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대한민국 현대사 (책소개)/5.대한민국대통령

대한민국 근대화 대통령 박정희 혁명 1 (2019)

동방박사님 2023. 5. 31.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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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지금까지 경험한 적 없는 혁명가의 모습을 만나다!
‘쿠데타’로 역사무대에 등장하여
‘혁명’으로 삶을 마무리한 근대화 대통령 박정희 18년의 기록

이 책은 대한민국 근대화란 산업혁명을 일궈낸 한 위대한 혁명가에 대한 가장 정밀한 보고서다. 배고픈 국민들에게 밥을 먹이고, 이 나라를 우리 힘으로 지키기 위해 무능과 부패에 맞서 목숨을 걸었던 혁명가 박정희. 그런 그의 소망은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 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독립된 한국의 창건’. 이 책은 박정희가 귀와 입이 아닌, 다리와 눈으로 확인하고 감독하며 마침내 어느 누구도 실행하지 못했던 국가 근대화를 성공시켜 물적 토대와 중산층 형성에 성공한 과정이 근대화에 동참했던 수많은 이들의 증언과 함께 수록돼 있다. 자주국방과 자립경제를 통한 자유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박정희가 일생에 세 번의 다단계 쿠데타를 감행했다는 놀라운 사실은 이 책의 키워드이자 핵심이다. 그리고 그 세 번의 쿠데타의 결과는 혁명이었다.

목차

머리말
01 교사에서 군인으로
긴 칼을 차고 싶었던 소년, 군인의 길을 가다

02 만주군 장교가 되다
패전으로 무장해제, 초라한 귀국길

03 생사(生死)의 기로에 서다
이승만 대통령, 사형 선고받은 박정희를 구하다

04 현실정치에 눈을 뜨다
이승만 타도 위한 쿠데타 계획 모의

05 세 차례에 걸친 쿠데타 모의
“가자. 가다 죽더라도 가자”

06 5·16 운명의 그날
“여보 김 장군, 그대로 밀어”

07 쿠데타 성공하다
권력은 둘로 나눌 수 없다

08 국가운영의 질을 높이다
위로부터의 혁명

09 국정운영의 달인(達人)
현장 행정, 확인 또 확인…

10 한일 국교 정상화
‘제2의 이완용’이라는 욕을 먹더라도…

11 제2의 군사쿠데타 감행하다
일본과의 수교 연기했다면?

12 월남전과 대한민국
“미국이여, 월남을 도와야 한다”

13 한국군 월남에 파병하다
파병 협상에서 미국 대통령을 들었다 놨다…

? 참고문헌
 

저자 소개 

저 : 김용삼
 
대전고, 중앙대 문예창작과, 경남대 북한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조선일보 기자, 시사월간지 [월간조선] 편집장, 경기도 대변인, 경기콘텐츠진흥원 감사를 역임했다. [월간조선] 기자로 활동하며 50여 개국 현지 취재를 통해 전·현직 국가원수 4명을 특종 인터뷰했다. 또한 황장엽 망명사건 특종보도로 제1회 대한민국 언론상 수상, 2008년 해양사상 보급에 공헌한 공로로 장보고대상을 수상했다. 2013년 『이승만과 기업가...

책 속으로

1. 첫 번째 쿠데타
우리는 정권이 탐나서 궐기하려는 게 아니야. 우리의 목표는 나라의 근본을 개혁하고 썩어빠진 병폐를 뜯어고치려고 일어서는 건데 혁명이면 어떻고 쿠데타면 어떤가. 그동안의 정권이 해내지 못한 국가 근대화를 달성하면 평가는 후세의 역사가들이 내려줄 거요.(1권 본문 10쪽)

4·19가 일어나 이승만 정부가 붕괴되고 그 해 8월 23일 내각책임제 하에서 윤보선 대통령-장면 정부가 출범했으나 실망의 연속이었다. 당시 정치인과 국민들은 만악(萬惡)의 근원이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데 의견이 일치하여 개헌을 통해 권력구조를 대통령중심제에서 의원내각제로 바꾸었다.
그런데 진정한 민주주의는 단지 권력구조만 바꾼다고 해서 근본 문제, 즉 국민들이 배불리 밥을 먹고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는 시스템이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진리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초등학생들마저 데모에 나서고, 심지어 데모를 진압해야 할 경찰관들마저 집단 시위에 나설 정도로 이 나라는 ‘시위 공화국’으로 돌변했다.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정치집단이 부재한 상황에서 단연 돋보이는 파워 폴리틱스 집단은 군부였다. 60만 대군이라는 양적 팽창도 그렇거니와 미국식 선진교육을 받고, 대규모 인력들이 미국 유학을 통해 체득한 근대화된 과학적 지식과 행정능력, 훈련된 리더십은 국내의 다른 어느 집단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선진화된 파워 엘리트 그룹이었다. (1권 본문 129쪽) --- 「현실정치에 눈을 뜨다」 중에서

박정희 정권과 대립각을 세웠던 함석헌은 잡지 『사상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게재했다.
‘또다시 혁명해야지. 혁명밖에 다른 길 없다. 뱃속에 병이 들었으면… 하다가 죽는대도 배를 가르고 수술해야지 그 길밖에 길이 없다.’(1권 본문140쪽)
우리는 정권이 탐나서 궐기하려는 게 아니야. 우리의 목표는 나라의 근본을 개혁하고 썩어빠진 병폐를 뜯어고치려고 일어서는 건데 혁명이면 어떻고 쿠데타면 어떤가. 그동안의 정권이 해내지 못한 국가발전을 달성하면 평가는 후세의 역사가들이 내려줄 거야.(1권 본문 145쪽)

스칼라피노 교수는 ‘콜론 보고서’를 통해 한국에서 군사쿠데타 가능성을 예고했으나 “당분간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기술함으로써 한국의 청년 장교단을 격렬하게 자극했다. 어쩌면 스칼라피노의 이 모멸적 표현이 한국의 소장파 장교들을 쿠데타로 나서게 하는 촉진제 역할을 했는지도 모른다.(1권 본문 154쪽) --- 「세 차례에 걸친 쿠데타 모의」 중에서

2. 두 번째 쿠데타
박정희 정권 출범 후 한일 국교 정상화는 세 가지 현실적 이유에서 제기됐다. 첫째, 한국의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 확보와 안보 차원. 둘째, 미국의 글로벌 냉전전략 추진 차원. 셋째, 일본의 경제적 필요 차원에서 극히 긴요한 현실적 과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1권 본문 321쪽)
대중 정치인으로서 국민의 지지도나 인기에 연연했다면 박정희는 한일협상을 포기하거나 연기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박정희는 불법 시위가 도를 넘었다고 판단하고 정치인으로서의 대중적 인기 대신 혁명가적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는 제2의 5·16을 감행하는 심정으로 6월 3일 오후 10시,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1권 본문 346쪽)

박정희를 비롯한 당시 국가 지도부는 청구권자금을 모든 국민에게 균등하게 혜택이 돌아가고, 다음 세대 후손들에게까지 기념할 만한 사업을 넘겨줄 수 있도록 ‘의미 있는 투자’에 사용되어야 한다는 엄격한 기준과 원칙을 수립했다. 그 결과 1966년부터 1975년까지의 10년간 청구권자금의 집행실적을 종합 정리하여 기록을 남긴 것이 『청구권자금 백서』(1976년 12월)다. 이 백서에 의하면 포항제철 건설에 무상 3억 달러 중 3080만 달러(무상 자금의 10.8퍼센트), 유상 2억 달러 중 8868만 달러(유상 자금의 44.3퍼센트) 등 총 1억 1948만 달러를 투자했다. 포항제철 건설이야말로 1970년대 한국의 공업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적의 역사다. 특히 1970년대 중화학공업 건설 과정에서 공작기계공업, 산업기계공업은 물론 자동차·선박, 전자공업에서 요구되는 소재와 중간재의 자체 공급이 가능해짐으로써 한국의 공업화 수준을 크게 업그레이드하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한국 산업화의 대동맥 역할을 했던 경부고속도로 건설사업도 일본의 청구권자금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또 전 국토 종합개발사업의 상징이랄 수 있는 소양강댐 건설도 총 소요자금 2161만 3,000달러 전액을 청구권자금으로 충당했다. 공사기간만 무려 6년 반(1967년 4월?1973년 10월)이 걸린 아시아 최대, 세계 4위 규모의 대규모 토목공사로 인해 한강 유역 일대의 홍수 조절이 가능해졌고 한수해(旱水害) 예방, 그리고 생활용수와 농공업용수 문제를 일거에 해결했다. (중략) 박정희는 전 국민의 피와 땀이 서려 있는 자금을 전 세계의 전문가나 국내의 야당, 학생들이 그토록 반대했던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거의 70퍼센트 가깝게 투입했다. 인기를 먹고 사는 정치인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국가의 백년대계를 앞세워 수많은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호기롭게 투자할 수 있었을까? (1권 본문 357쪽) --- 「한일 국교 정상화」 중에서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은 안보 차원의 접근법이었지만 그로 인한 경제적 이익도 막대했다. 한국 기업들이 월남에 납품할 기회가 주어졌고, 한국 용역회사들이 한국군과 미군 지원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으며, 한국의 건설 회사들도 각종 건설공사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힘입어 당시 한국 철강수출의 94퍼센트, 수송 장비 수출의 52퍼센트가 월남이었다. (1권 본문 405쪽)
한국의 월남전 참전으로 한미관계가 긴밀해지면서 미국은 한국의 경제발전을 지원하기 위해 차관을 대폭 늘렸고, 한국 제품에 대해 시장을 개방했다. 1964년 한국의 총 수출에서 대미 수출의 비중이 30퍼센트를 돌파했고, 1968년에는 무려 52퍼센트에 달했다. (1권 본문 407쪽)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포퓰리스트 정치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박정희는 ‘국민의 인기’나 지지율에 일희일비하는 ‘연예인 대통령’이 아닐 뿐 아니라, 포퓰리즘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수많은 사람에게 박수를 받기 위해 “가진 것 나눠 먹으며 모두가 잘사는 사회”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비난을 각오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는 사회”를 지향했다. 이것이 박정희가 집권 초부터 서거할 때까지 일관되게 추구했던 지도자로서의 철학이었다.

한국군 월남 파병, 한일 국교 정상화, 향토예비군 창설, 고속도로·제철소 건설 등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늘리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역사적 과업이었지만, 한편에선 국민들에겐 지지리도 인기 없는 정책이었다. 국교 정상화 대가로 일본이 제공한 자금을 일제하에서 피해를 당한 사람들에게 나눠 준 것이 아니라 국가발전을 위한 제철소와 고속도로, 소양강댐 건설에 70퍼센트의 자금을 투입했다. 포퓰리스트 정치인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통 큰 결정’이었다.

위대한 지도자로
박정희 재임 기간 18년은 경제학자 좌승희의 표현을 빌린다면 마차와 지게가 주류였던 농업사회에서 자동차와 비행기가 주류를 이루는 공업사회로 나라의 기틀이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한 시대의 지도자가 국리민복을 위해 몸 바쳐 일했다고 해서 그 지도자가 반드시 긍정적이고 합리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다. 전후(戰後) 프랑스의 새 역사를 쓴 드골 대통령도 철모르는 국민들의 비판에 어지간히 속을 썩였는지 “프랑스 국민은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눈앞의 풀만 내려다보는 소떼”라고 발언한 바 있다.

인간은 신(神)이 아니기에 업적을 쌓는 동안 수많은 실패와 실수, 잘못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 그 실수와 실패, 잘못을 뛰어넘어 성공의 길로 나갔으니 ‘위대한 지도자’라는 평을 듣는 것이다.

일본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나라를 빛낸 인물들의 생애에서 성공한 사례, 위대한 점, 긍정적 이미지, 본받아야 할 점 등을 찾아내 그 위에 스토리텔링이라는 멋진 의상을 입혀 ‘성공의 DNA’를 보급하는 데 열을 올린다.

반대로 우리 사회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라도 발가벗긴 다음 실패와 실수, 잘못한 부분만을 집요하게 캐내 이를 확대 재생산하는 데 시간과 노력과 비용을 총동원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한 인물에 대한 모욕 주기, 인생 더럽히기, 깎아내리기, 침 뱉기 등 ‘저주의 DNA’가 확대 재생산되어 자해와 자기모멸, 자학의 왜곡·폄하·날조된 현대사 조작이 범국가적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다.

마침내 명예혁명을 증명하다
5·16에 가담했던 혁명군 장교의 40퍼센트 정도가 빈농(貧農) 집안이나 월남자 출신이었다. 이들은 자기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고, 기술을 익히도록 유도하여 전 국민 대다수의 중산층화에 성공했다. 이 점에서 5·16은 단순한 군사정변이 아니라 ‘양반의 나라’를 뒤엎고 ‘평민과 기술자들의 나라’가 출발하는 명예혁명이었음을 증명한다.

박정희는 혁명적 발상이 아니면 불가능했던 국가 근대화를 정치인으로서의 ‘통치행위’가 아니라, 혁명가적인 ‘건설’로 쟁취해 냈다. 그렇게 얻은 성취를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고르게 나눠줌으로써 혁명의 대의를 성공시켰다. 그러나 그 대가로 박정희는 지금도 ‘민주주의를 파탄 낸 독재자’로서 하루빨리 우리 사회에서 ‘청산되어야 할 세력’으로 몰려 있다.

‘기적’이기 전에 수수께끼에 가까운
경제발전 과정을 추진한 강력한 리더
박정희의 통찰과 전략이 담긴 단 하나의 기록!

한정된 국력으로 국가안보, 경제 근대화, 자유 민주정치라는 세 마리의 토끼를 쫓아야 했던 박정희 집권 기간 18년. 그는 세 마리의 토끼를 쫓겠다고 허둥대는 대신 강력한 결단성과 신념으로 불가능할 것 같은 신화를 써 내려갔다. 서구의 지식인들이 주장하고 국제기구가 앞장서 설파한 경제발전 공식을 ‘거꾸로’ 하며 첨예한 국제관계 속을 헤쳐 나온 박정희. ‘거꾸로’ 공식과 공언한 자신의 은퇴시기 ‘1981년’. 이 책에는 ‘거꾸로’와 ‘1981년’에 담긴 그의 통찰과 전략 속에 박정희 혁명이 갖는 세계사적 의미가 들어있다. 자세히 보아야 제대로 보이는 위대한 리더 박정희를 마주하게 될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