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한국역사의 이해 (책소개)/3.고려시대사

개경에서 한양까지 - 권력투쟁으로 본 조선탄생기

동방박사님 2022. 12. 20.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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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휴일 전날이 아니라면 절대 펼쳐들지 말라”
눈을 뗄 수 없는 고려왕조 최후의 정치사

‘와룡’ 이성계의 기다림, 정몽주의 최후의 반격


조선왕조가 개창한 지 10년도 훨씬 지난 1405년 도읍을 개경에서 한양(서울)으로 옮긴다. 새 왕조 개창의 완성을 알리는 상징적 조치였다. 개경에 근거를 둔 고려왕조 시절 기득권층의 반발은 얼마나 심했을까. 천도 과정만 다뤄도 책 한 권 분량의 이야기는 충분히 나올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천도 이야기를 뛰어넘어 조선 왕조 개창에 이르기까지 고려왕조 말의 권력투쟁에 초점을 맞췄다. 시기로는 공민왕이 죽고(1374) 바로 뒤를 이은 우왕이 즉위한 이후부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1392) 직후까지 고려 말의 마지막 약 20여 년 정도의 기간, 전제개혁을 반대해 내쳐진 문익점, 대마도 공략에 성공한 박위 장군 등 200여 명이 명멸하며 권력과 명분을 좇아 진영을 가르고, 프레임을 씌우는 양상이 생생하고도 흥미롭게 그려진다. 선양 명분을 쌓으려 최영?변안열 등 몇을 빼고는 최소한의 피를 흘리며 선양 명분을 쌓으려는 이성계, 이성계의 낙마를 계기로 훗날 조선 개국공신이 된 정도전을 폐서인으로 몰아 처형 직전까지 갔던 정몽주의 반격 등 흥미로운 이야기가 줄을 잇는다.

 

목차

고려 왕실 세계
시작하며

제1장 우왕의 즉위와 명사 살해 사건
1. 공민왕 시대 개관
격동의 공민왕 시대|공민왕의 친명반원 외교|공민왕 시대의 역사적 의미와 평가
2. 명사 살해 사건
우왕의 즉위와 이인임|우왕 즉위 전후 일련의 사건들|명사 살해, 그 배후는?|북원의 개입과 심왕|신진사대부의 저항, 정도전의 유배|이인임의 반격|이인임은 누구인가|민감한 심왕 문제|신진사대부는 왜 친명사대를 주장했을까?

제2장 이인임 정권, 명과 북원 사이에서
1. 이인임 정권
도당, 집단지도체제|저항하는 대간|골칫거리, 우왕 생모 반야|유배당한 김속명|무장의 성장을 견제하다|일본 통신사 나흥유|명의 정료위와 북원의 나가추|북원과의 교섭|왜구 방어를 둘러싼 갈등|2인자 지윤|도당의 확대|북원의 연호를 채택하다|지윤, 제거당하다|3인체제|해도원수 정지 장군
2. 명과 북원 사이에서
성과 없는 일본행 사신|북원의 군사 요청|명의 홍무 연호를 다시 채용하다|강경해진 명의 태도|태후까지 나선 대명외교|고려 사신을 거부한 명|사신단 구성의 문제|주원장의 고려 길들이기|이성계의 ‘안변책’|이성계와 정도전, 정몽주|이인임을 폭로한 사신 김유|행례사 김구용|조공 문제, 타결을 보다|주원장이 반긴 사신 정몽주
3. 이인임 정권과 최영
천도를 반대한 최영|끈질긴 천도론, 왕조의 위기|정권의 친위대, 임견미?염흥방?도길부|성년에 들어선 우왕|우왕의 저항, 주변의 문신|이인임과 최영 그리고 경복흥|이성계의 등장, 운봉전투|반발하는 우왕, 측근의 환관|이인임과 최영, 일선 후퇴|우왕의 한양 파천|우왕을 탓하는 간관, 우왕을 위하는 환관|우왕의 인사권 찾기, 수상 최영|수상 임견미, 밀려난 최영

제3장 요동정벌과 위화도 회군
1. 명과의 관계 회복과 권력 변화
임견미 정권과 북원|우왕의 여성 편력|우왕과 최영|주원장의 승인이 떨어지다|순조로운 대명관계|우왕의 반격|말 교역 문제|주원장의 경고|이이임의 은퇴, 우왕의 인사권
2. 철령위 문제와 최영의 요동정벌
주원장의 불신|정권 붕괴의 발단, 조반 사건|이성계, 사건에 뛰어들다|일망타진, 정권의 몰락|최영의 독주와 이성계|철령 이북의 땅, 유민 문제|최영은 왜 요동정벌에 나섰을까?|이성계의 4불가론|요동정벌은 친명사대를 부정하기 위해서
3.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우왕 폐위
회군 전야|회군은 사전에 계획된 군사정변|회군의 성공, 최영 유배|이성계의 사람들, 그리고 조준|우왕 폐위, 창왕 옹립|주원장은 회군을 어떻게 판단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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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 : 이승한
 
광주에서 나고 자라 지금도 고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전남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역사를 연구하는 데 ‘민족’이나 ‘민족주의’ 시각을 갖는 것은 역사를 수단화·도구화하여 배타적이고 공격적이 기제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삼별초 연구로 시작해서 고려시대 무인정권과 원 간섭기에 색다른 호기심과 문제의식을 갖게 된 데는 ‘민족’이란 연구 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정년퇴직을 앞두고 20년 ...
 

책 속으로

공민왕 시대의 가장 큰 역사적 의미는 새로운 친명사대 관계의 성립이었다. 이는 원 제국과의 사대복속관계를 끝장내는 일로서 충분히 역사적 사건이라 할 만한 일이었다. 또한 이러한 대외관계의 대전환은 국내 정치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쳐 새로운 정치 세력, 신진사대부를 개혁 세력으로 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조선왕조 개창의 단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으니 그 의미는 더욱 특별하다
--- p.29

북원과 관계 개선을 시도하려는 이인임 정권과 이를 반대하며 친명사대를 고집하는 사대부 측으로 정치 세력을 양분하여 설명하는 것인데, 양 세력 간의 권력 싸움에 주목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인임 정권은 무인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신진사대부가 친명사대를 고집했던 것은 무인 기반의 이인임 정권을 견제하고 주도권을 잡기 위한 권력투쟁이라 볼 수 있다
--- p.66

이인임 정권이 이런 식의 방어 전략을 구사한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장수들의 직함만 바꾸어 수시로 여러 사람을 돌려막기 식으로 교체했던 것은 무장들의 정치적 성장을 꺼려 한 때문이었다. 군사를 보유한 장수를 특정 지역에 장기간 주둔케 하면 군사적 기반을 갖춘 무장의 성장은 당연하다. 이는 이인임 정권에 위협적인 일로서 방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왕 대의 왜구 침략에 대응하는 방식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 p.84

이성계가 사병 같은 군대를 기반으로 크게 승첩을 올린 전투가 왜구와 맞서 싸운 1380년(우왕 6) 9월의 운봉(전북 남원)전투였다. …… 운봉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이성계는 고려 중앙 정계에 무장으로서 깊게 각인되었다. 하지만 운봉전투 이후에도 이성계는 크게 주목할 만한 활동이 없었다. 장수로서 이미 명망을 세웠지만 중앙 정계에는 아직 충분한 기반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성계를 동북면 도지휘사에 임명한 것이니 그 의미가 컸다
--- p.155

이성계가 다시 친원적인 외교노선을 따른다는 것은 자신의 기반을 부정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성계는 불가피하게 반원노선으로 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성계가 북원과의 관계 개선을 지향하는 이인임 정권에 참여할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무장들 거의 대부분이 이인임 정권을 추종했으니 이성계는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이인임 정권에 맞서 친명사대를 주장하다가 유배까지 당했던 정도전과 정몽주는 그런 이성계를 주목했던 것이다
--- p.160

우왕은 왜구의 위협이 지척인데 복술만을 좇을 수 없다고 하면서 천도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마침내 철원(강원)에 관리를 보내 궁궐터를 살펴보게 하였다. 새로운 도읍지로 내륙의 철원을 생각했던 것이다. 새로운 궁궐터를 살핀 후 우왕은 철원에 궁성을 축조하라는 명령을 내리는데 기어이 천도를 단행하겠다는 생각인 것 같았다
--- p.177

최영은 분명 이인임 정권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웬일인지 인사권에는 별로 간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대목에서 이를 다시 생각해보니, 최영은 이인임 정권으로부터 군사권을 보장받는 대신 이인임의 인사권에는 부러 간섭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인임과 최영 사이에는 서로의 권력을 인정하고 침해하지 않는다는 정치적 묵인이 있었던 것 같다
--- p.196

1382년(우왕 8) 8월, 결국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다시 결정한다. 이때는 이인임과 최영이 수상에서 물러나고 홍영통과 이자송이 새로이 수상을 맡은 직후였는데, 간관들이 천도를 말렸지만 우왕은 한양으로 떠난다. 이게 완전한 천도가 아닐지라도 국왕이 왕도 개경을 장기간 벗어난다는 점에서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었다
--- p.214

주원장의 교류 중단 조치가 내려진 직후 명에서는 그해 12월 갑자기 철령 이북의 땅을 자신들이 관할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른바 철령위鐵嶺衛 설치 문제로서 이게 고려에 통보되어 알려진 것은 이듬해 2월이지만, 교류 중단 조치 직후 이런 선언이 나왔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 p.273

이를 두고 사람들은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이번 사건에 제일 큰 도적이 그물에서 빠져나갔다. 정직한 최 공이 개인 사정으로 늙은 도적을 살렸다.’ 최영이 불법적인 치부와는 거리를 두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올바른 처결은 아니었던 것이다. 최영의 처결에 대한 여론의 불만을 엿볼 수 있으며, 아울러 앞으로 최영의 독주를 충분히 예상할 수도 있다
--- p.288

최영은 문무백관을 불러 철령 이북의 땅을 명에 바칠 것인지 가부를 논의하였다. 당연히 모두 불가하다고 하였다. 불가라고 해서 바로 요동정벌을 찬성한 것은 아니었지만 곧바로 최영은 우왕과 비밀리에 회동하여 요동을 칠 것을 논의한다. 개경의 군사를 징발하여 한양의 중흥성 수축에 들어간 것은 그 직후였다. 모두 1388년(우왕 14) 2월의 일로 뭔가 급박하게 전쟁 분위기로 몰아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 p.294

임견미?이인임의 정권이 무너진 직후라 우왕에게는 최영의 후원이 절실했다. 최영은 우왕의 이런 처지를 이용하여 요동정벌에 끌어들이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세우는 데 이를 활용한 것이다. 최영과 우왕의 적극적인 결합은, 1388년(우왕 14) 3월 우왕이 최영의 딸을 왕비로 들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 p.297

최영에 의한 요동정벌의 무리한 추진은 전시동원체제를 통해 정권을 확실하게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본다. 최영이 권력을 장악해나가는 데 가장 큰 경쟁 상대는 이제 이성계였다. 이성계가 소유한 독자적인 군사력 때문이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성계는 요동정벌준비 과정에서 완전히 소외되고 있었다
--- p.298

최영의 요동정벌이 대외적으로 명을 직접 자극하여 적대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홍무’ 연호 정지는 대내적으로 신진사대부를 의식하여 친명사대 노선을 부정하려는 선언이었다. 즉 요동정벌은 명과 전쟁을 통해 반드시 승첩을 올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친명사대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이 당면 목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최영의 처지에서는 요동정벌에서 승리하면 더없이 좋았지만 패배한다 해도 크게 나쁠 것이 없었다. 친명사대관계를 끝장낼 수만 있다면 승패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 p.305

“만일 상국(명)의 경계를 범하여 천자께 죄를 얻으면 종묘사직과 백성에게 화가 미칠 것이다. 내가 순順과 역逆으로써 회군하기를 요청하였으나 국왕은 살피지 못하고 최영 또한 늙고 어두워 듣지 않았다. 그대들과 함께 회군하여 왕을 뵙고 화禍와 복福을 알릴 것이며, 국왕 곁의 악한 자(최영을 가리킴)를 제거하여 백성들을 편안케 할 것이다.” …… 역사적인 위화도 회군이 시작되는데, 1388년(우왕 14) 5월 22, 23일경이었다
--- p.310

회군을 결행하면서 이성계와 조민수는 우왕을 폐하고 왕씨를 세우자고 약속을 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조민수는 창왕을 세우기 위해 이색을 앞장세웠다. 유학자로서 사대부의 중심에 있던 이색에게 자문하니 창왕을 세우는 데 동의했다는 것이었다. 조민수가 이색의 동의를 빙자하여 재빨리 창왕을 내세운 것은 정치적 주도권을 잡으려는 의도였다. 공민왕이 죽자 바로 우왕을 내세워 정권을 장악했던 이인임처럼 말이다
--- p.325
 

출판사 리뷰

친명사대노선을 둘러싼 갈등이 권력투쟁의 핵

이미 ‘고려 무인이야기’, ‘몽골 제국과 고려’ 시리즈로 고려시대에 대한 역사적 내공과 유려한 필력을 입증한 바 있는 지은이는 이 책에서도 그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고려 말의 정치를 다루면서도 시야를 넓혀 위화도 회군을 부른 요동정벌의 정치적 산술 등 북원 및 명과의 외교사까지 아우르면서 이를 국내 권력투쟁의 큰 줄기로 제시하는 해석 틀은 신선하다.

“친명사대의 외교노선을 처음 확정한 공민왕은 이성계나 그 공신들에게 그 대세의 길을 열어주고 권력투쟁의 장을 마련해준 것이다. …… 공민왕 사후 등장한 이인임 정권은 …… 주로 무인들을 권력기반으로 하면서 친명사대관계를 부정하거나 이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이는 신진사대부의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통해 친명사대를 주장하던 신진사대부가 정치적으로 결집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인임 정권과 인연이 없었고 변방 출신으로서 소외되었던 이성계가 신진사대부와 제휴했던 것은 그래서 가능했다. 이성계와 신진사대부의 결합은 이성계가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첫 번째 기반으로서 이인임 정권의 덕을 크게 본 것이다.”(345쪽)

위화도 회군이란 극적 장면을 담담하게 넘어가는 등, 소설적 상상력을 최대한 배제하고 사실에 충실한 점도 이 책의 미덕이다.

최영이 이성계 즉위의 가장 큰 기여자라고?

“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란 일화로 유명한 최영 장군은 과연 청렴하기만 한, 고려의 충신이었는가? 지은이는 이에 이의를 제기한다. 최영은 권신 이인임과 권력을 양분했으며 요동정벌은 전시동원체제를 통해 확실히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무리였다고 본다. “요동정벌은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었고 국내 상황과도 어긋난 일이었다. 따라서 위화도 회군은 잘못된 요동정벌을 바로잡는 명분으로 피할 수 없었고 이성계는 이를 통해 정권 장악에 성공했던 것이다.”(298쪽) 즉 이인임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이성계를 끌어들인 우왕도 보탬을 주었지만 역설적으로 최영이야말로 이성계의 즉위에 가장 큰 기여자였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밖에 당대 최대의 사회문제였던 토지문제의 폐단을 외면하던 기득권 세력과 달리 전제개혁을 통해 변방 출신의 이성계 측과 신진사대부 세력이 역사적 정당성을 획득하는 과정, 이성계 세력의 핵심 참모로 전제개혁을 주도한 조준의 활약, 위화도 회군 이후 4년이 지나서야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이유 등이 설득력 있게 제시된다.

한양 천도가 동전 던지기로 결정되었다니

역사를 읽는 이유는 교훈만이 아니다. 미처 몰랐던 사실을 읽는 재미 또한 만만치 않다. 한양 천도가 동전으로 결정된 사실은 어떤지. 개경에서 한양으로, 다시 개경으로 오락가락 하던 천도 논쟁에 지친 태종은 1404년(태종 4) 10월 6일, “종묘에 들어가 송도(개경)와 신도(한양)와 무악 세 곳을 알리고 그 길흉을 점쳐 길한 곳을 따라서 도읍을 정하겠다”고 선포한다. 이에 따라 동전을 던지는 척전擲錢과 제비뽑기 같은 시초蓍草가 거론되다가 종묘에서 동전을 던져 점을 쳤다. 그 결과 한양이 2길 1흉, 개경과 무악은 1길 2흉으로 나와 한양 천도가 결정되었다고 한다(336쪽). 권신 이인임에 휘둘리던 우왕이 친정체제를 구축하려 나섰으나 20살도 못 된 의비의 동생 노귀산을 국왕 대변인 격인 우부대언으로 발탁하거나 자신의 기행과 일탈행위를 부추긴 환관이나 장사꾼, 물고기 잡고 사냥하는 자들까지 벼슬을 얻었다니 개혁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는 이야기는 어떤가(267쪽). 퇴위 후 생명을 보장받기 위해 이성계와 ‘동맹’을 추진했던 공양왕의 서글픈 운명 등 흥미로운 역사 뒷이야기가 책 곳곳에 담겨 읽는 재미를 북돋운다.

고려사를 천착해온 지은이는 자신의 집필 작업을 마무리한다는 의미에서 여말선초의 정치사를 썼다고 했다. 한데 술술 읽히는 재미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역사를 보는 신선한 시각을 제공하는 이 ‘대하드라마’를 읽고 나면 부디 조선사도 다뤄줬으면 하는 소망이 절도 생긴다.
 

목차

제4장 왕조 개창으로 가는 길
1. 왕조 개창의 시험대, 조준의 전제개혁
전제개혁의 역사적 배경|조민수를 찍어낸 전제개혁|이색을 수상으로, 개혁 시동|조준의 시무책|전제개혁은 사전 혁파, 수조권의 국유화|빗발치는 상소, 최영 죽다|주원장과 이성계 그리고 이색|전제개혁을 반대한 이색, 어정쩡한 정몽주|반대론자에 대한 비난과 탄압|전제개혁은 왕조 개창의 시험대|권문세가 출신의 조준|조준, 새로운 활로를 찾아서
2. 상소를 통한 권력투쟁
창왕의 입조 문제|주원장의 이상한 메시지|탄핵당한 이숭인과 권근|김저 사건|폐가입진, 왕위에 오르는 길목|이색, 탄핵 파면|우왕?창왕 부자, 죽임을 당하다|공양왕 길들이기|3차 전제개혁 상소|끈질긴 탄핵 상소|변안열의 죽음, 끝이 없는 탄핵 상소|쉽지 않은 공양왕|다시, 사전 혁파 문제
3. 공양왕의 버티기
공양왕의 반격|윤이?이초 사건|저항하는 대간 그리고 정몽주|한양 천도|공양왕의 버티기와 이성계|이성계 제거 모의, 김종연 사건|대마도 정벌과 김종연 사건|문하시중 이성계, 군통수권 장악|이성계의 사퇴 요청|책명을 받지 못한 공양왕|연복사 중창과 척불 논쟁|공양왕을 협박한 정도전|역사적 확신범, 정도전|다급해진 정도전

제5장 찬탈과 선양 사이에서
1. 반전, 배후의 정몽주
갈라선 정몽주와 정도전|공양왕과 이성계|이성계와 이방원 부자|세자 입조|정도전, 귀향당하다|가계를 문제 삼은 정도전 유배|뒤바뀐 정국|정몽주의 《신정률》|이성계의 낙마|정몽주의 반격
2. 폐위당한 공양왕
정몽주, 타살당하다|화난 이성계, 핀잔을 준 후첩 강씨|정몽주 죽음의 의미|다시 급반전|다시, 반대자 탄압|공양왕의 마지막 버티기, 우현보|이방원, 이성계 추대를 거론하다|마지막 인사 발령|고려왕조의 마지막 사신|공양왕의 맹서 요구|공양왕의 마지막 장면|왜, 양위가 아닌 폐위를 택했을까|만약 이성계가 죽었다면
3. 추대 받은 이성계, 고려의 마지막 왕
이성계의 첫 장면|즉위, 둘째 날|국정 운영의 중심 도당, 정도전|고려의 종친 왕 씨 문제|즉위 교서, 천명의 정당화|최초의 인사|공신 책정|정도전의 복수, 이성계의 관용|대민 선전관, 수령|공신들이 주도한 세자 책봉|대명외교, 왕위승인 문제|국호를 조선으로

보론-왕조 개창, 그 후
1. 대명 외교와 권력의 추이
문제의 발단, 여진 문제|이방원을 파견하다|표전 문제|권근의 활약, 곤경에 처한 정도전|정도전의 진법 훈련과 출병 주장|주원장, 조선 사신을 처단하다|또 다시 억류당한 사신|요동 공격을 주장한 정도전|이방원의 즉위와 14세기의 마감
2. 우여곡절을 겪은 한양 천도
최초의 천도론|계룡산으로 향하는 이성계|계룡산을 반대한 하윤, 무악으로|천도 후보지 논쟁|지지부진한 천도, 왜?|이성계가 주도해서 결정한 한양|왕도 공사, 이모저모|경복궁 완공|개경으로 환도하다|다시 지난한 한양 천도|다시, 한양과 무악|동전을 던져 결정한 한양 천도|개경에서 한양까지

책을 마치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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