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과학의 이해 (독서)/6.천문학

우리가 잘 몰랐던 천문학 이야기 - 고대 그리스에서 천문학 혁명까지 (2018)

동방박사님 2023. 11. 11.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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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새로운 접근법을 통한 천문학사의 명쾌한 분석과 이해

고대로부터 천문학은 다양한 사상과 이론들이 융합된 학문이었다. 탈레스로부터 시작하여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 코페르니쿠스, 티코, 케플러, 갈릴레이, 뉴턴에 이르기까지 형이상학, 종교, 수학, 물리학은 끊임없는 투쟁을 이어가며 천문학을 견인했다.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 기독교 성경,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은 삼위일체가 되어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기까지 지구중심·인간중심적 세계관을 참된 진리로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등장을 계기로 지구중심설은 태양중심설로 대체되면서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는 더 이상 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었다. 결국 코페르니쿠스가 수립한 새로운 세계관은 과학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근대 과학이 출현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하였다.

이 책은 고대 천문학의 맥락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근대 천문학이 출현하게 된 동기를 고대 그리스로부터 시작한 연구사 분석을 통해 논증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참신함이 깃들어 있다. 게다가 동양의 태양중심설 수용 과정을 실증 자료를 통해 규명함으로써 지금까지 잘 몰랐던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한편 근대 천문학을 이끌었던 네 명의 천문학자들 생애를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도록 개인사와 연구사를 함께 혼합하여 기술함으로써 내용 이해의 편이성을 높여 주었다. 특히 문답식으로 진행되는 천문학 관련 개념 풀이는 천문학의 범위를 넘어 과학사 전반을 통찰할 수 있는 폭넓은 안목을 갖게 해 준다.

목차

서문

제1부 천문학의 발달 과정
1장 고대 천문학
1. 고대 초기 천문학자들의 우주론
탈레스 | 아낙시만드로스 | 아낙시메네스 | 피타고라스 |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
2. 고대 천문학의 진화
히파르쿠스 | 프톨레마이오스 |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사상과 우주론
2장 근대 천문학
1. 고전 천문학의 불길한 조짐
2. 코페르니쿠스 이론의 등장과 학계의 반응
3. 영국에서 이루어진 태양중심설의 완결
4. 동양의 태양중심설 전래 과정
중국 | 일본 | 우리나라
3장 태양중심설에 대한 종교계의 반응
1. 16세기 교회의 반응
2. 17~19세기 교회의 반응

제2부 천문학 혁명가들의 생애
1장 코페르니쿠스
2장 티코
3장 케플러
4장 갈릴레이

제3부 천문학사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물음들
1장 천문학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2장 천문학에서 음률적(音律的) 해석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3장 우주혼(宇宙魂)은 어떤 개념인가?
4장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어떤 동기와 의도에서 출판하게 되었는가?
5장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학자들은 왜 고전(古典)을 통해 진리를 찾으려 했는가?
6장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와 『알마게스트』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7장 티코의 수정(修正) 지구중심설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8장 케플러가 개척한 천체물리학이란 무엇인가?
9장 갈릴레이의 망원경을 통한 천체 관측은 천문학사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가?
10장 근대 천문학 등장 전후의 기독교는 어떤 모습이었는가?
11장 토마스 쿤(T. S. Kuhn)의 ‘과학혁명’ 이론을 통한 코페르니쿠스 태양중심설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가?
12장 우리는 왜 역사와 과학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가?

저자 소개

저자 : 임진용
경북대학교 지구과학교육과와 경상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그 후 역사교육 쪽으로 전과하여 경상대학교에서 코페르니쿠스와 관련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진주동명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티코 브라헤: 천체도를 제작하다』가 있고, 논문으로는 「고전 천문학의 진화에 대한 연구」, 「코페르니쿠스 과학혁명의 동기」, 「천문학 발달 과정에 대한 연구」, 「플라톤 사상이 근대 천문학 탄...

책 속으로

탈레스(Thales, BC. 624-546)는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지방의 밀레토스 출신이다. 그는 최초의 유물론학파로 일컬어지는 밀레토스학파(Milesian school)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데, 기하학과 천문학에 능했다고 전해지며 일식을 예언하기도 했다. 그는 자연에 존재하는 물질의 근원을 물이라고 간주하면서 물이 스스로 여러 변화 과정을 거침으로써 다양한 만물들이 형성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초(超)자연적이거나 신화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자연철학적 인식으로만 현상들을 해석하려 했다. 당연히 천상계(天上界) 역시 그런 사유 방식으로 이해하려 했는데, 이러한 시도는 그 이전의 학자들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고대 신화(神話)는 인간이 사물에 대한 가치를 인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만물의 창조와 존재의 의미를 판단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잣대였는데, 이것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것은 상당히 획기적인 시도였다. 탈레스는 당연히 신화를 대체할 만한 새로운 가치 기준을 제시해야만 했는데, 그는 ‘유물론(唯物論) 입장에서의 지적 탐구를 통한 현상의 이해’라는 새로운 가치 기준을 내놓았다. 그의 천문학 연구 방식도 바로 이런 원칙에 입각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학계에서는 고대 천문학의 시작은 탈레스로부터였다고 간주한다.--- p.19

플라톤(Platon, BC. 427-347)은 인간의 부족한 이성 수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바로 ‘기하학(幾何學)’이라고 주장하면서 천문학에서 기하학이야말로 경이로울 만큼의 정합성(整合性)으로 ‘이데아(idea)’를 밝혀 줄 등불이라고 확신했다. 플라톤의 사상은 코페르니쿠스가 훗날 태양중심설을 고안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그것은 순수 플라톤주의가 아니라, 플라톤의 계승자들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진화되어 오던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였다. 신플라톤주의는 중세를 거치면서 여러 요소가 가미되어 진화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플라톤의 사상은 다소 개방적이면서 강한 흡입력을 띠는 속성을 갖게 되었다. 가끔씩은 서로 대립하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일부 요소들까지도 수용했으며, 피타고라스의 사상, 스토아학파의 사상마저도 선별적으로 도입했을 뿐만 아니라, 헬라 종교와 동방 종교(東邦宗敎)마저도 흡수하는 형태를 띠기도 했다. 이처럼 신플라톤주의는 제설혼합주의적(諸說混合主義的) 성격을 띠면서 철학과 종교 사이의 경계를 허물었다. 중세 플라톤주의는 철학적 세계와 신의 세계를 잇는, 즉 철학에서 출발했으나 신의 세계에 대한 향수를 떨쳐 버리지 못한 경향이 매우 짙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의 반(半)종교로까지 해석되기도 한다.--- p.25

프톨레마이오스는 기존의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이 학문적 측면에서만 천상계(天上界)를 해석하려 했던 것과는 달리, 천문학의 실용적 측면을 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의 탄생일과 관련된 별자리를 통해 운명을 점친다든지, 왕위를 계승하는 대관식은 언제가 좋은지, 행성이 어떤 운동을 할 때 길(吉)하고 불길(不吉)한지 등을 알아보는 것에 천문학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전의 천문학자들이 지향했던 ‘전체적으로 간결하면서도 완벽한 우주 모형의 완성’을 굳이 무리하면서까지 추구하려 하지 않았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연구 초기에 아리스토텔레스 우주 모델과의 융화를 잠시나마 시도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끝내 행성 각각의 운동 방식에 대한 분석과 정리에만 치중했다. 그 이유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연구를 진행시켜 가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결과들을 정리하면 할수록 도저히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과는 융화될 수 없음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실들은 1967년에 발견된 프톨레마이오스의 저작 『행성의 가설(Planetary Hypotheses)』의 내용을 통해 확인되었다.--- p.37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os, AD. 90-168) 이전의 고대 천문학이 형이상학적 논리에 입각한 것이었다면,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문 현상을 수리적 논증으로 집대성했다는 점에서 고전 천문학의 새로운 경계를 수립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저서 『알마게스트』는 수리적 논증을 통해 지구중심설을 구체화시킨 것으로서, 17세기까지 지구중심설을 견지하고 있던 고전 천문학자들의 수리적 해석의 기본서(基本書)가 되었다. 기독교 세계관과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은 고전 천문학계의 삼위일체(三位一體)가 되어 인간중심, 지구중심의 우주론을 오랫동안 전개해 갔는데, 이런 결합은 상호 보완적 역할을 착실히 수행하며 신(新)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은 코페르니쿠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장기간 성공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은 천체 운동과 관련해 충분하다고 여길 만큼의 합리적인 해석으로 간주되었으므로 비록 몇 가지 모순들을 안고 있긴 했으나, 그 모순들의 원인은 인간 능력의 한계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치부했다. 그로 인해 당시 천문학계는 지구중심설 외에 다른 대안을 전혀 찾지 않고, 오랫동안 지구중심설만을 고수했다. 이런 분위기는 코페르니쿠스의 등장 이후에도 곧장 사라지지 않았는데, 고전 천문학계는 천상계 운동의 부조리를 끝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 범주 안에서만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 p.47

뉴턴은 『프린키피아』 제3권 마지막 부분에서 ‘신은 항상 모든 곳에 있으며 실재하고, 인간은 신을 찬양하고 숭배해야 하며, 사물의 모습을 바탕으로 신에 대해 논하는 것이 진정 자연과학에 속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가 ‘교황에게 바치는 헌정서’에서 표현한 바가 있는 연구 동기와 매우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프린키피아』는 ‘근대 천문학을 구성하는 기본 원리의 완결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제1권의 제2장, 제3장에서 논증되는 만유인력 이론과 3가지 운동 법칙을 근거로 한 케플러 법칙의 증명, 그리고 제1권에서 논증되는 법칙 66과 그 부속 논증들을 통해 달의 운동을 명쾌히 규명한 것은 매우 탁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제3권은 태양계의 구조에 대해 아주 세밀하게 다루고 있는데, 행성들과 위성들의 운동, 달, 혜성을 비롯한 여러 태양계 천체들의 운동을 구체적으로 수리(數理) 논증함으로써 『프린키피아』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재확인시켜 주고 있다.--- p.60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지전설(地轉說)을 주장한 학자는 김석문(金錫文, 1658-1735)이다. 그는 1697년에 자신이 편찬한 『역학이십사도총해(易學二十四圖總解)』를 통해 지구, 달, 태양,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상대적인 크기를 제시하고, 지구가 하루에 한 바퀴 자전하면서 일 년에 총 366번의 회전을 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태양 주위를 행성들이 공전하고 있으며, 이것은 다시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설명했는데, 이것은 티코의 행성계에서 볼 수 있는 구조다. 그는 처음에는 중국 성리학을 기초로 천문 현상을 이해하려 했다. 그러나 청나라에서 활동했던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 자크 로(Jacques Rho, 중국명 羅雅谷, 1593-1638)의 『오위역지(五緯曆指)』를 접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 책은 프톨레마이오스와 티코의 이론들을 수록하고 있었는데, 김석문은 티코의 행성계를 더욱 신뢰했다. 그러나 티코가 지구의 자전을 거부했다는 점에 찬동하지 않고, 낮과 밤은 분명히 지구가 자전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하지만 김석문의 이런 주장은 자신이 천체들을 직접 관측한 결과들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단지 서양 천문학 이론들을 분석해서 나온 결과일 뿐이었다.--- p.68

기독교가 출현한 이후로 모든 신도들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천상세계(天上世界)는 사후(死後)에 이르게 되는 선망(羨望)의 대상이었다. 가톨릭교회는 프로테스탄트 세력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예전에 누렸던 영광과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보다 엄격한 교리 해석과 집행을 통해 가톨릭교회의 분열을 저지하고 조직의 결속력을 더욱 강화시켜야만 할 필요가 있었기에 선망의 대상인 천상세계의 속성을 부정하는 태양중심설과 같은 이단(異端)에 대한 공격을 잠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이 소개된 이후, 티코, 케플러, 갈릴레이를 거치면서 신성(新星), 혜성(彗星), 목성의 위성(衛星), 금상의 위상(位相), 태양의 흑점(黑點) 등 여러 현상들이 다시 해석되고 연구되자 교회 당국은 한꺼번에 물밀듯 몰려오는 반(反)신앙적 공격들을 효율적으로 방어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런 위기를 내부 결속을 통해서만 극복하려 했다. 이러다 보니 코페르니쿠스 추종자들을 겨냥한 그들의 공격은 점차 몽매주의(蒙昧主義)로 기울어져 갔다. 갈릴레이의 사건이 발생한 지 359년이 흐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Pope John Paul II) 시절인 1992년 10월 31일에 이르러 비로소 교황청이 갈릴레이에 대한 복권(復權)을 발표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p.84

1604년 10월 11일, 케플러는 신성(新星)을 발견하고, 그 후 2년 동안 관측 자료를 정리해서 『신성에 대하여(De Stella Nova)』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여 루돌프 2세에게 헌정했다. 그 사이에 케플러는 아들 프리드리히(Friedrich)를 얻게 된다. 티코가 남긴 화성의 관측 자료는 매우 정확하면서도 방대했는데, 케플러는 이를 토대로 행성의 운동 법칙을 발견하게 된다. 케플러는 행성들이 원궤도로 공전하는 것이 절대 아니며, 타원의 형태로 돌면서 근일점에서는 속도가 빨라지고, 원일점에서는 속도가 느려졌음을 발견했다. 게다가 행성이 같은 기간에 태양을 하나의 초점으로 두고 타원 선상을 쓸고 지나간 면적은 어디서든 모두 같게 나온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하지만 이런 연구 결과의 발표는 케플러가 티코의 관측 장비와 관측 자료들을 마음껏 이용하여 연구할 수 있도록 하는 계약을 조인하는 과정에서 설정된 조건에 따라 티코의 사위이자 제자였던 텡크나겔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 텡크나겔은 케플러의 연구 결과가 티코의 행성계를 부정하고 있었지만, 끝까지 승인을 거부할 수만은 없었다.--- p.123

고대 사람들은 창조주가 이 세상을 만들 때, 마구잡이식으로 작업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어떤 규칙에 입각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인류가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래로 타악기가 가장 먼저 등장했는데, 그 후 현악기로 발전하면서 화음(和音)이라는 것이 구체화되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학자들 사이에서 화음이 자연의 법칙을 이해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고, 조금씩 그에 대한 증거를 탐색하던 중, 수학적으로 표현된 화음 원리가 건축과 토목 사업 등에서 심미주의를 극대화시킬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자연철학자들은 이런 화음 원리를 좀 더 큰 규모로 확대하여 이 세상의 창조 과정과 진행 방식 역시 ‘화음의 수학적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p.153

코페르니쿠스는 지구의 위치를 행성들 간의 상대적인 거리, 즉 천체들의 운동에 따른 겉보기 현상을 통해 논증했는데, 그는 물체의 위치가 변하는 것은 관측자와 물체의 운동이 균등하지 않을 때, 다시 말해 천체들 간에 서로 상이한 운동이 발생할 때만 가능한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지구의 운동이 바로 그런 경우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가 지구에서 천체들의 운동을 보고 있긴 하지만, 만약에 지구가 어떤 운동을 할 경우엔 그 운동은 외부 우주에 재현이 되어 마치 외계의 것이 지구가 운동하는 것과 반대 방향으로 운동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런 예가 바로 항성들의 일주운동이라고 소개하면서 만약 지금까지의 믿음을 뒤집어 하늘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서에서 동으로 자전하고 있다는 가정을 세우고 다시 한 번 천상계를 바라본다 할지라도, 현재 일어나고 있는 태양, 달, 별들의 출몰 현상들은 예전과 변함없이 똑같이 발생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p.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