무지했다. 이 때문에 이인임을 지지하고 신진 유신들을 탄압했다. 이인임 집단에 의해 신진 유신들은 대거 축출당해 죽거나 유배되었다.

정도전 역시 유배되어 10년간 유랑했다. 이때 그는 백성들의 참모습을 경험했다. 왜구에게 죽고 지배층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그들은 잡초처럼 강인하게 생존했다. 또한 오히려 정도전을 따뜻하게 위로하고 도움을 베풀었다. 거기서 정도전의 정치의식에 근본적 전환이 일어났다. 1383년 정도전은 함흥으로 이성계를 찾아가 역성혁명을 결의했다.

1356년 22세의 이성계는 아버지 이자춘을 따라 동북면에서 개성에 처음 왔다. 그 후 고려말의 수많은 전쟁에서 눈부신 전공을 세웠다. 특히 1380년(우왕 5) 황산대첩을 통해 구국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단순한 무장에 머물렀던 그는 정도전과 만나면서 정치가로 거듭났다. 두 사람의 만남을 통해 고려말 새롭게 성장하던 신흥무장세력과 신진 성리학자 집단이 극적으로 결합되었다. 이념이 무력이 더해지면서 비로소 역사를 쇄신하기 위한 역성혁명의 길이 열린 것이다.

이방원은 역성혁명의 마지막 문을 열었다. 1388년 위화도회군 이후 이성계파는 전격적으로 전제개혁을 강행했다. 토지문서가 개성 대로에서 불태워졌다. 이후 5년간에 걸쳐 국가의 전 분야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이 추진되었다. 1389년에는 쓰시마정벌을 단행해 왜구 문제도 40여 년 만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이성계파는 이처럼 고려말의 주요한 개혁과제를 대부분 해결했다. 국가를 정상화하고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을 입증한 것이다. 역성혁명은 자연스러웠다.

정몽주도 처음에는 이성계파의 개혁을 지지했다. 그러나 성리학의 명분론에 충실했던 그는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이성계파와 대립했다. 정몽주를 제거하지 않으면 역성혁명은 차치하고 목숨조차 위험했다. 하지만 이성계는 최후의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정몽주 암살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긴 것은 이방원이었다. 조선건국을 최후로 결정한 것은 이성계가 아니라 이방원이었다.

공민왕은 고려를 안으로부터 개혁할 수 있는 마지막 왕이었다. 하지만 그는 고려말의 정치적 관습인 측근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신하들을 불신했다. 또한 매우 총명했으나 정신적 강인성이 결핍되었다. 가장 중요한 결점은 이제현, 이색 등 신진 성리학자들의 역사적 비전에 무지했다는 것이다. 지적 수준이 낮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자신의 품 안에서 자라고 있던 이들을 오히려 적대시했다. 신돈의 발탁은 그런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역사는 행복이 자라는 대지가 아니다. 여말선초의 정치가들도 대부분 불행했다. 이방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의 일생은 권력투쟁의 피에 젖었다. 조선건국 후 형제들을 죽이고, 아버지 이성계조차 축출하여 왕위에 올랐다. 또한 처가를 멸문시키고, 공신을 모두 제거했으며, 심지어 세종의 처가도 역모죄로 처벌했다. 조선의 국가이념인 성리학의 윤리를 파괴한 패륜이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조선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또한 1418년 세종에게 왕위를 잇게 함으로써 조선왕조의 영속성을 확고히 했다.

그 뒤 태종은 권력의 야수에서 인간으로 회귀했다. 4년의 여생을 그는 춤과 행복감 속에서 보냈다. 그는 오직 정치 안에서 정치의 길을 찾았다. 어떤 역경 속에서도 그는 종교에 의존하지 않았다. 정치에 헌신함으로써 국가를 구하고, 자신의 영혼도 구원했다. 정치에 대한 헌신, 그리고 국가에 대한 강한 책임감 없이는 정치가의 구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