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역사이야기 (독서)/4.독립운동가

광이불요의 지도자 성재 이시영 선생 평전 (2020)

동방박사님 2024. 2. 19.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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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빛나되 번쩍이지 않았던 지도자,
성재 이시영 선생


대한제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정부에서 요직을 맡은 유일한 인물로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성재 이시영 선생의 활동을 소상히 기록한 평전이 새로 나왔다. 독립기념관장을 지냈고,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의 평전을 여러 권 집필한 김삼웅 전 『대한매일신보』 주필의 역작이다.

평전은 이시영 선생의 소년 시절부터 시작하여 대한제국 시기의 관직 생활,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6형제와 그 가족들이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온갖 간난신고를 무릅쓰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한 이야기, 고종을 중국에 망명하도록 하여 독립투쟁을 하려고 계획했던 일, 임시정부의 법무총장과 재무총장 등을 역임하면서 임시헌장을 제정하고 살림을 책임졌던 일, 해방 후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노선을 달리하면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한 일, 대한민국 정부의 부통령으로서 이승만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독선과 부패에 맞서 싸우다 결국 부통령직을 사임한 일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이시영 선생은 대한제국의 문명개화, 임시정부의 독립 투쟁, 대한민국 정부에서의 민주주의에 큰 기여를 하였는바, 각 시대마다 가장 필요한 일을 맡아서 한 것이다. 책에는 30여 장의 소중한 사진도 함께 실었다.

목차

책의 구성

추천의 글/ 종손(從孫)이종찬
첫머리에
서문: 성재 이시영은 누구인가
제1장출생가문과 성장기
제2장급변하는 내외정세 속에서
제3장신민회 참여, 망국 겪으며
제4장6형제 함께 망명, 삼원보에 터 잡아
제5장신흥무관학교 창설하고 운영
제6장베이징에서의 활동
제7장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제8장임시정부 떠났다가 다시 참여
제9장중국인의 한국사 왜곡에 ??감시만어?? 집필
제10장임시정부의 이동 시대
제11장일제 패망과 환국 전후
제12장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
제13장민족사의 불행과 비극 앞에서
제14장서거와 국민장 그리고 추모 사업
성재 이시영 선생 연보

저자 소개 

저 : 김삼웅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으며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친일파 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국립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바른 역사 찾기에 힘써왔고,...

출판사 리뷰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

우리나라 최고 명문가의 하나로서 삼한갑족이라는 명성을 얻었던 이시영 선생의 6형제는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 병탄되자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40여 명의 일가족이 만주로 망명하였다. 나라의 은덕을 가장 많이 받은 자신들이 망국의 불행 앞에서 모든 것을 바쳐 독립운동에 헌신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홀연히 떠난 6형제 중 살아서 고국 땅을 다시 밟은 사람은 이시영 선생뿐이다. 나머지 다섯 형제는 이역 중국 땅에서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일제 경찰에 고문당해 죽었다.

이시영의 형인 이회영 선생은 형제들과 중국으로의 망명 계획을 의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가족에 대하여 말하기를 대한공신의 후예라 하며, 국은(國恩)과 세덕(勢德)이 당대의 으뜸이라 한다. 그러므로 우리 형제는 나라와 더불어 안락과 근심을 같이 할 위치에 있다. 지금 한일합병의 괴변으로 인하여 한반도의 산하가 왜적의 것이 되고 말았다. 우리 형제가 당당한 호족의 명문으로서 차라리 대의가 있는 곳에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히 도모한다면 이는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 만일 뒷날에 행운이 있어 왜적을 부숴 멸망시키고 조국을 다시 찾으면, 이것이 대한민족된 신분이요, 또 왜적과 혈투하시던 백사공白沙公(이항복)의 후손된 도리라고 생각한다. 여러 형님 아우님들은 나의 뜻을 따라주기를 바라노라.

이회영 선생의 이 같은 말에 형제들은 아무 이의 없이 뜻을 같이하여 일가족 전체가 중국 망명길에 오른 것이다. 이시영 선생은 남대문을 나서면서 이렇게 다짐했다고 한다.

내가 이 문으로 다시 돌아올 날이 없다면 자손이라도 들어올 날은 있을 것이다. 내가 이 문을 나선 시간으로부터 별별 고초와 역경을 당하더라도 원천우인(怨天尤人;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함)은 아니하리라.

이 다짐과 같이 이시영 선생은 만 35년간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독립운동 외길을 걷다가 조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 76세의 노구를 이끌고 귀국하였다. 가히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이라 할 만하다.

신흥무관학교

이시영 형제가 당시 돈으로 황소 1만 3000마리 값인 40만 원, 지금의 화폐가치로 보면 600억 원가량의 돈을 가지고 중국에 망명하였기 때문에 적어도 처음 10년 정도는 경제적 여유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실상을 보면 망명 후 불과 2, 3년 후에 자금이 다 떨어져서 그때부터 해방될 때까지 경제적으로 심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모든 재산을 아낌없이 독립운동가 양성에 바쳤기 때문이다.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신흥무관학교는 10여 년 동안 3500명가량의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신흥무관학교의 교관과 졸업생들은 후일 항일독립투쟁 과정에서 더할 수 없이 소중한 역할을 하였다. 예컨대 청산리 대첩의 주역인 지청천, 이범석 등이 신흥무관학교의 교관 출신이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1940년 중국 충칭에서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조직된 항일무장부대 광복군의 창설에도 핵심적 역할을 했다. 지청천, 김학규, 김원봉, 이범석, 권준, 신동열, 오광선 등이 그들이다. 광복군 총사령 지청천, 참모장 이범석, 제1지대장 김원봉, 제3지대장 김학규 등은 모두 신흥무관학교 간부들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시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법무총장과 의정원 의원을 역임한 이래 잠시 임시정부를 떠나 있던 기간을 제외하면 시종일관 임시정부를 지켰다. 그러면서도 주석이나 의정원 의장 등 수장직을 사양하고, 의원과 국무위원을 맡는 데 그쳤다. 그야말로 광이불요의 자세를 견지한 것이다. 이시영 선생은 임시헌장 기초위원으로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라고 명시한 헌장, 이로써 대한민국의 국호가 탄생하게 된 헌장의 제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시영 선생은 임시정부의 살림을 책임진 재무총장직에 오랜 기간 있었음에도 극심한 가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항상 공명정대하게 일처리를 했기 때문이다.

대일 선전포고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10일, 주석 김구와 외무부장 조소앙의 명의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임시정부는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한 1937년부터 전에 없이 활기를 띠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중국과 힘을 합쳐 일본과 싸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임시정부 인사들은 이 싸움에서 일본이 패망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독립운동 진영의 오랜 분열을 극복하고 힘을 합칠 수 있었다. 같은 시기에 국내의 많은 인사들이 친일로 돌아선 것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일이다. 왜 이런 결과가 빚어졌을까? 물론 중일전쟁 이후 일제가 본격적으로 침략 전쟁을 벌이면서 압박과 회유가 극심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내 인사들이 국제 정세에 어두워 상황을 오판한 데도 큰 이유가 있었다. 중일전쟁 초기 일본이 중국을 휩쓸고, 진주만 공습 이후에는 미국과 영국 등을 상대로도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가 가까운 시일 내에 해방될 가망성이 없다고 잘못 판단한 것도 많은 국내 인사들이 친일로 돌아서는 이유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려운 시기에 상황 판단을 정확히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단독정부 참여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

이시영 선생은 해방 후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 선생과 노선을 달리하여 남한만의 단독정부에 참여하였다. 통일 정부 수립이 요원한 상황에서 우선 남한만이라도 민주 정부를 세우는 것이 현실적인 방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부통령이 된 이시영 선생은 이승만의 독주로 인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등 이승만 정부의 부패와 인권유린에 항의하는 뜻으로 부통령직을 사퇴하였다. 그 후 비민주적인 발췌개헌으로 직선제의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자 보수 야당에서는 대통령 후보로 나올 인물이 없었다. 승산이 전혀 없는 데다 이승만 대통령의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시영이 보수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예상대로 낙선하였다.

모든 한국인의 사표

이시영 선생은 젊은 시절부터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고비고비마다 꼭 해야 할 일을 한 분이다. 대한제국 시절에는 국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였고,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다음에는 그것을 되찾기 위한 싸움에 모든 것을 내던졌다. 정부 수립 후에는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으니 그 한평생을 나라를 위해 헌신한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시영 선생은 모든 한국인의 사표(師表)가 되실 만한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