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한국근대사 연구 (독서)/2.개항기조선

활자와 근대 - 1883년 지식의 질서가 바뀌던 날

동방박사님 2023. 1. 28.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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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복수의 지식들이 경쟁하는 시대가 열리다”

‘철도’(『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2003)와 ‘이양선’ (『악령이 출몰하는 조선의 바다』2008) 등을 통해 근대의 역동적이고 중층적인 가능성의 세계를 특유의 박람강기와 수려한 문장으로 소개해온 박천홍 선생(아단문고 학예연구실장)이 새로운 사실을 찾는 과정과 집필에 7년의 공력을 들여『활자와 근대』를 내놓았다.

‘1883년, 지식의 질서가 바뀌던 날’이란 부제가 암시하듯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식 연활자로 인쇄한 「한성순보」와 「한성주보」, 단행본 출판사 ‘광인사’ 등 신식활자문화의 기원을 이루는 시공간인 18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근대 연활자 인쇄술이 조선의 근대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특히 신문이라는 커뮤니케이션 양식으로 인해 조선 사회의 의사소통 구조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이 무엇을 상상했고 꿈꾸었는지 살펴본다. 오늘날 우리가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지식과 정보, 개념 등을 낯선 시선과 감각으로 다시 들여다봄으로써 오늘날의 세계를 새롭게 해석해낼 가능성을 찾아보려는 것이 이 책을 낸 이유이다.

당시 조선 정부가 구입한 ‘푸트 인쇄기’의 수입 경로, 「한성순보」의 발행부수와 가격, 박문국 장인들의 종류와 인건비, 활자체 등 박천홍 선생이 새롭게 밝힌 사실들은 흥미롭다. 저자는 근대 출판의 기원을 다룬 이 책 『활자와 근대』 다음으로는 20세기 초반, 근대적 지식과 문화를 만드는데 참여했던 사람들을 기록하는 데 힘쓸 생각이라 한다.

목차

들어가는 말_ 복수의 지식들이 경쟁하는 세계

1부 동아시아 근대의 활자문화 공간

1장_ 윌리엄 갬블과 동아시아 활자문화
2장_ 근대 출판의 기원, 쓰키치활판제조소
3장_ 쓰시마와 부산, 언어와 문학의 공동체
4장_ 국경을 넘나든 활자의 여행

2부 김옥균과 박영효가 꿈꾼 나라

1장_ 굶주림의 반란, 왕조의 황혼
2장_ 문명개화를 위한 차관 17만 원
3장_ 활자와 인쇄기, 현해탄을 건너다

3부 박문국과 동시성의 커뮤니케이션

1장_ 유길준, 신문 창간사를 쓰다
2장_ 널리 세상의 이치를 배우다
3장_ 『한성순보』, 논란의 중심에 서다
4장_ 불타는 박문국, 혁명정치의 파산
5장_ 백성들의 눈과 귀가 되다
6장_ 국한문체와 민족어의 재발견

4부 지식과 상품이 모이고 퍼지다

1장_ 상품과 광고, 자본을 전파하다
2장_ 지식의 생산과 소비를 조직하다
3장_ 국립출판사 박문국의 빛나는 시절
4장_ 문명개화의 서글픈 종말
5장_ 광인사와 근대 출판의 길

5부 기원과 신화

1장_ 활자와 근대 433
2장_ 신문과 근대 452

나오는 말_ 의미의 탐구는 멈추지 않는다
부록_ 박문국의 『국용상하책』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 : 박천홍
 
1967년 섬진강 근방 순천의 외진 마을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들어갔지만 원하던 길이 아님을 깨닫고 중도에 학업을 그만두었다. 그 후 출판계에 입문해 몇몇 출판사를 거쳐 서평지 『출판저널』 편집장을 지냈다. 현재 (재)아단문고에서 학예연구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지금까지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 『인간 이순신 평전』 ‘여행하며 읽는 우리 고전’ 시리즈(자산어보·삼국유사·난중일기·...
 

책 속으로

창간호 기사만 보면 『한성순보』가 무가지였는지 유가지였는지 알 수 없다. 당시만 해도 신문을 유료로 판매하겠다는 방침은 아직 세워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제8호(1883년 12월 11일)의 마지막 면에 신문 구독료가 처음 밝혀져 있다. ‘매1권 가전(價錢) 아(我) 동화(銅貨) 30문(文)’이었다. 8호에 실린 당시 물가를 보면, 싸전(米廛)에서 파는 하미(下米) 한 되(1升)가 60문이었다. 하미 반 되가 신문 1부 값과 맞먹었다. 저포전(苧布廛)에서 파는 하급 저포(下苧布) 한 자(1尺) 값도 신문 1부 값과 같았다. 1881년 10월에 부산에서 발행된 일본 신문 『조선신보』 의 1부 값 4전(40문)보다는 쌌다.
『한성순보』는 4호(1883년 11월 1일)에 이르러 지면에 몇 가지 변화가 나타났다. 인쇄용지가 서양 종이에서 한지로 바뀌었다. 4호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1면에 나타났다. 제호 아래에 발행소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면서 ‘통리아문’이 빠지고 ‘박문국’으로만 간략해졌고, 아래에 ‘제4호’가 나타난다. 그 왼쪽에는 ‘조선 개국 492년 계미 11월 초1일’과 함께 ‘중국 광서 9년’이 표기되어 있다. 그전까지 중국 연호는 왼쪽 상단의 난외(書耳)에 있다가 제호 아래로 옮겨간 것이다. 중국 연호가 있던 자리에 서기 연호, 곧 ‘서력 1천8백83년 11월 30일’이 표기되었다. 신문 한 면에 조선, 중국, 서양의 연호가 동시에 등장한 것이다. 이런 시간표기 형식은 현재 남아 있는 『한성순보』의 마지막 호인 36호까지, 그리고 『한성주보』에서도 지속되었다.
당시 『한성순보』 는 몇 부나 발행되었을까? 언론학자 정진석은 지방관청에서 납부한 구독료와 구독 부수를 토대로 『한성순보』 와 『한성주보』 가 매호 3천 부 정도 발행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 발행부수를 뒷받침해주는 결정적 증거가 남아 있다. 『시사신보』 1884년 1월 25일자(음력 1883년 12월 28일) 기사가 그것이다.

“조선의 『한성순보』는 3천5백 책여(冊余)를 인쇄, 3천 책은 지방으로, 2백 책은 경내(京內)로 관명(官命)으로 팔아넘긴다. 3백 책은 사보고 싶은 자에게 매호 값 30문으로 판다. 어느 쪽으로도 몹시 평판이 좋다고 한다. 특히 해당 신문에 게재된 「지구설략」, 「5대주」 기사 등에서 지구의 모습이 어떤지, 5대주 각국의 대소와 강약이 어떤지 성대하게 논의하고 연호를 쓰고 이학(理學)의 일도 다루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기사가 실린 날짜를 보면, 당시 『한성순보』는 9호(12월 21일)까지 발행되었다. 두 나라 사이의 교통 사정을 고려하면 7호(12월 1일)나 8호(12월 11일)까지 발행된 상황을 반영할 것이다. 이 기사는 『한성순보』 발행부수가 3천5백 부라고 명시하고, 그 내역까지 자세히 기록했다. 이는 정확한 정보일 것이다. 당시 신문의 편집 내지 실무를 맡고 있던 가쿠고로가 보낸 자료를 토대로 작성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p.257~259

주보는 신문 지면에서 처음으로 세 가지 문체를 실험했다. 하지만 이 실험이 끝까지 지속되지는 못했다. 현재 실물이 남아 있는 주보로 판단하면, 29호(1886년 8월 23일)부터는 국한문체가 더 나타나지 않고, 32호(1886년 9월 7일)까지만 한글 기사가 나타난다. 국한문 혼용체 기사는 1호, 2호, 16호, 22~28호에만 보인다. 한글 기사는 1~24호, 31호, 32호에만 쓰였다. 국한문 혼용체 기사가 먼저 사라지고, 국문 기사는 더 지속되다가 47호(1887년 1월 1일) 이후부터는 오로지 한문 기사만 남게 되었다.
주보가 국한문체와 국문체 신문에서 한문체 신문으로 후퇴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국문학자 김영민은 독자층의 성격과 문체 자체의 한계를 그 이유로 꼽았다. 주보는 관청을 중심으로 배포되었고, 독자는 대부분 관리 등 한문 향유층이었다. 그 때문에 보수 지식인 사회에서 저항한 결과 문체 실험이 좌절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새로운 언어 형식에 걸맞은 참신한 주제와 내용을 발굴하지 못한 것도 패인 가운데 하나였다. 주보에서는 과감히 한글 기사를 도입했지만, 그 문체에 적합한 기사를 찾기는 어려웠다. 예컨대 주보 창간호에는 한글 전용 기사인 「뉵쥬총논」 이 실렸는데, 외래 지명들이 한글로 번역되었다. 주보의 주 독자층인 한문 향유층들에게는 오히려 한문보다 이해하는 데 더 어려웠다.
국어학자 이기문의 해석도 김영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회를 거듭할수록 주보에서 한글 기사가 줄어든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한글 기사의 뜻을 파악하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이었다. 띄어쓰기를 하지 않은 것이 가독성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나중에 『독립신문』 이 한글 구절을 띄어서 표기한 것은 매우 현명한 전략이었다.
--- p.346
 

출판사 리뷰

근대의 활자문화 공간, 그 국제적 네트워크를 찾는다

이 책은 활자와 인쇄기가 현해탄을 건너오기 직전, 중국의 미화서관, 일본의 쓰키치활판제조소 등 동아시아 근대의 활자문화 공간을 답사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특히 조선에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던 당시 일본의 인쇄기술과 활자제작 시스템을 세밀히 복원하는 것은 우리나라 근대 인쇄출판의 기원을 좀 더 풍부하게 재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국사의 시야에서 벗어나 국제적 네트워크에 주목한 점이 이 책의 첫 번째 특징이다.
중국에서는 1819년 영국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이 서양식 연활자 인쇄 시스템을 도입한 이후 개항장을 중심으로 신문과 잡지, 과학기술 도서들이 급속도로 전파되었고, 1860년대 이후 국영 번역기관과 관영 인쇄국이 곳곳에 설립되면서 근대 출판 세계로 빠르게 나아갔다. 이 무렵 중국에 건너온 윌리엄 갬블(1830~1886)이 창안한 ‘전도자모법’은 활판인쇄 문화의 일대 혁신이었고 이른바 현재까지도 인쇄 문자의 표준이 되는 ‘명조체’를 만들면서 한자 인쇄의 역사에서 신기원을 이룩한다. 이후 갬블의 일본행은 일본의 근대 인쇄출판의 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고, 머지않아 조선은 갬블의 후예들에게 서양식 연활자 인쇄술을 수입하게 된다.
이 책의 국경을 넘나드는 활자여행은 일본으로 이어진다. 일찍이 네덜란드의 일본 무역 거점이었던 나가사키와 ‘난학’을 통해 제한적이나마 서양과 접촉하고 있었던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부국강병 정책을 가속화하면서 빠르게 서양화, 근대화의 길로 나아갔다. 1869년 갬블이 일본으로 건너와 연활자 인쇄술을 전수한 이후 모토키 쇼조(本木昌造)와 히라노 토미지(平野富二)라는 일본 인쇄계의 거목이 탄생하면서 근대 출판의 길이 열린다.
특히 요코하마의 쓰키지활판제조소는 조선의 근대 인쇄술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전신인 히라노활판제조소에서 조선문자 2호, 3호, 4호, 5호 활자가 만들어졌고 188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근대 신문, 잡지, 교과서, 단행본, 성경 제작에 쓰인 활자와 인쇄기는 그곳에서 제조, 판매한 것들이었다. 이 중 「한성주보」에 사용된 4호 활자(이수정 체)를 제외하고는 초창기 기독교의 역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이 책은 만주 선양의 조선어 성경책 인쇄소인 ‘문광서원’에 관해 소상히 밝힌다. 저자는 2호와 5호 활자는 가톨릭의 사전과 성경 번역서에 사용되었고, 3호 활자는 개신교의 성경 번역에 널리 쓰였다고 말한다.


박문국과 광인사, 근대 출판의 길을 찾아서

“이미 [도쿄에] 머물고 있던 박[영효] 공사가 (…) 우리 인쇄국에서 별도로 제작한 푸트 인쇄기(フ-ト印刷機) 두 대를 제조해 보내고, 기타 지난 20일[음력 11월 11일] 샤료마루(社寮丸)로 화물 50여 상자를 실어 보냈다.”(1882년 12월 22일자(음력 11월 13일)『도쿄니치니치신문』) -본문 204쪽

이 책이 새롭게 밝힌 사실들 중 하나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인쇄기와 연활자의 수입 내역이다.
1882년 임오군란 뒤 외교사절로 일본에 갔던 수신사 박영효 일행이 일본에서 활자와 인쇄기를 수입해 온 것이다. 명조체 한자 활자와 문선함과 함께 일명 ‘푸트 인쇄기(족답 인쇄기)’ 두 대(구입가 약 2천 엔)였다. 이 활자와 인쇄기로 1883년 박문국에서 최초의 신문을 제작한다.
드디어 ‘한성에서 10일마다 알리는 새 소식’이란 뜻의 한성순보(1883년 10월 1일(음력) 발간)가 나와 이후 주보로 이어지며 조선왕조의 ‘조보(朝報)’를 대신했다. 이 책은 그동안 추정으로 남아있던 한성순보의 발행부수, 가격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보여준다.

“조선의 『한성순보』는 3천 5백 책여(冊余)를 인쇄, 3천 책은 지방으로, 2백 책은 경내(京內)로 관명(官命)으로 팔아넘긴다. 3백 책은 사 보고 싶은 자에게 매호 값 30문으로 판다.”(『시사신보』 1884년 1월 25일자(음력 1883년 12월 28일)) -본문 258쪽

이 기사는 한성순보 발행부수가 3천5백부라고 명시하고, 그 내역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 신문의 편집 내지 실무를 맡고 있던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보낸 자료를 토대로 작성되었다. 당시의 인구 규모나 교육 수준, 교통 통신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이 발행부수가 대단히 많은 편이다. 저자는 특히 박문국의 경영 실태를 보여주는 희귀 자료, 서울대 규장각에 묻혀 있던 1886년도 박문국 회계자료『국용상하책(局用上下冊)』을 입수하여 새로운 사실들을 밝힌다. 당시 수입과 지출의 구체적인 내역을 분석, 관영인쇄소의 경영 상태를 재구성해냄으로써, 기존의 학설과 달리 당시 박문국의 재정 상태가 양호했음을 입증한다. 저자가 새롭게 밝혀낸 사실들로 가득하다는 점이 이 책의 두 번째 특징이다.

「한성순보」와 「한성주보」는 비록 관보였으나 나라 바깥의 거대한 세계에 대한 지식을 선택적으로 소개, 가공, 해석함으로써 지식의 개방성을 촉진시켰다. 기자, 편집자, 번역자라는 새로운 직업군이 탄생했다. 이들은 목적의식적으로 기사를 선별하고 배치했다. 이것은 조선에서 근대 언론이 탄생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권력의 하향적 침투라는 전통적 방식을 지양하고 민의상달의 이념을 지면 위에 구현하려 했다. 나아가 한글과 국한문을 신문 문체로 채택함으로써 지배언어로서 한문의 특권을 상대화하고 한글이 공적 언어로 유통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박문국의 신문 발행과 민간 출판사 광인사의 단행본 출판은 관청 주도란 핸디캡과 대중적인 독자가 만들어지지 못한 한계 때문에 결국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들 두 언론, 출판 기구는 1890년대 이후 애국계몽기의 근대 언론과 민족주의 출판이 꽃피는 데 값진 거름이 되었다.


연활자 인쇄술은 조선의 근대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무엇보다도 지식과 정보의 생산 양식이 달라졌다. 활자 주조와 인쇄 공정이 다품종 소량생산에 토대를 둔 수공업적 ‘공예’의 영역에서 대량 생산과 유통, 소비를 위한 기계제 ‘공업’으로 이행해갔다. 연활자 인쇄술로 한 지면에 담을 수 있는 정보량이 크게 늘어났고, 생산 속도가 높아지고 인쇄 부수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인쇄도 훨씬 선명해졌다. 인쇄용 유성 잉크로 판면을 묻혀 기계로 압력을 가하는 방식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종이를 누르는 압력의 차이 때문에 연활자로 찍은 지면에서는 요철의 입체적 느낌이 살아 있었다. 활자체도 전통과는 단절되었다. 조선시대 활자를 만들 때 글자본은 주로 학문과 예술적 경지가 뛰어난 왕족이나 상층 사대부들이 썼다. 하지만 도쿄 쓰키치활판제조소에서 만들어진 한글 글꼴은 주로 하층의 기독교 신사들이 쓴 글씨를 전범으로 삼은 것이었다.
활자로 간행된 책들의 주제와 소재, 종류와 성격도 달라졌다. 신문이라는 커뮤니케이션 형식이 처음으로 선보였고, 서양의 정치 제제와 사회 제도, 물리학과 화학, 농학과 공학, 지리 정보 등이 번역 소개됨으로써 세계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확대 심화되어갔다. 외국어를 배우기 위한 어학서와 사전도 활자화됨으로써 언어의 상대성과 다원성에 대한 감각이 생겨났다. 비록 나라 바깥에서 인쇄되었지만 성경이 한글로 번역, 인쇄되어 국내에 들어옴으로써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단과 금기의 장벽도 허물어져갔다.
지식 사회를 둘러싼 이 같은 사태는 두 가지의 의미심장한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조선시대 내내 흔들림이 없었던 성리학이 도전받기 시작했다. 지식과 정보의 수입 경로가 복수화되며 개항 이후 지식 형성 과정에서 중국의 독점적 지위는 무너졌다. 그 자리에 일본과 서양의 담론들이 경쟁적으로 몰려들었다.
『활자와 근대』는 근대 텍스트를 구성하는 물질적 조건이 지식과 사유의 구성 방식, 그리고 독서 경험을 어떻게 바꿔가는지에 주목한다. 이를 통해 텍스트 내용 분석에만 치중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텍스트의 물질성과 정신성의 결합 관계를 밝히는 데 주력한 점이 이 책의 세 번째 특징이다.

신문과 근대, 커뮤니케이션 양식은 사회의 소통구조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국왕의 통치행위를 행정적으로 전달하던 행위에 그쳤던 조보와는 달리, 근대 신문에서는 원리적으로 국왕의 권력의지와 민간의 계몽의지가 한 지면에서 공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근대 미디어의 출현으로 인해 전통적인 의사소통 양식이 어떤 변형 과정을 겪으면서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게 되었는지 살펴본다.
전통시대에 승정원에서 간행되었던 ‘조보’는 손으로 필사되었고 비밀주의, 폐쇄주의, 독점주의에 갇혀 있었다. 기계식 연활자로 인쇄된 한성순보와 한성주보는 공유와 개방주의를 지향했다. 소수의 지배계층에 독점되어 있던 정치의 영역도 공개하고 논리적으로 설득하며 이성적으로 토론할 수 있다는 것이 근대 신문의 이념이었다. 한성순보의 개방성을 상징하는 것은 구매 가능성이다. 순보는 30문, 주보는 50문으로 가격이 매겨졌다. 국왕과 국가의 지엄한 통치 행위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지식과 정보를 언제든 화폐로 교환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의 공식 정기간행물에서 국문체, 국한문체, 한문체가 동시에 출현했다는 것도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조선시대 지식 교양층의 사유와 의식, 상상력을 지배해온 한문체의 절대성이 무너지고 상대화되었다. 하층민이나 여성의 속된 언어로 천대받았던 한글이 공식 언어의 지위에 올라선 것이다. 언어가 한 민족의 정체성과 무의식을 결정한다면, 교양언어와 민중언어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민족적 차원에서 표현 가능성의 영역이 확장되었다.
근대 초기 신문들은 전통시대의 ‘윤음’처럼 과거의 구술문화 전통 안으로 포섭되어서 낭독되거나 구술되었다. 활자문화의 산물인 신문기사가 낭독과 음독에 적합하도록 과거의 문체를 모방하거나 채용하기도 했으나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양식은 기나긴 전통에서 벗어나, 시각 중심적이고 묵독에 따른 내성적 인간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활자형 인간’도 이때 태동하기 시작했다.


의사소통의 문명사적 전환기의 책과 활자

1880년대에 일본을 거쳐 서양식 연활자 기술이 도입됨으로써 조선에서도 드디어 근대 인쇄 출판의 막이 올랐다. 이때를 전후하여 성리학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전일적인 지배 체제는 반대로 마침내 막을 내렸다. 이질적이고 때로는 화해 불가능한 복수의 지식들이 서로 경쟁하고, 이단적인 이론마저 전통적인 가치와 경합하며, 불멸의 가치로 추앙받던 성인의 말씀조차 도전 받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책에서 근대 지식 세계의 형성 과정에 주목한 것은 다양한 복수의 가능성 가운데서 당대인들이 선택하고 수용하고 변형시킨 것들이 바로 지금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사고의 틀을 구성해왔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다시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현재의 삶을 좀 더 풍부하고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 들어가는 말 13쪽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1990년대 이후 디지털 출판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21세기 이후에는 종이책과 전자책이 공존하는 시대를 맞이했다. 책의 생산과 유통, 그리고 소비 과정을 근본적으로 혁신하는 새로운 미디어들이 등장하면서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행방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엇갈린 전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는 의사소통양식의 문명사적 전환기를 살아가고 있다. 지식의 생산과 유통, 소비를 매개하고 구현하는 기술이 혁명적으로 변하면서, 그 의사소통의 회로에 참여하는 주체들의 모습도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주변과 자신 안에 있는 세계에서 의미를 발견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결코 멈추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