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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 기념관 (2023 1.3)

동방박사님 2023. 1. 5.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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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 기념관은 나라를 잃은 어려운 시절 세계를 재패해 우리 민족의 긍지를 높여준 손기정 선수(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의 뜻을 기리고, 1918년 만리동에 건립된 손기정 선수(21회 졸업)의 모교인 양정의숙 건물을 리모델링 하여 손기정 탄생 100주년인 2012년 10월 14일에 개관하였습니다.

주소 / 관람시간 / 휴관일

서울시 중구 손기정로 101
동절기: 10:00~17:00
하절기: 10:00~18:00
*관람 종료 1시간 전까지 입장가능
1월 1일, 설날, 추석, 매주 월요일 (단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그 다음날), 기타 별도로 정하는 휴관일

 

손기정은 달리는 사람으로서 기원전 490년 전 마라톤 평야를 처음 내달려간 필리피데스의 벗이었고, 1936년 베를린에서는 한국인으로서 첫 세계인이었고, 그 날 이후 살아있는 동안 내내, 그뒤로 세계인들과. 무엇보다도 한국인들과 여전히 달리고 있다. 손기정은 어제 달렸지만 늘 오늘을 넘어 내일을 향해 달리고 있다. 근 과거로서 현재이고, 동시에 늘 가슴 뛰는 미래다. 필리피데스 조각상을 여기에 배치하는 이유이다. '첫번째 세계인, 전시관에서는 마라토너 인간 손기정을 만날 수 있다.

 

양정과 함께 이뤄간 꿈

19세 손기정은 집안 살림을 도우면서 달리글 하며 운동선수의 꿈을 키워나갔다. 이윽고 다양한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평안도 대표 선수로 뽑히긱도 하였다.

1931년 10월, 양정고보에 입학하기 몇개월 전,  서울에서 열린 조선신궁대회에 평안북도 대표로 출전하게 되면서 그는 마라톤이라는 종목을 접하게 된다. 5,000m가 가장 긴 경주라고 생각했던 손기정은 1932년 동아일보에서 주최하는 마라톤대회에 처음으로 출전하여 2위 성적을 거둔다. 이는 손기정 마라톤의 시작이었고, 이 대회를 기점으로 그는 장거리 경주에 필요한 실력을 길러나간다. 

베를린 올림픽을 향하여

"나능 좋은 기록을 위해 매일 정해진 10km 또는 20km 코스에서 실전과 다름 없는 강훈을 쌓았다. 또한 하루하루 달리는 시간을 단축 시킴으로써 강도를 높여 나가며 매 순간 베를린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었다.

50년 만에 손기정의 품으로 돌아온 고대 그리스 청동투구

청동 투구는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자에게 주는 부상품 이었지만 손기정은 당시에 투구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투구 반환의 노력은 1946년 양정고등학교의 후배가 손기정에게 투구 기사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작 되었다. 조사 끝에  그리스 브라디니 신문사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에게 소장품인 기원전 6세기의 청동 투구를 기증하겠다.'는 기사를 발견했다. 이후 '손기정이 청동 투구를 찾고 있다.'는 기사가 널리 전파되었고 이를 본 베를린 교민 노수웅씨가 1년 반 동안 찾은 결과, 베를린 샤로텐부르크(Chariotten - burg)박물관에서 투구를 발견했다. 손기정은 대한 체육회, 한국-그리스 친선협회 회장, 마이니치 신문 체육부장 등과 함께 반환을 강력히 요구 했다.

처음에 독일 올림픽위우너회는 규정을 내세워 반환하지 않다가 제24회 서울 올림픽 개최가 확정된 후 세계의 여론이 ' 투구는 손기정에게 넘겨주어야 한다.'로 뜻이 모이자 1986년 반환했다. 이듬해, 투구는 민족의 긍지를 높이고,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의 부상품이라는 가치를 높게 평가받아 서양 유물로는 최초로 보물 (제904호)로 지정되었다. 1994년. ' 이 투구는 나의 것이 아니라, 우리민족의 것" 이라는 손기정의 뜻에 따라 국가에 기증 되었다. 

레니 리펜슈탈과의 인연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의 개최를 준비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1989~1945)는 올림픽을 기록영화로 남기고자 했다. 당시 유능한 영화제작자로 신임을 받던 독일 베를린 태생의 레니 리팬슈탈 ( Leni Riefenstahl,1902~2003)을 감독으로 내세워 촬영하였다. 베를린 올림픽을 담은 <올림피아>의  <민족의 제전> 부분에는 손기정의 마라톤 완주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손기정을 촬영하여 감명을 받은 레니는 노년에 이를 때 까지 손기정과 작품황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엽서를 보내는 등 친분을 유지했다. 스포츠 기록영화로서 <민족의 제전>은 표현력, 기술, 예술성 등 다양한 부분에서 세계의 주목을 모았다.

세계인 손기정

손기정은 기록자였다. 마라톤 기록을 세운 기록자일 뿐 아니라, 자기 삶 또한 마라톤 기록처럼 꼼꼼하게 남겼다. 나라 안팎에서 숱한 사람들이 보낸 편지, 메모지, 우표 한까지 차곡차곡 수집하고 정리를 해왔다. 그의 삶은 마라톤을 떠나서 말할 수 없지만 기록, 수집자로서 면모도 충분히 평가 받을 만하다. 손기정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서 성장하였고, 해방공간에서 우리 사회 갈등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생생한 증인이자. 이후에도 현대사의 중요한 국면들과 함께 해왔다. 그의 인생자체가 긴 마라톤이자 시대상을 대표할 수 있는 궤적을 남기고 있다. 그 장구한 노정에서 손기정은 한번도 중심을 흐트리지 않았다. '세계인 손기정'은 손기정의 기록을 통해 '과거에서 현재'를, '현재에서 후대'를 잇는 공간이자 거점이다

기사와 편지를 직접 모으다

손기정은 양정고등보통학교 학생 시절인 30년대부터 본인 또는 한국 체육과 관련된 기사, 사진, 편지 엽서 등 다양한 자료들을 스크랩하였다. 신문스크랩북 43권, 서한 스크랩북은 29권이며 부착되어 있는 기사와 서한의 총 량은 3,398점에 이른다. 신문 기사는 기사를 오려 자신만의 방법으로 배치하여 부착하였으며, 편지, 연하장 등의 서한은 발송인의 이름을 적어 보관하였다.

일장기 말소사건

손기정의 금메달은 세계적인 사건이었다. 국내외 신문사들은 앞다퉈 손기정의 승리에 대해 특집기사와 호외를 쏟아냈다. 동아일보의 사회부 체육주임 이길용 기자는 동아일보의 12면중 5~6면을 손기정, 남승룡에 대한 특보 기사로 채웠다. 조선의 체육과 손기정, 남승룡의 베를린올림픽출전에 대해서 남다른 애정을 보이던 기자였다. 1936년 8월 24일 오사카 아사히 스포츠지를 구독하던 이길용 기자는 기사에 실린 손기정의 시상식 사진과 선명한 일장기를 발견하게 된다. 이길용기자는 사회부 현진건 기자에게 "손기정 선수의 가슴 쪽을 엷게, 잘 보이지 않게 보도하는 편이 좋겠다."고 하며 일장기 말소를 계획하였다. 손기정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 일본의 승리가 아닌 인간 손기정 그리고 한국인의 승리로 기억 되고자 하였다. 동아일보 사진과장 신낙균, 화백 이상범 등과 의논하여 동판 사진중 일장기 부분을 청산가리액으로 말소 한 뒤 8월25일 동아일보 석간에 게재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일장기 말소에 대한 책임을 물어 관련인 8명을 약 40일간 고문하였으며, 8월27일 동아일보는 무기 정간처분을 받았다

여의도 비행장 귀국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 후 조국으로 돌아온 손기정은 경비행기를 타고 여의도 비행장에 내렸다. 1936년 10월17일이었다. 일본경찰의 삼엄한 감시 속에 양정고보의 안종원 교장, 서봉훈교감, 조선일보의 고봉오기자 그리고 그의 형 손기만이 마중 나와 있었다. 일본 경찰은 환영행사를 일절 금지하고 손기정이 비행기에서 내리자 마자 연행하여 남산에 있던 조선 신궁으로 데려갔다. 

"손기정의 베를린에서의 행적은 슬픈결과를 초래했다. 그가 한국인임을 세계가 알게되고, 자신들이 정복한 나라가 영광을 얻는 것을 원치 않던 일본인 군인 총독은 귀국한 그를 심하게 응징했다. 하지만 이를 통해 그가 한국이라는 것을 다시한번 알려지게 되었다.

지도자 손기정

손기정은 자신의 경험과 능력을 전달할 수 있는 지도자였다. 자신의 시대와 역사의 고난을 뚫고 세계의 중심에 우둑 선 것 처럼 후배들을 이끌어 세상의 중심에 서게 했다. 손기정은 민족에게서 받은 사랑을 고스란히 물려주고 배풀고자 하였다.

손기정의 도전과 승리

손기정이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2시간 29분 19초 2라는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하며 수여받은 메달, 상장, 월계관이다. 손기정의 삶과 우리나라의 올림픽 역사연구에 매우 소중한 자료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우승 유물을 통해 손기정의 도전에 대한 강인한 정신력과 승리가 선사한 자긍심을 느껴볼 수 있다.

 

오오, 조선의 남아요!  

베를인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남승룡 양군에게   (심훈 1901-1936)

승리의 월계관

손기정은 그 날 승리하였다. 그는, 우리 겨럐 모두와 함께 우승하였고, 도든 약자들과 함께 우승하였고, 모든  식민지인들과 우승하였고, 모든 이름 없는 자들에게 월계관에게 쓰어주었다. 다시 쓰는 그 월계관 이름은 < 2시간 29분 19초 2>다.

손기정의 우승이 깃든  양정고등보통학교 

손기정은 달리기에 재능을 보이며 전국 최고 육상 명문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여 달리기 기술과 전문성을 키우고 싶어 했습니다. 1932년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후, 단거리부터 장거리까지 다양한 경기에서 우승하여 양정의 이름을 알렸습니다. 양정고등 보통학교 5학년이던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경기에 출전하여 세계제패를 이루며 역사적인 우승을 합니다. 이듬해인 1937년 봄, 손기정은 제21회 졸업생으로 양정의 문을 나섰지만 졸업 후에도 학교를 방문하여 후배들과 함께 달렸습니다.

손기정 (孫基禎)

손기정은 1912년 8월29일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출생했으며 1932년 양정 고등 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 마라톤에 입문했다. 이후1935년 11월3일 2시간 26분 32초로 세계공인신기록을 수립하고 1936년 5월21일 최종 선발전을 거쳐 베를린올림픽에 출전하여 2시간 29분 19초 2라는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했다. 하지만 손기정은 당시 한국이 일제강점기 하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 국적으로 참가할 수 밖에 없었다. 1945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해방 된 후, 손기정은 후진 양성과 대한체육회 부회장, 대한육상경기연맹 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역임하며 대한민국 체육계를 위해 공헌했고 2002년 11월15일 타계했다.

1936년 제 11회 베를린올림픽의 마라톤 우승자는 한국인 손기정이었다. 그러나 시상식에서 호명된 그의 이름은 " 야판 키타이 손!" 이었다. 시상대에 선 손기정의 감슴에는 일장기가 세겨저 있었고, 스타디움에는 일본 국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조선인으로 태어나 일본 국적의 마라토너로서 42.195km를 달려야 했던 비운의 러너, 슬픈 우승자가 바로 손기정이다. 베를린올림픽 이루 손기정의 삶은 또 다른 마라톤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이 마라톤은 새로운 기록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한국인 손기정을 희복하는 여정이었다. 그러나 이 마라톤은 새로운 기록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한국인 손기정'을 희복하는 여정이었다 이 여정은 애국가가 울려 퍼자는 시상대에 태극기를 가슴에 새기고 서있는 ' 하눅의 마라토너 손기정'을 되찾는 레이스였다. 이곳에 설치된 손기정의 동상은 이 길고 긴 마라톤의 완주를 상징하는 것이다. 진정한 체육인으로서 손기정은 민족간의 갈등을 넘어서 평화와 공존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한국의 마라토너로 영원히 기억 될 것이다.

손기정을 위한 선물

스물 네 살, 청년 손기정은 베를린에서 한국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제국주의하에서 공식적일 수 없었다. 손기정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최후까지 분투하겠다는 마음으로 전력질주 하였고, 올림픽 마라톤 2시간30분대 기록을 깬 첫 번째 선수였다. 손기정의 우승은 단순한 마라톤 우승이 아닌 인조. 국가, 인체의 한계와 차별을 뛰어넘은 승리였다. 그에게 온전한 조국이 있었다면 분명 기쁜 우승자이자 당당한 우승자로 고개를 든 채 청동 투구를 들고 우리나라에 돌아왔을 것이다. 이 동상은 세계를 무대로 승리하여 절망 속에서 살아가던 한국인 들에게 자긍심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준 손기정에게 주는 선물이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와 자라나는 미래 세대에게 국가의 소중함과 나라 사랑 정신을 새겨볼 수 있도록 손기정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