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일본학 연구 (독서)/7.일본전후사

일본 전후 정치사 (2006)

동방박사님 2023. 3. 23.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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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일본의 정치부 기자가 쓴 책이다. 1961년부터 96년까지 아사히신문 정치부 기자로 활약했던 이시카와 마쓰미는 일본 현대정치의 역사를 현장에서 관찰했으며, 특히 사회당을 오랫동안 담당한 기자로서 선거연구의 선구자로 인정받는 실력있는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이와나미 문고에서 작은 문고판으로 출간되었던 이 책은 많지 않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사건과 인물, 선거 내용과 결과, 주요 정치세력과 파벌간의 갈등과 변화, 내각 교체 등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어, 현실 정치를 바라보는 기자의 진정한 강점이 돋보인다. 일본의 비판적 지식인들과, 일본 연구자들에게 널리 읽히는 책으로 전후 일본 현대사를 이보다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정치사 사전처럼 활용할 수 있도록 구성했고 본문은 소제목을 단 짧은 글들로 연결되어 있으며, 자민당 내 파벌의 계보나 정당 재편, 전후 수상 일람 등이 도표로 정리되어 있다. 부록으로 전후 중의원, 참의원 선거 결과 데이터를 수록했다. 한국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국어판은 31장의 본문을 총 4부로 나누어 각 부마다 연표를 정리했으며,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역자 주를 달았다. 마지막으로 등장 인물과 중요한 사건, 개념들을 가능한 색인으로 정리했다.

목차

역자 서문
한국어판 서문
시작하며

제1부 패전과 정당의 부활
01 패전
02 점령과 개혁
03 헌법개정
04 정당의 부활
05 전후 최초의 총선거와 제1차 요시다 내각
06 사회당, 제1당으로
07 최초의 단독 과반수 정당
08 강화조약 전후

제2부 ‘55년 체제’의 형성
09 요시다 대 하토야마, 좌파 사회당 대 우파 사회당
10 보수일당우위체제의 성립
11 일소국교 회복과 UN 가입
12 1960년 안보조약 개정과 정치의 전환
13 경제정치의 시대
14 사회당의 좌절
15 사토 장기정권의 시작
16 오키나와의 반환: ‘본토 수준’으로

제3부 보수정치의 확대
17 서민재상과 열도개조
18 다나카의 몰락
19 수상의 범죄
20 여야 백중세의 지속
21 실세, 다나카의 지배
22 ‘총결산’의 진전
23 자민당의 세대교체이
24 다케시타파의 지배
25 ‘국제공헌’과 선거제도 개혁
26 보수정치의 확대


제4부 전환기에 선 일본정치
27 전후 50년
28 좌절하는 ‘개혁’
29 1999년이라는 전환기
30 고이즈미 붐과 구조개혁
31 ‘9.11’ 이후

데이터 역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중의원 의원 총선거 기본수치
참의원 의원 총선거 기본수치

찾아보기 인명,일반
 

저자 소개

저자 : 이시카와 마쓰미
1957년 규슈공업대학 기계공학과 졸업,『아사히신문』사에 입사, 편집위원(정치담당) 등을 역임한 후, 니가타 국제정보대학 교수, 오비린(櫻美林)대학 대학원 교수를 지냄.

주요 저서:『戰後政治構造史』(1978),『日本の政治の今』(1981),『ある社會主義者: 羽生三七の步いた道』(1982),『墮ちてゆく政治』(1998),『いま, 政黨は何か』(1999),『日本社會黨: 戰後革新の思想と行動』(2003)
역자 : 박정진
도쿄대학 박사과정. 북한 및 일본정치, 북일 관계사 전공

주요 저서:『運動とは何だったのか: 封印された日朝關係史』(공저, 2005), 「북한의 일본에 대한 전략적 이해변화 분석」(2001), 「일본 나쇼날리즘: 재현과 재구성의 모색」(2003), 「在日朝鮮人の‘歸國問題’の國際的文脈」(2005)
 
 

출판사 리뷰

1. 전후 일본 천황제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었는가?
일본의 비판적 지성 마루야마 마사오는 천황제를 넘어서지 못한 일본의 민주주의는 ‘불구’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말처럼 국가가 “정신적 권위와 정치적 권력을 일원적으로 점유”하고, 개개인이 소위 그것의 ‘현신’인 천황을 자신과 일체화했던 것이 일본 파시즘의 심리였다면, 전후 민주주의의 건설은 천황제에 대한 문제제기부터 시작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패전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일본 중신들과 군부의 최대 관심사는 국체호지(國體護持), 즉 천황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항복하기 5일 전 일본 정부는 연합국에,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는 대신 ‘천황의 대권 유지를 양해’해 달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물론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일본은 항복했지만, 오히려 미군정이 점령한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전범 처리 과정에서 연합국 최고사령관이었던 맥아더가 도쿄 극동군사재판의 전범 기소 대상에서 천황을 제외시켰던 것이다(위 사진은 천황과 맥아더의 첫 번째 회담 때이며, 이후 11번째 회담에서 천황은 맥아더에게 전범 기소 대상에서 자신을 제외시켜 준 데 대해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천황제의 유지가 결정되었던 것은 헌법 개정을 통해서였다. 헌법의 개정이, 일본 민주화를 위한 초기 점령정책의 완성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역설적이며, 전후 일본 민주주의의 틀과 성격을 규정하게 된다.
천황제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었는가? 당시 정부를 비롯한 다양한 세력들이 헌법개정안을 다투어 내놓고 있었고, 천황제의 존폐와 천황의 역할은 논쟁의 핵심이었다. 일본 공산당은 천황제를 폐지하고 정부가 민주의회에 책임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헌법문제조사위원회의 개정안은 천황은 지극히 존엄한 존재이고, 군 통수권을 갖도록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헌법의 내용을 결정한 것은 총사령부, 즉 맥아더였다. 다양한 개정안과 심지어 전전의 일본헌법까지 검토되었지만, 원만한 점령정책을 위해 맥아더는 결국 천황제의 유지를 내용으로 하는 개정안을 서둘러 발표했다. 당시 일부 연합국들이 천황제 폐지를 주장하고 있었으므로, 극동위원회가 이를 미리 결정해버리게 되는 상황을 우려했던 것이다. 대신, 천황은 ‘정치적 권능을 갖지 않는’ 무해한 상징의 형태로 남는다는 것, 그리고 일본은 ‘전쟁과 군비를 포기’한다는 두 가지 항목이 포함되었다. 천황제 유지와 평화헌법(헌법 9조)의 타협적 교환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2. 일본 정당정치의 보수적 구도는 언제부터 형성된 것일까
전후 미군정에 의해 위로부터 부여된 민주화와, 이후 냉전으로 인한 미국의 정책 변화는 혁신세력의 형성과 구세력의 복원을 가져 왔다. 이후 일본의 정치는 보수세력과 혁신세력 간의 갈등의 역사였다.
일본 정당정치의 보수적 구도는 언제부터 형성된 것일까. 강력한 보수정당의 집권과 그것의 절반 정도의 세력을 갖는 혁신정당의 견제, 즉 ‘1과 1/2정당체제’는 일본 정당체제의 특징이었다. 흔히 이를 ‘55년체제’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세력구도가, 1955년 보수정당인 자유당과 민주당의 합당으로 자민당이라는 거대 정당이 탄생하면서부터 형성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의 선거분석을 보면, 흥미롭게도 이러한 보수 우위의 세력구도는 전후 최초의 총선거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으며, 이후 반세기 동안 변함 없이 유지되었다.
1946년 연합군 총사령부는 소위 ‘군국주의 고취자’ 등 전쟁에 관련된 인물 21만여 명을 공직에서 추방했다. 1월로 예정되어 있던 전후 최초의 총선거를 4월로 연기시키면서까지 추방을 진행했던 것은 구정치세력이 의회를 장악하지 못하게 하려는 계산에서였다. 이 조치로 공산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의 정치인이 대부분 추방되었지만, 놀랍게도 선거 후 세력 재편 결과 드러난 보수와 혁신의 의석비율은 3 대 1이었다. 이듬해 새로운 헌법하에 치러진 총선거 결과 또한 2 대 1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이후 성립되는 ‘55년 체제’의 실체인 ‘1과 1/2 정당제’의 구성에 필요한 세력 배분은 이 때부터 이미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3. 사회당은 왜 실패했는가
1996년 일본 사회당의 해체는 지난 40여 년 동안 일본의 조직노동을 정치적으로 대표하던 정당의 소멸을 의미한다. 한국 또한 민주노동당의 의회 진출에도 불구하고, 최근 몇 년 동안 노동운동 위기 논쟁이 진행중이다.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우울한 단면이 아닐 수 없다. 일본 사회당은 왜 실패했는가. 다른 경로는 없었는가. 사회당에 대한 필자의 혹독한 비판은 일본 정치의 보수적 경로가 필연적이었다기보다는 사회당의 실패가 다른 경로를 닫아버렸다는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1947년 총선거 결과, 최초로 사회당(가타야마) 내각이 탄생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사회당 좌우파의 갈등을 심화시켰고, 1년도 채 못되어 가타야마 내각은 총사퇴하고 말았다. 가타야마 내각의 실패는 우경적 노선의 오류로 평가되면서 우파의 주도권 상실과 좌파 우위의 확립을 가져왔고, 1951년 사회당은 분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당은 국민의 열망과 기대를 흡수하면서 총선에서 약진했다. 그러나 사회당이 선거가 끝날 때마다 ‘패배선언’을 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이는 애초에 ‘과반수 의석 획득과 사회당 정권의 수립’이라는 불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필자는, 목표 설정의 안이함과 선거결과에 대한 정서적 패배선언이야말로 국민의 의사를 정확히 읽어내야 하는 노력을 방기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사회당에 대한 또 다른 비판은, 여당이 경제대국으로의 방향을 분명히 하면서 사회당조차 한편으로는 경제성장 정책을 내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고도 경제성장으로 ‘이데올로기의 정치’가 쇠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민주의 노선으로의 방향 전환이 1980년대 중반에야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이로부터 10여 년 후 자민당의 장기집권 체제가 붕괴하고, 사회당 출신의 무라야마가 수상이 된 시점에서 진행된 두 번째 노선전환이었다. 일미안보체제의 견지, 자위대의 합헌, 히노마루·기미가요의 용인 등, 끝까지 신중했어야 할 과제들을 무라야마는 너무나 손쉽게 받아들였다. 그 결과 전후정치를 주도해 온 ‘보수’는 일본 정치 전체를 광범위하게 포괄함은 물론, 보다 강하게 재생산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회당이 대변해온 공간을 파편화된 보수정당들이 잠식함에 따라 1996년 사회당은 해체되었다.


4. 일본정치는 왜 보수화되고 있는가
최근 일본 정치의 보수화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역사교과서 문제,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영토소유권 분쟁, 북한에 대한 강경한 태도 등 외교문제에 있어 일본 정부, 정치세력들의 태도가 보수적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 내 비정규직의 확대나, 양극화, 불평등 문제 또한 심각하다. 냉전의 첨예함과 일본 내 이념 갈등이 약화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일본 정치가 보수화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의 정치학자 주세페 디 팔마(G. Di Palma)는 심지어는 극단주의적 정당까지를 포함하여 이념적 스펙트럼에서 정당들이 최대한 포괄되는 것이 민주주의에 대한 저항을 극복할 수 있는 강점을 갖는다고 말했다. 역설적이게도 일본에서 이념적 스펙트럼의 개방은 전후 민주주의의 안정을 가져온 반면, 그 대가는 보수독점의 정치였다. 일본 사회당은 냉전시대 일본 정치의 한 축이었지만, 보수정당에 대한 견제세력으로서 당대의 이슈들을 정치체제의 넓은 스펙트럼으로 반영함으로써 오히려 일본 정치의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자민당 역시 사회당을 1/2정당으로 묶어두기 위해서는 정책적으로 진보적이고 유능해야 했던 것이다.
이 책의 후반부 집필을 담당한(저자 이시카와 마쓰미의 건강이 좋지 않아 2004년 증보판을 내면서 1995년 이후 부분은 홋카이도 대학의 야마구치 지로 교수가 집필하였다) 야마구치 지로 교수는 자신의 다른 책에서, 사회당의 해체로 야당이 온순해졌다고 우려한다. 그가 강조하듯이 권력의 대사(代謝)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여당을 비판하면서 다른 선택안을 제시하는 야당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며, 다른 선택지를 가짐으로써 국민은 하나의 정권이 실패할 경우의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이념이 아닌 정책의 미세한 차이로 정당의 분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의 일본 정치가 사실상 파시즘으로 향하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