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역사이야기 (독서)/4.독립운동가

이회영 평전 (2018)

동방박사님 2023. 9. 5.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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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백사 이항복을 비롯하여 대대로 정승·판서를 지낸 삼한갑족의 후예로 태어난 이회영은 일제에 나라가 망하자 “공신의 후예로서 국은國恩과 세덕世德 당대의 으뜸이라는 우리 집안이 어찌 왜적의 노예가 될 것인가” 통탄하며 6형제 일가·식솔 60여 명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무장투쟁에 나섬으로써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였다. 살아 있는 교과서이자 ‘지나간 미래상’으로서의 이회영의 생애를 탐구하고 조명한 이 책은 그대로 ‘아나키스트 항일독립운동사’이기도 하다.

목차

책머리에_ 삼한갑족의 노블레스로 오블리주를 실천한 아나키스트

제1장 명문대가의 자손으로 태어나 자유사상가이자 우국지사로 성장하다
봉건질서를 부정하고 자유사상을 키우다
청년 구국민족운동가로 성장하다

제2장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무장투쟁의 터전을 닦다
일가 60여 명을 이끌고 기약 없는 망명길에 오르다
독립군양성소 신흥무관학교를 건립하다

제3장 혁명가의 투혼으로 항일무장투쟁의 외길을 걷다
국내에 잠입하여 고종황제 망명을 추진하다
임시‘정부’가 아니라 독립운동‘총본부’를 주창하다

제4장 ‘자유로운’ 정신으로 ‘뜨겁게’ 투쟁하다
아나키즘에서 독립운동과 미래사회의 길을 찾다
의열단에 바친 열정 그리고 이상촌의 꿈
아나키즘의 사상적 연원과 우당의 활동
다물단 지휘, 밀정 김달하 등을 처단하다

제5장 서울과 톈진 사이, 그리움과 간난의 세월을 겪어내다
아내를 서울로 보내고 톈진에서의 나날
‘동방연맹’ 결성 그리고 풍찬노숙의 일월

제6장 “당신들이 나를 두 번 처형한다 해도 내가 올바로 살았다는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
좌절을 모르는 불굴의 도전정신
항일구국연맹과 흑색공포단을 지도하다
마지막 불꽃을 사르러 가는 길에 순국하다

부록
남편 영전에 바치는 이은숙의 조사
우관 이정규의 「추모 우당 이회영 선생」

닫는 글_ “무서운 깊이의 아름다운 표면”
 

저자 소개

저자 : 김삼웅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이다.「민주전선」등 진보매체에서 활동했으며,「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 주필로 있으면서 동호지필의 소임을 다하고자 했다. 제7대 독립기념관장을 지냈으며,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제주4·3사건희생자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이사,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자문위원,『친일인명사전』편찬 ...

책 속으로

“선생의 집안은 6형제로 번성한 가족이었다. 형제 모두가 화합하고 즐거워하여 그 우애가 마치 악기를 서로 맞춰 연주하듯 즐거웠고, 산앵두나무의 만개한 꽃과 같이 화사하였으니, 온 집안이 즐거운 기운이 가득 찼고 형제간의 우애의 소문이 온 서울 시내에서 으뜸이었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혁명적 소질이 풍부하여 사회 통념을 뛰어넘는 과감한 행동으로 그의 친척들과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집안에 거느리고 있던 종들을 자유민으로 풀어주기도 했고, 더 나아가 남의 집 종들에게도 높임말을 쓰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당시의 양반들이나 판서의 집안 자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당치않은 짓’이었다.”

신민회 발족 한 해 뒤인 1908년 상동교회에서 이회영과 결혼한 이은숙의 자서전에도 신민회가 상동교회의 5인에 의해서 결성되었음을 증언한다. 명문 사대부가 태생인 이회영은 애초에 근왕주의자일 수밖에 없던 탓에, 양명학을 탐구하였으나 왕조를 국권과 동일체로 인식한 가운데 국권회복운동에 정진하였다. 그러다가 상동교회와 신민회에 몸담으면서 공화주의자로 바뀌었다. 일부의 복벽운동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공화주의자가 되었다.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명문대가에서 태어나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공화주의자가 되고, 뒷날 이를 뛰어넘어 아나키스트가 되었으니 이회영은 자신의 말대로 ‘자유인’이었다.
이회영은 뒷날 한국 아나키즘의 대표적인 위치가 되는 등 독립운동진영에서 누구보다 인망이 높았지만, 천성이 워낙 감투를 싫어한 데다 아나키스트적인 기질 탓에 어떤 단체를 조직하고도 높은 자리에 앉은 적이 없었다. 일은 선도적으로 도모하되 윗자리는 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겸양이 몸에 밴 것이다. 이처럼 자리에 연연하지 않을뿐더러 마음이 어질고 언행이 청결하니 화합의 리더십으로는 당대에 그를 넘을 자가 없었다.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목적이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는다면 이 또한 행복인 것이다. 이것을 남의 눈으로 보아서는 불행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죽을 곳을 찾는 것을 예부터 행복으로 여겨왔다. 같은 운동선상의 동지로서 장래가 구만 리 같은 귀중한 청년자제들은 죽는 것을 제 집에 돌아가는 듯이 여겨 두려움 없이 몇 번이고 사선을 넘고 사지에 뛰어드는데, 나이 이미 60을 넘어 70이 멀지 않았다. 그런데 이대로 앉아 죽기를 기다린다면 청년 동지들에게 공연한 부담을 주는 방해물이 될 뿐이니 이것은 내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바요, 동지들에게 면목이 없는 일이다.” (북만주로 떠나는 길에, 이회영)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삼한갑족 부귀영화를 박차고 항일투쟁의 전사가 된,
‘아나키스트’ 이회영의 파란만장한 ‘망국노’ 일대기


2011년 6월 10일은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신흥무관학교는 일제강점기 항일무장투쟁의 상징이자 요람이었다. 독립투쟁사에 찬란하게 빛나는 청산리·봉오동 대첩의 주역들도 대부분 신흥무관학교가 길러낸 전사들이었다. 1911년 설립하여 1920년 폐교하기까지 10년 동안 항일전사 3500여 명을 길러냈으니 가히 ‘독립군 사관학교’였다. 그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주역이 바로 우당 이회영을 비롯한 신민회 동지들이고, 그 설립자금은 이회영 형제 일가의 전 재산을 처분하여 마련한 40만 원이었다. 현재 가치로 600억 원에 이르는 거금이다.

신흥무관학교는 이회영과 그 형제들 그리고 동지들이 그야말로 ‘모든 것’을 걸고 만들어 운영한 독립군기지다. 이회영은 여기서 배출된 전사들과 더불어 항일무장투쟁의 ‘전위前衛’에서 자유와 해방을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당시 일제를 경악케 한 항일투쟁의 배후에는 대개 이회영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회영은 어떤 ‘자리’나 ‘지위’에도 이름을 걸지 않고 그야말로 ‘백의白依’로써 투쟁의 전위에서 종군하였다. 당시 내로라하는 아나키스트 독립투사들은 대개 신흥무관학교를 거쳤으며,《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장지락)은 최연소(15세) 입학생이었다.

우당에 관한 ‘본격 평전’으로는 최초라 할 김삼웅의《이회영 평전》은 우당 개인의 일대기에 국한하지 않고 그와 관련된 당시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의 역사를 심층적?입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보재 이상설, 단재 신채호, 석오 이동녕, 백야 김좌진 등과의 관계는 한국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씨줄을 형성하고 있으면서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의 노블레스들은 권리만 있고 책임과 의무는 없었다. 그래서 왕권의 그늘에서 온갖 이권과 호사를 누리던 자들이 막상 나라가 망하자 일제에 빌붙어 일왕이 주는 작위와 거액의 은사금을 받고 조국과 겨레를 배신했다. 이런 축에도 못 끼는 자들은 친일파가 되고 부일협력자가 되어 일제에 충성하면서 호의호식했다.” 그런 참담한 역사 가운데서도 이회영 일가와 같은 오블리주를 온몸으로 실천한 노블레스가 있어 오늘날 우리가 반이나마 ‘독립된’ 나라에 살고 있진 않을까.

이회영은 “역사가 무엇인지를 묻지 말고,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를 물어야 한다”는 데 대한 답을 온몸으로 실천한 행동가이다. 살아 있는 교과서이자 ‘지나간 미래상’으로서의 우당의 생애를 탐구하고 조명한 이 책은 그대로 ‘아나키스트 항일독립운동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