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교육의 이해 (독서)/5.독서노트

나 홀로 읽는 도덕경 (2021)

동방박사님 2024. 4. 2.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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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2500년이 지나도록 빛나온 지혜의 5천 자를
오늘 나는 어떻게 읽을 것인가?

20여 년간 수많은 강연과 저술을 통해 도가철학과 인문학적 통찰을 역설해온 시대를 선도하는 철학자 최진석의 신간 『나 홀로 읽는 도덕경』은 노자 철학의 정수 『도덕경』의 새 독서법을 제시한다. 2500년이 넘도록 고전으로 살아 있는 『도덕경』이라는 지혜의 5천 자를, 원문과 번역문만 가지고 해설 없이 홀로 읽기가 그것이다. 이는 최진석이 강조해온, 자기 사유의 진정한 주인으로 서는 태도가 그대로 대입된 『도덕경』 읽기라 할 수 있다.

『나 홀로 읽는 도덕경』은 『도덕경』을 공부한다는 한 독자와 최진석의 만남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이 독자와 나눈 『도덕경』에 대한 수많은 질문과 대답들과 더불어 그간 많은 이들이 『도덕경』에 가졌던 궁금증들, 그가 스스로 중요하다고 여기는 『도덕경』의 핵심들을 모아, 이 내용을 나침반 삼아 누구나 ‘나 홀로 읽기’에 도전해볼 수 있도록 40문40답으로 정리했다. 『나 홀로 읽는 도덕경』의 1부 ‘묻고 답하는 도덕경’은 이 40문40답에 해당되고, 2부 ‘나 홀로 읽는 도덕경’은 어떤 해설도 없이 『도덕경』 원문 전체와 최진석의 번역문만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40문40답은 입말로 정리되어 최진석과 직접 대화하는 듯한 독서를 가능하게 한다. 또한 『도덕경』을 구성하는 총 81장은 경전 구절이라기보다 여든한 편의 시처럼 읽힐 수 있도록 제목을 달았다.

『나 홀로 읽는 도덕경』은 『도덕경』이라는 지혜의 숲을 누구나 혼자서 더 쉽고 자유롭게 거닐 수 있게 도울 것이다. 목차를 따라 1부에 놓인 40문40답을 먼저 읽고서 2부에 놓인 『도덕경』으로 들어가도 되지만, 용감하게 『도덕경』을 먼저 읽고서 40문40답의 대화의 장으로 나와도 좋다. 경전 읽기를 어려워하던 이들에게는 『도덕경』에 대한 접근을 보다 용이하게 해줄 것이며, 이미 노자 철학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도덕경』을 보다 창의적이고 도전적으로 읽어볼 기회를 열어줄 것이다. 어떤 길로 어떤 걸음으로 가는 독서이든 독서의 주인은 독자 자신이다. 『나 홀로 읽는 도덕경』은 노자의 『도덕경』이 이런 주체적인 독서를 통해 보다 빛나는 지혜의 고전이 된다는 것을 경험하게 할 것이다.

아무리 높은 평가를 받는 고전이라도 숭배의 대상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숭배하지 않기 힘들겠지만,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키우는 연료로만 사용해야 합니다. 고전은 소장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소비하는 것이 낫습니다. 소장자보다는 소비자가 더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홀로 읽기’라고 해보죠. 이제 친절한 안내와 도움 없이 홀로 읽는 일에 도전해볼 필요가 있습니다._「들어가는 말」에서

목차

들어가는 말 9

1부 묻고 답하는 도덕경

도덕경을 읽기 전에
노자는 누구이고 도덕경은 어떤 책입니까?
노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는 어떤 시대입니까?
동양철학은 노자 이전에 어떠했습니까?
사상과 철학은 어떻게 다릅니까?
도덕경 판본이 여럿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노자와 공자의 사상은 어떻게 다릅니까?
노자와 공자는 인간을 어떻게 바라봤습니까?
노자의 표현 방식은 어떻습니까?
노자 사상과 법가 사상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도경과 덕경의 특징은 각각 무엇입니까?
덕이 등장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도덕경 속으로
이름 붙이는 것을 부정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노자의 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노자의 관계론적 사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노자에게 자연은 무엇입니까?
노자 사상에서 여성성이란 무엇입니까?
노자 사상에서 물은 어떤 특성을 갖습니까?
눈이 아니라 배를 위하는 게 무엇입니까?
노자에게 몸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시와 견, 청과 문은 어떻게 다릅니까?
손님은 무엇을 의미합니니까?
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진정한 앎을 어떻게 찾아가야 합니까?
구부러짐이 자연을 따르는 것입니까?
선과 악 같은 대립항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항무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뺏고 싶으면 주어야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국가의 통치자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대기만성과 대기면성은 어떻게 다릅니까?
무위와 갓난아기 상태는 어떻게 연결될까요?
백성들을 우직하도록 한다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행적이 아니라 계약서를 따진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나라를 작게 하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도덕경의 현재와 미래
현대 사회에서 도덕경은 어떤 길잡이가 될 수 있을까요?
노자의 철학이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할 대안이 될까요?
노자 사상의 해체주의적 면모는 어떻습니까?
그동안 노자를 계속 이야기해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시대의 젊은이는 어떤 길을 찾아야 할까요?
우리 시대의 철학과 문학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2부 나 홀로 읽는 도덕경
제1장 온갖 것들의 문
제2장 서로 살게 해주는
제3장 무위의 다스림
제4장 비어 있으나 끝이 없는
제5장 풀무와 같은
제6장 미묘한 모성
제7장 장생의 까닭
제8장 물의 덕
제9장 물러날 순간
제10장 무지의 태도
제11장 무의 기능
제12장 눈을 위하지 않는다
제13장 내 몸과 같이
제14장 아무것도 없는 모습
제15장 마치 손님처럼
제16장 오래가는 길
제17장 백성들과 통치자
제18장 대도가 망가지면
제19장 이상을 끊으면
제20장 홀로 우매한
제21장 황하고도 홀하다
제22장 구부리면 온전해지고
제23장 자연스러운 것
제24장 자신을 드러내면
제25장 소리도 모양도 없이
제26장 중후하고 안정된 것
제27장 스승과 거울
제28장 되돌아가다
제29장 뜻대로
제30장 거기서 멈추기
제31장 전쟁과 병기
제32장 항상 이름이 없는
제33장 자신을 아는 자
제34장 대도의 넓음
제35장 태평한 세상의 도
제36장 부드럽고 약한 것
제37장 욕망 없는 고요
제38장 버리고 취하는 것
제39장 하나를 얻어서
제40장 유와 무
제41장 감춰져 드러난
제42장 음을 진 채 양을
제43장 무위의 유익
제44장 어느 것이 중요한가
제45장 잘 이뤄진 것은
제46장 만족을 앎
제47장 보지 않고도
제48장 덜고 또 덜어내고
제49장 성인의 마음
제50장 사는 길과 죽는 길
제51장 도와 덕
제52장 이 세계의 진상
제53장 대도와 비탈길
제54장 잘 심어진 것
제55장 조화를 알면
제56장 아는 자는
제57장 나라를 다스리는 법
제58장 정해진 것은
제59장 오로지 아끼다
제60장 작은 생선 굽듯
제61장 자신을 낮추기
제62장 만물이 의지하는 것
제63장 어려운 일과 쉬운 일
제64장 잃지 않는 법
제65장 지혜와 우직
제66장 위에 서고 싶다면
제67장 위대한 보물
제68장 싸우지 않는 덕
제69장 적이 없다는 것
제70장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제71장 모르는 사람의 병
제72장 힘들게 하지 않으면
제73장 용기와 망설임
제74장 죽음을 관장하는 것
제75장 위에서 유위를 행하면
제76장 강한 것과 유약한 것
제77장 자연의 도와 인간의 도
제78장 정면으로 하는 말
제79장 계약서와 행적
제80장 나라를 작게 하면
제81장 모두 베풀어도 갖게 되는
 
저자 소개
저 : 최진석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사단법인 ‘새말새몸짓’ 이사장, ‘새말새몸짓’ 기본학교 교장이다. 건명원(建明苑) 초대 원장을 지냈다. 1959년,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 곁의 작은 섬 장병도에서 태어나 함평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서강대학교 철학과에서 학사, 석사를 마치고 베이징대학교에서 당나라 초기 장자 해석을 연구한 『성현영의 ‘장자소’ 연구(成玄英的‘莊子疏’硏究)』(巴蜀書社, 2010)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

책 속으로

인간이 책임감을 갖고 주도적으로 펼치는 역사는 신으로부터 이탈하면서 비로소 시작됩니다. 철학이 시작되었다는 말은 믿음의 시대에서 생각의 시대로 넘어갔다는 말과 같아요. 신이 주인인 시대에서 인간이 주인이 되려는 시대로 넘어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생각하는 능력으로부터 시작돼요. 이 능력이 가장 고도화된 것이 철학이죠. 철학이 시작되면서 인간의 역사는 신의 역할과 지위가 축소되고 인간의 역할과 지위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계속 이동합니다.
---「덕이 등장한 의미는 무엇입니까?」중에서

대답과 질문을 놓고 봤을 때,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 덕의 활동에 가깝습니다. 대답은 이미 있던 이론과 지식을 먹었다가 누가 요구할 때 그대로 다시 뱉어내는 기능적 활동이지만, 질문은 자신이 자신으로 존재할 때 나오는 힘, 즉 궁금증과 호기심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일이죠. 자신에게만 있으면서 자신을 활동하게 하는 힘이니까 덕에 가까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나온 모든 새로운 것들, 모든 위대한 것들은 거의 다 질문의 결과로 나왔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어요. 대답의 결과로 나온 것은 거의 없습니다.
---「덕이 등장한 의미는 무엇입니까?」중에서

인간은 ‘없는 것’, ‘안 보이는 것’을 다룰 줄 알아야 해요. ‘새로움’이나 ‘창의’나 ‘창조’ 모두, ‘아직 없는 것’이나 ‘안 보이는 것’이 현실화된 것이죠. 보이고 만져지고 확실히 있는 것만 다룬다면 새로운 이론을 생산해내기 어렵고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태도를 가질 수가 없어요. 그렇게 되면 궁금증과 호기심도 사라져요. 예술도 사라지고요. 질문, 궁금증, 호기심, 지식의 생산, 창의성, 상상력, 이런 것들은 전부 다 안 보이고 없는 세계를 꿈꾸는 것들입니다.
---「노자의 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중에서

노자는 자연에서 발견한 자연의 운행 원칙을 인간 세상에 적용하자고 해요. 그런데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그냥 문명을 거부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의미로 오해하게 됩니다. 그건 노자의 생각이 아닙니다. 노자는 자연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적으로 파악한 자연의 운행 원칙을 인간의 삶 속에서 구현하자고 주장하는 거예요. 이 부분에 대한 이해가 정확하지 않으니까 노자 사상을 반문명론으로 오해하고, 문명 자체를 부정하는 삶을 매우 큰 깨달음에 이른 것으로 착각하죠. 노자는 자연을 추구하고 문명을 배격한다는 식의 말은 노자를 잘못 이해한 결과입니다.
---「노자에게 자연은 무엇입니까?」중에서

노자의 눈에 비친 물은 경쟁하지 않습니다. 다투지 않는 물의 특성이 바로 이것이에요. 경쟁하지 않기 때문에 이미 있는 시스템 안에 끼어들기보다는 아무도 가지 않는 전혀 다른 길을 자신의 선택지로 삼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이미 차지한 곳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직 이상하고 어색하게 보이는 바로 그곳에 처하게 되는 것이죠. 그곳은 누구도 먼저 차지하려고 덤비는 곳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차지하려고 덤비지 않는 이상한 곳, 거기에서 혁신의 씨앗이 남몰래 자라는 것입니다. 창조의 기운은 누구나 다 아는 곳이 아니라, 아직은 비밀스럽게 숨어 있는 이상한 곳에서 시작되지요. 그 이상한 곳에 도달하는 힘을 물이 가지고 있습니다.
---「노자 사상에서 물은 어떤 특성을 갖습니까?」중에서

공자는 ‘우리’를 정하고 그 안에 ‘나’들을 편입시켜야 하므로 ‘나’들은 ‘우리’의 이념에 맞는 ‘나’들이 되어야 한다 하고, 노자는 ‘나’들이 자율적으로 만들어가는 ‘우리’를 추구한다고 하기 때문에 혹자는 공자는 ‘우리’를 긍정하고 노자는 ‘우리’를 부정한다고 가볍게 말해버려요. 이것은 큰 오류입니다. ‘우리’에 대한 시각이 서로 다를 뿐입니다. 공자는 문명을 긍정하고 노자는 문명을 부정했다고 오해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죠. 노자나 공자 모두 문명을 긍정했어요. 문명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각자 다른 문명을 건설하려 했을 뿐입니다.
---「노자에게 몸은 무엇을 의미합니까?」중에서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라는 문장은 노자의 철학을 정말 제대로 함축하죠. 무위하라, 그러면 무불위, 즉 모든 일이 잘된다고 말하는 것 아닙니까? 노자의 시선은 ‘무위’보다는 오히려 ‘무불위’를 향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무불위’는 보지도 않고, ‘무위’만 보죠. 그것은 마치 노자를 앞서는 것, 갖는 것, 온전해지는 것보다는 물러서는 것, 주는 것, 구부리는 것을 강조한 사상가로 보려고 고집부리는 것과 같습니다. 노자는 일을 안 하려는 자가 아니라 일을 잘하려는 자였어요. 화살을 앞으로 멀리 날려 보내려면, 활시위를 뒤로 당겨야 하지요. 두 동작은 활을 잘 쏘기 위한 한 벌의 동작입니다. 노자는 활을 아무렇게나 쏘려는 사상가가 아니라 정확하게 잘 쏘려고 했던 사상가였죠.
---「구부러짐이 자연을 따르는 것입니까?」중에서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은 개념을 여백이나 틈 없이 사용해서는 세계의 진실을 담을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죠. 세계는 서로 여백을 나누며 틈을 허용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유무상생인 거죠. […] 시인은 언어를 재배치하고, 위치를 다르게 하며, 개념과 개념 사이에 틈과 여백을 남깁니다. 그 틈과 여백 사이에 소리를 심죠. 언어들 사이의 남겨진 틈과 여백들이 소리를 입은 개념들에 탄력을 주어 드러나지 않거나 아직 없는 진실들을 튀어오르게 하죠. […] 협치나 포용이나 하는 것들은 배척이나 편 가르기에 비해 얼마나 큰 감동을 줍니까? 또 얼마나 새로운 길을 만들어내겠습니까? 다 여백과 틈에서 빚어진 감동입니다.
---「국가의 통치자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중에서

골프를 칠 때도 공을 끝까지 보고 고개를 들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해요. 고개를 든다는 것은 클럽에 공이 맞기도 전에 내 공이 어디로 갈지 먼저 보려는 거잖아요. 누구나 이런 어리석음을 보이죠. 그러나 공이 날아갈 먼 곳을 미리 보려는 마음을 억누르고 클럽이 공에 맞는 것만 보면 공이 더 정확히 맞고 더 멀리 가거든요. 공에 클럽이 맞기도 전에 공이 갈 곳을 미리 쳐다보려 하면, 공이 제대로 맞을 리가 없습니다. 더구나 공을 저 멀리 쳐야겠다거나 세게 쳐서 저 멀리 보내야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온몸에 힘이 들어가서 잘 되지 않아요. 운동의 기본은 힘을 빼는 것입니다. 그게 무위無爲예요. 그래서 노자는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 즉 무위를 행하면 되지 않는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혹은 무위하기만 하면 다 잘된다고도 새길 수 있죠.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중에서

우리는 보통 어린아이를 아직 어른이 덜 된 상태로 보죠. 어른은 도달해야 할 이상적인 상태이고, 어린아이는 아직 어른이 덜 된 부족한 존재이기에 어른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어린아이는 항상 부족한 상태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어른이 되려고 분발해야만 합니다. 어린아이로서는 한 번도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행복해본 적이 없는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어서 어떻게 자존감이니 자신감이니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자신감과 자존감이 없으면 창의성도 있을 수 없고 질문도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 하기나 대답하기만 잘하게 됩니다. 어린아이에게 어린아이의 행복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는 아직 어른이 덜 된 상태가 아니라 어린아이일 뿐입니다. 어린아이 시절의 행복은 어린아이에게 목적 그 자체입니다.
---「무위와 갓난아기 상태는 어떻게 연결될까요?」중에서

노자가 궁극적으로 해체하려고 했던 것은 모든 구축構築이에요. 즉 본질주의를 해체한다는 거죠. 제가 볼 때는 노자 사상이 가진 해체주의적인 특성, 즉 관계론적 특성이 노자 사상의 현대성을 보여주는 데 중요한 점입니다. 노자의 사상이 공자의 그것보다 훨씬 더 오래된 기원을 가지면서 관계론적 특성을 보인다면, 혹시 우리 문명의 원형은 훨씬 관계론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지 않았을까라고도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저는 노자를 현대 철학자라고 봐요. 사회의 어떤 필요가 사상을 호출하는 거잖아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노자의 사상에서 도움받을 내용과 참조할 만한 것이 있으니까 지금 노자를 소환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노자 사상의 해체주의적 면모는 어떻습니까?」중에서

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개념화될 수 있으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무는 이 세계의 시작을 가리키고
유는 모든 만물을 통칭하여 가리킨다.
언제나 무를 가지고는
세계의 오묘한 영역을 나타내려 하고,
언제나 유를 가지고는
구체적으로 보이는 영역을 나타내려 한다.
이 둘은 같이 나와 있지만 이름을 달리하는데,
같이 있다는 그것을 현묘하다고 한다.
현묘하고도 현묘하구나.
이것이 바로 온갖 것들이 들락거리는 문이로다.
---「제1장 온갖 것들의 문」번역문 전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철학은 시대의 산물입니다”

노자나 공자는 철기가 산업에 투입되면서 야기되는 과격한 계급 변동의 시대를 살면서 그런 변화에서 한발 물러나 자신들이 살던 시대를 자세히 관찰한 사람들이었다. 최진석에 따르면 『도덕경』에 등장하는 구절들은 그 구절이 탄생한 당시의 맥락 안에서 해석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 철학이 탄생한 구체적인 토양과 나중에 이론 체계로 승화되는 과정을 유기적으로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보편적으로 승화되어 체계화된 창백한 철학을 가져와서 그것을 자신의 구체적인 현실에 적용하려고만 한다는 것을 경계하면서 최진석은 지금 내가 있는 구체적인 토양에서 어떻게 보편적인 철학을 형성하는가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미 있는 보편적인 이론 체계로서의 철학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내 삶 속에서 철학적 높이의 시선을 생산하는 연료 역할을 해야 한다. 『도덕경』을 읽은 사람들은 『도덕경』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설명하려는 대신, 노자의 사상을 빌려 지혜의 근육을 단련하고 사유를 확장한다는 태도로 접근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도덕경』을 추종하는 일보다 자신을 『도덕경』보다 더 크고 단단하게 성장시키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

철학이 됐든 문학이 됐든 그것이 보여주는 형식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철학자나 작가가 그들이 살던 구체적인 시대 안에서 다음과 같은 물음에 고유하게 답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시대에 누구였는가?”, “당신은 무엇을 봤는가? 거기서 무슨 문제를 발견하고 무슨 불편함을 느꼈는가?”, “그 불편함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 “도대체 당신은 누구인가?”, 이런 질문들에 수준 높게 반응하는 것이 철학이고 문학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_「우리 시대의 철학과 문학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에서 (p.181~182)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닌 자신의 꿈을 꾸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노자의 시’가 필요한 이유

인간이 지닌 가장 높은 수준의 덕목은 꿈을 꾸고 그 꿈을 향해 무모하게 내달리는 데 있다고 최진석은 말한다. 꿈과 이상은 같지 않다. 여기서 이상은 이념 같은 것, 즉 도덕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등을 말한다. 자본주의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규정한다면 결국 자본주의를 한 발짝도 넘어서지 못하는 삶이 된다. 그러나 삶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보다 훨씬 복잡하고 넓다. 넓고 복잡한 삶을 제한하고 규정하는 이런 것들을 버려야 꿈을 꾸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저기 멀리 걸려 있는 집단적인 이상을 추구하지 말고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라고, 정해진 이념을 수행하는 자가 되지 말고 자신의 꿈을 꾸는 자가 되라고 노자는 『도덕경』를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경제·교육·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있어 변화의 가속도가 날로 더해가는 현대의 초연결사회에서 외부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는 자신의 꿈을 꾸는 일은 더욱 중요하다. 지금 우리가 노자의 『도덕경』을 보다 주체적이고 자유롭게 홀로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안빈낙도는 엄청나게 적극적인 말이에요. 너의 가난에 주눅 들지 말고 당당하게 도의 높이에 서라, 이런 뜻이에요.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자신이 ‘도’의 높이에 있는 한 절대 주눅 들 수 없죠.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삶을 즐길 수 있는 매우 고급스러운 신념입니다. 이상을 추구하면 너는 집단이 정한 것을 수행하는 사람에 불과할 것이다, 너를 추구해야 진정으로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인격이 될 수 있고, 거기서 큰 성취가 나온다는 뜻이 거피취차에 담겨 있어요. 타인의 눈으로 너를 보지 말고 너의 눈으로 너를 보라는 것이죠._「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에서 (p.138~139)