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조선시대사 이해 (독서)/2.조선학문

조선의 백과사전을 읽는다 - 이수광의 지봉유설

동방박사님 2023. 1. 25.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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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조선은 창대한 지식의 나라였다
실학자들이 바라본 삼라만상의 세계와 당대의 개혁사상과 열정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격인 「지봉유설」은 성리학의 세계에 갇힌 당시 조선 양반 사대부들의 지식의 범위를 획기적으로 확장한 책이다. 단지 성현의 말씀뿐만이 아니라 우주와 자연, 세계 지리, 사회 풍속, 천주학, 서양 문물, 언어, 기담, 음식 문화 등 갖가지 생생한 지식과 정보들을 '유설類說'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담았다.

『조선의 백과사전을 읽다』는 이러한 「지봉유설」을 위시해 「성호사설」과 「양엽기」등 다른 유설들에 실린 내용 가운데 현재의 삶에 의미가 있다고 판단되는 소재만을 골라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쓴 책이다. 임진전쟁과 정묘전쟁의 소용돌이, 그리고 서서히 밀려오는 서학의 물결 속에서 새로운 학문과 사회를 꿈꾸는 실학자들의 개혁사상과 열정을 「지봉유설」이라는 씨줄과 「성호사설」이라는 날줄로 엮어냈다.

권력의 도구가 되어버린 성리학이 변화하는 세계를 더는 감당할 수 없음을 감지한 때, 새로운 정신을 흡수한 실학자들은 신(新) 지식 세계로 나아가고자 열망했다. 유설, 즉 조선의 백과사전은 바로 그러한 마음을 대변하는 결과물이다. 유설의 편찬자들은 사방에서 새로운 주제와 소재, 설들을 모아 새 세상을 감당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책 『조선의 백과사전을 읽는다』는 그러한 감동적인 노력을 엿보고자 한 시도이다.

 

목차

1부 하늘과 땅을 고증하다|무지개는 동물이 만든다|해 먹는 두꺼비와 달 먹는 까마귀|우레는 땅속의 용이 만든다|우박은 얼음의 자식이다|금성이 낮에 나타났다|이수광, 세계지도를 보다|세계 56개 나라를 소개하다|금강산에는 1만 2천봉이 없다|조선의 강토는 저절로 줄어들었다

2부 사회 풍속의 속살들|자녀에게 담배를 가르치다|재가를 국법으로 금하노라|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노비도 엄연한 사람이다|과거 시험장의 부정한 풍경들|오묘한 십간십이지의 세계|조선의 활은 천하제일이다|귀신을 부르는 주문|고려의 근친혼은 더러운 풍속이니|생일에는 마땅히 더욱 비통해야 한다|전염병 귀신에게 비나이다|전라도 순창에는 궉씨가 있다|얼씨구나 잘한다 다 함께 놀아보자|애채는 세상에서 말하는 안경이다|흰옷 입는 것을 금지하라

3부 역사를 보는 실학의 눈|선우씨는 기자의 후예다|압구정을 악호정이라 불렀다|주인의 원수를 갚은 계집종|임진전쟁 발발의 조짐들|임진전쟁이 일어나다|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다|폭력 속에서도 문명은 섞여 흐르고|정릉의 화를 부른 과욕

4부 선비됨과 학문의 세계|책을 빌려주는 자는 바보|조선의 성리학인가, 성리학의 조선인가|비가 오면 집 안에서 우산을 폈다|안남국에 울려 퍼진 이수광의 절창|동서 교류의 거인, 마테오 리치|조선을 뒤흔든 천주학의 충격|한글은 정말 인도 글자를 모방했을까|난설헌을 질투한 양반 남성들|허리띠를 매지 않아 부끄럽습니다|소인의 반대는 군자가 아니다|젊은이를 영감이라 하면 왜 어색할까|제비는 《논어》를 읽고 개구리는 《맹자》를 읽는다

5부 음식 문화 박물지|황제가 복날에 개고기를 하사하였다|성균관에서 소를 잡아먹다|숟가락은 조선에서만 사용한다|중국인들은 육회를 먹지 않는다|한 고을의 정치는 술맛에서 알 수 있다|상추를 천금채라고 하는 이유|오줌을 마시면 건강해진다|고추는 삼국시대에 들어왔다|토마토는 식용이 아니라 관상용이었다
 

저자 소개

저 : 이철
 
1972년 강원도 양양의 설악산 밑 동네에서 태어났다.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핀 날 높다란 뒷산에 올라 구비치는 백두대간 능선을 바라보며 저 너머에는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해 하곤 했다. 그러한 호기심은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어릴 적부터 과거의 시간을 헤매고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역사란 현재 우리의 삶을 성찰하기 위한 학문이라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대학 시절 학생 운동을 시작했다. 대학을 그...
 

책 속으로

임진전쟁 발발의 조짐들
“중국 사람 허의후가 임진년 이전에 포로가 되어 일본에 있었는데 왜노가 장차 침략할 것을 알고 몰래 명나라의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 보고문에서 일본의 용병술에 대해 말하기를 ‘…땅에서의 전투는 잘하지만 오직 함부로 죽이는 일만을 알 뿐이다. 물에서의 전투는 잘할 줄 모르고 화공을 알지 못한다. 거짓으로 강화를 요청하거나 항복한다고 속여 놓고는 적국을 깨뜨린다. 성을 쌓아 에워싸기를 잘하는데 그것으로 적의 성을 함락시킨다. 기습 공격을 가장 두려워하며 완만한 싸움을 좋아한다. 급하면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완만하면 침착하게 위엄을 기른다. 그들의 배는 매우 불편하게 되어 있는데, 면面은 넓은데 바닥을 뾰족하게 만들어 움직이기가 어렵기 때문에 매우 공격하기가 쉽다’라고 하였다. 이미 경험한 것을 가지고 보면 이 말은 모두 옳다. 임진년 이후 우리나라의 수군이 그 수가 적음에도 많은 적선을 쳐서 가는 곳마다 모두 이긴 것은 이 때문인 것이다.”(《지봉유설》에서) --- pp.220-221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다
백성들이 굶주리다 못해 생존을 위해 서로 잡아먹는 상황에 이를 정도로 기근은 심각했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글은 유성룡이 남긴 《징비록》에도 있어 《지봉유설》의 글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한다. 《징비록》에는 “심지어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잡아먹었는데 해골만 잡초처럼 드러나 있었다”고 했다. --- p.237

폭력 속에서도 문명은 섞여 흐르고
관왕은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대를 살다 간 유명한 장수 관우를 높여 부르는 말로, 관왕묘는 관우를 모신 사당이다. 원래 명나라에서 유행하던 풍습인데 임진전쟁 때 왜적을 몰아낼 수 있었던 것이 관왕의 음덕이라며 명나라 장수 진린 등이 요청해 세우게 되었다. 1598년 남대문 밖에세운 것이 남관왕묘이고 1602년 동대문 밖에 세운 것이 동관왕묘다. 서울 지하철 1호선과 6호선이 정차하는 동묘앞역의 ‘동묘’가 바로 동관왕묘를 가리킨다. --- p.245

안남국에 울려 퍼진 이수광의 절창
7년 전 이수광과 북경에서 주고받은 시를 안남으로 돌아간 풍극관이 널리 퍼뜨렸는데, 그 시들이 그곳 선비와 유생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이수광에 대해 《지봉유설》의 저자로만 알려져 있지만 이수광은 이미 당대에 문장가로도 인정받았던 인물이었다. 《지봉유설》만 해도 약 40퍼센트 정도의 분량이 시와 문에 관한 내용일 정도로 이수광은 문장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이수광이 그토록 뛰어난 문재였다고는 해도 그의 시가 안남국에서 유생들에게 암송될 정도라는 건 매우 깜짝 놀랄 만한 사건이었다. 조완벽은 같은 조선인인 이수광의 문명文名을 예상치도 못했던 안남국에서 듣게 된 것이다. --- p.288

조선을 뒤흔든 천주학의 충격
도미니코회와 프란체스코회 선교사들이 예수회 선교사들의 적응주의 선교 방식이 옳은지를 1643년 로마 교황에게 질의하면서 전례 논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99년 후 예수회가 논쟁에서 패배하면서 조상의 제사도 금지되고 천주를 상제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만약 예수회의 선교 방식이 인정되었다면 윤지충이 죽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며 천주교 신자였던 양반들의 이탈 현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 p.303

허리띠를 매지 않아 부끄럽습니다
‘창피하다’라는 단어는 원래 ‘옷을 입고 허리띠를 매지 않다’라는 뜻이다. 이수광은 옷을 입고 띠를 매지 않는 것과 마음이 부끄러운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지금 사전을 찾아봐도 그 연관성을 알 수가 없다. ‘창피’라는 단어는 중국과 일본에서는 원뜻 그대로 쓰이고 한국에서만 ‘부끄럽다’는 뜻으로 쓰인다. 아마도 ‘창피’라는 단어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개념의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라 짐작된다. --- p.327

황제가 복날에 개고기를 하사하였다
그런데 양기가 가장 왕성한 날인 복날에 마찬가지로 양기가 가장 센 동물인 개고기를 먹는 것은 얼핏 생각하면 이치에 맞지 않는 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사람의 몸은 여름에 더위가 기승을 부릴수록 겉은 뜨거운 반면에 몸 안은 차게 된다. 즉 겉은 양의 기운을 띠지만 속으로는 음의 기운을 띠는 것이다. 여름에 찬 것을 먹으면 배탈이 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사람의 몸 안에 가득 찬 음기를 다스리려 양기의 동물인 개고기를 먹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의 70퍼센트가 태음인, 소음인의 체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더욱 양기를 보해줄 음식이 필요하다. --- p.354

숟가락은 조선에서만 사용한다
어찌나 많이 먹었는지 유구국, 즉 지금의 오키나와 사람들이 밥을 많이 먹는다고 놀릴 정도였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이 먹었을까? 조선 후기의 문헌에 따르면 성인 늳자는 한 끼에 7홉, 성인 여자는 5홉, 아이들은 3홉을 먹었다고 한다. 당시의 1홉은 대략 지금의 60씨씨 정도이므로 7홉은 420씨씨에 가까운 분량이다. 현재 전기밥솥에 달려 나오는 컵의 용량이 160씨씨인 것을 감안하면 거의 세 배나 많다. 그러니까 요즘 성인 남자 서너 사람이 먹을 분량을 혼자서 한 끼에 먹은 셈이다. --- p.368

오줌을 마시면 건강해진다
오줌을 마시는 것이 건강에 매우 좋다고 여겨 윤회주라고 이름 붙였다. 여기서 윤회의 의미는 ‘삶과 죽음을 반복한다’는 뜻보다는 ‘다시 태어날 정도로 젊어진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이 글에 등장하는 정협과 곽지선은 이수광과 같은 시대를 살다가 간 조선시대 문인들이다. 양반들이 오줌을 먹을 정도로 요료법은 조선시대에 널리 행해진 치료법이었다.
--- p.386
 

출판사 리뷰

조선을 거세게 뒤흔든 임진전쟁과 정묘전쟁의 소용돌이
그리고 아득히 먼 구라파에서 밀려오는 서학의 물결
그 격동의 와중에 이른바 조선 백과지식의 싹이 움텄다

조선은 창대한 지식의 나라였다
실학자들이 바라본 삼라만상의 세계와 당대의 개혁사상과 열정

경학의 시대를 넘어 실학의 시대로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들이 선택한 학문의 주제는 ‘경학經學’이었다. 성리학이라는 프리즘으로 고전을 거슬러 올라가 사서오경을 파고 또 팠다. 조금 더 박람강기博覽强記한다는 이들은 『사기』와 같은 중국 고대 역사서나 『노자』『장자』 등 제자백가류 서적을 가까이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유자들의 학문 세계는 경학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 격인 『지봉유설』은 그렇게 협소하게 갇힌 지식의 범위를 획기적으로 확장한 책이다. 단지 성현의 말씀뿐만이 아니라 우주와 자연, 세계 지리, 사회 풍속, 천주학, 서양 문물, 언어, 기담, 음식 문화 등 갖가지 주제들을 풍성하게 다뤘다. 당시로서는 방대한 340여 종의 책을 인용해 총 33개의 부部, 184개의 세부 항목, 3,405조목으로 이전까지의 지식 개념 안에서는 수용되지 않던 생생한 지식과 정보들을 ‘유설類說’이라는 나름의 독특한 형식으로 담았다. 유설이란 광범위한 책에서 발췌한 내용들을 주제별로 분류해 편찬자 자신의 ‘의견『說』’을 덧붙인 책을 말한다.

이 책 『조선의 백과사전을 읽는다』는 『지봉유설』을 위시해 『성호사설』과 〈앙엽기〉 등 다른 유설들에 실린 내용 가운데 현재의 삶에 의미가 있다고 판단되는 소재만을 골라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쓴 책이다. 모두 다섯 부의 구성으로 1부에서는 음양론에 근거한 조선 자연과학의 정신과 지리 인식을 엿볼 수 있는 글들을 담았다. 2부에서는 생생한 조선 사회의 풍경을, 3부에서는 한국사 이면의 이야기들을 소개했다. 4부에서는 서학의 충격을 비롯해 각종 학적 논쟁과 단어?속언의 유래 등이 실렸으며, 5부에서는 음식과 식재료의 유래, 음식 문화 등을 살펴봤다. 임진전쟁과 정묘전쟁의 소용돌이, 그리고 서서히 밀려오는 서학의 물결 속에서 새로운 학문과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일군의 실학자들이 생겨났다. 『지봉유설』을 씨줄로, 『성호사설』을 날줄로 삼아 그들이 바라본 삼라만상의 세계와 당대의 개혁사상과 열정을 살펴본다.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조선 사회의 풍경

이수광의 『지봉유설』을 비롯해 이익의 『성호사설』과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등에는 당시 조선 사회의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생생한 글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다. 이는 사실을 중요시하는 실학의 학문 태도에서 비롯된 특징일 것이다. 당시 경학자의 눈에는 하찮아 보였을 ‘잡설’들까지 이들 실학자들은 관심을 가지고 기록으로 남겼다.

이를테면 과거 시험장의 풍경이 그렇다. 보통 생각하기에 유생들이 정연하게 앉아 엄숙히 시험을 치르는 광경을 떠올리겠지만, 이수광과 이익이 묘사하는 풍경은 그와는 거리가 멀었다. “답안을 스스로 작성하는 사람은 몇 사람 되지도 않고 시험장 안이 모두 남의 것을 베껴서 제출”하거나(134쪽), “과거 응시자를 대신하여 글을 베껴 쓰고 있”는 대리 시험자도 수두룩했다(136쪽). 심지어 “시험장에 들어가서도 트집을 잡고 다툼을 일으켜 이따금 시험 감독관을 때리며 못하는 짓이 없”었다고 하니(137쪽), 그 모습이 요란하기 그지없었다.

조선시대의 담배 문화도 요즘의 상식과는 많이 달랐다. 이익은 “상하노소를 막론하고 해가 지고 날이 저물도록 담배 구하기에 급급하다”고 현실을 개탄했는데(109쪽), 이때 ‘소少’인들의 연령이 무척 낮았다.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교 3학년 정도에 해당하는 열 살 정도의 아이들이 아버지와 맞담배를 피는 경우가 흔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어른이 담배를 피우려 하시거든 반드시 담배를 담뱃대에 담아서 불을 붙여드리는 것”이 예절로 생각되었는데(106쪽), 이 과정에서 아이들이 일찍부터 담배를 배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불을 붙이려면 담뱃대를 물고 빨아 연기를 흡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 큰 화제를 몰고 왔던 서양 문물에 대한 글도 여럿 있다. 그중에서 조선인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건 서양의 지도였다. 이수광은 마테오 리치가 만든 〈곤여만국전도〉를 보고 나서 말하길 “매우 정교하게 만들었는데 서역은 특히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었으며, 중국의 지방과 우리나라의 팔도는 물론 일본의 육십주까지 지리의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음이 모두 섬세하여 빠진 것이 없었다”며 놀라움을 표시했다(61쪽). 투시원근법으로 그려진 서양화도 놀라움을 자아냈다. 이익은 “요즘 연경에 사신으로 갔다 온 자들은 대부분 서양화를 사다가 대청 위에 걸어놓는다”라며 당시의 유행을 전하고 “궁궐 지붕의 네 귀퉁이와 궁궐을 둘러싼 담벼락이 모두 실제 모습 그대로 우뚝하게 솟아 있음을 알 수 있다”라며 서양화의 입체감에 감탄했다(298쪽).

세상을 바꾸려한 실학의 고증 정신

이수광이 살던 당시 명나라에는 유럽에서 온 서양인 선교사들이 다수 활약하고 있었다. 사실 그들이 없었다면 조선의 실학도 태동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서학이 청나라의 고증학을 낳았고,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실학사상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학문 태도는 실학에도 이어졌다. 실학자들은 직접 자료를 대보고 이치를 따져가며 나름의 진리를 구축하고자 했다. 실학의 선구자 격이었던 『지봉유설』과 『성호사설』의 각 조목에도 이러한 정신이 깊게 배어 있다.

심지어 이익은 주자의 견해에도 의구심을 표하는 대담함을 보이기도 한다. 가령 주자는 “무지개는 형체가 있어 물도 마시고 술도 마실 수 있다. 이것으로 보아 반드시 창자도 있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에 대해 이익은 무지개가 생기는 과학적 이치에 근거해 “무지개가 물을 마신다고 하는 것은 한때의 재이일 뿐이지 어찌 자리를 정하여 놓고 물이 없어질 때까지 마실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주자의 견해를 비판한다(32쪽). 이는 성리학이 온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권력을 위한 도구가 되어버린 성리학은 새롭게 변화하는 세계를 감당할 수 없었다. 새로운 정신을 흡수한 실학자들은 성리학이 완고하게 규정한 틀을 깨고 새로운 지식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했다. 유설, 즉 조선의 백과사전은 바로 그러한 열망을 대변하는 결과물이다. 유설의 편찬자들은 사방에서 새로운 주제와 소재, 설들을 모아 새 세상을 감당하려 했던 것이다. 이 책 『조선의 백과사전을 읽는다』는 그러한 감동적인 노력의 일단을 엿보고자 한 소중한 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