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한국정치의 이해 (독서)/1.한국정치사상

안익태 케이스 국가상징에 대한 한 연구

동방박사님 2024. 2. 19.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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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애국가에 국가(國歌)의 자격을 묻다

한미 FTA, 영화 스크린쿼터 등 사회와 현실의 첨예한 이슈에 예리한 정론으로 지식인의 책무를 다해온 한신대 이해영 교수가 ‘애국가’를 들고 왔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음악적 가치가 아닌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기호로서 애국가가 과연 국가(國歌)로 적절하고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는지, 그리고 정치적 행위로서 국가란 무엇인지 불편하지만 마주해야 할 물음을 우리에게 묵직하게 던진다. 그리고 이 질문은 저자가 오랫동안 치열하게 찾은 자료들의 제시와 분석, 날카롭고 곧은 정치·역사적 관점 속에서 역동적으로 전개된다.

국가(國歌)는 시민 주권의 구현체인 국가(國家)와의 정서적 결속이자 충성의 서약이다. 따라서 국가(國歌)는 정치적이고 시민 종교적인 면을 강조할 수밖에 없으며 공동체의 합의된 가치인 애국을 담아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 저자는 이러한 국가(國歌)로서의 자격을 현재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자리에서 부르고 듣는 안익태의 [애국가]에 묻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숭고한 애국심을 지닌 [애국가]의 작곡자이자 한국을 빛낸 세계적인 음악가라는 휘장 속에 가려진 안익태의 그동안 드러나지 않은 행적과 [애국가]의 변천 과정을 통해 과연 우리가 [애국가]를 국가로 제창하는 것이 적절하며 이것에 대해 합의할 것인지 우리에게 판단을 요구한다.

목차

들어가는 말
1. 안익태 「애국가」의 탄생
2. ‘프린스 리’는 누구인가?
3. 더블린에서 베를린으로
4. 그러면 에하라 고이치는 누구인가?
5. 「에텐라쿠(월천악越天樂)」인가, 「강천성악(降天聲樂)」인가?
6. 슈트라우스의 「일본 축전곡」과 에키타이 안
7. 독일 협회(獨日協會, Deutsch-Japanische Gesellschaft)와 나치 독일
8. 1942년 9월 18일 그날의 「만주국」
9. 우리에게 만주국이란? 소설가 박영준, 그리고 에키타이 안의 경우
9.1. 만주국의 민족 협화
9.2. 소설가 박영준의 「밀림의 여인」 개작
9.3. 에키타이 안의 「만주국」 개작
10. 「애국가」 논쟁: 국가 상징의 재구성을 위하여
10.1. 두 개의 ‘분단’ 애국가의 형성
10.2 안익태 「애국가」의 공고화: 이승만과 박정희
10.3. 봉인과 도전
참고문헌, 사진 및 도판 출전
맺는 말

저자 소개 

저 : 이해영
 
1962년 마산에서 나고 부산 혜광고등학교를 나왔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및 동 대학원을 마친 뒤 독일(당시로선 서독) 마부룩(Marburg) 대학교에서 철학박사(Dr.Phil.) 학위를 받았다. 그 뒤 서울대학교 지역종합연구소 특별연구원을 거쳐 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로 지금에 이른다. 이 대학에서 국제평화인권대학원 원장을 맡은 적이 있고, 그 뒤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스크린쿼터 영화인대책위, 민주화를 위...

책소개

‘스페셜 에이전트’는 사실 다양한 어감의 여러 가지 용어로 번역이 될 수 있다. 특수 공작원, 특수 정(첩)보원, 특수 요원 등으로 말이다. 또한 우리에게 익숙한 밀정(密偵)이나 스파이란 말로도 옮길 수 있다. 프랑크 호프만도 이 책에서 쿠니 마사미, 즉 박영인과는 달리 에키타이 안, 즉 안익태가 에하라 고이치의 ‘스페셜 에이전트’라는 움직일 수 없는 물증을 제시하진 못하고 있다. 일종의 강한 심증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에하라 고이치가 일제의 유럽 첩보망 독일 지부 총책이 분명하다면, 그의 집에 에키타이 안이 빠르면 1941년 말부터 1944년 4월초까지 거의 2년 반 가까이 기식했다는 사실은 저 심증을 강화하는 요소임이 분명하다. 더군다나 전후 그가 사망할 때까지 프랑스 바로 옆 마요르카 섬에 머물면서도 그가 환대받았던 프랑스 음악계에 한 번도 출연하지 않은 사실은 그가 프랑스의 ‘기피 인물’일지 모른다는 심증을 강화시킨다. 뿐만 아니라 에키타이 안은 자신의 커리어에 정점을 찍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에도 결코 등장하지 않았다. 베를린 필 지휘 경력을 그가 얼마나 광고했을지를 생각해본다면 더더구나 이해하기 힘든 행보였다.
에키타이 안의 활동이 에하라 고이치에게 제공한 것은 간단히 무시할 수 있는 첩보 따위와는 비교하기 힘들다. 대일본제국과 나치 독일의 고급 나팔수로서 그의 가치는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이는 베를린 총책 에하라가 직접 파리로 달려가 파리의 친나치 프랑스 언론에 모습을 드러낸 데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호프만의 주장을 그저 음해나 비방으로 치부하기에는 에키타이 안의 행적에는 여전히 너무나 많은 의문부호가 달려 있다. 흔히 우리가 첩보원이건 정보원이건 그 뜻을 “적대적인 상대국(방)에 직간접적으로 ‘고용’되어 정보 등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금전을 비롯한 일정한 반대급부를 수수하는 자” 정도로 본다면, 에키타이 안의 그것을 ‘고용’으로 보기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도 에키타이 안은 에하라 고이치에게 그가 기대하는 대일본제국과 나치 독일의 고급 프로파간디스트(propagandist)로서 용역을 제공한 것은 분명하고, 그 대가로 여전히 그 전모를 알 수 없는 수많은 편익을 수수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 작전 직전, 그의 스페인 도주는 마찬가지 일제의 유럽 첩보망과의 연관에서 보자면 어쩌면 그 자체로 잘 준비되고 기획된 일일지도 모른다. --- p.53-55

안익태 '애국가'의 치명적 흠결은 그 선율이나 그 가사에 있지 않다. 그것을 지은 사람에 있다. 본질적으로 그리고 정의상 모든 애국가는 하나의 양보할 수 없는 최소 요건을 요구한다. 특히 일반 대중의 눈높이에서 그것은 멜로디나 가사의 우월성이나 높은 미학적 수준에 있다기보다, 만든 이가 최소한 ‘애국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도덕적 무결점과 높은 학식 혹은 유명세 등은 부차적이다. '애국가'를 통해 ‘애국’이라는 기본 가치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자신이 애국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정언 명법이다. 그러기에 ‘비애국적’ 애국가는 그 자체로 하나의 형용 모순이다. (…) 그래서 첫 번째 대안은 ‘모른 체하기’다. 혹은 악의적 방치(malign neglect)라 불러도 좋겠다. 이미 수십 년 그렇게 사용해왔는데 어떤 새로운 사실 혹은 더 나아가 설사 진실이 밝혀진다손 해도 그냥 모른 체하면 된다. 사회적, 정치적 비용도 가장 싸게 먹힌다. 그래서 가장 경제적인 대안이다. 국가 상징을 관리해야 하는 정부로서도 그저 ‘일각에서 그런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정도로 치부하면 손쉽다.
두 번째 대안은 ‘좀 문제가 있는데 통일될 때까지 그냥 사용하자.’는 거다. 혹은 선의적 방치(benign neglect)라고 해도 되겠다. 실무적으로 전 세계가 다 우리 국가로 알고 있는 데다, 나중에 통일되면 어차피 바꿔야 하니 이대로 좀 참고 가자. 더군다나 '애국가' 문제가 불거지면 틀림없이 보수-진보로 나눠 싸울 것이 자명하니 사회 통합 차원에서도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이다.
세 번째로 생각해 볼 대안은 기존 '애국가'는 그냥 사용하되 제2의 애국가를 만들어 불러 보는 방안이다. 다시 말하지만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므로 다수로 존재해도 아무 문제는 없다. 또 이런 방안이 전혀 다른 맥락이지만 과거에 정부 차원에서 검토된 적도 있다. 행사 유형별이나 의전 성격에 맞추어 각각 적합하게 운용해 갈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광복절이나 3·1절과 같은 성격의 행사엔 아무래도 안익태 '애국가'의 적절성에 부담이 있다는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다른 곡을 선택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네 번째는 사안의 공론화를 통해 ‘국가(國歌)제정 위원회’를 시민 사회와 협동해서 구성, 널리 가사와 곡을 시민에게 묻는 것이다. 공모형 국가를 만드는 방식이다. 이미 해방 직후에도 시도되었고, 1960년대에도 가장 다수안 중 하나였다. 1980년대에는 우리 사회 가장 보수적인 측에서 들고 나온 방식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가장 솔직하고 또 역사 정의에 가장 부합되는 방안이다.
--- p.196-198

출판사 리뷰

에키타이 안에게 애국을 묻다

애국가가 포함된 '코리아 판타지'는 1938년 더블린에서 초연됐다. 안익태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조선의 새 '애국가'의 작곡가라고 말하지만 임시 정부는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 신 곡조의 사용을 허가했을 뿐이었다. 더블린 초연 이후 안익태는 에키타이 안Ekitai Ahn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에하라 고이치江原綱一의 베를린 저택에 2년 반 가까이 기거했다. 에하라 고이치는 다름 아닌 주 베를린 만주국 외교관으로 위장한 일본 정보기관 총책이었으며, 다양한 분야에 있는 300여 명의 정보원을 관리했다. 저자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정황들은 에키타이 안이 일본 정보기관의 특수 공작원이나 정보원이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최소한 에키타이 안은 유럽에서 추축국 중심으로 연주 여행을 하며 일본제국을 선전하는 고급 나팔수 역할을 하고 편익을 제공받았다.

일본 궁중음악에서 우리 전통음악으로의 둔갑

저자는 안익태의 행적만이 아니라 그의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친일적 성격을 파헤치고 후에 이 작품들이 우리 앞에 나타날 때까지의 변모들을 보여준다. 우선 '강천성악(하늘에서 내려온 음악)'은 전통 아악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1959년 작곡된 것이 아니다. 악보와 음원은 존재하지 않지만 일본 아악의 선율을 서양 악기로 편곡해 전시 유럽에서 선전용으로 연주한 '에텐라쿠'의 개작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남아 있는 영상 자료를 비교하여 저자는 밝히고 있다.

또한 에키타이 안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대일본제국 2600년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하고 일본 천황에게 헌정한 '일본 축전곡'의 지휘를 맡았다. 출생지를 평양이 아닌 동경으로 적은 에케타이 안의 나치 독일의 제국 음악원 회원증에는 나치 독일 비밀경찰의 ‘정치적 관점에서 흠결이 될 만한 기재 사항 없음’이라는 스탬프가 찍혀 있다. 나치 비밀경찰로부터 정치적 흠결이 없다는 확인을 받았다는 의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의 관계로부터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당시 독일 협회(獨日協會)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도 이를 알 수 있다. 독일과 일본은 예술과 문화 교류를 통해 정치적·군사적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려 했으며 그 중심에 독일협회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에키타이 안의 베를린 필 연주회는 바로 이 독일 협회의 주최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만주국 환상곡'의 '한국 환상곡'으로의 변신

에키타이 안은 1942년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 음악회를 위해 만주에서 유행하는 선율들을 활용하여 '만주국 환상곡'을 만든다. 이 곡의 작사는 일본 정보기관 총책 에하라 고이치가 맡았다. 문제는 우리가 부르고 듣는 애국가가 '만주국 환상곡'의 피날레 부분이라는 것이다. 일본제국이 만주 사변 이후 세운 괴뢰 국가인 만주국의 건국을 축하위해 만든 곡을 우리의 국가로 재사용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에키타이 안은 친일 부역의 산물인 '만주국 환상곡'을 1944년 파리 해방을 앞두고 파시스트 독재 국가 스페인으로 도주하면서 악보를 폐기했다. 그리고 1938년 더블린 판을 개작하여 새롭게 1944년 판 '한국 환상곡'을 냈다. 작곡가가 자신의 작품에서 유사한 주제를 되풀이하는 일은 드물지 않지만 스스로 만든 '애국가'를 ‘매국’의 도구로 재활용하다 그것을 다시 애국이라 주장하면서 그 중간 과정을 마치 없었던 것처럼 우긴다면 그것이야말로 언어도단이다.

상상의 법정을 열 때

해방 이후 안익태의 애국가는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대한민국의 정식 국가(國歌)에 대한 필요성으로 점차 확산되었다. 법정(法定) 국가는 아니지만 ‘관행상’ 국가로 기능한 것이다. 이후 안익태는 이승만 정권에 친화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박정희 정권에도 영합하는 행위를 보였다. 2000년 '만주국 환상곡' 영상이 발견되기 전까지 애국적 인물로 영예와 권력을 누렸던 것이다. 반민족 행위 처벌법은 폐지되었지만 우리는 상상의 법정을 열어 이른바 ‘기억 투쟁’을 해야 한다. 에키타이 안은 민족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 침략주의에 협력하는 부역을 했다는 것은 바뀌지 않는다. 여기에 대하여 저자는 통일 전까지는 현행 그대로 두거나 제2의 애국가를 만들어 부르기, 공론화하여 새로운 애국가를 공모하기 등의 대안들은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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