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한국역사의 이해 (책소개)/3.고려시대사

혼혈왕. 충선왕 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

동방박사님 2022. 12. 20.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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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낭만적 망명을 택한 경계인, 충선왕

충선왕을 '혼혈 왕'이라고 표현한 것은 시대착오적인 말이다. 그 시대에는 그런 표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충선왕 자신도 그에 대해 특별한 자기 인식이 없었다. 또한 그 혼혈이라는 이유 때문에 고려 왕위를 계승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거나 원에서 활동하는 데 한계로 작용하지도 않았다. '혼혈 왕' 이라는 표현은 지금의 시각으로 충선왕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동원한 말일 뿐이다. 충선왕이 고려인으로 일생의 대부분을 원에서 생활했던 것은 그러한 문화적 혼혈의 바탕이었다. 성년이 된 이후 충선왕은 원에서 활동하면서 고려에는 특별한 경우에만 들어왔다. 그러면서도 원 제국의 정치와 사회 속에 온전히 투신하지 못했고 고려의 국정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전념하지 못했다.

고려에 있을 때는 제국을 지향했고 제국에서 밀어내면 고려에 잠시 머무르기를 반복했지만, 이쪽 사회에서나 저쪽 사회에서나 진중하게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 충선왕은 말년에도 끝내 고려에 돌아오지 않고 원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살아서는 고려에 돌아올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미처 삶을 정리하지 못하고 갑자기 죽음을 맞이했던 것일까. 그래서 충선왕의 재원 활동과 삶은 결국 자발적인 망명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낭만적 망명이라 해도 괜찮다. 충선왕을 '경계인'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때문이다.

 

목차

프롤로그_충선왕 연보
고려 왕실 세계
몽골 왕실 세계

제1장 부마 국왕과 세자
1. 부마국 체제의 성립
2. 충렬왕의 측근 정치
3. 충선왕의 세자 시절

제2장 중조, 폐위와 복위
1. 떠오르는 세자
2. 충선왕의 개혁 정치
3. 충선왕 폐위, 갈등의 시작

제3장 책략, 혼미한 정치
1. 깊어지는 갈등
2. 혼미한 정치
3. 성종 테무르 시대의 정치
4. 공주 개가 책동

제4장 복위, 원격 통치
1. 충선왕의 원 무종 옹립
2. 복위
3. 원격 통치

제5장 충선왕과 만권당
1. 상왕 충선왕
2. 만권당
3. 티벳 유배

에필로그_충선왕 약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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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 : 이승한
 
광주에서 나고 자라 지금도 고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전남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역사를 연구하는 데 ‘민족’이나 ‘민족주의’ 시각을 갖는 것은 역사를 수단화·도구화하여 배타적이고 공격적이 기제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삼별초 연구로 시작해서 고려시대 무인정권과 원 간섭기에 색다른 호기심과 문제의식을 갖게 된 데는 ‘민족’이란 연구 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정년퇴직을 앞두고 20년 ...
 

출판사 리뷰

어디에도 없었던 지배자, 충선왕

한국사에서 ‘소외’된 고려사를 생동감 넘치면서 신중한 방식으로 대중들에게 꾸준하게 소개해온 이승한이 충선왕 시기 원과 고려를 조망한 《혼혈 왕, 충선왕》을 출간했다.
고려사에 천착하는 역사가의 눈이 주목한 원 지배기의 고려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주변 국가들과의 대립에서 종종 역사를 소환하는 우리에게는 몇 가지 역사적 질문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그 중 하나는 식민지기를 바라보았을 때 맞닥뜨리게 되는 불편함이다. 식민지 조선은 제국의 종속적 존재로서 혹독한 과정을 감내해야 했지만, 그와 동시에 대동아공영권의 기치 아래 제국의 일부로서 기능했다. 이때 식민지기를 경험한 조선인들은 분열적인 모습의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원 간섭기' 또는 '원 지배기'의 고려사는 아직 정리되지 못한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 고려사는 지금여기와 멀리 떨어져 있기에 제국주의에 맞서 정체성을 보전했다는 숭고한 대상으로서의 민족주의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거리 두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원 지배기의 고려를 살았던 고려인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바로 충선왕이 존재한다. 그는 몽골인과 고려인, 중심과 변경의 교집합에 속해 있으면서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경계인이었다.

충선왕은 왜 ‘자발적 망명’을 택했을까?
충선왕은 고려뿐 아니라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매우 독특한 군주였다. 그는 당시 세계를 지배했던 원 황실의 일원이었고 동시에 원의 지배 아래에서 ‘변경’이 된 고려의 왕자였다. 고려 왕실의 무력감을 보며 부마국 체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범위를 확립하고자 역설적으로 어머니 나라의 사위가 되었다. 강력한 개혁정책을 펼쳤지만 7개월 만에 폐위되어 왕에서 물러난 아버지와 자리를 바꾸었다가 다시 즉위하는 이른바 '중고'를 경험하기도 했다. 또한 고려의 군주로 있으면서도 통치 시기의 대부분을 원 제국에서 보내며 원격으로 국가를 통치했으며, 한편으로는 원 제국 내 정쟁에서 맹활약하면서도 그 안에 온전히 투신하지도 못했다. 고려에서는 선왕인 아버지와 갈등했으며, 고려 밖에서는 세자인 아들을 살해했다.
그리고 충숙왕에게 양위한 이후에는 원의 수도인 대도에 만권당을 짓고 당대 문인들과 교류하는 한편, 불교에 심취하면서 원과 고려, 둘 모두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그의 분열적인 삶의 배경에는 제국의 변경으로 전락한 고려 왕조의 처지와 당시 고려 사회의 모습이 응축되어 있었다. 몽골 제국과 고려 시리즈의 두 번째 결과인 이 책은 이러한 충선왕의 독특한 삶을 통해서 당시 고려를 들여다본다.

이 책의 주요 내용: 제국을 부정하며 동시에 좇았던 충선왕
충선왕의 아버지인 충렬왕은 무인정권과 뒤이은 몽골의 지배를 경험하면서 관료집단에 회의적이었으며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다. 이를 확보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원 공주와의 결혼이었다. 그는 변발과 호복도 감수하며 쿠툴룩켈미쉬 공주(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한다. 이러한 부마국 체제에서 고려는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했지만, 그와 동시에 자주권에 심한 손상을 입었다. 충렬왕은 원 황제의 사위로서 원 황실에서 일곱 번째(훗날 네 번째) 자리라는 대단히 높은 서열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왕위의 임면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피지배자이기도 했다. 충선왕은 이러한 제국의 '변경'인 고려에서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 사이에 태어나 '제국'에서 자란 인물이었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갈등
“‘듣자오니 흉년이 들고 백성이 굶주린다고 하니 전하께서는 멀리 국경까지 출영하지 마시옵소서. 어가가 행차하는 곳에 준비나 경비가 많고 번거로울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굽히실 필요가 없사옵니다. 관리들도 개경 교외까지만 나오도록 하십시오.’ 충렬왕은 이 말을 전해 듣고 노여움을 드러내었다. ‘세자의 말이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탄식했다고 한다. 세자의 말인즉슨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부왕을 매우 서운하게 했다." (본문 111쪽,〈부마국왕과 세자〉중에서)

소년 시절부터 충선왕은 부왕과 자주 마찰을 일으켰다. 특히 충렬왕이 관료를 부정하고 측근을 끼고 돌며 사냥과 연회에 빠진 모습에 대한 반감이 컸다. 열네 살 때는 충렬왕이 주회한 연회의 참석을 거부하기도 했고, 커서는 어머니인 제국대장공주의 상이 끝나자마자 충렬왕이 총애했던 애첩 무비를 비롯해 탐관인 도성기와 최세연 등을 바로 죽였다. 심지어 충렬왕 사후 아버지의 비였던 숙창원비와는 간음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아버지와 충돌했던 충선왕은 아버지처럼 원 성종의 큰 형인 진왕의 딸 부타시리 공주(계국대장공주)와 결혼했다. 그리고 원 황실과의 혼인을 통해 힘을 얻은 다음 충렬왕이 자신의 가장 큰 후원자인 쿠빌라이와 제국대장공주의 연이은 사망으로 힘을 잃게 되자 충렬왕의 양위를 받아 고려 왕에 즉위한다.

충선왕과 개혁, 그리고 폐위
충선왕은 즉위하자마자 충렬왕의 정책들을 부정하며 강력한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정치적으로는 친종행리(충렬왕이 원에 입조할 때 호종했던 공신들)를 견제하며 건국 이후 공신들의 후손을 등용하는 한편 원의 제도에 큰 영향을 받은 관제개혁을 실시했다. 경제적으로는 관리들의 백성 착취를 금했으며 권세가의 대토지 소유 실태를 파악했다.
급작스러운 개혁은 기존 세력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충선왕의 개혁은 원의 제도를 선망한 것이지만 역으로 반원적이라는 의심을 샀다. 여기에 배우자인 계국대장공주와의 불화가 겹쳤다. 친원적이면서도 반원적이며 정략적으로 원 황실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그 결과인 계국대장공주를 멀리했던 분열증적인 모습은 원 황실의 개입에 의해 즉위 7개월 만에 폐위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막을 내린다. 부왕을 제치고 즉위한 것도 범상한 일이 아니었으나 물러난 아비가 살아 있는 아들의 뒤를 이어 다시 왕위에 오른 것은 한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충렬왕의 복위 이후 왕유소와 송린 등과 같은 충렬왕의 측근 세력은 고려에서 충선왕의 영향력을 거세하기 위해 갖가지 책동을 일으켰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계국대장공주에게 고려 왕족인 서흥후와의 재혼을 꾸몄던 공주 개가 책동이다. 공주 개가 책동에는 충렬왕과 충선왕은 물론 원 황실의 인물들까지 휘말린다. 이들 모두 원 공주가 선택한 남성이 곧 고려 왕이 되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고려와 고려 왕조의 현실이었다.

왕의 귀환, 그러나 어디에도 없는 왕
고려에서의 충렬왕과 충선왕 세력 간의 충돌은 원의 황제 계승 싸움으로 이어져 불루간 황후-아난다(원 성종의 사촌)-충렬왕으로 이어지는 세력과 하루가순-카이산(원 무종)-충선왕으로 연결되는 세력 간의 정치갈등이 전개되었다. 충선왕이 왕에서 물러나 숙위생활을 하며 친분을 다졌던 카이산 형제는 원 황제 계승 다툼에 뛰어들었는데, 충선왕 또한 공주 개가 책동에 따른 위기의식 때문에 이에 개입한 것이다. 정쟁의 승리자는 충선왕이었다. 그는 카이산을 원 무종으로 옹립하는 데 공을 세움으로써 원의 체계에서 고려 왕보다 상위에 존재하며 실제 영지를 다스리는 심양왕에 책봉되었다. 이어 서흥후를 비롯한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충렬왕이 승하하자 고려 왕위도 되찾았다.
그러나 충선왕은 강력한 통치권을 발휘해 고려의 국정을 장악하고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한 채 원에 남아 고려를 원격으로 통치했다. 왕의 부재 상황에서 세자 감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고려 국내에서 나타나자 세자를 죽이는가 하면, 환국의 요구가 고려와 원 안팎으로 거세지자 차라리 왕위를 내려놓았다. 이후 그는 원에 머물며 만권당을 설립, 염복과 요수, 조맹부, 우집 등 당대 문인들과 교류하며 원과의 정치에 거리를 두지만 자신의 후원자인 인종 사후에 티벳으로 유배를 가기도 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산다.

‘자발적 망명’을 택한 고려의 ‘명준’, 충선왕
충선왕은 안으로는 무인정권에서 벗어나 왕권의 정상화를 꾀하고 밖으로는 원이라는 막강한 제국과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설정하던 시기에 고려 왕과 원 공주 사이에서 출생한 '혼혈'이다. 고려에서 자라 원에서 살았고, 원 제국에서는 고려를 그렸으며 고려에서는 원 제국을 지향했다. 군주로서는 아버지의 구폐를 극복하려고 노력했지만 측근을 중용하고 원의 영향력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는 등 아버지의 한계를 그대로 좇았다.
충선왕은 부마국 체제를 이용해 고려의 독자성을 지키고자 했지만 대를 이은 원 황실과의 혼인은 고려의 부마국 체제를 더욱 심화시켰다. 공주 개가 책동에서 명징하게 드러났듯이 충선왕의 정치적 선택은 치정과 같은 사소한 문제일지라도 원 조정으로까지 비화되기 십상이었다. 충선왕 당시 고려와 원의 관계는 마치 하나의 정치체로 작동하는 중앙과 지방의 관계처럼 보였다. 혼혈 왕, 충선왕은 그러한 양국관계의 현실이 응축된 상징이었다.
이러한 충선왕에게는 고려 왕위가 큰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고려 국정은 제국의 틀 안에서 운행되었고 개혁 좌초 이후에는 제국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 보전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복위 이후 국정을 장악하고 더욱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펼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에 남는 것을 선택한 까닭은 이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가 만권당을 설치해 다양한 인사들과 교류하고 불교에 심취했던 연유는 경계에 선 데서 온 허무감과 결핍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문화적 정체성은 역설적으로 다른 문화와의 교류 속에서 더욱 깊게 자각되기 때문이다. 경계에 위치한 그의 이와 같은 선택은 《광장》의 명준처럼 '자발적인 망명'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그가 남긴 불씨는 그의 아들인 충숙왕 시기 심왕 책동을 둘러싼 고려 왕조의 위기와 나아가 요동정벌론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몽골 제국과 고려 시리즈의 세 번째 책에서 소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